회중 찬송론


1.회중찬송의 역사


성 경에 기록된 최초의 회중찬송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변에서 부른 노래일 것이다(출 15장) 모세의 노래로 알려진 이 찬송은 그 가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서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음악에 관해서는 알기가 어렵고 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불렀기 때문에 애굽에서 흔히 불려지던 어떤 선율이나 리듬에 맞춰서 함께 제창을 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래할 기회가 많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회막과 성전시대를 통틀어서도 회중 찬송이 크게 발전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제사장들에게 위탁된 것이었고 회중이 직접 참여하는 기회는 거의 없었고 큰 절기나 국가 행사등 특별한 경우에만 함께 모였기 때문에 회중찬송이 사용되는 용도가 그리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간혹 같이 노래하는 경우에도 회중은 후렴을 부르는 것이 고작인 경우도 많았다. “할렐루야”,혹은 “아멘”그리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는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와 같은 후렴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런 후렴을 사용하는 음악은 고대 음악에서는 종종 사용되는 방식이었다.특히 노동요와 같은 경우에는 리듬을 맞추어 부르는 노래가 일의 효율을 올려주기 때문에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성 전시대가 끝나고 포로 기간동안이나 초대교회에서도 회중찬송은 크게 발달한 것 같지는 않다.바벨론 포로 기간동안은 회당이 생기기는 했지만 활발한 종교집회를 갖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고 초대교회는 아직 부를 찬송들이 많지 않았고 또 초대교회의 많은 기간은 로마의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마음껏 찬송하는 것이 불가능했다.하지만 이 기간에 기록된 신약의 문헌들에 의하면 회중찬송가가 생겨났고 또 초대교회 교인들이 찬송을 부른 것은 확실해 보인다.


행 2:46-47과 엡 5:19, 골 3:16 등에 의하면 초대교회 교인들도 여러 종류의 회중찬송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 나오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노래“는 그 종류가 어떻게 다른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시“는 구약의 시편을 ,”찬미“는 공식집회에서 불리는 오늘날의 찬송가와 같은 종류의 음악, 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개인적인 신앙체험에서 나온 오늘날의 복음성가와 같은 류의 음악이 아닐까 하고 많은 음악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A.D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 전까지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의 눈을 피해서 신앙생활을 해야했기 때문에 회중찬송도 아마 악기의 반주도 없이 조용히 챈팅(Chanting)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이런 방식의 노래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후 암브로우스 성가나 그레고리우스 성가에 잘 나타나 있다.그러나 기독교가 조직화되면서 그 규모가 대형화해가고 드디어는 성가학교(Scholar Cantorum)가 생기면서 교회내의 음악은 이 성가학교 졸업생들에 의해서 독점되기 시작한다. 


 또한 4세기에 있었던 라오디게아(Laodicea)회의에서는 교회의 임명받은 자 외에는 교회에서 찬송할 수 없다고 하여 자유롭고 즉흥적인 회중찬송은 억제되고 말았다.마침내는 이들성가학교 출신들이 성가대를 조직하고 음악적 수준이 높아가면서 일반 회중은 도저히 부를 수도 없는 음악들이 교회안에 들어오고 교회안의 찬송은 이들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중세시대의 교회합창은 매우 높은 수준의 음악들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회중찬송이 없는 예배를 생각해 보라. 그 예배에 참석한 회중들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예배를 드렸겠는가? 또한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는 무식한 일반 회중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공허한 의식으로 변해갔다. 정치와 종교가 결탁해서 성직자들은 타락해가고 세속의 권력과 성직자들의 권력 싸움은 교회를 회중들과는 점점 거리가 먼 별개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소수의 권력을 가진 성직자들은 회중들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명예와 부를 쌓는데 혈안이 되었고 교회 예식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상징과 상투적인 관용구로 가득찼다. 이런 상황에서 1517년 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 교개혁은 단순히 구교에서 개신교가 나왔다는 차원이 아닌 세계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고행이나 헌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의미를 알 수 없던 교회의 예배는 이해할 수 있는 자기 나라말로 바뀌었고 성가대의 전유물이었던 교회음악도 회중의 손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2. 종교개혁자들의 찬송관


루터의 찬송관은 개신교에 미친 영향력 때문에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면


첫째, 찬송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때 찬송보다 더 효율적이고 적당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둘 째,찬송으로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도 찬송치 말아야 한다.

성경은 찬송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이 찬송이라는 단어가 신.구약을 통틀어 약 400회 정도 나오는데 이 단어의 전.후에는 한결같이 성삼위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셋째, 음표가 가사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좋은 시나 문장들에 아름다운 선율들이 더해질 때 그 시나 문장은 가장 아름답고 힘을 가지게 된다.


넷 째, 이미 잘 알려진 노래의 멜로디를 창작에 응용해서 사용했다.

그의 폭넓은 음악적 재능 덕분에 당시 불리던 많은 음악들이 교회 안에 들어 올 수 있었다. 이런 형태의 찬송을 Contrafactum이라 하는데 물론 약간의 문제도 있었다. 당시 개신교인들이 많은 찬송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데 비해서 실제로 부를 수 있는 찬송은 별로 없었다.그래서 짧은 시간에 작곡해서 또 그것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노래에 가사를 붙이는 것이 당시로서는 효율적이었다.


다 섯째, 한 음표에 한 음절의 가사를 붙였다.

당시 그레고리안 챤트에서는 가사 하나에 여러개의 음을 붙이는 멜리스마(Mellisma)를 전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가사를 한 음에 하나씩 붙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한층 살아있는 것으로 전하려 했다.


여섯째, 모든 성도들은 모국어로 찬송을 부르고 또 모국어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당시 라틴어로 되어있던 많은 찬송들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독일어 성경도 번역했다.


일 곱째, 많은 독일어로 된 찬송들을 지었고 다른 음악가들에게도 의뢰했으며 라틴어 노래들을 번역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36곡의 찬송을 스스로 작곡했다. 우리 찬송가 384장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루터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여덟째, 찬송은 기쁨으로 불러야 한다.

찬송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또는 은혜에 감격해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쁘게 불러야 한다.
위 에서 본 루터의 이런 견해는 교회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고 당시 구교로부터 억압을 받던 개신교인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 심지어는 당시 구교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루터의 회중찬송이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 러나 장로교의 창시자인 John Calvin은 루터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복음이 순수하게 지켜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불리는 찬송은 그 가사가 모두 성경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예배 시간에는 시편가만 부르도록 했다. 이렇게 한 것은 사람들이 작사한 가사가 비성경적으로 되는 것을 막고 세속의 영향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칼빈의 영향이 강한 나라들에서는 예배시간에 시편가만 부르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당시에는 이미 다성부 찬송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칼빈은 교회에서 단선율의 운율시편가(Psamodyl)만을 부를 것을 주장했다. 이런 음악의 대표적인 것이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다. 이런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음악이 무미건조한 것 같고 딱딱해 보이지만 익숙한 사람들은 아주 엄숙하고 장엄하게 부를 수 있다. 루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독일 교회들에서는 지금도 코랄을 즐겨 부르고 칼빈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프랑스나 네델란드등의 교회들은 이 시편가(Psalter)를 많이 부른다.



3. 회중 찬송의 현황


각 나라의 교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찬송들을 가지고 있다. 자기네 정서에 맞는 찬송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각 민족마다 정서의 표현방법이 다르고 좋아하는 음악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각 나라의 작곡가들이 자기네 정서에 맞는 찬송을 작곡하고 그것을 교회들이 보급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보다 기독교의 교세가 약한 일본이나 중국등의 교회들도 자기 나라 작곡가들이 작곡한 찬송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기독교 역사가 오래 된 유럽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만 아직도 유독 주로18- 19세기에 작곡된 서양 찬송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빨리 고쳐야 할 점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이 찬송들이 자기들의 정서와 맞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찬송들을 잘 부르지 않는다. 어른들이 부르니까 같이 부르기는 하지만 감동이 없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히 찬송에 힘이 없고 기쁨이 없다. 찬송에 힘이 없는 교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성장하는 교회들의 찬송과 그렇지 못한 교회의 찬송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4. 한국 교회 회중찬송의 현황


앞 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 한국교회 회중찬송은 소수의 곡을 제외하고는 서양음악 일색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우리 찬송을 만들어 부르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외에도 순수한 우리나라 작곡가가 한국적인 음악어법으로 만든 제2집 찬송도 나와 있지만 현재 교회들에서는 홍보부족 탓인지 아니면 교육상의 문제가 있어서인지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

1). 회중찬송에 대한 교회의 인식문제
목 회자나 교인들은 회중찬송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특히 예배시간에 회중찬송을 하나의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거나 구색을 갖추기 위한 것,혹은 분위기를 잡기 위한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앞자리가 비어 있을 때 교인들을 앞으로 불러내면서 그냥 움직이면 소란스러우니까 찬송 한 장 부르면서 자리를 옮긴다던지 예배 시작전에 소위 말하는 “준비찬송” 한 장 부른다던지 하는 것은 찬송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찬송은 그 자체로서 예배이지 예배를 돕기 위한 보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모든 순서는 다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요소는 중요하고 어떤 요소는 대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기도 시간에는 예배당에 출입하면 안되고 찬송시간에는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또 목사님의 설교시간은 중요하고 광고나 성도들간의 교제 시간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등이다. 물론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 어떤 요소는 우리 실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고 어떤 요소는 좀 덜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요소의 중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2). 회중찬송과 은혜
예 배에서 찬송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이미 언급했다. 하지만 찬송을 개인이 은혜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때 말하는 은혜라는 것도 정의를 내리기 어렵거나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신학적으로 말할 때 은혜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거나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상 받을만한 어떤일을 해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상이나 복이라고 해야한다. 그러면 왜 찬송을 은혜받기 위해서 사용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는 찬송이라는 용어의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데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성가와 찬송이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은데 엄밀히 말하면 찬송은 성가의 한 종류다. 성가에는 예배용도 있고 친교용도 있고 연주회용도 있다.


 예배시간에 예배용이 아닌 성가들이 불리다 보니까 교인들이 혼동하게 되고 부흥회때 불렀던 부흥회용 성가들을 예배시간에도 부르게 되고 별 설명이 없으니까 교인들은 그게 다 찬송인줄 알게 되어서 계속 예배시간에 부르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현재 우리 찬송가는 정확히 말해서 “성가”라고 해야 옳다. 예배시간에 찬송을 부르면서 박수를 칠 수도 있고 민족적 정서에 따라서는 춤을 출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감정이 고조되고 육체적인 움직임이 우리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해도 그 자체를 은혜라고 할 수는 없다. 몸을 움직이면서 빠른 템포의 노래를 부르면 어떤 음악이든 누구나 흥분되고 감정이 고조된다 또 이렇게 되는 상태를 목적으로 몰고가는 것도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찬송하면서 박수를 치거나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야한다.


한 편 이와 반대되는 현상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예배시간에도 몸을 움직이거나 율동을 하면서 찬송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어른들은 그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해하고 그러다보니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찬송하면서 박수치거나 춤추는 것을 경건하지 않다거나 예배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너무 고정관념에 얽메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박수가 아니라 춤추어 찬양하라는 말도 등장한다.(시 150:4절) 그러므로 신체의 일부분이나 전부를 사용해서 찬양하는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물론 신약에는 구약처럼 춤추고 박수하면서 찬양하는 기록을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금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당시 시대적 상황과 환경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3).회중찬송의 선택문제
예 배시간에 어떤 찬송을 부를 것인가는 예배를 인도하고 조직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 강운데 하나이다. 가장 무난한 방법은 교회력에 맞추어 선곡하는 것이다. 성탄절에는 성탄찬송,부활절에는 부활찬송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하더라도 회중이 어떤 사람들이냐, 또 연령은 어느 정도냐 하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예배 시간도 중요한 고려사항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우선 나이드신 분들이 많은 예배에서는 템포가 너무 빠르거나 리듬이 복잡한 것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우리 한국적인 리듬과 선율로 된 것이 일반적으로 좋다. 반대로 젊은이들의 집회에서는 리듬이 좀 복잡해도 괜찮고 선율도 많이 움직여도 별 문제가 안된다. 다만 너무 느리거나 일정한 리듬이나 선율이 자주 반복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들은 음역이 좁기 때문에 유치부 아이들은 가능하면 옥타브를 넘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것이 좋다. 또 사람의 목소리는 잠에서 늦게 깨기 때문에 아침에 높은 음역의 노래는 하기 어렵다.새벽 기도회나 이른 아침 시간대의 찬송은 조용하고 음역이 너무 높지 않은 것을 택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4.회중찬송의 실제


우 리가 사용하고 있는 회중찬송을 우리가 얼마나 정확하게 또 유효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찬송은 작곡가와 작사가의 의도를 알아서 그 의도대로 부르는 것이 좋다. 찬송가 495장을 예로 들어서 이야기해보자. 제일 위 가운데 큰 글자는 찬송의 제목이고 그 아래는 이 찬송과 관련이 깊은 성경귀절이다. 왼쪽 위는 작시자의 이름과 작시 연도, 오른쪽 위는 원래 이 찬송의 제목이고 그 뒤의 숫자는 이 찬송의 운율이다. 이 찬송은 8.8.8.8과 후렴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영혼이 은총입어”까지가 하나의 운율 또 “중한죄짐 벗고보니”등으로 되어 있다.


바로 앞의 493장은 우리 나라 작곡가가 쓴 것으로 3.3.조로 되어 있다. 작시자 아래에는 이 노래의 빠르기가 “보통으로♩=76”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노래를 1분 동안에 4분음표를 76번 부르는 속도로 부르라는 것이다. 속도는 리듬과 함께 음악의 성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빠른 음악은 사람을 쉽게 흥분시키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 노래의 조성은 내림가장조로 되어있으며 박자는 4/3이다. 이 노래를 4/3으로 부를 때와 8/6으로 부를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가 된다. 4/3으로 불러 보자. “내 영혼이”에서 “영”, “은총입어”에서 “총”이 강박이 된다. 그러나 8/6으로 불러보면 “내영혼이 은총입어”에서 “내”와 “이”, “은”, “어”등이 강박이 된다. 그러면서 노래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다.우리 찬송가에서 4/3과 8/6으로 혼용해서 부를 수 있는 곡이 많은 것은 아니다. 찬송가 364장은 8/6박으로 되어 있지만 전에 사용되던 “개편 찬송가”에는 4/4로 되어 있었다. 이것도 박자를 바꾸어서 불러보면 다른 느낌의 노래가 된다. 그러므로 찬송의 박자를 정확히 불러야 원래의 리듬이 살아서 제대로 된 찬송을 부를 수 있다.


다 음으로 음을 정확히 불러야 작곡가의 의도를 살릴 수 있고 그 찬송을 제대로 부를 수 있다. 찬송가189장을 반주없이 불러보자. 후렴 부분만 들어보면 작곡가도 자기의 작품이란 것을 모를 정도다. 물론 이 노래는 서양사람이 작곡했고 전통적인 우리 음악에 익숙해 있는 나이드신 분들에게는 지금 틀리게 부른 것처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 전통가락이 진행하는 방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를때엔 원래 이 곡의 분위기와는 다른 곡이 되고 만다.


찬송가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는 리듬을 정확히 불러야 할 곡이다. 박수치면서 부르다 보면 후렴 끝부분의 “불로 불로” 부분을 한 박씩 빠뜨리고 부른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지할 수 있는 곡을 군가처럼 만든다.


찬송은 유절가곡이다. 여러 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각 절의 가사를 정확히 불러야 한다. 찬송가 518장의 “신자 되기 원합니다”는 지금은 4절로 되어 있지만 전에는 5절로 되어 있었고 4절 가사에 “유다처럼 안 되기를”이라는 가사가 있었다. 이 찬송을 부를 때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남들은 “예수 닮기 ”하는데 혼자서 “유다처럼”하다가 5절로 갑자기 돌아오면 “유다처럼 원합니다”가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겠다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찬송은 4,5절 가운데 한 절을 생락해도 의미 전달에는 큰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또 어떤 곡들은 한 절을 빼버리면 전체 연결에 무리가 오는 경우도 있다. 찬송가 27장의 경우 3절과 4절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3절을 생략하고 4절을 부르면 연결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예배 시간에 찬송의 절을 생략하는 경우는 대부분 경우 예배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시간을 줄이기 위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예배를 계획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주의깊게 준비하면 해결될 수 있다. 시간을 줄이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설교를 듣거나 기도하는 시간은 줄이면 안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간은 줄여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없고 완전한 것으로 드리려고 구약시대의 제사에서부터 노력해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찬송을 꼬리 짜르고 몸통 짜르고 토막난 것으로 드려도 되겠는가?


현재 우리 찬송가는 4부 합창으로 부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회중 찬송시간에 4부 합창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 악보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못 부르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읽을 수 있는 분들은 파트별로 부르는 것이 더 풍부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이 될 것이다.


흔히 예배를 종합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의 추구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아름다워야한다. 영화나 오페라 연극 같은 것이 종합 예술인데 이런 장르의 예술들은 한결같이 치밀한 계획하에서 이루어진다. 한 편의 오페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동원된다. 성악가, 오케스트라 ,의상전문가, 무대장치 전문가, 조명, 건축등 여러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훌륭한 오페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악가가 노래만 잘 한다고 해서 오페라가 성공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도 목사님 혼자 설교만 잘 한다고 해서 그 예배가 성공적인 예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배 시작전에 안내위원들의 준비에서부터 그날 예배의 순서를 맡은 사람들은 미리 치밀한 준비를 해야한다. 예배 안내 위원들은 최상의 예배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의 출입을 통제할 수도 있고 기도하는 사람은 미리 기도를 연습해야 한다.


60분 예배 중에 회중대표 기도가 10분 가까이 차지해버리면 그때부터 목사님은 설교에 부담을 가져야 되고 모든 예배순서가 시간에 쫓기게 된다. 이럴 경우 많은 교회들에서는 기도문을 미리 작성해서 읽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이렇게 함으로써 중언부언하는 것도 막고 시간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회중도 아름다운 예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복장에서부터 행동, 찬송하는 방법등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반주도 지금은 거의 피아노나 오르간에 의존하고 있지만 소규모의 실내악단이라도 구성된다면 한결 아름다운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고 더 풍성한 찬송이 이루어 질 수 있다. 이렇게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노력할 때 아름다운 예배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다.



5.회중찬송의 전망


앞으로의 회중찬송은 어떻게 발달해 나갈까?
지 금 세상은 점점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어 가고 있다. 찬송하는 일도 점점 전문화 되고 있다.물론 누구나 찬양할 수는 있지만 이제 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전문적인 음악지식이 없이는 그 일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 지고 있다. 음악도 찬양대용과 회중용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1900년대 초기의 찬양대 찬양은 회중 찬송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회중찬송과 찬양대용 찬양은 아주 달라져 있고 일반 회중들은 찬양대용 찬양을 부르기가 어렵다. 또 음악은 시대에 따라서 자꾸 바뀌기 때문에 찬송도 바뀔 수밖에 없는데 지금 우리 찬송은 너무 변하지 않고 있어서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많이 불리고 있는 Gospel Song 스타일의 찬송들이 결국에는 우리 교회에도 들어오게 될 것이다.


나이 드신 분들이 지금은 부르기 어려워서 못하고 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들이 노력하지 않으면 찬송은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이며 자라나는 세대들이 좋아하는 찬송이 없어져서 교회안에 찬송하는 열기가 사라져 버린다면 교회는 실로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다행히 근래에 들어서 찬송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들과 기관들이 많이 생겨나서 교회찬송을 발전시키고 교육시키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교회가 찬송에 다시 눈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또 좋은 찬송을 찾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43:21절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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