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Babylonia) : 바벨론 제국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 왕국으로, 이전 시대의 수메르 지방과 아카드 지방을 아우르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명이다.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은 수도였던 론(Babylon)에서 유래하였다. 한글 구약성서에서는 ‘바빌론’, ‘바벨론’ 등으로 음역하고 있다. 바벨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3세기경 아카드의 사르곤(Sargon) 왕의 지배에 대한 점토판에서 찾을 수 있다.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이 차례로 통치하였다. 경작이 용이하고, 상업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형이어서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바벨론의 위치

고대 도시 바벨론의 폐허들은 유브라데 강을 끼고 현대 이라크 바그다드의 남쪽 80km 정도 떨어진 곳에 남아 있다.

바벨론은 9-15㎢에 걸쳐 있었는데, BC 5세기경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높이가 90m, 가로 길이가 26m 되는 벽들로 96km 정도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의 역사

고대 바빌로니아카사이트(Kassite)왕조 그리고 신 바빌로니아 제국(Chaldean Era(갈대아 期)로 분류된다.

바빌로니아의 잘 훈련된 군대는 이신, 엘람, 우루크 등의 도시국가와 강력한 마리 왕국을 무너트렸다. 바빌론의 지배는 지중해까지 미쳤다.


1. 고대 바빌로니아


기원전 20세기경, 우르 제3 왕조에 의한 수메르의 부흥 이후에, 유프라테스 강 서쪽으로부터 온 셈어족의 아모리인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지배하게 된다. 이후 약 100년간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신(Isin)이 가장 강력한 도시였으나, 아모리인의 도시인 바빌론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결국 첫 번째 바빌로니아 제국을 이루게 된다. 이후 약 300년간을 고대 바빌로니아로 분류한다.


바벨론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일 것이다. 대를 쌓았던(창 11:1-9) 바벨론은 니므롯이 세웠던 여러 도시들 중에 하나였다(창 10:10). 바빌론에 사람들이 정착했던 시기는 B.C.3,000년 이전이었고, 바빌론은 아카드(Akard)의 사르곤 (Sargon)에 의해 B.C.2400년경에 파괴되었다. B.C.2000년대 말엽에 아모리(Amorite)왕조가 바빌론을 수도로 만들었고 이 왕조는 옛 바빌론으로 BC 1595년에 히타이트(Hittites)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존속하였다. 엘람인을 추방하고 왕국이 정착한 뒤 함무라비(Hammurabi; BC 1792-1750)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으로 불린다.


함무라비 법전의 사본이 수사(Susa)에서 1901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시리아와 가나안 등지의 여러 서부 도시들과 정기적인 무역을 하였고, 바빌로니아에도 무역을 위한 아모리인의 이주지가 건설되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왕을 신 마르둑(Marduk)의 대행자로 믿었고, 바빌론은 "신성한 도시"로서, 모든 왕은 그곳에서 왕권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 제도와, 세금 제도, 중앙 정부 체제가 갖추어졌다.

 

▶바빌론 제1왕조: 고 바빌로니아(B.C.18~16세기경)는 함무라비 왕의 통치와 보복주의가 담긴 법전이 유명. 인도,유럽의 히타이트인과 카시트인에게 멸망

1.니므롯(B.C.2300년경):

바벨론제국과 앗수르제국의 창시자. 그는 특이한 사냥꾼. 노아-함-구스-니므롯의(노아의 4대손)

7.함무라비(B.C.1792~1750):법전으로 유명

2.수무-아붐(B.C.1894~1881):이삭(B.C.1952~1772)-야곱(B.C.1892~1745)과 동시대

8.삼수일루나(B.C.1749~1712)

3.수무-라-엘(B.C.1885~1845)

9.아비-에슈(B.C.1711~1684)

4.사비움(B.C.1844~1831)

10.암미-디타나(B.C.1683~1647):야곱 애굽 종살이 기간

5.아필-신(B.C.1830~1813)

11.암미-사두카(B.C.1646~1626): “

6.신-무발리트(B.C.1812~1793):야곱-요셉(B.C.1801~1691)과 동시대

12.삼수-디타나(B.C.1625~1595): “

 


2. 카사이트 왕조


다음 4세기 동안(BC 1570-1150)은 카사이트(Kassite) 왕조가 도시를 통제하였는데, 이때는 애굽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14번째 왕은 샘수-다이타나(Samsu-Ditana)였다. 기원전 1595년에, 히타이트왕 무르실리 1세(Mursili I)에 의해 약탈당한 이후에, 그의 치세는 카사이트 왕조로 넘어가게 된다. 카사이트 왕조는 바빌론의 이름을 "카르-두니아쉬"(Kar-Duniash)로 바꾸고, 576년간 지배했다. 외세의 지배는 비슷한 시기 힉소스인이 이집트를 지배한 것과 아주 유사하며, 이러한 지배 하에서 바빌로니아는 서부 아시아 지역에 대한 패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때 아슈르의 고위 성직자들은 스스로를 아시리아의 왕으로 옹립한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신성한 왕권을 부여받은 셈족 왕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사라지고, 카사이트 군주들에게는 신의 지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벨론은 여전히 제국의 수도이자 서아시아의 신성한 도시로서 기능을 잃지 않았고, 성직자들은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였다.


▶카사이트 왕조: 이들 지배자들은 바빌론을 다스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대수체계가 후에 바빌론의 카사이트 왕들에 의해 계속되었기에 목록화되었다.

1.간다쉬(B.C.1730)

6.카쉬틸리아쉬2세

2.아굼1세

7.우르지구루마쉬

3.카쉬틸리아쉬1세

8.하르바시후

4.우쉬쉬

9.팁탁지

5.아비라타쉬

 

▶바벨론 제2왕조: 씨랜드 왕조는 바빌론을 실제로 지배하지 않았지만 그 남쪽 수메르지역을 지배했다. 그럼에도 바빌론 제2왕조에 의해 전통적으로 목록화되었다.

1.일루마-일룸(B.C.1732):요셉((B.C.)1801~1691)과 동시대

7.페쉬갈다라마쉬

2.이티-이리-니비

8.아다라칼람마

3.다미크-일리슈

9.에쿠르두안나

4.이쉬키빌

10.멜람쿠르쿡카

5.슈슈쉬

11.에아-가밀(B.C.1460)

6.굴키샤르

 

▶바빌론 제3왕조: 연대기는 일반적으로 각 왕조를 위해 약10년에서 20년 이른 연대를 준다. 그러나 이것은 이집트 신왕국의 보통 사용되는 연대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1.아굼2세(B.C.1570)

14.나지마루타스(B.C.1306~1280):에훗B.C.1316()과 동시대

2.부르나-부리아스1세

15.카다스만-투르구(B.C.1280~1262)

3.카스틸리아스3세

16.카다스만-엔릴2세(B.C.1262~1254)

4.울람-부리아스

17.쿠두르-엔릴(B.C.1254~1245)

5.아굼3세

18.사가락티-수리아스(B.C.1245~1232):삼갈(B.C.1236)과 동시대

6.카다스만-하르베1세

19.스틸리아4세(B.C.1232~1224)

7.카라인다스

20.엔릴-나딘-수미(B.C.1224~1221)

8.쿠리갈주1세(B.C.1377):여호수아(B.C.1500~1390)와 동시대

21.아마드-수마-우수르(B.C.1224~1221)

9.카다스만-엔릴1세(B.C.1377~1361)

22.아다드-수마-우수르(B.C.1215~1185)

10.부르나-부리아스2세(B.C.1361~1333)

23.멜리시팍(B.C.1185~1170)

11.카라하르다스(B.C.1333~1331)

24.마르둑-아팔-이디나1세(B.C.1170~1157):기드온B.C.1169()과 동시대

12.나지부가스(B.C.1331)

25.자바바-수마-이디나(B.C.1157~1156)

13.쿠리갈주2세(B.C.1331~1306):옷니엘(B.C.1384~1344)과 동시대

26.엔릴-나딘-아헤(B.C.1156~1153)

▶바벨론 제4왕조:

1.마르둑-카비트-아헤수(B.C.1155~1146)

7.마르둑-사픽-제리(B.C.1085~1069):입산(B.C.1079)-엘론-압돈 동시대,삼손(B.C.1075)과 동시대

2.이티-마르둑-발라투(B.C.1146~1132)

8.아다드-아플라-이디나(B.C.1069~1046):사울왕(B.C.1050~1010)과 동시대

3.닌우르타-나딘-수미(B.C.1132~1126)

9.마르둑-아헤-에리나(B.C.1046)

4.나부-쿠두리-우수르(느부갓네살1세,B.C.1126~1103):돌라(B.C.1120)-야일(B.C.1120)과 동시대,룻과나오미(B.C.1117)동시대

10.마르둑-제르-*(B.C.1046~1033)

5.엔릴-나딘-아플리(B.C.1100~1082)

11.나부-숨-리부르(B.C.1033~1025)

6.엔릴-나딘-아헤(B.C.1100~1082):입다(B.C.1085)와 동시대

 

▶바벨론 제5왕조:

1.심바-시팍(B.C.1025~1008):다윗왕(B.C.1025~1008)과 동시대

 

2.에아-무스킨-수미(B.C.1008)

3.카수-나딘(B.C.1008~1004)

▶바벨론 제6왕조:

1.에울마-사킨-수미(B.C.1004~987)

 

2.닌우르타-쿠두리-우수르(B.C.987~985)

3.시리크티-수카무누(B.C.985)

▶바벨론 제7왕조:

1.마르-비티-아플라-우수르(B.C.985~979)

 

2.나부-무스킨-아플리(B.C.979~943):솔로몬(B.C.970~930)과 동시대

▶바벨론 제8왕조:

1.닌우르타-쿠두리-우수르(B.C.943)

8.바나-아하-이디나(B.C.813~811)

2.마르-비티-아헤-이디나(B.C.943~920):르호보암(B.C.930~915)과 동시대

9.5왕(B.C.811~800)

3.사마스-무담미크(B.C.920~900)

10.닌우르타-아플라-*(B.C.800~790)

4.나부-수마-우킨(B.C.900~888)

11.마르둑-벨-제리(B.C.790~780)

5.나부-아플라-이디나(B.C.888~855)

12.마르둑-아플라-우수르(B.C.780769):제1회 올림픽 개최(B.C.776)

6.마르둑-자키르-수미1세(B.C.855~819)

13.에리바-말둑(B.C.769~761)

7.마르둑-발라수-이크비(B.C.819~813)

14.나부-수마-이스쿤(B.C.761~748)

▶바빌론 제9왕조: 이“때부터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프톨레미 경전과 다른 문헌에서 잘 알려져 있다.

1.나보나사르(나부-나시르, B.C.748~734)

 

2.나부-나딘-제리(B.C.734~732)

3.나부-수마-우킨2세(B.C.732)

▶바벨론 제10왕조: 아사리아와 갈대아인

1.나부-무스킨-제리(B.C.732~729)

10.아수르-나딘-수미(B.C.700~694)

2.디글랏빌레셀(B.C.729~727)

11.네르갈-우세집(B.C.694~693)

3.살만에셀5세(B.C.727~722)

12.무세집-마르둑

4.마르둑-아팔-이디나2세(성경의 므로닥-발라단, B.C.722)

13.신-아헤-에리바(산헤립.B.C.681~669), 아시리아 왕

5.사르곤2세(아시리아, B.C.722~705):북이스라엘은 호세아(B.C.731~722)때 멸망.

14.아수르-아하-이디나(에살하돈,B.C.681~669):아시리아 왕, B.C.689년 아시리아의 바빌론 약탈, B.C.670년대 앗시리아의 엘살하돈에 의해 재건됨

6.신-아헤-에리바(산헤립,아시리아,B.C.705~703)

15.사마스-숨-우킨(엘살하돈의 왕자, B.C.668~648)

7.마르둑-자키르-수미2세

16.칸달라누(B.C.648~627)

8.마르둑-아팔-이디나2세(B.C.703,복위)

17.신-슈무-리쉬르(B.C.626)

9.벨-이브니(B.C.703~700)

18.신샤리쉬쿤(B.C.627~620)

▶바벨론 제11왕조: 신바빌로니아 또는 갈대아인, 바빌론은 B.C.539년 고레스 왕이 이끈 메대와 파사의 연합국에 의해 멸망했다.

1.나부-아플라-우수루(나보폴라살,B.C.626~605):신바벨론제국의 초대 왕.

5.라바시-마르둑(B.C.556)

2.나부-쿠두리-우수루(느부갓네살2세,B.C.605~562):남유다의시드기야(B.C.597~586)때 멸망

6.나부-나이드(나보니두스,B.C.556~539)

3.아멜-마르둑(B.C.562~560)

7.캄비세스2세(B.C.538~522)

4.네르갈-사르-우수르(네리글리살,B.C.560~556)

 


 

3. 신 바빌로니아 제국(갈대아 제국, B.C.625~539)


바벨론 남부 거주의 갈대아인이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세운 왕국, 나보폴라살(B.C.625~605)이 바벨론을 수도로 정하고 그 후 메대와 연합하여 앗수르를 멸망시키고(B.C.612) 신바빌로니아(갈대아 제국)을 건국. 왕자인 느부갓네살2세(B.C.605~562)가 이집트 군을 갈그미스에서 격파하고 즉위 후 시리아,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획득하고(B.C.597) 이집트측에 가담한 유다왕국에서 포로를 끌고 옴.


아시리아가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바빌로니아는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아시리아는 때로는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하고, 때로는 군사적으로 제압하면서 지배력을 유지하였으나, 결국은 B.C.627년, 아시리아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이 죽고 다음 해에 바벨론의 갈대아인 나보폴라살(Nabopolassar,B.C.626~605, 신바벨론 제국의 초대 왕) 메대 등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 제국을 침공해 B.C.612년에 니느웨를 함락시켰다.앗수르를 돕기 위해 온 애굽왕 느고는 유다왕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죽였다.


한편 나보폴라살은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 2세가 갈그미스 전투에 참여하고 있을 때 사망했다(역대하35:20∼27;스바냐2:13∼15)이 반란을 일으킨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Medes)인과 함께, 니네베(니느웨)를 파괴하고 제국의 패권은 바빌로니아로 돌아온다.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의 뒤를 이은 느부갓네살2세(B.C.605~562)는 기원전 585년에 페니키아를 정복하는 등, 다시 한 번 바벨론을 문명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의 연대기는 기원전 567년 이집트 공략 등 일부만이 발견되었다.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u-na'id)와, 고레스(Cyrus)에 의한 바빌로니아 정복에 대해서는 많은 사료가 존재한다. 이것은 주로 나보니두스의 연대기를 기록한 석판과, 하란의 달의 신전 복원에 관련된 석판, 키루스의 선전포고 등이다.


기원전 549년, 나보니두스 6년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안샨의 왕이라고 불리웠던 엘람의 고레스는 그의 영주이자 만다의 왕이었던 메데스의 아스티아게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아스티아게스의 군대는 왕을 배신하였고, 고레스가 엑바타나(Ecbatana)에서 왕을 자처하면서 메데스의 왕국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3년 뒤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원정한다. 이 때, 나보니두스는 그의 왕국의 국경 남쪽 근처의 사막에 진을 치고, 그의 아들 벨사살에게 군권을 맡겼다.


 나보폴라살( B.C.626~605)-느부갓네살2세(B.C.605~562)-에윌므로닥( B.C.562~560)-네르글리살( B.C.560~556)-나보니두스( B.C.556~539)-벨사살( B.C.553~539). 바벨론의 멸망(B.C.539년)

 


B.C.539년 고레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공격한다. 전쟁은 오피스(Optis)에서 6월에 시작되었고, 바빌로니아는 곧 패하고, 뒤어서 시파라(Sippara)가 항복한다.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도망쳤으나, 고브리야스(Gobryas)에 계속해서 쫓기어 시파라(Sippara)가 항복한 지 이틀 뒤에, "고레스의 병사들이 싸우지 않고 바빌론으로 입성"하게 된다. 나보니두스는 은신처에서 나와 왕위를 유지하였다.


고레스는 10월(Marchesvan) 3일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고브리야스(Gobryas)가 그를 대신하다가,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다. 며칠 뒤 나보니두스의 아들이 죽었을 때 6일 동안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키루스(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 II)가 무덤까지 그를 따랐다.


고레스가 죽기 1년 전인 기원전 529년, 그는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후 다리우스 1세(Darius Hystaspis)가 페르시아 왕권을 장악하고, 페르시아를 조로아스터의 대리인으로 다스리게 될 때까지, 바빌론은 서아시아의 지배자로서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다리우스는 정복자로서 바빌론에 입성하였다.


다리우스가 죽은 뒤, 바빌로니아는 니딘타-벨 왕 (네부카드네자르 3세) 때에 잠시 동안 독립을 회복했다가(기원전 521년 10월 ~ 520년 8월) 페르시아에 공격으로 다시 점령된다.


몇 년 뒤(B.C.514년추정) 바빌론의 아라카(Arakha)가 다시 봉기하지만, 이때 방벽 일부가 파괴된다. 거대 사원인 에-사길라는 계속해서 보수되면서 바빌로니아의 상징으로 유지되지만, 마침내 바빌로니아의 새 수도 셀레우키아가 건설되면서 많은 인구들이 이동하게 되고, 바빌론 성은 석재로 이용되기 위해 손상되고 말았다.


바벨론 제국 영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게 멸망하고, 이어서 남유다도 바빌론 제국에게 멸망하여 이스라엘의 분열왕국시대도 끝이 났다. 바벨론에 유다왕국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살던 70년을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분류한다. 유다왕국의 사람들은 바벨론에 세 번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는데, B.C. 605년에 1차 포로, B.C. 597년에 2차 포로, B.C. 586년에 3차 포로가 끌려갔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가나안지역은 바빌론제국의 총독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그 기간에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부름받은 선지자

다니엘에스겔이 있었다.  


주전 612년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의외로 힘없이 무너졌다. 이로써 앗수르 제국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것이 바빌론 제국이었다. 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축도 북부의 니느웨에서 남부의 바빌론으로 옮겨졌다. 사실 바빌론이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보다 약 1100년전에 바벨론에 유명한 왕이 등장했는데, ‘함무라비 법전’으로 인류 역사에서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었다(B.C.1792~1750). 함무라비 왕을 전후한 시대의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장악했던 권력의 핵심부였다. 그러나 그 세력은 오래 가지 못했고 B.C. 1600년보다 약간 후에 헷왕국(힛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그 자리를 앗수르 제국이 차지해 오랜 기간 메소포타미아의 맹주가 되었다.


함무라비 왕 시대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 바빌론의 영광의 날은 다시 찾아왔다. 역사가들은 과거 함무라비 왕 시대와 1000년 뒤에 일어난 제국시대를 구별하기 위해서, 후자를 ‘신바빌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시대라고 부른다. 


이 신바빌론 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해 100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다(B.C. 626∼539년). 그러나 이 제국은 고대 어느 제국보다도 더 큰 권세와 영화를 자랑했다.


나보폴라살(Nabopolassar)왕에 이어서 등장한 느부갓네살2세(네부카드네자르 2세, B.C.605∼562년)는 제국 역사의 중심인물로서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제국 역사의 절반이나 되는 40년이 넘는 기간에 메소포타미아의 절대적 제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 바벨론 제국은 B.C. 539년 벨사살 왕 때에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게 망하였다. 

 

 ▶앗수르 제국, 바벨론 제국 등 영어로 제국을 엠파이어(empire)라 하는데 그 기원은 라틴어의 임페리움(imperium) ‘권력’이나 ‘권한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말에서 최고사령관을 의미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가 나왔다. 그 말이 황제 ’엠퍼러(emperor)‘가 되었고, 그 황제가 지배하는 영역을 empire(제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영어의 황제가 엠퍼러(emperor), 독일에서는 황제를 ‘카이저’, 러시아에서는 ‘차르’로 불렀다. 카이저나 차르라는 말도 로마시대의 말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시대에 율리어스 카이사르(시이저) 이후 카이사르는 황제를 뜻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이 존엄자라는 존칭인 ‘아우구스투스’라는 말을 쓰면서 그 후 황제를 칭할 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한글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로 표현됨)로 부르기도 하였다.

 

느부갓네살 1세(BC 1124-1103)는 바벨론을 수도로 삼았으며, 그가 세웠던 왕조는 약 100년 동안 존속하였다. 바벨론은 BC 1000년경 앗수르 제국에 병합되었고, 앗수르인들과 북동의 아라비아에서 온 바이키와 같은 공격적인 침략자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이곳은 BC 698년에 앗수르 통치자 산헤립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후계자인 앗수르바니팔에 의해 재건되었다. 신바빌론 제국은 BC 625년에 갈대아인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왕권을 차지하였을 때 시작되었다. 20년 안에 그는 메대의 크야크아레스(Cyaxares)와 연맹하여 앗수르 군대들을 멸절시켰다. 


또한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 2세(BC 605-562) 때 바벨론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느부갓네살 2세는 정복자였을 뿐 아니라 건축가와 행정 전문가였다. 그는 여러 개의 왕궁, 지붕에 말둑(Marduk) 신을 위한 신전을 지은 거대한 지구라트, 공중 정원들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바빌론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BC 555-539)는 아라비아 도시 테이마(Teima)에서 은퇴하였고, 그의 아들 벨사살이 섭정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바벨론은 BC 539년 고레스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 후 페르시아 제국이 세워졌다. 고레스와 그 후계자들의 통치 아래 바벨론 도시는 엄청나게 부요한 상업과 지식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바벨론에는 부유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구약을 연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것이 바벨론 사람의 탈무드에 반영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성경 속의 바벨론


①히스기야 왕과 바벨론 특사

앗수르의 주력부대가 하루아침에 다 죽자, 살아남은 소수는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고대근동 전체에 퍼졌다. 성경은 앗수르의 군인들 18만5천명을 하나님의 사자가 치셨다고 기록했다. 폴 존슨은 헤로도토스를 인용하여 페스트(쥐가 옮긴 전염병)로 군인들이 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앗수르의 군인들이 다 죽고, 남유다가 위기에서 벗어날 즈음, 히스기야는 안타깝게도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살 가망이 없으므로 유언하라고 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사38:1). 그러나 벽을 향해 통곡하며 기도했다.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사38:3).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히스기야가 통곡 기도한 이유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후사가 없었던 점을 더욱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유대고대사’). 이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사38:4~5). 바벨론 왕(므로닥발라단)의 특사는 친필서한과 선물을 가지고 직접 방문한다. “그 때에 발라단(Baladan,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Berodachbaladan)의 아버지(왕하 20:12; 사 39:1)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Merodach-Baladan)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사39:1).


B.C.2000년 직후부터 역사에 등장한 바벨론은 ‘뜨는 나라’였고, 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B.C.1792~1750)왕의 ‘함무라비 법전‘은 친숙하다. 이후 힛타이트족에게 침략당해 약4세기동안 힛타이트의 다스림을 받고, 이후 애굽과 교류하며 앗수르와 패권을 다투는 규모의 나라로 성장했다. 앗수르가 대제국을 형성하는 시기에, 바벨론은 내분으로 앗수르왕 살만에셀3세의 침략을 불러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고, 이후 바벨론은 독립을 유지했지만 사실 앗수르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있었지만 호시탐탐 앗수르를 물리치고 근동의 패권야심을 키우며, 강대국으로의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었다. 이즈음 히스기야는 바벨론 특사의 방문에 크게 감동해 자진해서 보물창고와 무기고, 국내의 비밀들을 다 보여주었다.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사39:2). 남유다의 초라한 실상을 보게 되었다. 바벨론 특사는 정치일정을 잘 마치고 남유다를 정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벨론은 메대와 스키타이를 끌어들여 앗수르를 물리치고 상아시아의 주인이 되었고, 이제 남유다와 애굽을 치기 위해 내려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②이사야 선지자와 바벨론

바벨론 특사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39:3~8). 이사야는 아하스 왕(유다 제12대(BC 735-715)과 히스기야 왕(13대)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세계경영을 말하며 이제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게 망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③바벨론제국 정책과 1,2차 포로(B.C.605년, B.C.598년)

히스기야(BC 715-686)는 15년의 연장받은 생명을 다 살다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12세에 왕이 되어 55년간 통치하면서,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23:26~27). 므낫세의 악행으로 바벨론에 끌려가게 했다가 회개하자 다시 돌아오게 했다.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33:11~13). 므낫세에 이어 아몬이 왕이 되고, 그뒤를 이어 요시야가 남유다왕이 된다.


그는 므깃도에서 애굽의 바로느고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남유다는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다.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애굽의 바로느고는 여호아하스 왕을 왕위에서 내려오게 하고, 요시야의 아들 18대 여호야김(요시야의 둘째아들,엘리아김을 애굽명으로 개명)을 왕으로 삼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고 가 죽였다. 애굽에서 세운 여호야김은 초기에는 애굽을 섬기며 조공을 바치다가 바벨론이 압박하자 할 수없이 바벨론을 섬기며 조공을 바쳤다. 3년만에 바벨론을 배신하고 다시 친애굽으로 돌아서자 바벨론 느부갓네살은 아람,모압,암몬 동맹군을 끌고 남유다를 치러왔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왕하24:1~4). 바벨론은 이때 남유다보다 먼저 애굽을 공격해서 애굽을 바벨론의 속국으로 만든다.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갈그미스 전투‘이다.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왕하24:7).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왕국 유다는 앗수르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다시 바벨론의 발흥으로 인해 느부갓네살 2세 때(BC 605년) 애굽을 점령한 바벨론이 남유다에 들러,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천재 청소년들(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인질로 끌어간 것이 ‘1차 바벨론포로’이다. 그후 18대 여호야김(요시야의 둘째아들)이 죽고 B.C.598년 여호야김의 아들 19대 여호야긴(18대 여호야김의 아들, 20대 시드기야의 조카 /왕하24:8=18세즉위로/대하36:9=8세즉위로)이 18세로 왕이 된지 3개월만에 에스겔을 포함한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디야(20대 시드기야, 여호야긴의 삼촌)를 21세 때 왕으로 세워 11년간 다스렸다.


 예루살렘과 솔로몬의 성전이 BC 586년에 파괴됨. 시드기야 9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시드기야 11년까지 포위하므로 성중에 양식이 떨어지자 도망간 시드기야 아들들은 죽이고, 시드기야는 두 눈을 빼이고 놋사슬로 결박해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나라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이주하였다. 여러 개의 구약 선지서들이 이들 사건들과 밀접히 연관되고 있다. 유다왕 19대 여호야긴이 잡혀간 지 37년(바벨론왕 에윌므로닥 즉위한 해) 옥에서 나와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으며 자유의 몸이 되었다.


④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침(단1:3~4)

바벨론 제국의 인질교육은 이데올로기 정책 때문이었다. 바벨론식 민족교육을 시켜 그들을 정복지로 돌려보내, 바벨론 제국의 이등 민족화를 이끌 지도자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나중에 변형된 형태를 띠긴 했으나, 로마제국, 대영제국도 채택한 모델이다.

1차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벨드사살),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아사랴(아벳느고)는 이름이 바뀌고 왕실의 음식과 옷을 제공받았다(단1:5~7). 다니엘이 레위기법대로 뜻을 정했다(단1:17).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다니엘(단2:1, 2:11~13)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는 성경을 배웠다(창40:8;단2:31~35.24:7).

하루 세 번 기도한(단6:10) 다니엘은 ‘예레미야’ 성경을 통해서 바벨론 제국이 70년이면 끝날 것을 알았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Xerxes,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BC 486-464)(에 1:1). 일반 역사에는 그리스어 음역을 따라 ‘크세르크세스1세’로 알려졌다.)의 아들 다리오(아하수에로(Xerxes,크세르크세스의 히브리 명칭)의 아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9:1~2).

선지자, 최고행정가로 다니엘은 한사람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3대제국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은 공식문건을 통해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냈음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단6:26~27).


⑤에스겔

바벨론으로의 2차 포로는 B.C.598년 즉, 예루살렘이 완전 함락되기 12년 전에 일어났다. 여호야긴 왕을 바벨론으로 끌어가면서 당시 25세의 제사장 에스겔을 포함해 1만여명을 끌고 갔다. 에스겔은 그의 예언서 시작을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5년째부터 시작하고 있다(겔1:1~3). 에스겔은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떠나는 환상을 보았고(겔 10:18),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바벨론에게 복종하라고 권고하였다(겔 11:14-20). 1만여명의 포로 된 남유다 사람들에게 바벨론에서의 몇십년 생활해야 함을 알리고, 예루살렘이 완전 멸망 후 3차로 끌려온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명을 가진 에스겔은 장래의 소망을 알렸다.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렘29:11~14).


⑥70년

여호야김4년(첫번째 바벨론 포로,BC 605년)에서 BC 538년(고레스 칙령으로 첫 번째 귀환할 때까지).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25:11,대하36:6,왕하24:1).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12년째 예루살렘의 완전 함락소식이 전해진다(겔33:21~22). 이 소식 후부터는 남유다 사람들이 에스겔의 말에 귀 기울인다. 총독 스룹바벨도 나타나고, 학개, 스가랴도 등장하고 페르시아의 왕비가 된 에스더가 민족을 구하고 학자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도 페르시아에서 출현하게 된다.


⑦선지자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 하나냐

나라와 민족의 현재와 장래를 위해 많이 울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예루살렘을 비우고 바벨론으로 70년간 다녀오라는 것임을 알고, 빨리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했으나, 남유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친 바벨론주의자, 매국노로 미워해 폭행하고 감금했다(렘18:20,20:2,37:15~16).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이 예레미야를 더 힘들게 했다(렘14:14~18).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4년째 거짓선지자 하나냐는 성전에서 제사장, 백성을 모아놓고 거짓예언을 한다(렘28:1~4). 당시는 1차와 2차로 포로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상태인데, 거짓선지자 하나냐는 2년 안에 바벨론은 망하고 포로와 성전기구들은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예레미야는 거짓예언자 하나냐가 그해에 죽을 것이라고 했다(렘28:16~17). 하나님은 70년간의 포로기간을 말씀하셨다(렘29:4~10).


⑧레위기 토지정책과 포로 70년의 비밀

‘70년’이란 하나님께 레위기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반드시 안식일과 희년을 지켜 행하라고 하셨다(레23:3,25:2~5,26:14).


⑨왕과 선지자의 비밀회동

듣기 싫은 예언을 계속한다고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한 남유다의 고관들은 서기관의 집 토굴에도 갇혔다(렘37:15~16,37:17). 급기야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왕에게 탄원했다(렘37:20~21). 다시 구덩이에 던져졌다. 왕궁 환관의 충언으로 구덩이에 밧줄을 내렸다(렘38:7~13). 시드기야는 자신의 속내를 밝혀 남유다 백성들이 항복하려는 자신을 조롱할 것을 걱정했다(렘38:24). 예레미야는 유다의 최후 네 명의 왕들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바벨론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외쳤다(렘 42:10-12).

구약 선지자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권고함과 동시에 그들의 멸망도 함께 예언했다(사 13;14; 47; 48장; 렘 25장). 앗수르와 같이 역사적인 바빌론은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었던 것이다. 바빌론과 관련해서 다니엘서는 다니엘이 바빌론의 통치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내용을 다루었으며, 예레미야애가는 포로 생활 중에 유대인들이 경험한 실상을 기록.


⑩시드기야 왕과 그의 아들들의 비참한 최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시드기야는 18개월간 성안에서 버티다가 함락되자 분노한 바벨론은 도망간 시드기야의 두 아들은 살해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혔다가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당시 32세였던 시드기야는 11년간 통치했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2차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은 나중 모습이 보기 좋았다(렘52:31~34).


⑪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에스겔이 그린 성전조감도

3차 포로(B.C.586년)

18개월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며 큰 고생 끝에 성을 함락한 바벨론 군인들은 분노가 폭발해 남김없이 부수고 불질렀다(렘52:12~14). 그리고 비천한 자들 소수는 포도농사를 위해 남겨두고, 모조리 잡아간 것이 ‘바벨론 3차 포로’이다(애2:11). 에레미야의 눈물(애3:19~23)과 소망. 예루살렘이 불타고 예레미야가 아파할 때, 바벨론에서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희망을 주신다(겔37:1~6). 그 후 에스겔에게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의 조감도(겔40~44장)를 주신다. 동향한 문, 안뜰의 남문, 성소 내부, 성전 곁의 건물들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제단과 제단 봉헌에 관한 규례. 성전출입에 관한 규례를 주시며, 새 희망을 보인다. 새 성전의 소망은 에스겔이 사로잡혀간 지 25년이 되었을 때이다(겔40:4). 성전조감도 설명(겔40:32~34). 포로기간이 징계가 아닌 평안이라고 말씀하신다.


⑫바벨론에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친 바벨론주의자로 취급받은 예레미야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애5:21~22) 힘을 내서 바벨론에 끌려간 백성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70년이 차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 편지가 다행히 다니엘의 손에 들어갔다(단9:1~2). 그래서 다니엘은 회복될 예루살렘을 기대하며 평생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단6:10).


⑬요시야(B.C.640-609) 시대의 하박국은 바벨론인들의 침범을 예언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합1:5-11).


⑭바벨론성 스케치

헤도도토스의 책 ‘역사’에는 바벨론성이 광대한 평야 가운데 있는 대도시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각 변의 길이가 120스타디온(14마일*1.5km=22.4km)이며, 성 전체의 둘레를 합치면 56마일*1.6km=90.15km이다. 바벨론 성 둘레에는 100개의 성문이 있는데 모두 청동으로 되어있으며, 문주와 상인방도 청동이었다.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로서 물이 가득차서 깊은 해자가 도시 주위를 돌고 있으며 아스팔트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성벽위 가장자리에는 연하여 두채씩 마주보게 지었고, 그 건물 사이로 4두 전차를 타고 지날 수 있을 만큼의 빈공간이 있었다. 바벨론의 도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도시중앙으로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도시를 갈라놓았다. 후에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한 후, 세금을 걷었을 때의 기록에는 바벨론의 국력은 아시아의 1/3에 해당했다고 하니 그만큼 막강한 나라였다.



⑮바벨론 제국의 멸망(B.C.539년)

앗수르, 남유다, 애굽을 비롯해 고대근동을 손아귀에 넣은 바벨론 제국도 70년이 다되어 가면서 내리막길로 치닫는다. 바벨론 제국의 문을 연 느부갓네살은 43년 통치를 통해 군사적으로 무서운 힘과 엄청난 건축사업을 일으켰으나 그가 죽자 쇠퇴의 길을 걸었다. 느부갓네살2세(B.C.605~562)의 아들 아멜-마르둑(Amel-marduk, B.C.562~560)이 2년간 다스렸고, 아벨-마르둑을 살해한 마르둑의 매부 네리글리살(Neri-Glissar)과 네리글리살의 아들 라바시 마르둑(Labashi-marduk,B.C.556)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신하들에게 암살당한 후 느부갓네살의 집안이 아닌, 하란출신 귀족의 아들로 매우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는 나보니두스(Nabonidus,BC 555-539)가 왕권을 차지했다. 느부갓네살과 바벨론 백성은 ‘마르둑‘ 신을 섬겼으나. 나보니두스는 ’신(Sin)‘을 섬기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사살 때 1000명을 초대해 잔치를 열 때 사람의 손가락이 글씨를 쓰면서 그날 밤 벨사살이 죽고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게 멸망했다(단5:29~30).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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