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배경사


제1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1. 메소포타미아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산악 지방으로부터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거쳐 페르샤만쪽으로 내려왔다.  


2.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처음 등장한 인종은 우바이드족이라고 알려진 백성들이었다.

   이들에 관해서는 고고학적인 유물들 이외에는 문서상의 기록이 없다.  



3. 우륵시대: 주전4000년경의 수메르족의 출현으로부터 문명이 시작됨.  


-- 메소포타미아 하류의 우륵, 와르카(창10:10의 에렉), 수사,  우르(창11:28), 테페 고라 등지에 거주.  

-- 최초의 문자발명. 상형문자 발명, 10진법과 60진법이 사용됨.  

-- 하늘의 신 아누(Anu)와 어머니신 이난나(Inanna, 아카드어로 이스탈, Isthar)을 숭배. 아누 신전은 벽돌로 만든 인공대지 위에 건축되었고,

    둘레에 계단이 있는 피라밋형의 신전의 원형이 됨. 처음에 촌락 형태로 있었던 거주지는 신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로 변모. 모든 것이 다 신의 소유물이라는 가정하에

    국가가 조직되고 국가를 대표하는 통치자는 “루갈”(the Lugal, 위대한 사람)은 신전에 거하면서 통치했다. 전형적인 신정사회.  

-- 니풀, 우륵, 우르가 대표적이 도시국가들 



4. 젬뎃 나슬시대: 주전3000-2800년 


-- 특별한 기록이 없음.  



5. 메실림시대: 주전2800-2500년 


-- 반상형문자단계에서 쐐기모양의 설형문자단계로 발전, 기술과 공예가 발달, 중심도시국가인 우륵의 경우 10킬로미터의 담벽과 900개가량의 망대가 건설되었다.  

-- 문화중심이 페르샤만 남단에서 오늘날의 바그다드 근처로 이동 

-- 모래땅을 파서 그 위에 신전을 건설. 도시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신전의 역할이 약화되고 대제사장과 함께 왕이 부각되기 시작함(왕조의 등장). 기스의 메실림 왕이 활동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메실림 시대라고 부름.  



6. 우르의 첫왕조시대: 주전2500-2360년 


-- 메사니파다가 우르의 첫 왕으로 등장하여 80년간 통치. 우르 근처의 알 우바이드에 신전을 건축하여 니훌삭 여신에게 봉헌.  

-- 우르 이외에도 마리, 앗수르, 니풀, 수룹팍(노아의 고향으로 알려짐), 에리두 등의 도시국가들이 번성했는데, 그 중에서 우르는 지도적인 도시국가의 위치에 있었다.  



7. 아카드시대: 주전2360-2180년 


-- 셈족의 사르곤1세가 창립. 동쪽으로는 엘람, 북쪽으로는 수바르투, 서쪽으로는 수리아와 토러스산맥을 넘어 소아시아까지 진출. 같이 식사하는 사람만 5400명.  

-- 아들 리무스는 9년째 암살당하고, 동생 마니스투수가 15년간 제국을 장악, 손자 다람신이 엘람에서 32명의 왕으로 구성된 동맹군을 퇴치.

   사르곤가문의 힘이 빠지자 구트족에게 멸망.  

-- 수메르의 도시국가가 중앙집권화된 정부로 대체. 

-- 주로 달과 별을 의읜화한 신을 숭배. 달신 신(sin), 태양신 샤마스(shamas)를 숭배.  



8. 우르3세시대: 주전2060-1950년 


-- 구트족은 우룩의 우투헤갈이 축출해냄. 그러나 우투헤갈은 그의 신하 우르남무에 의하여 폐위되고 우르남무가 집권하여 우르제3왕조를 수립. 아들 술지를 거쳐 아말신, 수신, 입비신으로 대가 이어짐. 입비신왕때 엘람에 패망.  


-- 왕의 이름 안에 sin이라는 이름이 많이 들어간 것을 볼 때 신의 숭배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 엘람은 아모리족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모리족속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0. 이신-라르사시대: 주전1960-1830년 


-- 입비신을 폐위시킨 아모리족속은 한 무리는 마리 출신의 이스비 이라의 영도하에 이신에서 통치했고,

다른 한 무리는 나플라눔의 영도하에 라르사에서 통치했다. 이후 이신에서 세운 나라에 10명의 왕이 등장했고, 라르사에서 세운 나라에 10명의 왕이 등장함.  

-- 이신의 5대왕인 리핏-이스탈은 최초의 법전이 우르남부 법전을 비롯하여 그때까지 등장한 모든 법전들을 모아서 집대성.  

-- 라르사의 마지막왕 림신이 이신을 정복, 림신은 바벨론의 함무라비에 정복당함.  



11. 고대 바벨론시대: 주전1830-1530년 


-- 아모리족속 중에 숨뭄아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밥일루(바벨론의 기원)라는 소도시의 지배자가 되어 작은 왕국건설. 그 후, 수무라일루 -> 사붐을 거쳐서 함무라비가 왕이 됨.  


-- 함무라비는 위에 오른지 31년만에 라르사를 정복하고 림신을 사로잡음. 다음 해에 마리정복으로 정복사업을 끝내고 평화사업에 착수. 특히 함부라비는 우르남부법전, 리핏-이스탈 법전을 포함하는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을 집대성했다.  


1) 함무라비 법전은 가정적 사건을 설정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적당한 형벌을 제시한 형태로 되어 있음. (이 점에 있어서 명령형으로만 되어 있는 모세의 법과 다르다) 

2) 귀족, 평민, 노예의 3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평민들은 자기 소유의 땅이 없었으며, 왕실과 자유시민에 대한 세금납부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계급구분을 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노예의 인권보호를 중요시하고 있으며, 모든 백성들의 사적이 토지소유를 명문화한 모세의 율법과 대조된다) 

3) 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값을 치루고 신부를 데려왔고, 신부는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  

4) 아내는 이혼할 수도 있고 이혼한 후에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남편도 이혼할 수 있었다.

   (이혼규정이 없는 모세의 율법과 대조. 구약에 있는 이혼규정은 당시 사회에 들어온 이방의 규정을 묵인한 것) 

5) 결혼은 문서로 계약된 것만 유효.  

6) 아내가 아이를 두지 못할 경우에 첩을 둘 수 있도록 되어 있음.

   (이 점도 모세의 율법과 다른 점. 아브라함이 하갈을 첩으로 취한 것은 함무라비법전과 같은 이방법의 영향을 받은 증거).  

7) 양자를 데려올 수 있었고 양자는 법적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  

8) 무고죄, 절도, 살인, 간음 등에 대하여 사형을 구형. (모세의 율법보다 더 가혹) 



12. 고대 앗수르 왕국: (주전? <- 1950-1677 -> 200년어간) 


-- 아카드시대의 사르곤 왕국의 속국으로 통합되어 있다가 1950년에 우르의 제3왕조가 멸망당하자 독립하여 일루수마를 첫 왕으로 시작. 1770년 힛타이트 족속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까지 주로 소아시아 지방에서 존속. 이후 나람신과 그의 아들 에리수를 거쳐 1749년 셈족의 삼시-아닷1세에게 자리를 빼앗김. 마리를 공격하여 합법적이 왕 야둔림을 폐위시키고 야스마-아닷을 왕위에 세움.  


-- 삼시-아닷의 왕권은 아들 이스메-다간(1716-1677)까지 계속되었다가 함무라비에 점령당해 속국이 됨. 그 이후 계속되는 왕권투쟁으로 6명이 2년씩밖에 통치하지 못하는 혼란상태를 겪다가 200년간 암흑상태로 들어감.  



13. 마리왕국: (주전? - 1695년) 


-- 약기들림, 야둔림, 삼시-아닷에 의하여 야스마-아닷(1732-1715), 짐질림(1716-1695)까지 계속됨.  

-- 60평방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왕궁을 마리에 건립.  



14. 힛타이트왕국: 주전1800-1200년 


-- 성경에 헷족속으로 명명되고 있는 히타이트족속은 주전2000년경 러시아 남부 코카서스를 넘어서 소아시아쪽으로 이주.  

-- 아니타스 치하에서 힛타이트 종족들이 통일되어 왕국을 형성함.  

-- 2대 라바르나스(주전1600-)는 실질적인 창건자로서 귀족세력에 반대하여 왕권을 강화함 

-- 3대 하투실리스1세(주전1570-1530)는 영토확장에 착수한 최초의 히타이트인 

-- 하투실리스1세는 궁중내 음모 때문에 장자를 제거하고 동생이었던 무르실리스1세를 세움  암살당함.  


-- 텔리피누스(1480)가 혼란으로부터 잠시 왕국을 구해냈다가 수필루마니우스에 이르러서 새로운 제국으로 형성. 그 이전은 고대왕국으로 불리운다. 유프라테스 상류의 미탄니 왕국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만들어 버림.  


-수필루마니우스에 이어 손자인 무르실리스2세(1345-1315), 무와탈리스로 이어졌고, 사촌 하투실리스가 무와탈리스의 아들인 우리히-테수프로부터 왕권을 빼앗음, 하투실리스3세때에 앗수르의 살만에셀1세에 패망함.  


-- 언어는 국내행정에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힛타이트어, 외교적 언어로는 아카디아어를 사용함.  


-- 200여개의 결의론적 형태로 된 법전에 의하여 통치. 법전은 피의 복수를 금지하고 대신 손해배상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다만 강간, 수간, 반역에 대해서는 무거운 벌을 내림.  


-- 결혼관습: 신랑이 신부의 가족들에게 상징적 예물을 주었고 신부는 결혼지참금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시집에 감. 아내가 죽으면 지참금은 남편 소유가 됨.  


-- 근친간의 결혼은 금지됨 


-- 남편이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죽는 경우에는 남편의 형제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과부와 결혼했고, 자식이 태어나면 죽은 사람의 이름을 가졌다. (성경에 등장하는 계대결혼관습) 


-- 다신론 숭배자들이었다.

특히 호리족이 섬겼던 기후의 신 테수브와 그의 아내 헤바트, 이스탈신과 같은 신이었던 사우스카신이 숭배되었고, 특히 태양신이 국가수수호신으로 숭배되었다.  


-- 세 마리의 마차가 끄는 전차대를 이용하여 전쟁을 했고, 전쟁시에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공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앗수르왕들의 잔인성과는 대조적이었다.  



15. 호리족속: 주전3000중엽- 1350년  


--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에 주로 거주했던 셈족계통의 인종으로서 미타니왕국의 지배적인 인종.

미타니왕국의 수도는 하란, 유프라테스중류계곡을 중심으로 형성. 앗수르를 지배하기도 함.  



16. 카시트왕국: 주전1530-1150년 


-- 코카서스 지방에서 유래한 인종. 바벨론의 함무라비의 후계자들이 약해지고 무능해진 틈을 타서 메소포타미아북서쪽에 왕국을 세움. 간다스, 아굼1세, 카스틸리아1세와 2세, 울람부리아스, 카스틸리아스4세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다 카스틸리아스4세때에 이르러 앗수르의 투굴티니눌타1세에게 패배하여 왕이 죄수로 잡혀 가고 도시와 신전의 보물들이 약탈당함.  


-- 앗수르가 연약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가 바벨론 왕조를 다시 일으킨 엘람족에 의하여 1155년 엔릴나디나헤를 끝으로 왕조가 종말을 고함.  

-- 신들을 사람의 형태로가 아니라 추상적 형태로 표현, 종교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함. 바벨론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신 앞에서 합당한 도덕적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7. 중간 앗수르 왕국: 주전1356-932년 


-- 호리족속의 미타니왕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앗수르왕국은 주전14세기초에 미타니의 숫타르나2세가 죽고 난 이후에 찾아 온 혼란기를 틈타서 왕국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 최초의 왕으로 앗수르-우발릿1세가 즉위(1356-1331). 힛타이트는 침략하지 않고 아케나톤이 다스리던 애굽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바벨론을 침략하여 바벨론 왕으로 쿠리칼주2세를 세움.  


-- 아닷-니라리1세(1297-1266) 때 바벨론 남쪽을 유일하고 서쪽으로 갈그미스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 살만에셀1세(1265-1235) 때에 미타니의 반란을 진압.  


-- 투쿨티-니눌타1세(Tukulti-Ninurta)(1235-1198)는 바벨론의 카스틸리아스4세를 몰락시켰고, 마르둑의 입상과 함께 포로로 끌고 옴. 궁중에서 일어난 반역에 의해 살해당함.  

(이 사이에 카시트의 왕 아닷-숨-나실이 반란을 일으켜 바벨론을 재건함. 1128년에 토착민이었던 느부갓네살1세가 일어나 카시트왕조를 무너뜨리고 토착 바벨론왕국을 재건함. 그러나 느부갓네살1세가 죽고 나자 바벨론의 세력을 빠른 속도로 쇠약해졌다.) 


-- 디글랏빌레셀1세(1116-1078)가 등장하여 앗수르의 군사력을 절정의 단계에까지 끌어 올림. 디글랏빌레세의 군대는 무자비한 군대였다. 살해당한 자들의 피가 계속에서 냇물처럼 흘렀고 적들의 머리들이 곡식더미처럼 성읍들에 굴러 다녔다. 전쟁을 하지 않을 때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에서 사자, 들소, 코끼리 사냥에 시간을 보냈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성벽을 요새화하고 궁전과 신전의 건축에 매진. 디글랏빌레셀 사후에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18. 새 앗수르제국: 주전932-612년 


-- 주전932년에 앗수르-단2세가 즉위하면서 앗수르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살아났다.  

-- 앗수르-단의 아들 앗수르-니라리에 이르러 앗수르제국은 전성기에 들어섰다. 서쪽으로는 소아시아까지, 동남쪽으로는 바벨론을 침공하여 평화조약을 체결. 앗수르의 왕들은 a. 온 우주의 왕으로서 경배를 받고자 하는 교만을 보여주었으며, b. 무자비하게 적들을 학살했다. 도시를 불태우고, 반항하는 적들은 산 채로 껍질을 벗겼고, 목을 자르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끌고 가거나 불태워 버림. 이런 잔인한 행위는 우레의 신인 앗수르 신에게 드리는 예배로 해석됨. 그러나 앗수르의 왕권이 약화될 기미만 보이면 속국들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앗수르의 군대는 끊임없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전쟁비용으로 국가자원을 다 탕진하여 멸망당함.  


-- 앗수르-나실-팔2세(883-859)도 무자비한 살육을 계속했고, 국내적으로는 성읍과 신전건축, 곡물창고건립, 운하건설, 과일나무재배지도 등을 시행했다.  


-- 살만에셀3세(858-824)은 생존을 위하여 정복을 계속함. 정복에서 얻은 물자에 의지하여 명맥을 유지하는 정권이었기 때문에 정복물자가 떨어지면 몰락. 살만에셀3세가 다메섹을 침공하였을 때 다메섹은 발하닷(성경-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아합군대와 더불어 열두 연합군을 이끌고 대결하여 혈전을 벌임. 이 전쟁에서 아합이 전사하고, 발하닷은 부하 하사엘에게 암살당함.  


-- 살만에셀3세의 아들 앗수르-나딘-아팔과 삼시 아닷5세의 왕위쟁탈전에서 삼시아닷5세가 승리하여 왕권을 잡음(832-10). 바벨론과 전쟁을 벌여서 바벨론 왕인 마르둑-바랏수-이크비를 포로로 잡아오고 그의 부하들을 산 채로 껍질을 벗겨 죽임. 바벨론 왕위에는 바비-아히-잇디안을 세움.  


-- 삼시-아닷5세 사후에 아닷-니라리3세(809-782)가 등장하여 수리아와 팔레스틴 지방에 대한 원정을 벌여 두로, 시돈, 이스라엘(오므리왕), 에돔, 블레셋, 다메섹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세금을 받았다.  


-- 아닷-니라리3세 이후에 살만에셀4세, 앗수르-단3세, 앗수르-니라리5세(781-746)가 등장했을 때 앗수르는 많이 약화되었다. 특히 앗수르-단3세 때 재앙이 땅을 휩쓸어 힘이 빠진 틈을 타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가 영토를 확장했고 웃시야 치하의 유다가 잠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빼앗은 디글랏빌레셀3세(745-27)에 이르러 앗수르는 반월형 옥토지대에서 다시 지배권을 되찾았다. 바벨론과 병합시켜 버림.  


-- 이 당시 가장 강력한 앗수르의 대적은 다메섹의 르신이었다. 르신은 유다의 아하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임(이사야6-7장, 왕하16,17장에 기록된 수리아-에브라임전쟁). 이때 아하스가 디글랏빌레셀에게 호소하여 도움을 요청. 디글랏빌레셀3세는 즉시 진군하여 다메섹을 정복하고, 여로보암2세때 확장했던 영토를 모두 빼앗고 이스라엘을 사마리아 주변의 작은 영토로 위축시킴. 호세아는 앗수르의 묵인하에 베카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름.  


-- 살만에셀5세(726-22)는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애굽과 결탁하여 조공바치기를 거부하자 사마리아를 포위공격하여 멸망시킴. 상류층 사람들 2만7천명 가량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성읍들로 추방당하고 타지역사람들이 사마리아에 이주하여 정착하여 혼합됨으로써 사마리아 백성들이 생겨나게 됨. 향후 유대인들은 피와 종교가 혼합된 사마리아 백성들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살만에셀5세 사후에 보수적인 당파의 지도자인 사르곤2세가 왕위에 올랐다(727-705). 사르곤2세 치하에서 앗수르는 전성기를 누렸다. 이스라엘이 종말을 고한 이후에 가자의 한노, 하마스의 반란도 진압되었다.  


-- 사르곤2세가 군사원정길에 죽자 그의 아들 산헤립(704-681)이 왕위에 오름. 그러나 산헤립은 오만한 태도 때문에 도처에서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산헤립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페니키아, 블레셋 동맹군을 패퇴시키고 애굽 구원병도 패퇴시켰으며 예루살렘을 제외한 전 유대지역을 점령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산헤립군대가 붕괴되고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이야기가 왕하18-19장, 사36-37장에 기록되어 있다. 고, 자기 아들로부터도 소외당하다가 칼라의 신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살해당했다. 산헤립 통치기간동안 바벨론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노예출신 마르둑-자길-숨미가 왕권을 잡았으나, 산헤립은 그를 폐회시키고 친앗수르파인 벨 이브니를 왕위에 올려 놓았다. 엘람왕 할라수가 바벨론을 정복하여 잠시 지배권을 장악했으나 689년에 산헤립은 할라수를 죽이고 바벨론에 진격하여 잔인하게 응징했다. 마르둑의 입상을 앗수르로 옮겨갔고, 주민들은 살해되고 추방당했으며, 신전들은 파괴되고 신전보화는 탈취당했다. 그러나 산헤립은 아들 엣살하돈에게 죽임을 당했다.  


-- 엣살하돈(680-669)은 북쪽에서 위협하던 시메리안족들과는 평화협상을 체결해 놓은 뒤에 애굽정복에 나섰다. 673년의 첫 번째 원정은 이디오피아왕인 타하르코의 군대에 의하여 국경선에서 저지당했고, 둘째 아들인 아수르바니팔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두 번째 원정에 나섰다. 두 번째 원정에서 타하르코가 패배하고 수도 멤피스는 멸망당했다. 국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왕권쟁탈전이 전개되었다. 이 사이에 다시 애굽에서 반란이 일어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세 번째 원정에 나섰다가 길에서 객사.


-- 앗수르바니팔이 왕위를 계승(668-631). 지휘관, 정치가, 사냥꾼, 미술 수집가, 골동품 애호가로서 앗수르의 문화발전에 기여했으나 정복전쟁에서는 앗수르 왕들의 특징이 무자비함이 그대로 나타났다. 엘람족의 왕들을 입술을 잘랐고, 반역한 성읍주민들을 죽이고 시체를 반역한 성읍 주위에 매달았다. / 애굽이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앗수르의 반격을 받아 663년에 테베스스가 정복당하고 수백개의 성문이 파괴당했다(나3:8) 


-- 앗수르 내에서는 앗수르바니팔과 형제 사마스-숨-우킨 사이에서 왕권다툼이 계속되다가 사마스-숨-우킨은 궁전화재 중에 타죽고 앗수르바니팔의 힘을 소진되었다. 앗수르바니팔이 죽은 후 앗수르는 엄청난 전비를 충당해낼 수가 없었고, 항복해온 사람들을 먹여살릴만한 힘도 없었다.  


-- 이 사이에 바벨론은 칸달라누가 왕위를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갈대아의 나보폴라살이 바벨론의 왕권을 주장했다. 메데(시아사레스)와 갈대아 연합군이 힘을 규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고, 바벨론의 나보폴라살도 앗수르를 공격했다. 앗수르의 마지막 왕인 신-살-이스군은 애굽, 스키디아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대항했으나 패전했고, 신-살-이스군은 왕궁 폐허지에서 자결함으로써 앗수르는 종말을 고했다(612) 



19. 새바벨론제국: 주전625-539년 


-- 나보폴라살의 등장으로 바벨론제국이 시작됨. 앗수르보다 힘이 약했던 바벨론 제국은 군사력으로보다는 외교력으로 제국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함. 나보폴라살은 메데의 시아사레스와 조약을 맺어 북부 메소포타미아지배를 허용하고 중부 바벨론과 수리아지방을 통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나보폴라살은 하란을 정복하고 황태자 바롯느고와 느부갓네살을 보내 수리아의 지배권을 강화. 605년에는 갈그미스에서 애굽군대를 격파하여 애굽의 국경까지 이르는 지배권을 확보. 바벨론의 무너진 신전과 성벽을 재건.  


--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나부-쿠둘-우술)이 왕권을 계승(605-562). 에사질라의 신전, 운하, 성벽, 도로 등을 건립. 군사적 모험을 신중을 기했다. 주전501년에 바로 아마시스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597년에는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여호야긴 왕과 그의 모친을 인질로 끌어갔다. 왕위에는 시드기야를 세워 놓았다. 9년후에 시드기야가 애굽의 바로 호프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18개월동안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한 끝에 멸망시킴. 주전586년에 유다왕국은 종말을 고하고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본 후에 장님이 되어 하마스에 있던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감. 이후에 유다는 바벨론의 한 지방처럼 되어 버렸다. 애굽의 지지를 받던 두로는 13년간 반항하다가 멸망당함.  


-- 아들 아벨 마르둑이 왕위를 계승(561-560). 여호야긴 왕을 특사로 풀어주었다. 무능했던 마르둑은 처남인 네르갈-살-우술에 의하여 쫓겨남. 네르갈-살-우술은 잠시동안 통치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왕이 되었을 때 달신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라바시-마르둑을 죽이고 나보니두스(555-539)를 왕으로 세웠다. 달신 숭배자인 나보니두스는 달신인 신(sin)의 신전건립과 골동품수집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고레스의 영도하에 페르샤의 세력이 점점 증대되고 있었다. 페르샤가 동쪽 통상로를 차단하자 바벨론은 서쪽과 남쪽으로 통상을 확대해야 했다.  


-- 나보니두스느 벨-살-우술(벨사살)을 공동섭정으로 세웠다. 바벨론을 떠나 있었던 나보니두스가 신년축제에 참여하기를 소홀히 하자 백성들이 등을 돌렸다. 이 와중에서 티그리스강 동편에 있던 구티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임명한 구바루는 고레스와 합쳐 버렸다. 시팔에서 벌어진 구바루와의 전투에서 나보니두스군이 패전했고, 이틀 후에 페르샤 군대가 싸움도 없이 바벨론에 진주해 들어왔다(539년10월12일). 나보니두스는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됨. 약탈은 없었고 신전도 특별히 보호되었다. 벨사살은 궁에서 죽었을 것. 10월29일에 고레스는 바벨론에 해방자로 환영받으면서 바벨론에 입성했다.  



제2부: 애굽의 역사 


1. 애굽왕조는 주전3000년경에 시작되어 주전32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정복될 때까지 30대가 계속되었다.


중요한 왕조들은 다음과 같다.  

             

a. 옛 왕국 또는 피라밋 시대: 주전2700-2200, 제3왕조에서 제6왕조까지              

b. 중간 왕국: 주전2000-1800, 제12왕조              

c. 새왕국 또는 제국: 주전1570-1090, 제18왕조에서 제20왕조까지             

d. 이디오피아시대: 주전715-663, 제25왕조              

e. 세이스 왕조: 주전663-525, 제26왕조              

 f. 페르샤 시대: 주전525-332(중간에 애굽의 왕권탈환이 있었음) 


2. 원래 메소포타미아 북부 산악지역에서 살던 종족들이 아프리카 북동부 산악지대로 내려왔고, 이들은 산악지대의 물이 마르고 사냥한 들짐승만으로는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나일강변으로 내려 왔다. 이들에 의하여 목축과 관개사업이 시작되었다. 관개사업을 위해서는 촌락과 촌락들이 협력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3. 주전3000년경에 한 가족이 애굽전체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가족의 수장은 메네스였다. 메네스는 나일강 하류의 멤피스에 도읍을 정함.  



4. 주전2700년에 제3왕조가 등장하면서 애굽의 문화가 성숙하기 시작함.

이 무렵부터 피라밋시대가 시작됨. 피라밋은 조서(Zoser)의 계단식 피라밋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피라밋은 이-엠-호텝(Ii-en-hotep)에 의하여 건축되었다. 왕은 신으로 숭배되는 신정사회로서, 왕의 아들들이 정부의 중요한 직책들을 맡았다. 왕은 영생이 보장된 자. 왕이 사후 세계에서도 영원히 다스리기 위해서 궁전이 필요한 것처럼, 왕자들과 귀족들도 영원히 살아서 왕을 섬겨야 했다. 이 때문에 사후의 궁전으로서 피라밋이 건설되었다.  



5. 제4왕조(2650-2500)때 기제(Gizeh)의 위대한 세 피라밋이 건립되었다.

쿠푸(Khufu)의 무덤인 대피라밋, 카프-레(Khaf-Re)의 제2피라밋, 멘-카우-레(Men-Kau-Re)의 제3피라밋.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 그러나 쿠푸와 레는 피라밋건축에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했고, 경제력을 수탈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제4왕조때에 문자기록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6. 제5왕조(주전2500-2350)에 와서 두 개의 다른 신이 숭배되었다.  

             

a. 태양신 레(Re): 현재 임금의 아버지. 따라서 정치적 권력을 얻음. 

             

b. 오시리스(Osiris): 죽은 자의 신, 죽은 왕들의 신.  


이 시대부터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귀족들이 왕의 영원불멸적 신성을 불신하고 자기들의 독립된 무덤을 세우기 시작했다. 제6왕조(2350-2200)에 이르러서 지방분권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지방귀족들의 묘석건립이 더욱 활발해짐. 남쪽으로는 수단과 교역이 활발해짐. 주로 향료, 고무, 상아, 표범가죽등을 수입함. 북동쪽인 팔레시타인-수리아 지역과는 애굽의 영향을 받은 신전건축을 지원하는 등 해상무역이 이루어졌으나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베두윈족들과 분쟁이 잦았다.  



7. 제6왕조 이후에 무력한 왕들이 등장하여 애굽 전역이 다시 지방 귀족들이 발호하여 혼란상태가 조성되었다.

이 시대에 발견되 문헌들은 정부의 혼란, 사회계급의 전복, 무덤들에 대한 무관심과 약탈, 외국무역격감, 베두인족의 삼각주 침투 등을 보도한다. 신적인 권위와 부를 가진 왕조가 허무하게 몰락하는 모습을 보고 철학적인 반성이 일어나기도 했다. a. 물질주의가 성공과 영생을 보장해 못하며 신에 대한 경건한 예배와 선한 성품과 생활이 필요하다는 인식. b. 보편적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농부도 고귀하다는 인식. 이와같은 인식은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분권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사상들이었다. 이전에는 장례예식이 왕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인식되었으나 이제는 모든 귀족들의 권리가 되었고, 왕 뿐만 아니라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죽을 때 오시리스 신이 될 것이며, 영원한 행복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8. 주전2100년에 권력투쟁은 두 도시국가간의 쟁패로 좁혀졌다. 헤라클레오폴리스(Herakleopolis)는 멤피스의 적법한 상속자라고 주장한 반면에 남쪽의 도시국가 테베스(Thebes)가 힘을 얻어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테베스가 승리하여 애굽을 재통일하여 평화, 안정, 번영을 누림.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승리한 가족은 테베스의 또 다른 가족에 의하여 물러나고 중간왕국이라고 불리우는 제12왕조(주전1990-1780)가 수립됨. 이 왕조는 애굽역사의 고전적 황금시대로 불리움.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였고,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의 수량을 측정하기 위한 제2홍수지역을 확보했고, 대상무역로 개설을 위하여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 팔레스타인과 수리아는 애굽의 문화적 지배권하에 있었으나 애굽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장악하지는 못했다. 제12왕조는 시나이의 동광개발에 참여함. 그러나 아시아의 족장들과 싸우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일을 추진함.  


  이 시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로는  

             

a. 네페르티의 예언서(제12왕조가 애굽의 혼란을 극복하고 애굽을 구원할 것을 예언한 예언자의 글), 아멘-엠-헷(Amen-en-het)2세의 지혜서, 시-누헤(Si-nuhe)의 이야기, 무역에 관한 풍자시 등이 공립학교 교재로 사용되었다.  

             

b. “저주본문들”: 도기 그릇 위에 적들의 이름이나 명칭을 새긴 후 이 도기를 산산조각냄으로써 왕의 모든 원수들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했다. 이 이름들 대부분이 셈족 계통의 인물들이었다(아스켈론, 세겜, 라이스, 벳세메스, 에이커, 두로).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본문도 있었다. 저주본문들의 존재는 애굽왕조가 국내에 많은 대적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외적으로는 셈족 계통의 군주들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9. 제12왕조가 약화되자 테베스스 왕조와 삼각주 지역세력이 다시 분쟁에 들어갔고, 국격수비가 약화됨.

이 틈을 타서 셈족 계통의 힉소스족이 무력으로 침략해 들어와서 북동쪽 삼각주에 있는 아바리스(Avaris)에 자리잡고 애굽통치를 시작했다. 이로써 힉소스왕조(주전1720년-1570). 힉소스의 통치사실은 타니스에서 발견된 “400년 돌비석”에서 확인된다.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 총리대신이 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인데, 애굽왕실이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셈족계통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애굽본토 출신이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힉소스왕조가 몰락하고 다시 애굽본토 출신 왕권이 들어서자 셈족 출신의 히브리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다시 살아나 박해가 시작되었다. 박해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야 했다. 힉소스왕조는 테베스스의 통치자들에 대하여 관대했으며, 삼각주를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테베스스로부터는 공물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10. 힉소스왕조 말기에 이르러 테베스스의 왕인 카-모세(1580)가 새로운 전쟁무기들을 입수하여 전쟁준비를 하다가 힉소스왕조와 전쟁을 벌여서 힉소스왕가를 삼각주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카-모세의 아들 아-모세(Ah-mose)1세는 세 번에 걸친 싸움 끝에 힉소스왕조를 몰아내고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초기의 새 왕국 곧 제18왕조를 수립했다(주전1570-1375).  


  힉소스 왕조에 의한 외국의 통치를 받아 본 애굽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마음 속에제국주의적인 애국주의 감정이 찾아 왔다. 이 감정은 1490년의 대논쟁을 촉발시켰다. 논쟁의 한편에는 핫트-세프수트(Hat-sheput)여왕이 있었다. 그녀는 평화정책을 추구했다. 다른 한편에는 투트-모세(Thut-mose)3세가 있었다. 그는 호전적이고 w제국주의적인 군사정책을 추구했다. 이 대결에서 핫트-세프수트이 승리하여 왕권을 장악함(주전1486-1468). 그녀는 재건, 건축, 사업, 외국무역에 주력했고, 테베스스에 아름다운 신전을 건축했다. 그러나 투트-모세3세에 의하여 축출되어 왕좌에서 물러나고 투트-모세3세가 왕위에 올랐다(주전1490-1436). 그는 17번의 원정전쟁을 통하여 수리아북방까지 애굽에 편입시켰다.  


  1468년 5월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330군주들로 구성된 동맹군이 오론테스 강변의 가데스의 군주의 지도하에 애굽군과 대전을 준비했다. 이들은 갈멜산에 은신할 수 있는 은신처를 확보하기 위하여 므깃도에 집결하고 대응했으나 투트-모세3세는 가볍게 므깃도를 통과함으로써 승리했다. 투트-모세3세는 동맹군을 므깃도에 몰아넣고 동맹군의 장막을 마음껏 약탈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말 2000마리, 가축 2000마리, 양 2만마리 기타 금, 은, 세공품들을 탈취했다. 추수기였기 때문에 45만부셀의 곡물도 약탈. 12월에 므깃도에 갇혀서 굶어 죽게 된 자들이 항복하고 용서를 빌자 도량이 넓었던 투트-모세3세는 충성서약을 받고 풀어 주었다. 예속된 봉신의 표지로서 당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애굽의 왕들은 지방군주들을 보좌에서 쫓아내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두었지만 아들과 형제들을 볼모로 데리고 감으로써 강압과 유화정책을 동시에 구사.  


  아멘-호텝(1439-1406)2세는 수리아를 침공하여 도가지 흙으로 된 비밀서신을 목구멍에 숨겨 전하려고 하던 지방군주의 신하를 사로잡기도 했고, 9만명이나 되는 아시아 포로들을 끌고 갔다. 이 가운데는 3600명의 히브리인들도 있었다.  


  애굽이 아시아지역으로 제국을 확장시키면서 애굽사회도 변화를 겪었다. 애굽사람들이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게 되었고, 아시아인들이 볼모와 노예로 끌려와 애굽에 거주하게 되었다. 아시아지역과 애굽지역간의 활발한 문화교류도 이루어졌다. 나일강 유역에서 섬기던 신들의 사당이 아시아에도 세워졌고, 해외에 살던 애굽인들이 바알과 아낫, 아스다롯신을 섬기기도 했다. 아멘-호텝3세(1398-1361)때는 유례없는 평화를 구가했다.  



11. 애굽 안에서는 사회구조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초기의 제정일치사회가 제국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문화되고 직업화되면서 제정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관리, 군인, 제사장의 세 계급이 세력을 얻어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신하들의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바로 왕은 자신이 이들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왕권을 다시 확립하기 위해서는 변혁이 필요했다. 이때 아멘-호텝3세가 공동섭정으로 임명한 아들이 변혁을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주전1375-1300).  

            

a. 아몬-레신 숭배로부터 태양표면신 아톤신 숭배로 종교를 바꾸고,  

             

b. 이에 맞추어서 “아몬신이 만족하였다”는 뜻의 아멘-호텝으로부터 “아톤신은 무사하다”는 뜻을 가진 아켄나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c. 수도를 테베스로부터 북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이름을 아켓-아톤(Akhet-Aton)이라고 명명했다. 이 곳이 오늘날 텔-엘-아마르나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 시대를 아마르나시대라고 명명한다.  

             

d. 그러나 신체적으로 병약했던 아켄나톤은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면에서의 개혁 보다는 영적, 예술적, 지적인 분야에서 개혁을 수행했다. 이전에는 애굽의 예술이 무시간적이고 무공간적인 영원성을 강조했으나, 아마르나예술은 현재성과 인간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왕국을 백성들에게 개방하고 왕의 가족들의 모습을 친근하게 그렸다.  

             

e. 보수파가 퇴진하고 새롭게 업무를 담당한 행정가들이 등장하여 아케나톤에 대하여 충성을 다짐했지만, 이들은 외교적 경험이 전무했다. 수리아 지역의 군주들이 힛타이트의 위협을 받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할 때 요청에 응하지 못했다. 이때 예루살렘에서도 힛타이트의 공격을 받고 단 50명이라도 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보내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제국의 북부 일부가 히타이트족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병든 아켄나톤은 사위 스멘크케레(Smenkhkere)를 섭정으로 임명했으나 스멘크케레는 테베스로 돌아갔고 아몬 신숭배를 다시 시작했다. 또 다른 사위였던 투트-안크-아톤(Tut-ankh-Aton)이 이름을 투트-안크-아몬(Tut-ankh-Aton)으로 바꾸고 텔-엘-아마르나에 있던 수도를 버리고 과거로 돌아갔다. 나이든 친척 아이가 잠시동안 다스린 후 군 지휘관이었던 홀-엠-헵(Hor-em-heb)(주전1340-1303)이 사위일가를 몰아내고 법률과 질서를 회복시켜 놓았다.  



12. 제19왕조는 람세스1세에 의하여 시작되어(주전1303-1302), 세티1세(주전1302-1290), 멜-네-프타((주전1224-1214) 등에 의하여 통치되었는데, 이 신들의 이름은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레신, 삼각주 북동 지방과 외국 지방의 세스신, 멤피스의 프타 신 등을 숭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람세스1세는 수도를 삼각주에 있는 라메세스(Rameses)로 옮기고, 테베스는 전통적, 계절적, 종교적 수도로 격하시켰다. 람세스1세는 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하여 수에즈 경계로부터 갈릴리의 산악지방까지 출정하여 반란을 일으킨 팔레스타인군주들을 진압했다. 힛타이트 족들을 전투를 벌여 오론테스강변에 있는 가데스를 장악하여 그 성읍에 승전비를 세우는 데 성공. 


  모세가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 내려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나왔던 때는 제19왕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람세스2세는 히타이트왕 무와탈리스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했고, 이후 1270년에 동맹 및 상호 협조 조약을 맺었다. 1257년에는 람세스2세가 힛타이트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평화를 정착시킴. 람세스2세는 위대한 건축가로서 선배들의 기념비를 자기가 세운 것처럼 꾸며 놓았다.  


람세스2세의 13번째 아들 메르-네-프타(주전1224-1214)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는 이미 늙어 있었다. 이후 연약한 왕들의 등장으로 갑자기 끝났다. 주전1201-1197 사이에 호리족속이 잠시 왕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제20왕조(주전1197-1090)는 애굽왕좌의 정화를 내건 람세스3세(주전1196-1164)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람세스3세의 사후 제국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제국영토는 애굽 본토 안으로 움츠려 들어가 버렸다. 람세스3세는 궁중음모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 당시 신전은 백성들의 10%와 농경지의 12%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13. 제20왕조가 몰락한 이후에 애굽은 지중해 동부에서 누리던 제국의 지배권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애굽이 제국을 유지하지 못했던 주된 이유는 국내적으로 계속하여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어 통일된 왕국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시대부터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애굽은 계속하여 연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 시기에 애굽이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지역에서 얼마나 천대받았는가 하는 것이 애굽이 아몬신의 배를 만들 재료를 구하기 위하여 그발에 파견한 대제사장 밀사였던 웬-아몬이 받았던 대우에 관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여행중에 팔레스타인의 도르항에서 지니고 있던 금과 은을 다 빼앗긴 웬-아몬은 후불로 재료를 가져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여 다시 애굽으로 와서 지불금을 들고 다시 찾아 갔던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21왕조(주전1090-940)는 타니스와 테베스 두 도시로 나뉘어져 있었음. 특히 타니스의 상업층의 왕가는 지중해 동부의 해상무역에 의존했다. 솔로몬을 만나기 위하여 왔던 애굽여왕은 이 왕가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솔로몬은 타니스의 군주들과 무역했다. 테베스의 통치자들은 매우 종교적이었다. 이들은 도굴당한 무덤을 회복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모든 결정을 신탁에 의존하여 진행했다. 이 왕조는 리비아로부터 용병을 끌여 들였는데, 이 용병들이 마침내 삼각주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향후 제21-24왕조는 매우 취약한 왕조였다. 제24왕조의 마지막 왕은 보코리스였다.  



14. 보코리스 통치기간중에 삼각주의 나파타에서 이디오피아출신의 왕들이 등장했다.

나파타는 적당한 강우, 대상무역통로, 목축, 철광 등으로 유명한 요충지. 이 지역에 함족속, 리비안족, 니그로, 애굽혈통이 혼합된 구스족이 세력을 얻었다.  


  주전720-715년 사이에 구스의 군주들 가운데 하나였던 피-안키(Pi-ankhi)가 권력을 장악하고 애굽인들과 전투를 벌여 중부의 도시들을 장악하고 멤피스를 탈환. 이로써 이디오피아 시대가 시작됨(715-663). 16명의 북쪽 군주들의 충성서약을 받음. 피안키는 아몬신 숭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을 통하여 애굽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테베스 안에서는 모두 경건하게 행동하도록 했고, 애굽의 통치자들이 항복해 왔을 때 아몬신 숭배에서 금지되어 있었던 물고기 먹는 규례를 중시해서 물고기를 먹은 통치자들의 항복은 받아 주지 않았다. 또한 왕조의 딸을 아몬신의 수녀로 바치기도 했고, 공주들에게는 16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신전에서 여제사장으로 봉사하게 하기도 했다.  


  이 시기동안 북동쪽의 제국들이 애굽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앗수르의 산헤립은 유다를 침공했을 때 유다가 애굽을 의지하는 것은 “부러진 갈대”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설득했다(사36:6). 산헤립은 주전700년에 남부 팔레스틴에 있는 엘드게에서 애굽군을 패퇴시켰으나, 688년에 애굽변방의 펠루지움에까지 진출했다가 재앙을 만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사37:36). 엣살하돈은 671년에 애굽을 침공하여 멤피스를 장악하고 티르하카왕을 남쪽으로 패주시켰다. 얼마 후 티르하카의 사촌 타누트-아몬(Tanut-Amon, 주전664-653)이 구스에서 나와 잠시 멤피스를 탈환하기도 했으나 앗수르바니팔은 곧 멤피스를 다시 장악했으며, 남쪽으로는 테베스까지 정복했다.  



15. 엣살하돈은 애굽의 괴뢰정부의 수반으로서 세이스(Sais)가의 삼메티쿠스(Psammetichu)1세(663-609)를 인정했는데, 삼메티쿠스는 앗수르의 간섭이 해이해진 틈을 타서 세력을 강화하여 애굽의 지배권을 주장. 삼메티쿠스의 시대를 제26왕조 또는 세이스시대라고 부른다(663-525). 이 시대는 르네상스시대로서 애굽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시도가 진행되었다. 고대무덤과 같은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고 벽화를 제작했고, 기념비들을 복원했으며,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외국인들이 애굽에 빈번히 드나들었는데, 특히 페니키아와 희랍상인들이 환영받았고, 용병들이 군대에서 복무했다. 삼메티쿠스는 국가확장을 위한 군사적 노력도 병행하여 주전600년 무렵 팔레스타인을 침략하여 아스돗을 포위하기도 했으나, 느고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패전한 이후로 이 시도도 중지되었다. 호프라왕이 유다를 선동하여 바벨론에 항거하게 했으나 오히려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골육상잔에 빠진 애굽은 페르샤에게 점령당했다.  



16. 주전525년에 애굽은 페르셔의 캄비세스(Cambyses)의 손에 떨어졌다.

다리우스(Darius)1세(522-486)는 합법적인 애굽왕이 되기 위하여 선정을 베풀려고 애썼다. 토착민 제사장들에게 친절했고, 새로운 신전을 건축했으며, 나일강과 수에즈 만 사이에 운하를 완성. 그러나 다리우스의 친화정책은 오히려 애굽인들의 반감을 사서, 다리우스가 죽자 곧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크세르크세스(Xerxes)1세에 의하여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향후 341년까지 애굽은 페르샤의 지배하에 있었다.  



17. 주전333년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길리기아의 이수스에서 다리우스3세를 패퇴시킨 후 애굽으로 향했다.

페르샤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애굽인들은 알렉산더를 환영했다. 애굽에 있던 페르샤 총독은 항복하고 알렉산더는 멤피스를 점령. 주전332년 알렉산더는 애굽의 신들을 찾아가 경의를 표한 후에 알렉산드리아라는 국제적인 대도시를 세움.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애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크고 세계적인 대도시로서 헬라문화와 동방문화를 접목시킨 문화의 중심지였다.  


  알렉산더 사후에 이복형제와 복중의 아들이 상속자였으나 이들은 원로 장군들의 손 안에 있었다. 주전306년 왕위계승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제국이 분열. 카산더는 마케도니아와 북서지방을 장악하고, 셀루쿠스는 수리아와 동쪽을 장악하고 애굽에는 프톨레미장군이 왕으로 등극했다. 이로써 애굽의 프톨레미왕조가 창건되었다(주전305-30).  


  프톨레미1세는 고대 애굽종교를 존중하여 신전을 건축했다. 프톨레미1세는 알렉산드리아에 뮤스 신전박물관을 세우고, 특별한 학자들을 상주시켜 사본연구와 비평을 하게 했고, 50만개의 두루마리를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모아 들였다. 과학과 천문학, 기하학이 발달했다.  


  프톨레미3세인 유엘게트(Euergetes)1세(주전246-221)는 셀루쿠스왕조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안디옥의 안티오쿠스3세가 아시아지역을 탈환했다. 이 전쟁에서 프톨레미왕조가 거둔 실익은 별로 없었고 내부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격심한 집안싸움에 휘말렸다. 약화된 프톨레미왕조가 안티오쿠스와의 싸움에서 밀리자 신흥세력인 로마에 지원을 호소한 이후에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약 한세기 동안 외교적인 천재성을 이용하여 애굽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인물이 클레오파트라(Cleopatra)였다. 시저와 안토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클레오파트라는 이들을 이용하여 애굽의 보전을 추구했으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연합군이 악티움 해전에서 패전한 이후 주전20년에 자결했고, 이후 애굽은 로마의 가혹한 통치를 받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제3부: 페르샤제국의 역사 


1. 페르샤제국은 고레스에게서 시작되었다. 고레스의 부친은 캄비세스, 모친은 메데왕국의 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전559년 고레스는 40세의 나이로 메데제국에 속국인 안산(Anshan)이라는 작은 나라를 상속받았다. 고레스가 안산국의 왕위에 올랐을 때 바베론에는 나보니두스(Nabonidus)가 왕위에 있었다. 나보니두스는 철학자이자 신비가로서 나라를 통치하는 일보다는 골동품수집과 신전재건에 몰두함으로써 바벨론제국을 약화시켰다.  


  주전550년에서 549년에 고레스는 메데와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킴. 나보니두스는 메데제국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바벨론을 넘볼 여력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안이한 마음으로 바벨론의 왕권을 장남 벨-살-우슬(벨사살)에게 이양하고 하란으로 갔다. 그런데 메데제국의 반란사태가 예상치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구스(Harpagus)장군에게 군지휘를 맡겨 고레스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하르파구스가 고레스에게 투항해 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아스티아게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으나 안산의 수도 파르사(Parsa)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아스티아게스의 군대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왕권을 고레스에게 넘겨 버렸다. 메데와 왕궉을 인계받은 고레스는 대다수의 메데관리들을 유임시키는 관대한 정책을 실시하여 메데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2. 고레스는 소아시아에 있는 리디아왕국에 손을 뻗쳤다.

리디아는 토양이 비옥하고 금을 비롯한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였다. 고레스가 등장할 당시 리디아는 크로에수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크로에수스는 고레스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바벨론 및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대응했다. 크로에수스는 절친한 친구였던 에우리바토스(Eurybatos)에게 펠로폰네수스에서 용병을 모집해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에우리바토스는 크로에수스를 배반하고 고레스에게 투항해 버렸다. 

 

  할리스강을 건너 고레스군과 대면한 크로에수스는 갑바도기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에 고무된 크로에수스는 페르샤의 주권을 인정하면 리디아의 왕권과 왕국을 인정해 주겠다는 고레스의 요청을 거부했다. 고레스는 즉각 공격을 개시했다. 크로에수스는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고레스는 페르샤군의 전렬에 낙타를 배치하여 낙타를 본 일이 없는 말들이 도망치도록 만드는 작전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바벨론에 구원요청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고, 스파르타가 함대를 진수시키기도 전에 리디아의 수도 사데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리디아는 페르샤제국의 사데관구가 되었다.  



3. 고레스의 다음 정복대상은 바벨론이었다.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의 통치 하에서 바벨론은 독직과 악정이 반복되면서 거의 기아상태로 전락했다. 설상가상으로 느부갓네살 아래에서 유능한 장군으로서 엘람(구티움)의 행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구바루(Gubaru)가 고레스에게 투항하여 바벨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나보니두스는 애굽의 바로 아켓나톤처럼 통치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왕이었다. 나보니두스는 리디아의 크로에수스가 고레스와 대치하고 있을 당시 리디아에 원병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신전터발굴과 신상수집에만 열중해 있었다. 지방의 사당의 관리인들은 신상을 가져가는 나보니두의 행동에 대하여 사당이 빼앗기는 상실감을 느꼈고, 바벨론의 마르둑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마르둑의 제사장들이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린 일은 바벨론 멸망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주전539년10월 고레스는 오피스에서 첫 교전을 한 뒤에 10월11일 별다른 전투도 치르지 않고 시팔(Sippar)을 획득했다.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을 아들 벨사살에게 맡기고 도주했고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다. 구바루는 바비루쉬라는 이름으로 새로 편성된 행정구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바벨론 백성들로부터 해방자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입성한 고레스는 바벨론에 대해서도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고레스는 마르둑의 신년대축제를 완전히 시행함으로써 마르둑 제사장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고, 나보니두스가 모아들인 신상들을 모두 지방 사당에 돌려 주기로 결정했다. 또한 주민들을 고향으로 영구적으로 추방시키고 다른 주민들을 이주시켰던 앗수르의 정책과는 달리 고레스는 주민들을 추방하지 않았고 오히려 포로로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고레스의 관대한 정책은 인도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잘해 주면 오히려 페르샤의 정복정책에 협력할 것이라는 고도의 정치적인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전략으로 고레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에 필적하는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페니키아의 협력을 얻어냈다.  



4. 고레스의 포로민 귀환정책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적용되었다.

바벨론으로 잡혀 온 유대인 포로들 중에는 바벨론에서 성공하여 바벨론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니엘, 에스더서의 이야기나 페르샤왕의 술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혜미야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고레스는 유대의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허용하는 조서를 내렸다(스6:3-5). 약 오만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화할 기회를 맞이했다. 귀환포로들의 통솔은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나 성전재건작업은 “유다와 벤냐민의 대적들”(스4:1)의 방해공작 때문에 진척되지 않았다.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간 지역에는 앗수르의 정복전쟁에서 추방된 포로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대의 고지대에는 네게브인들, 헤브론 북방으로부터 유대남부지방에는 에돔사람과 이두매 사람, 에돔 북쪽에는 갈렙족속등이 뒤섞여서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사마리아인들이라고 호칭되었다. 이들은 자신들도 하나님을 믿으니까 성전재건작업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스4:2). 그러나 귀환한 유대인들은 이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요청을 거부했다(스4:3).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은 페르샤 왕실에게 뇌물을 주고 회유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방해했다(스4:5, 11-16). 이들의 작전이 성공하여 성전재건작업은 중단된 채 18년동안이나 진척되지 않았다.  



5. 고레스는 애굽정복은 아들 캄비세스에게 맡기고 동쪽 국경에서 일어난 유목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섰다.

이 전투에서 고레스는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고레스는 정복민들에게 아버지로 칭송받았고 그리스인들은 스승이지 입법자라고 불렀으며, 유대인들에게는 바벨론 유수를 종식시켜 주었다. 고레스는 페르샤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고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이스, 인디아의 문명을 종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6. 고레스 생전에 이미 아버지로부터 바빌론의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고레스의 장자 캄비세스는 고레스가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530-522). 고레스 사후에 전국적인 소요가 일어났는데, 캄비세스는 이 소요가 차남 바르디아(Bardiya)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보고 바르디아를 죽이고 이 사실을 비밀에 붙였으나 후에 사건의 주모자는 바르디아가 아니라 바르디아를 사칭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왕위계승문제가 매듭지어지자 캄비세스는 애굽원정에 나섬. 당시 애굽은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 들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들은 전성기 시절의 애굽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 예컨대 바로 호프라는 유대왕을 부추겨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으나 이 반란은 오히려 주전587년에 예루살렘 멸망의 계기가 되었다. 자국에서는 전사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아마시스 장군의 노련한 작전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그러나 아마시스와 호프라가 불화관계에 들어가자 전쟁이 일어났고 호프라는 죽고 말았다. 바로의 자리를 차지한 아마시스는 사모스(Samos)의 군주 폴리크라테스와 동맹을 맺었다.  


  캄비세스가 왕이 된지 4년만에 애굽정벌에 나섰을 때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가 캄비세스에게 투항하여 애굽의 방어군에 대한 비밀을 모두 폭로했다. 캄비세스는 55마일의 사막을 건너 아마시스의 아들 사메티쿠스3세 휘하의 펠루시움 성벽까지 접근했다. 그 사이에 아마시스는 병으로 죽었고, 펠루시움에서의 격렬한 전투 끝에 사메티쿠스와 그의 군대는 멤피스로 도주. 멤피스까지 진격한 캄비세스가 항복을 요구하자 사메티쿠스는 캄비세스의 사절을 살해. 캄비세스는 강력한 공격을 개시하여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사메티쿠스3세는 수사로 추방했다. 캄비세스는 애굽의 바로로 등극. 캄비세스는 자신이 태양신 레의 아들임을 발표. 


  캄비세스는 애굽의 서부인 암몬의 오아시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5만명의 대군을 파견. 그러나 이 원정대는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는데, 아마도 모래폭풍에 집어삼킴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캄비세스는 에디오피아 원정에도 나섰는데, 진군도중에 식량이 동이 나서 철수해야 했다. 이 사이에 본국에서는 가우마타(Gaumata)가 바르디야로 자처하고는 왕위를 찬탈.  


  간질병으로 고통을 당했던 캄비세스는 말년에 정신이상증세가 있었던 같고, 이 때문에 마음이 돌변하여 애굽의 종교에 대하여 보였던 호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애굽의 신 프타(Ptah)를 조롱하여 그 신상을 불태우라고 명령하고 멤피스에 있는 아피스라는 성우를 찔러 죽였다. 캄비세스는 다프네, 멤피스, 엘레판티네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본국으로 회군. 특히 엘렐판틴의 수비대에는 유대인 용병들도 있었다. 그러나 캄비세스는 본국에 이르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죽음은 마상에서 입은 부상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살일 가능성이 있다. 캄비세스는 죽었으나 그의 군대는 충성을 다했다. 군대는 가우마타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7. 캄비세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다리우스(주전522-486)였다.

가우마타가 왕위를 찬탈하자 페르샤의 일곱 귀족이 연합하여 다리우스의 지휘하에 가우마타를 제거. 일곱 귀족은 태양이 떴을 때 제일 처음으로 우는 말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으나, 다리우스의 마부가 다리우스의 말을 제일 먼저 울게 만들어 다리우스에게 왕위가 주어졌다. 일찍이 캄비세스 밑에서 원정경험을 쌓은 다리우스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두달만에 왕위를 굳혔다. 다리우스는 반역자들에 대하여 코와 귀와 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족쇄를 채워 왕실법정에 두는 잔인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반역에 대하여 경고했다.  


  다리우스는 거대한 규모의 베히스툰 비문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바그다드와 테헤란 사이에 있는 약대로에 세워진 이 비문은 한 개의 길이가 18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며, 고대 페르샤어, 바벨론어, 엘람어로 쓰여 있다. 이 비문은 설형문자 해독에 열쇠를 제공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다리우스 제2년에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하에 재개되었다. “유대와 벤냐민의 대적들”은 페르샤 총독 닷드내에게 유대인들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했다. 닷드내는 반역의 기미만 있으면 처벌하려고 현장을 방문하여 질문했다(스5:3).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고레스의 명령에 따라 진행된 것이므로 서적 곳간을 조사해 보라고 답변했다(스5:13-17). 조사를 진행한 다리우스는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고 그 조서의 유효성을 확인한 후에 성전재건을 막지 말고 오히려 왕의 재산 중에서 경비지원을 하도록 지시했다(스5:7,8).  


  다리우스 왕은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으나 일곱 귀족에 의하여 제약받기도 했다. 다른 여섯 귀족은 거대한 땅을 하사받았고, 왕비를 제공할 권리도 있었다. 왕이 왕가출신이 아닌 여자와 결혼하려 할 시에는 여섯 귀족의 딸들과만 결혼이 허락되었다. 중대사가 생기면 반드시 이 귀족들과 의논해야 했다.  


  법에 관한 문제는 일곱명의 재판장과 반드시 협의해야 했고, 왕 자신이 내린 명령을 왕 자신도 어길 수 없었다. 예를 들어서 다리우스의 신하들은 다니엘을 잡기 위하여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다리우스의 입으로 말하고 어인을 찍어서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로 만들었다(단6:8,14,15). 


  관할구역은 총독을 세워 통치하게 했는데, 총독은 민사행정만을 담당하고 군사행정은 군사장관을 따로 두고 왕께 직접 보고하게 함으로써 총독의 권한을 견제했다.  

  도로와 우편제도를 발달시킴. 도로를 따라 규칙적인 파발꾼들이 대기하도록 하는 우편로는 당시 모든 나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다리우스의 상비군은 놀랍게도 소규모였다. 기병 2000명으로 구성된 친위대, 귀족출신 보병2,000명, 메데와 페르샤에서 징병된 정예병 10,000명으로 구성. 유사시에는 메데나 페르샤의 귀족들로부터 보충병을 소집하는 것이 가능했다.  


  주전512년 다리우스는 스키토족(Scythians)을 공략하기로 결정. 스키토족은 러시아의 초원지대엣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여 흑해 북변과 다뉴브강에 근접한 서편과 남편에 정착. 이 지역에는 금광이 풍부. 금광을 차지하고자 함. 다리우스는 70만대군을 일으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다뉴브강까지 진군. 스키토족은 싸우지 않고 후퇴하면서 페르샤군을 내부로 끌어 들였다. 통상적으로 점령지에서 군비공급을 하는 것이 관례였던 페르샤군은 끌려 들어가는 과정에서 군비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추격을 포기하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보스포러스강을 다시 건너 트라키아를 정복함으로써 그리스와 국경을 맛대게 되었다. 그리스 본토를 제외한 소아시아지방이 모두 다리우스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리우스가 트라티아와 마케도니아를 얻은 사건은 오히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그리스의 후원을 받는 이오니아 동맹이 결성되어 페르샤군과 결전이 진행되었다. 전세는 이오니아동맹쪽이 불리했다. 이오니아 동맹의 배후에 그리스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페르샤는 그리스 본토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다. 첫 번째 시도는 함대 6백척을 거느리고 소아시아에서 출전했으나, 아토스 산에서 불어오는 풍랑 때문에 함선 절반과 20,000명의 군사를 잃고 후퇴해야만 했다. 두 번째 시도는 메데출신 제독인 다티스제독이 에레트리아를 포위공격하여 신전을 불태우고 주민을 수사에 노예로 팔아 넘겼다. 이 소식은 오히려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을 자극하여 더 공고하게 연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리우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과 접전을 벌여 대패했다. 마라톤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애굽은 노골적으로 다리우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애굽의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다리우스는 사망했다. 다리우스가 건축한 페르세폴리스의 왕궁은 위대한 고대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다.  



8. 성경에 아하수에로로 알려진 크세르크세스(Xerxes)가 35세의 나이로 다리우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주전486-465). 크세르크세스는 애굽의 반란을 진압한 뒤에 아우 아케메네스(Achemenes)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바벨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조피로스를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살해당했고, 그 후임으로 메가비소스(Megabysos)가 임명되었다. 화가 난 크세르크세스는 바벨론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신전을 파괴했다. 유명한 에사길라 신전이 부서지고 벨-마르둑 신의 황금상은 녹아 버렸다. 이런 잔인한 정복을 통해 영원한 바벨론제국이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종식시켰다.  


  크세르크세스는 3년간의 준비를 거쳐서 그리스정벌을 다시 시작했다. 46개 속국들로부터 병력을 모으고, 29명의 페르샤 장군들, 1207척의 함대와 50개의 대형선박으로 구성된 대병력을 출정시켰다. 사데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주전480년 5-6월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르테미시움에서 폭풍우를 만난 페르샤해군은 전함 400척과 수많은 수송선을 잃었다. 폭풍우에 밀려 피난처를 찾던 페르샤 함선 15척은 그리스에 포로가 되었다. 지상전투에서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군대가 저항했지만 내부의 밀고자 때문에 패배했고 마침내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에 입성하여 아크로폴리스 위에 있는 신전들을 불태웠다. 크세르크세스는 전쟁을 위대한 승리로 끝내기 위하여 살라미스에서 그리스해군과 마지막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리스해군은 페르샤 해군의 절반의 병력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페르샤군에 의하여 그리스의 도시들이 처참하게 불타고 파괴되는 광경을 목격한 그리스군은 사생결단을 하고 싸워서 페르샤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지상에는 페르샤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크세르크세스는 마르도이누스(Mardonius)에게 그리스원정의 임무를 위임했다. 마르도니우스는 몇차례에 걸친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전사했다. 페르샤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패전후 크세르크세스는 14년간 더 통치하다가 아르타바누스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아르타바누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셋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성경에는 에스라서4장6절에 고레스 때와 다리우스 때 성전건축을 방해했던 유대의 대적들이 크세르크세스에게도 유대인을 고발한 기록이 등장한다. 포로귀환시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페르샤 본토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운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정숙한 왕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은 에스더를 왕후로 간택. 왕의 총애를 받는 하만이 모르드개와 온 유대인을 멸하려고 했을 때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 간청하여 유대인을 구한 일이 이때 일어났다. 종교적으로는 조로아스타교도였던 크세르크세스는 허식에 빠져서 과시하기를 좋아했고 아첨하는 신하들의 발림말과 밀고에 민감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즉위한 지 20년만에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당했다.  



9. 크세르크세스를 뒤를 이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왕이 되었다(주전464-424). 형 히스타스페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애굽에서는 크삼메티쿠스의 아들 이나로스가 델타 지역 동부 애굽인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크세르크세스의 형인 아케메네스가 이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본국정부의 증원을 받아 이나로스와 대결. 일차 전투에서는 아케메네스가 우세했다. 페이니카 함대까지 동원하여 계속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이나로스는 그리스의 동맹군과 함께 밀리다가 프로소피티스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했지만 패배했다.  


 이 무렵 에스라가 유대인을 다시 유다로 귀환시켜 줄 것을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청원했다. 에스라는 유대인 1500명을 모아서 일곱달에 걸친 긴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 예루살렘에 귀환한 에스라가 가장 중점을 두었던 문제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잡혼문제였다. 에스라는 유대인들의 총회를 소집하여 이방인 아내와의 이혼을 요청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 보수문제였다. 유대의 대적들이 예루살렘 성 재건작업을 왕에 대한 반역음모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고발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재건사업을 중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스4:7-21). 유대의 대적들은 강제로 성전재건사업을 중단시켰다(스4:23). 이 조치가 느혜미야의 마음을 불붙게 함.  


  느혜미야는 수산의 왕궁에서 술맡은 관원장을 맡고 있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왕은 느혜미야에게 휴가를 주어서 성전보수작업을 하게 했다. 유대의 대적들이 집요하게 방해공작을 했으나 느혜미야는 마침내 성전보수작업을 끝냈다. 준공식을 잘 끝내고 느혜미야가 수산으로 돌아 온 이후에 옛날의 문제들이 다시 대두되었다. 유대의 대적들이 다시 방해했고, 레위인들에게는 댓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안식일에 대한 율법이 망각되었고, 잡혼이 다시 성행했다. 그 결과 자녀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어머니의 방언을 말했다(느13:23-24). 이 때문에 느혜미야는 재차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신앙과 생활의 개혁을 완수했다. 이 이야기와 함께 구약의 역사는 끝난다.  

  당시 애굽과 구브로는 여전히 페르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서방의 대부분은 그리스에게 빼앗겼다.  



10.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사후에 등장한 다리우스2세는 페르샤의 황금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수스전쟁을 통하여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군을 패퇴시켜 소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성공을 거두기는 했으나 국운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메데와 애굽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애굽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때에 독립을 선언했으나 페르샤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애굽은 스파르타와 배반한 페르샤 총독들과 함께 진군해 들어 왔으나 애굽의 바로 타크호스(Takhos)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철군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는 왕위를 계승하자 모든 형제자매들을 살해하고, 애굽반란에 동조했던 시돈을 불태웠으며, 애굽을 재차 정복하고 그리스와 일전을 별렀다. 아테네는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에 자극받아 페르샤와 동맹을 체결했는데, 마테도니아의 왕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이를 적대행위로 해석하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주전338).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는 환관인 바고아스(Bagoas)에게 살해당했다.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의 막내 아들 아르세스(Arses)를 꼭두각시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살려 주었다가 말을 듣지 않자 그도 살해했다. 바고아스는 다시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의 사촌을 왕으로 세워 조종을 시도했으나 그는 다리우스3세라는 이름을 취하고(주전336, 느12:22의 다리오와 동일인물) 바고아스를 독살해 버렸다. 같은 해 알렉산더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로부터 페르샤를 정벌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주전333년 다리우스3세는 잇수스(Is년)전투에서 대파당하고 2년 뒤에는 페르샤 중심부가 알렉산더에게 넘어갔다. 다리우스는 에크바타나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촌 벳수스(Besus)에게 살해당했다(주전330). 다리우스3세의 죽음과 함께 페르샤제국은 멸망당했다.   



11. 페르샤시대의 유대인의 사정은 사마리아인, 엘레판틴의 유대인, 회당에 대한 관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a. 사마리아인.

사마리아라는 말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와 아합이 사치스러운 왕궁을 지으면서 알려짐. 이때부터 수도의 이름이 전 왕국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주전722-21년에 사마리아성이 앗수르에게 함락당한 후에 많은 저명인사들이 앗수르의 여러 성으로 추방당했다. 그 대신 바벨론, 시리아, 엘람 등지의 이주민들이 사마리아에 와서 거주하기 시작(왕하17:24-29). 그 결과 주민이 혼합되고 새로운 정착자들이 이방신과 야훼를 동시에 경외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지 1세기 반 후에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벨론유수가 있은 후에 예루살렘 지역에 정부가 없어지자 주변의 이웃들이 유대땅을 차지하고 유대인들이 관여할 수 없는 새로운 생활 양식을 발전시켰다.  


  고레스의 조서에 따라서(주전536) 첫 번째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소유지가 위협받게 되리라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사마리아인들은 귀환자들의 성전재건사업에 동참하고자 했으나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의심한 귀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은 줄기차게 성전재건작업을 방해했으나 귀환 유대인들은 마침내 성전을 재건했다.  


  에스라와 느혜미야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잡혼 문제였다. 대제사장 요야다의 아들이 페르샤가 임명한 산발랏 총독의 딸과 결혼했다. 산발랏은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그리심에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므낫세라는 이름의 대제사장의 아들이 사마리아 여자와 결혼했을 때 이혼을 요구했으나 거절하자 느혜미야는 그를 대제사장 자리에서 축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은 원수가 되었다(요4:9). 

             

b. 엘레판틴의 유대인.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에서는 요셉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족장시대부터 접촉이 있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임금을 피해 애굽에 피난내려와 있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안에는 친애굽파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친애굽파에게 의존하지 말 것을 요청했는데, 말년에는 강제로 애굽에 끌려 내려갔던 것 같다. 캄비세스 때에 상당수의 유대인 용병들이 애굽에 들어갔고, 캄비세스 철군 후에는 엘레판틴 지역에 남겨진 수비대의 일원이 되었다.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야후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신앙의 순결성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들은 이숨베델, 헤렘베델, 아나트베델 등의 신도 같이 섬겼는데, 아나트는 풍요와 전쟁의 가나안 여신으로서 바알의 누이동생이자 아내였다. 이들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이었던 중앙성소개념을 유지할 수 없었다.  

           

c. 회당.

바벨론 유폐 이전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인들의 영적 생활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세날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자 유대인들에게는 새로운 예배방식이 요구되었다. 성전파괴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배역한 백성에 대한 징계로 해석되었고(단1:2), 하나님의 거룩성을 증거했다. 성전파괴와 더불어 제사도 끝났다. 그러나 기도와 성경연구는 국경이 필요없었다. 에스겔서에는 에스겔의 집에 모인 장로들의 모임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겔8:1;20:1-3), 이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게 되면서 주간 회당예배가 형성되었다. 회당(synagogue)은 집회 또는 집회를 위한 건물이라는 뜻을 갖는다. 회당예배는 바벨론, 페르샤 제국의 성읍들, 애굽과 소아시아, 그리스와 로마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행15:21). 열명만 모이면 회당을 조직할 수가 있었으며, 회당에서는 히브리어로 씌여진 성서를 아람어를 비롯한 실용언어로 해석해 주었다.  


  대도시에는 23명의 장로단으로 구성된 산헤드린(Sanhedrin) 곧 회당공동체의 관리회가 구성되었고 장로 가운데 한 명이 장을 맡았다. 산헤드린은 법정과 민사 및 종교행정의 역할을 담당했다. 산헤드린에서 매질, 출교,사형 등의 형벌이 선고될 수 있었다. 매질은 40에 하나 감한 매(고후11:24)였고, 이보다 가혹한 처벌은 출교였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형도 선고할 수 있었지만 로마시대에 와서는 사형집행은 로마 총독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특히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대산헤드린으로서 유대의 최고법정 역할을 담당했다. 대산헤드린은 대제사장에 의하여 주관되었고, 대산헤드린의 명령은 유대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인정되었다(행9:2).  


  회당의 예배 의식은 자유로웠다. 자격만 있으면 어떤 유대인이든지 예배를 집행할 수 있었다. 회당의 관원은 예배를 감독하고 건물을 관리보존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사환(눅4:20)은 성경을 낭독자에게 가져다 주고 낭독이 끝난 후에는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을 했다. 산헤드린의 대리로 범법자를 매로 치는 일과 어린아이를 매로 치는 일도 담당했다.  


  회당예배는 초기에는 기도와 성경 한 부분을 읽고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미쉬나(Mishna) 시대(주후2-3세기)에는 쉐마, 기도, 율법 낭독, 선지서 낭독, 감사기도, 성경교훈의 번역과 설명으로 구성되었다. 쉐마는 듣는다는 히브리어에서 유래. 신명기6장4-9절;11장13-21절, 민수기15장37-41절로 구성. 율법의 신성함과 중요성을 가르치고자 하는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의 열망이 반영되어 있다. 쉐마가 새겨진 경문과 옷술을 착요하도록 요구되었다. 쉐마를 읽기 전과 후에 감사기도. 쉐마의 시작말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구성되었는데, 예수님이 이 형식을 인용하셨다(막12:29).  


  2세기 초엽에 회당의 주된 기도는 18가지 감사기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기도문은 에스라시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후110년경에 랍비 하파콜리에 의하여 최종개정됨. 현재 존재하는 기도문은 예루살렘 함락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팔레스타인판과 바벨론판이 있다.  


  율법낭독은 율법으로부터 하나의 교훈을 채택하여 낭독하는 것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안식일과 절기와 월삭과 반절기에 율법을 낭독하는 것을 제도화하였고, 에스라는 월요일, 목요일, 안식일 오후에 하도록 했다.  


 선지서 낭독은 율법을 설명하거나 예증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다. 통역자가 선지서의 교훈을 아람어로 통역해 주었다.  

  예배 끝에는 제사장이 축복을 빌었고 모든 참석자들은 아멘으로 응답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없으면 기도로 대치.  


  회당의 구조를 보면, 율법 두루마리를 둔 궤가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중앙에는 높은 단 베마(bemah)가 자리했다. 나머지 자리는 나무 의자들이었다. 회당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정교한 벽화, 사자, 말, 염소, 새를 본뜬 다양한 모자이크가 도입되었다. 예수님과 바울이 모두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제4부: 헬레니즘 시대 


1. 페르샤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서로 반목시켜서 얻는 어부지리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 마케도니아의 필립은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묶어서 헬라동맹을 구성하고 페르샤에 대결했다. 그러나 필립은 주전336년에 모살당했다. 왕위는 곧 아들 알렉산더에게 계승되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직접 교육을 받았으며 원정길에도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지니고 갔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인으로 구성된 작은 군대와 역사가, 지리학자, 식물학자로 구성된 참모진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트로이를 점령함으로써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페르샤의 다리우스3세는 알렉산더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부하에게 알렉산더를 잡아 수산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라니쿠스강의 전투에서 페르샤군이 패배했다.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시들을 점령한 후에 잇수스의 길리기아 협문에서 다리우스3세와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페르샤군이 패배했다. 두로를 제외한 페니키아 전역의 성들이 알렉산더의 손에 들어갔다. 다리우스3세는 협상을 요청했으나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었던 알렉산더는 거부하고 공격을 계속했다. 7개월의 항전끝에 두로가 점령당하고 가자를 2개월만에 함락시키고 마침내 애굽도 함락시켰다. 애굽인들은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환영하고 합법적인 바로로 인정받았다. 알렉산더는 애굽통치는 애굽인들에게 맡기고 군대만 관리했다. 알렉산더는 애굽에 알렉산드리아라는 국제적인 대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켰다.  


  북방으로 회군한 알렉산더는 페르샤 본토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3세를 결정적으로 패퇴시키고 페르샤를 장악했다. 해방자로 환영받으면서 입성한 알렉산더는 마르둑 신의제사장들과 성의 귀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알렉산더는 황폐화된 마르둑신전을 복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수산을 접수한 알렉산더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던 페르세폴리스를 공격하여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삼았다. 주전330년에 다리우스는 죽고 알렉산더는 대왕(Basileus)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알렉산더는 동방정복을 계속하여 러시아지역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와 3년동안 접전을 벌인 후에 화해의 표시로 박트리아의 공주인 록사나와 결혼. 주전323년 알렉산더는 33세의 나이로 열병으로 사망했다.   


   

2.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에 록사나와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가 자리기도 전에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7년간의 권력다툼 끝에 주전315년 4명이 권력을 나누어 갖기에 이르렀다.  

             

a. 안티고누스는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까지 

             

b. 카산데르는 마케도니아 

             

c. 프톨레미 라기는 애굽과 남시리아. 프톨레미의 총사령관은 셀류쿠스.  

             

d. 리시마쿠스는 트라키아.  

유대인들은 애굽정부에 조공을 바쳤지만 지방업무는 대제사장이 관장했다.


이 시대의 유대인 중에서 주목할만한 사람들로는,  

             

a. 대제사장 의인 시몬. 프톨레미1세가 파괴한 성전을 재건. 유대인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아 교사장(the chief teacher)으로 불리웠다. “세계는 세가지 기초 위에 서 있는데, 율법, 예배, 사랑이 그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시몬1세는 주전3세기 중엽에 살았고, 시몬2세는 주전200년경에 살았는데, 이 두 사람 중에 한명이 전설적인 시몬일 것. 

             

b. 토비아스1세와 대제사장 오니아스(Onias)가의 대결. 도비야는 친애굽적이었고 부유층을 대표. 느혜미야를 괴롭게 했던 암몬사람 도비야(느2:10;4:3,7;6:1-19)일 것. 토비아스가의 요세프는 팔레스타인의 세금거두는 직책에 지명받는데 성공. 한편 오니아스2세는 애굽의 요금납부를 거부하고 프톨레미에 대한 충성을 끊음으로써 반애굽정책을 취함.  


  안티고누스는 프톨레미를 시리아에서 축출하고 시리아를 장악했다. 그러자 셀류쿠스도 프톨레미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주전311년 셀류쿠스는 바벨론지방을 정복하고 셀류쿠스 왕조를 열었다.  


  주전301년에 리시마쿠스, 셀류쿠스, 카산데르는 연합하여 안티고누스를 프리기아에 있는 입수스에서 만나 제압했고 안티고누스는 전사했다. 이때 프톨레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방관했다. 코엘레-시리아지방은 원래 프톨레미에게 주도록 되어 있었지만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프톨레미가 선수를 쳐서 이 땅을 차지해 버렸다. 안티고누스의 아들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데스는 페니키아 연안을 차지하고 셀류쿠스는 북시리아를 소유하고 안디옥에 수도를 건설. 데메르리우스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프톨레미가 페니키아를 가로챘다.  


  프톨레미 라기의 왕위는 주전283년에 아들 프톨레미 필라델푸스에게 계승되었고 셀류쿠스는 주전281년에 아들 안티오쿠스1세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이렇게 해서 애굽의 프톨레미왕조, 시리아의 셀류키드 왕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왕조가 제국을 분할하는구도가 확립되었다. 시리아를 놓고 프톨레미왕가와 셀류키드 왕가 사이에 벌어진 계속된 전쟁은 어느 쪽에도 시리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지 못했고, 북시리아는 프톨레미의 치하에, 그리고 남시리아는 셀류키드의 치하에 머물러 있었다. 프톨레미의 왕가는 프톨레미2세인 필라델푸스가 247년 죽자 프톨레미3세에게 계승되었다가 주전221년에 프톨레미4세인 필로파테르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셀류큐스 왕가는 안티오쿠스1세에 이어 주전 261년 안티오쿠스2세, 주전 246년 셀류쿠스2세, 주전226년에 즉위한 셀류쿠스3세는 아비판에게 독살되고 그 뒤를 이어 안티오쿠스3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3. 안티오쿠스3세는 주전223년에 18세의 나이로 시리아왕위에 올랐다.

안티오쿠스3세가 즉위한 후에 시리아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애굽군대와 반복되는 접전을 벌인 끝에 주전198년 애굽의 스코파스 장군에게 파니온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안티오쿠스3세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 패전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안티오쿠스 왕실로 피신해 들어 왔다. 한니발은 안티오쿠스를 충동질하여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는데, 이 조치를 로마는 도전으로 받아 들이고 안티오쿠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지휘를 받은 로마군은 안티오쿠스를 밀어 붙여 소아시아의 사데, 서머나 마그네시아 등지에서 안티오쿠스3세를 패배시키고 안티오쿠스3세의 아우인 안티오쿠스 아페파네스를 로마로 볼모로 잡아갔다.  



4. 로마에서 볼모로 지내는 동안 로마의 매력에 빠져 친로마파가 된 안티오쿠스4세 곧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영화로운 자)는 유대인들로부터 에피마네스(미친 놈)이라는 풍자어법으로 불리웠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초기에 예루살렘은 의인 시몬의 자손인 대제사장 오니아스3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친그리스파 유대인들은 오니아스를 대적하고 야손을 지지했는데, 야손은 안티오쿠스에게 더 많은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대제사장으로 지명받는데 성공했다. 야손은 헬라파 유대인들을 충동하여 예루살렘에 연무장을 세우고 거기에서 그리스의 관습을 따라서 나체로 운동하게 했다. 이런 조치들은 정통 유대인의 제도를 옹호하고자 했던 유대인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의 반감을 샀다. 안티오쿠스는 유대 정통파를 분열정치세력으로 간주해 버렸다.  


  야손과 그의 조력자인 메네라우스(Menelaus)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레위지파가 아닌 벤냐민 지파인 메네라우스는 제사장직을 감당할 권한이 없었지만 야손보다 더 많은 조공을 안티오쿠스에게 바침으로써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메네라우스가 대제사장이 된 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애굽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틈을 타서 야손이 예루살렘을 습격했다. 메네라우스는 야손을 격퇴했지만 유대교가 여전히 자신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메네라우스는 애굽전쟁에서 돌아오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예루살렘 성전 보화의 처분권을 위탁함으로써 환심을 사려고 했다.  


  로마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애굽통치를 맡기는 것은 그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을 주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애굽에서 승리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철군을 명령했다. 좌절을 느끼며 철군한 안티오쿠스는 애굽을 잃은 이상 팔레스타인이라도 더 확고하게 지배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아폴로니우스를 보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게 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안식일에 공격하여 메네라우스의 대적자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아크라(Akra)라는 요새를 건설하여 대 부대를 주둔시켰다. 이스라엘에는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나라를 헬레니즘화시키려는 시도들이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쥬피터와 동일시했고, 이방신상을 성전 제단에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것이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었다. 그리스의 군인들과 이들의 정부(情婦)들이 성전 뜰에서 음탕한 이교도의 제사를 드렸으며, 돼지가 제단에 드려졌다. 술의신 바카스신숭배의식이 거행되고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사형시켰다. 히브리 성경 사본들을 파괴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노서기관 엘르아살은 돼지고기 먹는 것을 거부하다 채찍에 맞아 죽었으며, 어떤 어머니와 일곱 아들은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죄로 학살당했다. 할례를 행한 두 어머니는 쫓겨 다니다가 성벽 위에 곤두박질하여 떨어지기도 했다.  



5. 유대인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알렉산더는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도자였다.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뭄, 두라 등과 같은 도시들을 통하여 헬레니즘을 퍼뜨렸다. 아름다운 공회당, 신체수련을 위한 연무장, 노천극장 등이 세워졌다. 헬레니즘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유혹했다. 바벨론 유수 이전의 유대인들이 가나안 인들의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다면, 바벨론 유수 이후의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의 유혹에 노출되었다.  


  바벨론 유수 이후에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정착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 안디옥, 다마스커스, 소아시아에서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충성스러웠다.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들은 성전세를 냈고, 가능하면 성지 순례를 했다. 그러면서도 이웃의 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앙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양식에 동화되고자 하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교와 헬레니즘 사이의 종합이 발전하였다.  

             

a. 70인역.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가장 큰 업적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잊어 버린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번역했다. 주전250년경 토라번역을 필두로 하여 나머지 정경들과 외경도 번역되었다. 오리겐 시대에 이르러서 이 역본은 70인역(Septuagint)라고 명명되었다. 주전100년경에 기록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는 문헌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사서인 팔레룸의 데메트리우스의 제안에 따라서 프톨레미 필라델푸스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사절을 보내어 12지파에서 6명씩 선출하여 번역사로 보내도록 부탁했고 이 부탁에 따라서 72장로들이 알렉산드리아로 파송되어 번역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70인역의 어투는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70인역은 비유대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해 주었고, 특히 사도 바울과 그 외의 사도들의 사역을 수월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신약성경이 인용하는 대부분은 70인역세ㅓ 나온 것이다.  

             

b. 알렉산드리아 비유법.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그리스사상과 조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저속하고 불충분한 것일 때는 숨어 있는 속 뜻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속 뜻을 찾는 방법으로서 그리스의 비유법을 받아 들였다.  


  그리스에서는 호머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과 같은 고전들이 세련된 그리스인들이 받아 들일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들은 종교적인 고전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고전들을 보존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야기들을 역사적인 이야기들로 받아 들일 수는 없지만 정신적 가치의 투쟁을 예증하는 것으로는 받아 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제우스는 로고스로, 헤르메스는 이성을 예증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주전160년경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는 그리스철학자들이 모세의 율법에서 실제로 많은 사상을 빌려 왔다고 가르침으로써 비유적 해석의 기치를 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주전20년경부터 주후50년경까지 살았던 필로(Philo)는 그리스사상에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으나 모세를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간주했다. 필로는 진리가 언제나 비유적인 해석을 사용하여 발견된다고 생각했다. 비유적인 해석은 완전히 주관적인 해석이었다.  

             

a.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것일 경우나 이성에 거스리는 것일 경우에는 모두 비유적으로 해석되었다.  

             

b. 하나님에 관한 언급 중에서 인성을 의미하는 것은 모두 비유적으로 해석되었다.                

             

c. 아브라함의 팔레스타인 여행은 한 스토아철학자가 감각적인 이해(갈대아)를 떠나서 곤경 또는 감각들(하란)에서 잠시 머무른 것으로 해석되었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결혼은 철학자와 추상적인 지혜의 결혼으로 생각되었다.  

             

d. 반복귀절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e. 70인역에 사용된 단어는 그리스어에 들어있는 모든 의미에 의하여 해석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비유해석법과는 대조적으로 모프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와 같은 저술가를 포함한 안디옥의 시리아 학파는 문자적인 성경해석을 주장하였다.  

  팔레스타인지역에서도 강력한 헬레니즘 지지당이 등장했지만, 헬레니즘을 유대교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인 반대당도 등장했다.

  특히 하시딤은 죽음으로써 조상의 신앙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6.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탄압은 하시딤의 거센 저항의 기폭제가 되었다.

모딘(Modin)이라는 이름없는 작은 마을에 안티오쿠스의 사자들이 이방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 제단 앞에 나와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 마을의 노 제사장인 마티디아스에게 제일 먼저 단에 나와 본을 보이라고 요구했으나 마티디아스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일부 겁많은 유대인들이 제단에 나아가자 마티디아스는 격분하여 배교자들과 안티오쿠스의 사절을 죽여 버렸다. 마티디아스는 다섯명의 아들과 함께 이방신 제단을 파괴하고 산으로 도망하여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했다. 일부 유대인들에 이에 합세했다. 이들은 게릴라 전술로써 마을을 습격하여 왕의 관리들과 헬라니즘에 물든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반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티디아스는 사망하고 마카비라고 불리우는 셋째 아들 유다가 마티디아스의 지명에 따라 후계자로 선정되었다. 마카비 휘하의 유대인들은 게릴라전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마카비는 자신들을 소규모의 실랑이 정도로 간주하여 가볍게 대처한 시리아군을 연파했다. 특히 마카비는 안티오쿠스가 파견한 리시아스 장군 휘하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거대한 전리품을 차지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확보한 마카비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가 메네라우스 일당을 쫓아내고 아크라라는 보루를 제외하고는 성전 안의 모든 이교도의 흔적을 제거했다.  


  리시아스는 다시 군대를 규합하여 예루살렘 근처에서 마카비군을 패퇴시켰고, 마카비군대를 굶어 죽일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리시아스는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이 위험하다는 전갈을 받고 북행하려는 목적으로 유대인들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리시아스는 내정간섭을 중지하고 유대교의 의식을 억압하는 법의 폐기를 약속하고 메네라우스의 직책을 박탈할 것과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할 것을 약속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 회의는 투표를 통하여 리시아스의 강화조약을 받아 들였고, 마카비의 추종자들은 우려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났다. 마카비의 우려대로 알키무스는 대제사장이 되자 수많은 하시딤을 체포하여 처벌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유다스에게 돌아와서 독립전쟁을 재개했다. 알키무스가 시리아에 원조를 요청했을 때 많은 병력이 파견되었고, 헬레니즘에 물든 많은 유대인들을 설득해 놓은 상태였다. 800명밖에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린 마카비는 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마카비 유다스는 전사했고, 이로써 제1차 마카비 전쟁은 끝이 났다.  



7. 마카비 유다스의 형제들인 시몬, 요나단, 요하난은 수백명의 마카비 군사를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도피했다. 이들의 지도자는 요나단이 맡았다. 알렉산더 발라스가 시리아 왕위를 요구하자 발라스와 데메트리우스2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요나단의 군대가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다. 양 진영은 모두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요나단은 요청을 금방 들어주지 않고 끌다가 발라스를 지지하고 스파르타 및 로마와 조약을 체결했다. 요나단은 대제사장과 유다의 통치자가 되었고 시몬은 팔레스타인 해안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요나단이 시리아 장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시몬이 뒤를 이어 통치했다. 시리아는 다시 둘로 분열되어 한 파는 데메트리우스2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다른 한 파는 안티오쿠스6세를 지원한 트리폰의 일파였다. 마침내 트리폰이 직접 왕권을 장악함으로써 갈등상태는 해결되었다. 시몬은 트리폰을 인정하지 않고 데메트리우스2세를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원래 합법적인 대제사장 가문은 오니아스가였는데, 오니아스가는 투쟁 기간동안 애굽으로 내려가 제사장직을 주장할 권리를 상실했다. 이스라엘 지도자 회의는 시몬의 지혜로운 통치를 인정했다. 이 결정으로 하스몬왕조가 탄생했다. 주전134년에 시몬과 두 아들이 사위에게 살해당하자 셋째 아들인 요한 히르카누스가 간신히 피신하여 유대국의 세습왕으로서 아버지를 계승했다. 마티디아스의 아들들이 사망한 것과 더불어 마카비투쟁의 영웅시대는 끝이 났다.  



8. 시몬의 사위들의 살육을 간신히 모면한 시몬의 셋째 아들 히르카누스는 시리아에 충성을 서약하고 왕을 인허받았다(주전134-104). 히르카누스 정부의 등장과 함께 헬라주의자들은 불신임을 받고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헬라주의자들의 이념은 사두개파라는 형태로 전수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하시딤의 이념은 바리새파에게 전수되었다. 이 시기부터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 대한 언명이 등장한다.  


  히르카누스는 영토확장정책을 시작했다. 시리아에게 양도했던 팔레스타인 해안도시들을 재정복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무역로가 있던 에돔 곧 이두메도 정복했다. 이두메인들에게는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유대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히르카누스의 영토확장정책은 새로운 상업기회들이 생겨서 부를 증대할 기회를 맞이한 부자와 귀족들에게는 환경받은 반면에, 일반 대중들은 영토가 확장되는 것과 더불어  세속주의가 팽배하여 대제사장직책까지도 돈을 받고 파는 성직매매가 나타나는 것과 전쟁 때문에 인명이 희생되는 것 때문에 반대했다. 히르카누스는 하시딤출신이었기 때문에 서기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반면에 그의 자녀들은 왕족이라는 교만함과 히브리사상 보다는 헬라사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경멸했다.  


  히르카누스가 죽자 곧 왕권투쟁이 일어났다. 유다라는 히브리 이름 보다는 아리스토불루스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더 좋아했던 히르카누스의 장자는 왕권투쟁에서 승리한 후에 세 명의 형제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세 명 중 두 명은 감옥에서 굶어 죽고, 투옥되지 않았던 다른 한 명은 왕궁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는 음주, 질병, 반란에 대한 공포 등으로 왕이 된지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주전103).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감옥안에서 살아남은 형제인 요나단, 그리스 이름으로는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이 되었다(주전102-76).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영토확장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팔레스타인 본토 전체와 애굽의 국경, 베뢰아, 아스글론, 팔레스타인 해안평야까지 점령했다.  


  히르카누스때부터 시작된 하스몬왕가출신 통치자들과 바리새인들과의 불화는 얀네우스때 절정에 달했다. 얀네우스는 외국의 보병들을 이용하여 바리새인들을 복종시켰다. 얀네우스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멸감을 표시하기 위하여 땅에 붓도록 되어 있던 헌주를 자기 발에다 부었다. 얀네우스는 이 광경을 보고 거칠게 항의하는 바리새인들 수백명을 학살했다. 이로 인하여 내란이 발생. 바리새인들은 시리아 왕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상한 동맹이 맺어진 것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바리새파의 선조들이 핫시딤의 원수였었다. 이 점이 불안했던 바리새인들은 신중히 생각한 끝에 생각을 바꾸어서 오히려 얀네우스편에 서서 시리아군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러나 얀네우스는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패배자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마침내 얀네우스는 바리새파 중에서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을 찾아내서 무섭게 징계했고, 사두개인들과 함께 연회를 베푸는 사이에 800명의 바리새인들을 찾아내어 연회석상에서 십자가에 매달았다. 이후부터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이에서의 타협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해사본은 얀네우스를 사악한 제사장으로 호칭했다. 얀네우스는 임종직전에 회개한 것으로 전해진다.   


  얀네우스의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아리스토불루스와 결혼했다가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재혼했다. 알렉산드라는 70세의 나이로 여왕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알렉산드라의 임종이 다가오자 바리새인들은 장자인 히르카누스2세를 지지했고, 사두개인들은 차남인 아리스토불루스2세를 지지했다. 알렉산드라가 죽자 알렉산드라의 두 아들을 둘러싸고 다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장자인 히르카누스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적 수완도 없고 왕위에 관심도 없었던 히르카누스2세는 아리스토불루스2세에게 왕위를 양도해 버렸다. 이때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이 우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깨질 위험에 처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히르카누스2세는 이두메의 통치자 안티파터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레타스가 이끄는 나바테아의 아랍군의 도움을 빌려서 왕위를 되찾으려고 했다. 마침내 아레타스와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장기전에 들어갔다.  



9. 한편 서방에서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로마는 주전146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의 지휘 하에 한니발 장군이 거느린 카르타고군과 벌인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마케도니아, 고린도, 아가야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중이었다. 주전133년에는 페르가뭄의 왕 앗타루스가 영토를 로마인들에게 양도했다. 로마의 장군 폼페이는 아리스토불루스2세와 히르카누스2세간에 벌어진 왕권다툼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아리스토불루스가 로마에 반역하기 위하여 꾸민 증거를 알아낸 폼페이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르카누스를 지원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이 전투에서 유대인들 12000명이 학살되었다.  


  폼페이는 장교들을 데리고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이 행위가 유대인들을 분개시켰다. 그러나 폼페이는 성전기물에는 손대지 않았고 성전제사도 허용했다. 아리스토불루스가 패배하면서 유다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히르카누스는 폼페이에게 충성한 댓가로 갈릴리와 이두메, 베뢰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대제사장직도 승인받았다. 일년에 한번 로마에 조공을 바쳤다. 아리스토불루스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 갔다.  


   

10. 아리스토불루스2세와 히르카누스2세가 분쟁하고 있는 동안 이두메의 통치자인 안티파터(안티파스)는 히르카누스와의 우정과 아리스토불루스에 두려움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와 대립했다. 안티파터는 히르카누의 배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과 반목관계에 있어 온 에돔인이었던 안티파터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주전40년 페르샤 동쪽 영토를 차지하고 로마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파르티아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3년간 지배했다. 파르티아인들은 이 사이에 아리스토불루스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유대의 왕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로마는 파르티아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축출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댓가로 형식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해준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을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세웠다(주전37-주후4). 경쟁적인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헤롯은 예수께서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헤롯은 파르티아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후에 즉시 바벨론 출신의 하나니엘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으며, 하스몬가의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마리암네의 어머니는 히르카누스2세의 손자인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기로 결심하고 계략을 짰다. 마리암네의 어머니는 애굽의 클레오파트라에게 연락하여 클레오파트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안토니에게 연락하여 헤롯을 압박하여 하나니엘을 해임시키고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리스토불루스는 헤롯의 계략에 의하여 연못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마리암네의 어머니는 다시 클레오파트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안토니는 헤롯을 소환했다.


헤롯은 숙부뻘 되는 요셉에게 국정을 맡기고 떠나면서 만일 자신이 안토니에게 사형선고를 받으면 즉시 마리암네를 죽이고 왕권을 지킬 것을 은밀히 부탁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암네에게 헤롯의 부탁을 일러 바쳤고 마리암네의 어머니는 헤롯이 죽으면 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헤롯은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안토니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얻어 가지고 살아서 귀국했다. 헤롯은 마리암네 살해계획이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요셉과 마리암네 사이에 부정한 관계가 있었다고 결론내리고는 요셉을 죽여 버렸다.  


  주전32년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안토니가 패배하고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통치자로 등장하자 헤롯에게는 다시 위기가 찾아 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이 안토니우스에게 보여준 우정과 충성을 듣고 같은 충성을 자기에게도 쏟아 줄 것을 확약받고 헤롯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헤롯의 왕권은 더욱 공고해졌다.  


  헤롯은 정치에서는 성공했지만 가정문제가 다시 괴롭혔다. 헤롯은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위하여 로즈(Rhodes)로 가면서 시종 소헤무스에게 국정위탁을 하면서 역시 자신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사형선고를 받으면 마리암네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떠났다. 그런데 이 지시가 다시 마리암네의 귀에 들어갔다. 헤롯이 다시 살아서 돌아왔을 때 이 지시가 폭로된 것을 알아차린 헤롯은 소헤무스를 처형하고, 마리암네와 그녀의 어머니를 한꺼번에 처형해 버렸다.  


  유대인들에게는 헤롯에 대한 적대감정이 강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세금을 1/3 감면해 줌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적대감을 줄일 수 없었다. 헤롯은 건축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사마리아를 아구스도에게 바치는 세바스테로 바꾸었고, 사마리아는 방파제와 10개의 망대를 갖춘 세바츠테로 개조했으며, 욥바의 북동쪽에는 안디바드리, 북쪽 요단 계속에는 파사엘리스, 아그리페이온, 헤로데이온, 알렉산드레이온, 히르카니아, 마카에루스, 마사다 요새 등을 건축했다.  


  특히 통치18년째 되는 해(주전20-19)에 성전재건사업을 시작하여 성전 본 건물을 일년 반 만에 완성하여 매일 끊임없이 제사를 드렸으며, 성전 뜰은 완성하는데 8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성전은 전체구조가 계단 모양으로 되어 있었고, 낮은 뜰과 높은 뜰이 있었다. 바깥뜰은 이방인들과 불결한 자들, 여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은 성전의 경내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인들과 남자들을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전주변건물건축작업은 예수님의 사역 기간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 작업은 알비누스 총독 때에 완성되었으나(주후62-64), 불과 몇 년이 못되어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헤롯의 말년은 음모와 모반으로 점철되었다. 헤롯의 장자인 안티파터는 왕위의 경쟁자인 다른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반역의 조작된 증거서류를 근거로 교살시켰다. 그러나 안티파터 자신도 헤롯을 독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 사형선고를 받았다. 헤롯이 병들어 죽음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바리새인들은 헤롯이 세워 놓은 성전 대문 위의 황금독수리를 부숴뜨렸다. 그러자 헤롯은 이 유대 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 유대 지도자들 중에는 유다와 마티아스라는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전4년4월1일에 헤롯은 장암과 수종 때문에 죽었다. 헤롯은 심술은 아기예수에게까지 미쳐서 아기 예수가 왕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아이들을 두 살 밑으로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11. 근동의 생활과 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헬레니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두가지로 나타났다.

한편은 헬레니즘에 매력을 느끼고 헬레니즘과 히브리사상을 종합하고자 시도한 반면, 다른 무리들은 헬레니즘을 율법의 규정과 반대되는 생활 방식을 전하는 사상으로 보고 배척하는 하시딤(경건한 자들)운동을 시작했다. 이런 반응을 중심으로 유대인들 사이에 몇 개의 종파들이 형성되었다.  

             

a.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시절(주전134-104)에 처음으로 이름이 언급된다.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구별되었다는 말은 헬레니즘과의 영향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의식과 청결에 관한 율법을 세심하게 준수했다. 의식이 불결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죄인”으로부터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어느 것 하나도 사지 않았다. 바리새인은 자기 집에서는 죄인을 대접할 수 있었어도 죄인의 집에서 먹어서는 안되었다.  

  사두개인들이 하스몬 왕조가 지배하는 동안 성전 제사의 주도권을 잡은 반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예배와 교육의 중심지로 삼았다.  


  주전 1세기 동안 두명의 바리새파 교사가 등장하여 두 학파를 구성했다. 하나는 힐렐이다. 힐렐은 온건한 율법해석을 지향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했고, 로마의 관례를 유대교와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 다른 하나는 샴마이다. 샴마이는 엄격한 율법해석가였고, 로마인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샴마이학파의 입장은 젤롯당으로 표현되었다. 탈무드 안에는 두 학파 사이의 논쟁에 관한 기록이 316가지나 등장한다. 

 

  사두개인들은 토라만을 권위있는 경전으로 받아 들였고, 중세시대의 종파인 카라이트(Karaite)파도 성경 그 자체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율법에 대한 주석으로 뿐만 아니라 성경 자체의 수준으로 높였다. 심지어는 구전율법은 기록된 율법인 토라와 함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생활과는 거리가 먼 헌법 (기록된 토라) 보다는 보통 사람의 생활에 보다 밀접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전법이 더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라도 자기자신을 불결함으로부터 구분하였던 사람들의 경건에 대한 열심이 율법의 가르침을 준수한다는 종교적인 교만으로 변질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야생식물의 십일조까지 바칠 정도로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려고 애썼지만(마23:2;눅11:42), 동시에 빈궁한 자들을 압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마23:14).  

             

b.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귀족들과 대제사장들로 구성된 종파로서, 정치권력자들과 교분을 맺어 부요하고 영향력있는 지위를 획득했다. 성전의 관리와 제사가 이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책임이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대중들로부터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의 구전법을 인정하지 않았고, 토라만을 받아 들였다. 부활이나 여이나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막12:18; 눅20:27; 행23:8). 바리새인들이 개종자들을 환영하고 찾아 다닌 반면에(마23:15), 사두개파는 폐쇄적이었다. 대제사장과 예루살렘 귀족일가 외에는 아무도 사두개인이 될 수 없었다. 주후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당하자 사두개파는 종언을 고했다.  

             

c. 엣세네파.

엣세네파는 바리새파와 같이 핫시딤의 신앙고백을 계승했으나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구조 안에서 엄격한 정통을 유지하고자 했다면 엣세네파는 유대교의 구조를 거부하고 따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했다. 이들은 주로 쿰란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에서 엄격하고 간소한 수도생활을 했다. 이들은 성경과 기타 종교서적들을 연구하고 복사했으며, 자급하기 위하여 근육노동을 했다. 재산은 공유되었고 감독자 아래에서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다. 숫자는 4천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엣세네파는 불멸은 믿었지만 육체부활교리는 믿지 않았다. 이같은 입장은 엣세네파에 물질은 악하다는 헬레니즘사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육체는 물질이고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구원은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육체부활은 바람직한 것이 못되었다. 엣세네파는 결혼을 단념시키거나 금지했지만 바리새파는 남작 18세가 되면 모두 아내를 취하도록 했다. 바리새파는 비정통인 사두개인들의 지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성전예배에 참석한 반면에, 엣세네파는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참되고 순수한 이스라엘이라고 여기고 부패한 성전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엣세네파는 바리새파보다 율법을 더 엄격하게 준수했다. 예를 들어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 짐승을 끌어 올리는 일을 허용했으나, 엣세네파는 이 조치조차도 반대했다.  


  엣세네파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반대되는 것이었다. 엣세나파는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한다고 하여 반대했지만 예수는 주저하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마11:19;눅7:34).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셨지만 율법은 짐이 아니라 인간을 축복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곧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었다(마12:1-12; 막2:23-26; 눅6:6-11, 14:1-6). 물질은 악하다는 엣세네파의 사상과는 달리 예수는 악한 것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성전 안의 악폐를 비난하면서 그 때문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성전 예배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d. 사독파.

사독파는 1910년 솔로몬 쉐히터(Solomon Schechter)가 Fragments of a Zadokite Work 라는 연구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주전2세기초 영적인 기질을 가진 한 무리의 제사장들이 세속을 떠나 “사독의 아들들”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독이라는 이름을 취한 이유는 이들이 대제사장의 적통을 잇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다메섹으로 도망한 이유는 안티오쿠스 에파파네스 당시에 오니아스3세의 대제사장직을 해임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다메섹으로 이주하여 “별” 또는 “의의 교사”라고 알려진 어떤 인물의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 젤롯당(열심당).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이 에스키아스의 유다스의 지휘아래 모여서 하나의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로마에 세금내는 것을 거부했고, 가이사에 대한 충성을 인정하는 것을 죄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젤롯당은 많은 백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주후70년 예루살렘 멸망에 이어서 벌어진 마사다 전투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종언을 고했다.  


12. 헬레니즘 시대의 마지막 2세기와 기독교시대의 최초1세기동안 묵시라고 불리우는 문학 양식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발전했다.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드러남이라는 뜻이다.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계시를 드러낸 문헌이라는 뜻이다. 묵시문학의 형식들은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요엘, 스가랴, 요한계시록과 같은 문헌들에도 나타나 있으며, 에녹과 바룩, 12족장계약서, 에스라4서 등과 같은 위경(僞經, 가명으로 발간된 문헌들)에서도 발견된다.  


 묵시문학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가혹학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위로를 주는 멧세지를 담고 있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악인들에 대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멧세지를 오래된 권위를 가진 이름을 빌려서(에녹처럼) 비유적인 표현을 이용하여, 그리고 신비스러운 분위기 안에 감싸서 표현하였다. 국가는 바다에서 나온 용으로, 사람은 동물들로, 유대인은 양이나 가축으로, 유대인 지도자는 어린 양 또는 황소 등으로 표현했다.  


  묵시문학은 하늘의 비밀들을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계시하는 형식을 가진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하나님 자신으로 직접 계시를 받았다면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천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계시를 받은 것으로 주장한다. 선지자들은 현재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미래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고, 임박한 종말론을 제시했다.  


  묵시문학에서 오는 메시아개념이 주제로 살아났다. 묵시문학이 그린 완전한 왕자는 다윗가문에서 나와서 로마인들을 타도할 출중한 정치지도자를 의미했다. 이 왕자는 “기름부음 받은 자,” “의인,” “인자” 등으로 호명되었는데, 마지막 명칭은 다니엘서7장13절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묵시문학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묘사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이 나라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나라로 묘사되기도 하고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들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묘사하는데 대담한 묘사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땅이 너무나 비옥해서 포도나무 하나가 만개의 줄기를, 한 개의 줄기가 만개의 가지를, 한 개의 가지가 만개의 작은 가지를, 작은 가지 하나에 만개의 포도송이가, 포도송이 하나에 만개의 포도알이, 포도알 하나가 225갤론의 포도주를 생산해내는 곳으로 묘사된다. 묵시문학에는 페르샤의 천사론과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의 영향이 나타나 있으며, 헬레니즘과 애굽사상도 들어가 있다. 터무니없는 상징주의, 과장된 국수주의, 숫치계산 등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신념과 이 목적들을 실현할 다윗의 자손의 강림에 대한 확신이 깔려 있다.  

   


제5부: 로마와 헤롯왕가  


1. 헤롯대왕의 죽음부터 아그립바1세까지(B.C.4-A.D.41) 


a. 왕위의 계승.  


--  헤롯이 유다와 마티아스를 죽인 행동은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 로마에 의하여 헤롯의 후계자로 지명받은 아르켈라우스는 군대를 보내 진압을 시도했는데 실패하고 재차 새로운 군대를 보내어 유혈진압에 성공했다.  

  아르켈라우스가 왕위를 인준받기 위하여 로마로 떠났을 때 또 다시 소요가 일어났으나 시리아의 통치자 바루스에게 진압당했다. 그러나 반란의 시도는 계속되었고 규모도 점점 커져 갔다. 나중에는 헤롯의 군사들까지도 반란에 가담할 정도가 되었다. 유대밖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갈릴리에서는 에제키아스의 아들 유다에 의하여 일어났고, 베뢰아에서는 옛날 노예였던 시몬의 지휘하에 일어났다.  

  마침내 바루스는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스4세(B.C.9년-A.D.40년)가 보낸 원군을 포함한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란진압과정에서 이천명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런 소동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헤롯왕가의 대다수는 헤롯의 유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에 모여 있었다. 헤롯의 세 아들이 참여.  

  a. 아르켈라우스: 헤롯이 지명한 왕위계승자 

  b. 안티파스: 갈릴리와 베뢰아 

  c. 빌립 


-- 두 명의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  

  a. 한 유대인은 헤롯왕가 가운데 누구도 왕위를 계승해 주는 데 반대, 대제사장에게 정부를 맡겨줄 것을 요청. 

  b. 가다라, 히푸스, 가자의 헬라도시에서 온 사람은 이 도시들을 로마에 합병시켜 줄 것을 요구.  


--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헤롯의 유언장에 따라서 이렇게 조치했다.  

  a. 헬라 이름이 붙여진 세도시들은 시리아로 합병.  

  b. 아르켈라우스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차지.  

  c.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를 차지 

  d. 빌립은 아우라니타스, 트라고니타스, 이두레아를 차지.  

  e. 이들 중 누구도 왕으로 부르는 것을 금지시키고 아르켈라우스는 분봉왕, 나머지 두사람은 사분봉왕(tetrarch)이 됨.  


b. 유대와 사마리아 통치.  


아르켈라우스가 이들 중 그 잔인함에 있어서 아버지 헤롯을 가장 많이 닮음. 그러나 B.C.4-A.D.6년까지 통치.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온 사절단의 불만을 받아들여 아르켈라우스는 폐위시키고 Gaul 지방으로 유배. 아르켈라우스의 영토는 로마에 귀속되고 총독이 직접 통치.  


B.C.6-7년 로마총독 퀴리나리우스에 의하여 인구조사가 실시됨. 인구조사에 반발한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킴. 대제사장 요아잘이 인구조사를 받아 들이도록 설득했으나 실패하고 갈릴리 출신 유다의 지휘 하에 반란이 계속됨. 로마는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했고, 유다는 살해됨.  


본디오 빌라도(주후26-36)는 예루살렘에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방패를 세워 유대교인들의 감정을 건드림. 유대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에게 항의하였고, 티베리우스는 이 방해를 가이사랴에 있는 주둔지로 가져 가도록 빌라도에게 명령.  


유대인들은 로마군대의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산헤드린이 국내문제에 있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사했다(마5:22). 디아스포라에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사울이 산헤드린의 칙서를 받아 들고 다메섹으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감). 황제에게 울리는 직접세를 책임지고 있었다.  


c. 빌립의 영토(B.C.4-A.D.33-34) 


--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팔레스타인의 북쪽과 동쪽을 배당받음. 거의 대부분 비유대인거주지역. 관대하게 통치했고 건축사업에 힘을 쏟음. 파니아라는 옛 도시를 재건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로 부름. 빌립사후에 빌립왕국은 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다가 37년에 아그립바1세의 왕국으로 귀속됨.  


d.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B.C.4-A.D.39) 


-- 갈릴리와 베뢰아를 차지. 건축사업에 몰두하겨 티베리우스황제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시를 건립.  


-- 나바테아의 와 아레카스4세의 딸과 결혼. 이 아내를 버리고 형제 빌립의 전처인 헤로디아와 결혼. 이 때문에 나바테아와 싸웠는데, 이 싸움에서 패배.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추는 것을 보고 미혹되어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살로메의 청원을 듣고 세례요한의 목을 벰(마14:3-13). 안티파스를 옹호하던 티베리우스가 죽고 카리큘라가 황제로 등극하자 곧 폐위당하여 골로 유배당했다.  


e. 당시의 조세제도.  


-- 직접세(산헤드린공의회가 직접 거둠), 사용세(수입세, 수출세, 도로, 항구, 시장사용에 대한 세금, 사람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바쳐서는 안되는지를 물었던 세금으로서 시리아와 유대주민들에게 무거운 부담이었다), 토지세(B.C.63년 이래로 납부한 세금), 인두세(가장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킴).    

 

-- 세금의 징수는 징세청부업자들에게 위탁됨. 징세청부업자 밑에는 실제로 세금을 거두는 부하직원들이 있었다. 삭개오는 징세청부업자였고(눅19:1-10), 레위(막2:14)는 세금을 거두는 징세공무원이었다. 후자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고, 매우 박한 임금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부패가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불가피한 일.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일용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자주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사용세를 면제받고 부자들 곁에 있었고, 공무를 이용하여 작은 돈들을 축재했기 때문. 예수님이 세리의 친구로 불리워졌다는 것은(마11:19) 예수님이 사회적 편견을 거스렸음을 의미한다.  


f. 토지제도. 


-- 마20:1-15, 막12:1-11에는 대토지 소유자들이 등장한다. A.D.1세기부터 대토지소유자들이 등장. 많은 농부들이 병이나 가뭄, 높은 세금을 감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할 수 없이 토지를 매각하고 임차인이나 일용노동자들로 전락했고, 토지를 사들인 지주들은 점점 대토지 소유자가 되어감. 이들은 도시(예루살렘)에 살거나 여행을 하면서 소일했다(눅16:1-8) 대제사장 가문의 많은 친척들과 상인들이 지주들이었다. 이들은 소유물에 대한 감독을 청지기들에게 위임하고, 실제적인 일은 일용노동자들, 노예들, 임차인들에 의하여 행해짐. 토지를 임차한 농부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수확한 것들 가운데 일부(1/3 또는 1/2)을 소유주에게 바치거나 돈으로 임대료를 바침. 이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했다.  


-- 일용노동자들 중에는 토지를 임차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지주들을 위하여 노동을 해야 했다.  

-- 일용노동자들 중에는 고정적인 노동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자주 실직. 포도원품꾼비유에서 보면 제11시(오후5시)에도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마20:6이하).  


-- 노예들: 빚을 갚을 형편이 안되면 스스로 노예의 길을 찾음.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18:25)에 따르면 채무자는 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에 빚을 갚은 두가지 방법이 있음을 시사. 첫째는, 채무자와 아내 재산이 모두 한꺼번에 팔리는 것(노예가 되는 길). 둘째는,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들어 앉아 있는 것.  


-- 시골에 거지가 많았다(거지 나사로, 눅16장). 


g. 종교생활 


--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생활의 중심. 성전은 유대 및 주변지역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종교생활의 중심이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1년에 한차례 반세겔의 성전세를 바침. 예루살렘 순례에 참여. 세 큰 절기에 참여하기 위하여 수만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임.  


-- 제사는 아침과 저녁에 드림.  


-- 재정과 경제에서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많은 희생제물이 필요했고, 성전세 및 기증품의 납부가 있었다. 성전이 일종의 은행으로 기능. 그러자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이 망각되고 장사하는 집이 되기도 했다(막11:15-17).  


-- 회당의 완전한 유대교적 발전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당시에도 이미 회당이 있었다. 성경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회당예배의 핵심.  


-- 산헤드린은 헤롯대왕이 통치하던 기간 중에는 거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통치권이 로마로 넘어간 뒤에는 상황은 약간 달라졌다. 산헤드린의 주 업무는 율법을 해설하고, 소송사건들을 판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로마총독의 승인이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산헤드린은 고위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 고위제사장들은 사두개파,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바리새파. 산헤드린에서는 사두개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 헤롯대왕 시대 이후에는 정치적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산헤드린의 의장은 계속 맡고 있었다. 로마시대에 대제사장은 지역을 관할하는 총독에 의하여 임명됨. 예수님 당시에 가장 잘 알려진 대제사장은 가야바라는 별명을 가진 요셉이었다. (A.D.18-36) / 의식을 집행할 때 24반열로 나누어진 제사장들의 도움을 받음(예컨대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 눅1:5, 24반열에 대해서는 대상24:10을 참조). 제사장 가문의 회원은 성전제물 일부를 취할 수 있었다. 낮은 계급의 제사장들은 시골에 살았고 수공업에 종사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일이었다.  


-- 소페림(책의 사람, 서기관). 하나님의 메시지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업무를 맡음.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 두각을 나타냄.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집단을 형성. 많은 서기관들이 바리새인이었지만, 모두가 바리새인은 아니었다. A.D.70년 이후 이들은 랍비집단을 형성했다.  


-- 샴마이학파와 힐렐학파. A.D.70년 이전에는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다가 A.D.70년 이후에는 힐렐학파가 우세. 샴마이는 보다 보수적, 힐렐은 진보적. 힐렐은 바빌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성인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왔고, 샴마이는 유대에서 전 생애를 보냈다. 

 

-- 예수님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모두와 논쟁을 벌이셨다. 예수님은 두 파 모두에게 비판적이셨으나, 바리새파와 더 가까웠다. 사두개파는 소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귀족계급. 평민들과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 예수님의 재판과 관련해서는 바리새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에도 바리새인은 관여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재판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에 대하여 좀더 동정적이었다. 사도들이 사두개인 대제사장에 의하여 감옥에 갇혔을 때도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이들을 보호하여 석방시켰다(행5:17-42). 예수님 동생 야고보가 사두개인 대제사장의 명령으로 A.D.62년에 죽임을 당했을 때 바리새인들이 아그립바2세에게 항의하여 면직시킴.  



2. 아그립바1세로부터 제1차 유대전쟁까지의 기간(A.D.41-66) 


a. 로마는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에 티베리우스(14-37), 칼리큘라(37-41), 글라디우스(41-54), 네로(54-68)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만한 통치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 티베리우스는 눅3:1에 언급되고 있는 티베리우스는 원로원과 백성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조카 게르마니쿠스가 거둔 것.  

-- 칼리큘라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로서, 무능했고, 일종의 정신병 증세가 나타나 스스로 신으로 숭배받으려는 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 클라우디우스는 법적인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 클라우디우스를 이어 네로가 등장. 잔인한 것으로 유명. 행정과 외교 모두 소홀히 했다.


네로를 죽이려는 수많은 음모들이 진행되다가 68년에 성공하여 네로를 자살로 내몰았다.

네로는 A.D.64년에 로마를 불질렀는데, 이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으며, 이것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의 시초가 되었다.  


b. 헤롯대왕과 마리암네의 손자였던 헤롯 아그립바(행12:1-23)는 칼리큘라와 절친. 카리큘라가 37년 황제가 되자마자 곧 아그립바에게 분봉왕직책을 줌.

2년후에 안티파스가 추방되었을 때 아그립바는 안티파스의 영토도 취했다.  


-- 이 무렵 스스로 신으로 경배받고 싶어 했던 칼리큘라는 예루살렘 성전에다가 자신의 동상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40-41년에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시리아통치자 페트로니우스가 팔레스타인으로 감. 그러나 페트로니우스는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명령을 수행할 경우 팔레스타인에서 폭동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게다가 아그립바의 능숙한 정책과 칼리큘라의 죽음으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글라우디우스는 팔레스타인에서 폭동을 막아 준 댓가로 아그립바에게 할아버지 헤롯대왕이 다스렸던 지역 전체를 아그립바에게 하사했다.  


-- 아그립바 치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는 다시 헤롯왕가의 통치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아그립바는 하스몬왕조 출신의 마리암네의 후손으로서 정통적인 혈통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 아그립바는 예루살렘 안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행세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했고, 예루살렘 밖에서는 헬레니즘 옹호자로 행세했다. 가이사랴에 딸들의 동상을 세웠고, 로마식 경기를 개최했다. 예루살렘에서 주조한 화폐에는 어떤 형상도 새겨넣지 않은 반면에 다른 도시에서 발행한 화폐에는 자신이나 황제의 초상을 넣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 아그립바는 예루살렘 북편에 새 성벽을 건축하려고 했으나 로마에 의하여 견제당했고, 로마의 다섯 봉신왕들과 함께 티베리아스에서 회의를 하고자 했으나 이 회의도 로마에 견제당함으로써 로마로부터 독립된 정책을 수행하려는 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를 설득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특권을 부여받게 했다.  


-- 아그립바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첫 번째 박해자가 되었다(행12:1-19). 세배데의 아들 야고보가 그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했다. 베드로도 비슷한 운명에 처할 뻔 했다. 아그립바는 44년에 가이사랴에서 죽음.  


c. 아그립바1세가 죽은 후에 글라우디우스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로마지방으로 만들었다. 글라우디우스는 파두스(44-46)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두스 시절에 드다라는 한 선지자(행5:36)가 나타나 활동을 시작했는데 파두스는 기마병을 동원하여 이 선지자일파를 무서운 살육을 행하여 진압했다.  


-- 파두스의 계승자는 티베리우스 줄리우스 알렉산더(46-48)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철학자 필로의 조카. 이 당시 팔레스타인은 기근으로 고통을 받았다(행11:27-29). 짧은 기간동안 총독으로 있다가 물러난 그는 70년 유다전쟁시에 예루살렘 포위를 지지한 로마군사령관의 조언자로 활약했다.  


-- 벤티디우스 쿠마누스(48-52) 총독시에 소요가 증가했는데, 이 소요들은 쿠마누스의 분별없는 행동 때문에 야기되었다. 52년경 한 갈릴리 사람이 사마리아에서 살해당했을 때 갈릴리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이 싸움에 예루살렘 주민들도 말려들었다. 엘르아잘과 알렉산더라는 이름의 두 열심당원들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사마리아에 대한 징벌원정을 단행했다. 이 일에 대하여 쿠마누스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나중에 왕이 될 아그립바2세의 중재와 로마황제 글라우디우스가 개입에 힘입어 사마리아에게 유죄가 선고되고 두 열심당원은 처형되었다. 글라우디우스 황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쿠마누스를 해임했다.  


 -- 쿠마누스의 뒤를 이어 안토니우 )스 펠릭스가 총독으로 임명(52-60).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죄수로 감금했던 사람. 그의 통치기간 중 주민들 사이에서의 불안이 증폭되었다. 반란도 계속되었다. 펠릭스는 매우 잔인하게 전략도 없이 반란을 진압해 나갔다. 그 결과 로마에 대한 반감이 점점 강해져 갔다. 행24:26이 암시하는 것처럼 펠릭스는 부패한 통치자였다. 60년에 벨릭스는 네로에 의하여 쫓겨나고 포르시우스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다(60-62). 베스도는 온건한 통치자. 아그립바2세와 제사장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제사장들은 아그립바가 성안을 내려다 보지 못하도록 벽을 쌓았고, 아그립바는 그 벽을 허물어 버리기를 원했다. 베스도는 그와 견해를 같이 하였으나, 동시에 제사장들이 대표단을 로마에 파견하여 네로에게 이 문제를 진술하도록 했다. 네로는 제사장 편을 들었다.  


-- 베스도 뒤에 임명된 알비누스 총독(62-64)과 게시웃 플로루스(64-66)는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총독들이었다. 알비누스 때는 어떤 죄수라도 돈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플로투스는 모든 도시들과 마을을 노략질했다. 제1차 유대전쟁은 그가 통치하던 A.D.66년에 발발했다.  

   

d.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1세가 44년에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그립바2세는 17세였고, 아버지가 죽은 후 몇 년동안 로마에 머물러 있다가 49년 레바논의 작은 왕국 칼키스의 왕으로 임명됨.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감독권, 대제사장 임명권을 부여받았다. 

 

-- 53년경에 아그립바의 영토는 이전 분봉왕이었던 빌립의 지경까지 확장됨. 아빌레네가 추가된데 이어 네로황제로부터 베뢰아의 아빌라와 줄리아스, 갈릴리에 있는 티베리아스와 타리케아를 하사받음(54-55년) 


-- 누이 베레니체와 동거하여 근친상간이라는 비난을 받음.  

--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철저한 친로마정책을 추진. 모든 화폐들에 로마황제들의 이름과 초상을 새겨 넣었다. 

-- 66년에 로마와의 1차 유대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다가 일단 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철저하게 로마편에 섰다.  


e. 41년 이후의 경제적 상황은 점차로 악화일로를 걸음.  


-- 탐욕스럽고 타락한 총독들의 악한 통치가 민중들로부터 반감을 사서 소요가 끊이지 않음.  


-- 로마 당국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었고, 거둔 세금 중 상당 부분이 중개인들이 착복함. 민중들의 불만은 모두 로마당국으로 향함.  


-- 예루살렘에는 제사장가문들과 부유한 토지소유자들이 살고 있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으나(요4:9) 유대전쟁시에는 유대인 편에서 로마를 대항하여 싸웠다.  


-- 당시 예루살렘에는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고 있었고, 유대인들 중에도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개종하여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일원이 되었으며,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행6:3). 구제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헬라파 유대인들로 구성된 일곱 집사를 임명하기도 했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이나 빌립집사가 모두 헬라파 유대인 출신들이었다. 예루살렘 당국의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 각지로 흩어질 때 헬라파 유대인들이 흩어졌고, 이들이 흩어져 나가면서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했다.  


--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권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담당했다. 야고보는 대제사장 안나스2세의 명령으로 산헤드린에 소환되어 순교당했다. 야고보의 순교는 온건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켜 안나스2세는 이 일 때문에 총독 알비누스에게 고소당했고, 로마 총독의 압력으로 아그립바2세는 안나스를 면직시켰다.  



3. 제1차 유대전쟁(A.D.66-74).  


--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점차 고조되어 갔고, 소요가 계속되었다.  

-- 특히 유대공동체와 헬라공동체 간에 적대감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마침 가이사랴에서 헬라주민들이 한 회당 옆에다가 헬라식 정원을 건설하여 회당이 부분적으로 막히자 두 집단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난 사건이 생겼다. 이 싸움이 네로에게 보고되었을 때 네로는 헬라주민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61년).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도시에서 시가전이 벌어질 정도로 양편의 싸움을 극한 대결로 치달았다.  


-- 총독 플로루스가 성전금고로부터 17달란트를 빼내 오도록 명령했다. 이에 화가 난 일부 주민들이 길가에 운집하여 플로루스를 조롱했다. 플로루스는 조롱한 주민들을 처벌하려고 했으나 저항이 너무 거세서 플로루스는 예루살렘에 보병대 하나만을 남겨두고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치안책임을 맡기고는 가이사랴로 철수했다.  


-- 마침내 숫자적으로 증가한 열심당이 대다수의 주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싸움을 시작했다. 이두매인들과 사마리아인들도 싸움에 합류.  


-- 사태가 심각해지자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고 있던 아그립바2세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중재를 시도했고, 헤롯왕의 지지자들도 평화회복을 위하여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다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당편에 서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열심당은 마사다를 포함한 요새들을 정복했고, 대제사장의아들인 엘레아잘은 로마로부터 탁월한 기능을 갖춘 성전에서 황제에게 매일 희생제사드리던 것을 중지시켰다.  


-- 아그립바2세의 중재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아그립바, 베레니체, 대제사장의 왕궁, 예루살렘의 문서보관소 등이 불에 타 버렸다. 안토니아요새가 점령된 후 도시전체가 로마로부터 해방되었다. 예루살렘 밖의 팔레스타인 시골지역에서도 유혈사태가 벌어져서 이 지역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이방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로마의 시리아 총독 세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가 66년 가을에 팔레스타인 원정을 시도했으나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퇴각하는 도중 벧호른 부근의 협곡에서 전멸당했다.  


-- 갈루스의 패배이후 예루살렘의 지도부는 재편성되었다. 줄곧 친로마정책을 펼쳐 온 제사장들은 반로마정책으로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반로마편에 섰다. 산헤드린이 행정적인 권력을 위임받았고, 고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주도되는 민회가 최고관청으로 자리잡았다. 민회는 갈릴리군의 최고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후일 역사가가 되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온건한 정책을 펼친 결과 로마와 협상을 하고자 한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고, 도시민들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갈릴리사람들의 무장항거를 초래하기도 했다.  


-- 네로는 베스파시안 장군을 팔레스타인에 파견해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했다. 베스파시안의 로마군에는 아그립바2세, 나바테아의 왕 말쿠스2세로부터 온 원군이 포함된 3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갈릴리로 진군한 베스파시안의 강력한 군대 앞에서 유대군은 연패당했고, 요세푸스도 티베리아스로 퇴각했으며 요타파타의 요새로 도망했다. 요타파타는 베스파시안에 의해 47일동안 포위당했다가 마침내 로마의 수중에 떨어져서 주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잡혀 갔고 모든 방어시설이 파괴당했다(67년6-7월경). 67년이 끝나갈 무렵 로마는 갈릴리 전역을 되찾았다. 기살라의 요한은 지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도망했다.  


-- 사태가 긴박해지자 예루살렘 내부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전이 전개되다가 열심당이 구테타를 일으켜 전면에 나섰다. 69년 여름 베스파시안에 의하여 추방당한 시몬 바르기오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기살라의 요한 일파로부터 갈라져 나온 제사장 엘르아잘 벤 시므온 일파도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안에서는 세 집단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있었고, 이와 동시에 예루살렘 방어벽을 강화하는데 모든 노력이 집중되었다. 불행하게도 이 무렵 예루살렘의 곡물창고가 불에 탔는데, 이는 이후 전개될 로마와의 대결에서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예루살렘은 세 곳의 요새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고지대와 저지대는 시몬 바르 기오라, 성전언덕은 기살라의 요한, 성전내부의 안뜰은 엘르아잘이 담당했고, 디도장군은 예루살렘을 에워쌀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노련한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안에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직접 공격을 피하고 우회하여 베뢰아와 이두메 등의 영토들을 정복하고, 사마리아와 세겜을 손에 넣었다. 가이사랴에 돌아간 베스파시안은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68년6월)을 듣고 로마 동부군의 지지를 얻어 로마황제로 등극했다(69년7월1일). 팔레스타인에는 베스파시안의 아들 디도가 남아 로마군대를 지휘했다.  


--70년 초에 디도는 마침내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기 몇주 전에 예루살렘 포위작전을 시작했다. 디도군에는 한때 유대군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와 전 총독 티베리우스 줄리우스, 알렉산더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예루살렘 내부의 열심당 당파 간의 권력투쟁이 계속되었다. 세 당파 중에 하나였던 엘르아잘파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을 위하여 성전 앞뜰의 문을 열었을 때 기살라의 요한파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이로서 예루살렘은 기살라의 요한파와 시몬파 두 파가 있었다. 마침내 로마군이 북쪽 끝의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대군은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내분을 중지하고 대응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시 전체를 돌 성벽으로 빙 둘러싸고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예루살렘 성전 안 높은 지대에 있던 안토니아성채를 함락시켰다. 엄청난 숫자의 예루살렘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성전은 함락당하여 불에 탔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에 700명의 청년들이 로마로 끌려 갔고, 다른 사람들은 이집트의 광산에서 일하게 하거나 노예로 팔렸다. 요한과 시몬은 지하수로에 숨어 있으려고 했으나 곧 사로잡혀 로마로 끌려 갔다. 시몬은 처형당하고 요한은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 디도가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을 때 헤로디움, 맛사다, 마케루스의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다. 남은 요새들을 정복하는 과제는 새로운 유대총독인 섹스투스 루실리우스 바수스에게 위임되었다. 헤로디움은 쉽게 정복되었고, 마케루스는 자유로운 통과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로마군에게 항복했다.  


-- 마사다를 정복하지 못한 채 바수스는 죽었고, 그 뒤를 프라리우스 실바가 인계받았다. 실바는 73년초에 마사다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마사다는 갈릴리 유다의 손자인 엘르아잘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방공호를 만들과 오랫동안의 포위를 견뎌내기 위하여 식량과 물과 같은 보급물자를 비축했다.  


-- 실바는 마사다를 둘러싼 마사다와 같은 높이의 성벽을 쌓고 성벽 위에는 불화살을 쏠 수 있는 망대를 세웠다. 실바는 토성공격으로 마사다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로마군이 마사다에 진입했을 때 포위당한 유대인들은 모두 자결했고, 두 여인과 다섯 어린아이들만 살아 남아서 탈출에 성공했다(73-74).  


-- 제1차 유대전쟁의 결과.  

              a. 어마어마한 인명살상. 인국가 격감했다.  

              b. 유대교의 종교적 중심지가 사라져 버렸다. 큰 절기 때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순례오는 일도 없어졌다.  

              c. 희생제사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았다.  

              d. 유다는 이제 로마의 독주가 되었고, 로마군이 고정적으로 주둔했다.  

              e. 도시들이 철저하게 파괴당했고, 토지들이 로마인들에게 양도되었다. 엠마오는 800명의 전쟁 퇴역군인들이 있는 요새가 되었다.  



4. 유대전쟁 이후의 팔레스타인의 문화적 정황 


-- 로마황제들:  

              a. 69-79, 베스파시안(원로원 가문출신이 아닌 플라비안가문통치의 시작) 

                  네로가 재정을 낭비했기 때문에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는데,  

                  베스파시안은 세금을 인상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함.  

              b. 79-81, 베스파시안의 아들디도.  

              c. 81-96, 디도의 형제 도미티안. 폭군의 기질이 있었음.  

              d. 96-98, 네르바, 사회적 관심 

              e. 98-117, 트라얀, 퀴에투스 전쟁이 발발 

              f. 117-138, 하드리안, 제국여행을 즐김. 이 시기에 바흐 코흐바의 반란 


(제2차 유대전쟁) 

-- 유대전쟁이 끝난 후에 종교집단들 가운데는 바리새파만이 살아 남았다. 바리새파는 로마로부터의 회유가 있었으나 이를 거절함으로써 유대민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던 것이 바리새파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러나 70년 이후에는 바리새파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랍비(나의 선생)으로 불리워졌다. 유대교의 중요한 인물들은 라반(우리들의 선생)으로 호칭되었다. 랍비들은 참혹한 유대전쟁 이후에 파멸적인 재난의 결과들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운동에 치중했다. 랍비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매일의 삶 속에 성경을 적용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들은 가르칠 뿐만 아니라 토라의 전승에 따라서 사는 실천도 중시했다. 이들은 생계문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다. 유명한 랍비들로는 요하난 벤 자카이, 엘레아잘 벤 히르카누스, 이스마엘 벤 엘리사, 가말리엘2세, 아키바, 타르폰 등이 있었다.  

-- 유대전쟁 기간중 예루살렘에서 도피한 요하난 벤 자카이는 야파 남쪽에 있는 야브네에서 토라연구학교를 시작했다. 이곳은 2차 유대전쟁이 끝나는 해인 135년까지 랍비 유대교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80년부터 120년까지는 그의 후계자 가말리엘2세가 랍비유대교의 기초를 마련했다.  

-- 야브네에는 일종의 재판정인 벧딘이 세워졌다. 70년에 제1차 유대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엄격한 통치를 하던 로마는 차츰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고, 이 덕분에 벧딘도 어느 정도 권한을 획득했다. 가말리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중요한 일로는 두가지가 있다. a. 구약정경의 확립. b. 18축복문의 확립(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저주문). 가말리엘2세 사후에는 타르폰이 벧딘의 의장으로 활동했다.  

-- 유대교에서 회당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70년에 성전이 파괴되고 난 이후부터였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최초의 회당은 마사다의 회당이었다. 70년 이후는 모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회당을 가지고 있었다. 회당은 영적인 삶의 중심지였으며, 유대교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용인된 종교(religio licita)의 지위를 가졌고, 유대인들은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5. 퀴에투스 전쟁(115-117년)과 바흐 코흐바의 반란(132-135년) 


 -- 115년과 117년 사이에 트라얀 황제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를 틈타 키레네, 키프로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과 같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의 반란이 로마의 장군 루시우스 퀴에투스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퀴에투스는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죽이는 야만적인 방법으로 진압에 착수했고, 그 보답으로 퀴에투스는 요대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 132년에 발발한 바흐 코흐바의 반란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a. 여행을 즐겼던 하드리안 황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문하여 헬레니즘적인 건축물들을 건립했다. 가이사랴, 티베리아스 등지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데, 특히 유대풍의 도시였던 세포리스를 희랍의 신들과 관련된 이름인 디오가이사랴로 바꾸었다. 이 일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b. 시골에서는 대개 로마인들이나 황실대리자들이 점점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생계의 원천인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가난한 임차인으로 전락했다.  

  c. 하드리안은 예루살렘을 아옐리아 카피톨리나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전형적인 헬레니즘적인 도시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 이런 상황에서 탁월한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인 능력을 지닌 바흐 코흐바라는 지도자가 등장하여 유대지방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바흐 코흐바군대는 유대지방에 있는 많은 요새들(헤로디움을 포함), 성채, 동굴들을 점령했고, 예루살렘도 수중에 넣었다. 바흐 코흐바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총독은 테네아우스 루푸스(Tineius Rufus)였는데, 루푸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점점 늘어나는 반란군에 비교하여 숫적으로 너무 열세였기 때문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 반란이 후기 단계에 접어들 무렵 하드리안 황제는 유명한 줄리우스 세베루스 장군에게 반란의 진압을 명령했다. 세베루스 휘하의 강력한 로마군은 효과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해 나갔다. 삼면이 계곡으로 둘러 싸이고 나머지 한 면은 참호화되어 있던 벧하르요새가 로마군에 점령됨으로써 끝났다. 이후 유대인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죽임을 당했고, 많은 사람들은 노예로 팔렸다. 예루살렘은 아엘리나 카피톨리나라는 이름 하에 완전히 이방도시가 되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사형당하도록 규정했다. 할례가 금지되었다. 향후 유대인들은 매우 길고 힘든 시대를 보내야 했다. 조국을 빼앗겼기 때문에 토라를 중심으로 흩어진 백성들의 정신적인 통일성과 단결을 도모하고자 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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