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의식의 치유


글 / 이중표 목사 (한신 목회개발원 원장)

 

사람마다 제각기 자기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도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보고 나왔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을 보면서 자기 얼굴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갤럽 기관이 당신은 당신의 외모에 만족하십니까?”라고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남자들 가운데 만족한다는 대답을 한 사람은 28%였고, 여자들은 13%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외모를 바꾸겠다고 대답한 사람은 남자가 94%, 여자가 99%였다고 합니다.

이 통계가 말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포함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기 얼굴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형 수술을 하고 만족한 사람이 있고 아무리 고쳐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만하는 자아상

 

수년 전에 맥스웰 멀쯔라는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가새로운 미래를 소유한 새로운 얼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것은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얼굴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애의 문이 열렸다는 개개인의 경험담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얼굴이 달라지니까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얼굴을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최근에 또 이런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얼굴을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은 아무리 외모를 바꾸어도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자아상의 성형수술이 되어야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개의 얼굴을 가졌는데 하나는 외형적인 얼굴이고 하나는 내적인 얼굴입니다. 내적인 얼굴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자아상입니다. 내적인 자아상이 바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을 싫어하듯이 자기 인생의 자아에 대하여 싫어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격이나, 가문이나 환경, 성장 배경, 학력 이런 모든 것을 다 싫어하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싫어합니다. 가장 좋아해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싫어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인생의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면 화를 내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더 무시하고 자기를 멸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를 가장 불평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열등감에 꽁꽁 묶여서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우리에게 심어 놓은 무서운 악인데 이것을 낮은 자존감(Low self-esteem)이라고 말하고 다른 말로 말하면 열등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무시하고 낮추는 감정입니다.

 

이런 자아상을 보면서 슬퍼하고 몹시 노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네 얼굴을 만들었는데 너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는데 네 자신에 대하여 부정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열등감은 자기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심리적인 질병입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도 나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나의 무서운 질병입니다. 이런 질병이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의 인생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탄식하고 울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성공하고 찬란한 영광의 금자탑을 남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자로 끝내 버립니다. 부부간에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게 살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 분내고 가정을 감옥처럼 폐쇄해서 대화를 잃어버리고 다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자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항상 질투심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낮은 자존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존감을 열등의식이라고 합니다. 낮은 자존감은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자아상을 열등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고 성공적인 존재로 세우려면 우리 속에 잠재된 낮은 자존감을 치유해야 됩니다.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열등감 때문에 인생을 패배자로 만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등감을 극복해서 더 위대해진 사람도 있습니다.

 

 

열등감으로 오는 나쁜 영향

 

첫째, 열등감은 우리 속에 있는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또 내게 있는 무한한 가능성,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잠식시켜 버립니다.

 

둘째, 열등감은 우리의 꿈을 파괴시킵니다.

희망을 꺾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담력을 상실하게 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상실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나약한 존재,

패배자로 낙인시켜서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 갑니다.

 

셋째, 열등감은 대인관계를 해칩니다.

자기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나가서는 것을 꺼려합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부정합니다.

자기를 밉게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밉게 봅니다.

자신에게 불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불만합니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넷째,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훌륭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한다.’하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고, 하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재능을 다 사장시켜서 초라하게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자아상의 문제인 것입니다.

 

며칠 전에 세계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사건이 과천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은석이라고 하는 한 대학생이 자기 부모를 죽이고 욕실에서 토막내어 비닐 봉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 원인이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해병대 출신이었습니다. 해병대는 귀신 잡는 군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아들을 귀신 취급했던 것입니다. 툭하면 때리고, 윽박지르고, 구박하고, 멸시하고, 집에서 내쫓고 꼭 귀신 쫓아내듯 했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이 나온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잠을 자고 있는 어머니를 새벽 1시에 가서 망치로 죽이고 또 건넌방에 가서 아버지를 죽이고 토막을 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까? 귀신이지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창조의 작품으로 보지 아니하고 귀신으로 봤기 때문에 귀신처럼 취급받은 아들이 귀신들려서 부모를 죽였습니다.

 

열등감은 일종의 병적인 심리 현상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만사에 자신이 없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나는 안된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열등의식 때문에 일생을 패배자로 끝내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열등감의 원인

 

낮은 자존감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봅니다.

내적인 요인에서 오는 열등감과 외적인 요인에서 오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첫째, 외적인 요인에서 오는 열등감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받은 가정과 사회의 영향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열등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의존하고, 기저귀에 의존하면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로 자랍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심리 속에는 나는 의존하고 사는 존재구나!’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낮은 자존감을 만들어 버립니다. “네 형은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해?”하면서 형제간에 비교시킵니다. 또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너는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하면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합니다. 세상이 온통 우리 자신을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어린아이들은 여과가 없기 때문에 어렸을 때 귓속에 들려오는 그대로 다 수용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려주는 대로 잠재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 형제, 선생님이 열등감을 만들어 줍니다. 또 성장해서는 직장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면 열등감이 옵니다.

 

둘째, 자기 스스로 만든 자아상으로 인하여 오는 내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사고, 신학적 사고입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더 심하게는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야.”하면서 자기 자신을 한없이 정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형상을 상실해 버리고 완전히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열등감의 원인이 됩니다. 외적인 것은 성장 과정과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형성되었고 내적인 것은 자기 스스로 잘못된 사고를 갖는데서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하다고 말할 때 자신을 무시하고 격하시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높여 주는 것입니다. 자기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을 높여 주는 것입니다. 자기는 못났다고 무시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기 학대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남을 높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위대한 존재다.”라고 높여 주는 것입니다.

 

열등감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비교의식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외모나 재능, 환경, 학벌을 비교하면서 우울해하고 원망하고 탄식하면 열등감이라는 병이 듭니다.

 

그래서 유명한 엘리슨이라는 분은 이런 병적 열등감에서 불행해지는 결과로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고, 소외감을 갖게 만들고, 공포감, 분노, 적의, 상심, 불안감, 창의력 상실, 시기, 질투, 원망, 좌절, 자기 학대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 때문에 자기를 너무 격하시키고 자학하는 비극, 이것이 바로 열등감입니다.

우리는 열등감이 우리 속에 어떻게 잠재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낮은 자존감을 치유해야 됩니다.


 

열등의식의 치유

 

첫째,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존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한 존재로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생각하면 놀라운 사실은 62억 인구 가운데 나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용모와 성격이 오직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창조 이래 인간으로 살다간 사람이나 앞으로 태어날 억조창생의 인류 가운데에서 나는 유일하게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히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나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무도 귀중한 존재요, 창조의 신비를 담은 걸작품입니다.

 

왜 우리가 자신을 소중히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투자한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면 나 한 사람을 값싸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물건은 지불한 가치에 의하여 값이 결정됩니다. 또 하나는 희소가치에 의하여 값이 결정됩니다. 상품은 아무리 많은 가치를 부여해도 대량 생산입니다. 그러므로 상품으로서 효용 가치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인격을 담은 가치로서 유일한 것이므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전무후무한 유일한 존재로 하나님이 예정하셨고, 또 예정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려 구원하셨기에 자기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구원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너는 내 피로 값 주고 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피 흘리신 만큼 내가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창세 전부터 나를 생각하셨고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이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창세 전에 미리 아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까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자신의 영화로운 모습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크신 은혜를 인하여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대로 태어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오직 영원히 한 번 있는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창조해 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하여 한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또 태어날 기회가 있다면 이대로 태어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화로운 예정에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태어나 되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형상을 닮은 더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210) 

 

공동번역과 새 번역에는 우리는 그의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작품이란 단어는 영어로는 ‘poem’ 즉 시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작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작품이 아니고 시적인 작품이고 아주 놀라운 예술적 작품이며, 걸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육체적인 걸작품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신비한 작품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육체적 작품을 자신에게서 보아야 합니다. 금세기의 유명한 크리스천 의사인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가 공저한오묘한 육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시편 13914절의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한 책으로 그는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기 위해 정자와 난자의 만남이 십조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신체를 세포, , 피부, 동작 네 부분으로 나누어 신비한 해석을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깊은 묵상 속에서 자기 존재의 신비, 탄생의 신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보면서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구나!’하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39 17)


주님은 많은 생각을 하시고 나를 지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많은 생각을 담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보배롭다는 말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성공했다고 느끼든 실패했다고 느끼든 창조하신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많이 생각해 주니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저 광활한 우주의 태양과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는 감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놀라워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내 존재가 얼마나 신기한 작품인지 감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걸작품으로 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창조의 믿음입니다.

나를 이렇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나에게 하나님의 창조품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저에게는 출생의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인물을 연구해 보니 큰 인물들은 모두 긴 강물을 마시고 자랐습니다.


대동강(한경직, 길선주, 김창인),

압록강(김재준, 문익환, 강원용),

낙동강(주기철, 손양원, 조용기),

금강(김충기, 오관석)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런데 나는 만경강물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큰 인물이 되기는 틀렸구나, 하고 낙심이 되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종을 한많은 갈릴리에서 나게 하셨습니까?”

그때 성령께서 종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대답해 주마, 나는 무슨 강물을 마시고 자랐지?”하셨습니다. “요단강이옵니다.” “요단강이 기냐 만경강이 기냐?” “만경강이 깁니다.” “그러면 걱정하지 말아라. 요단 강물 먹고 예수 되었는데 만경 강물 먹고 못 될 리 없다. 나는 대동강이나 낙동강이나, 양쯔강이나, 나일강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강수를 마시고 되었느니라. 나는 요단강에서 성령 받고 성령 충만으로 별세하여 큰 사람 되었다. 종아, 너도 만경 강물 마셔서 안되는 것이 아니니 하늘을 우러러 성령의 강수를 마셔라.”


저는 그때부터 성령의 강수를 마시고 열등의식을 극복했습니다.

성령 충만은 열등의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별세 신앙은 모든 열등의식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외모나 약점에서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열등감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열등감 때문에 이것을 보상하려는 노력으로 오히려 더 큰 성취를 이루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적인 열등감은 자기 학대로 인생을 파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주신 외모, 여러분의 머리 색깔, 여러분의 눈 모양, 얼굴 모양으로 하나님의 작품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목회자가 자기 외모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면 사람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바르게 쳐다보니 못하면 눈과 눈이 마주치지 못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는 제한됩니다. 목회자가 자기 외모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면 그 열등감은 어느 순간엔가 교인을 해치는 상처로 드러납니다.

 

저는 오랫동안 외모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 눈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눈이 무섭게 생겼다고 말하므로 다른 사람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열등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자신이 생겼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두 시간 제자훈련을 하면서 대화 중에 목사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다정다감한 사나이입니다.”하며 저에게 미남으로 생겼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자신감을 갖고 눈을 맞추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열등감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날 때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음에도 모세에게는 강한 열등감이 자리자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열등감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전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10)하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모세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3)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314)

41절에 보면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하고 자기를 세 번째로 부정합니다.

 

모세가 네 번째로 부정하는 말이 10절에 나오는데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311)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313) 하고 다섯 번째로 또 거절합니다.

모세가 자신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셨습니다. 우리가 죄 지었을 때만 하나님께서 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기대를 스스로 자학하고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노하십니다. 열등감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무서운 악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지도력 개발로 유명한 맥스웰 목사님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목사님이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가는 길을 막고 하는 일을 방해하는 한 사람이 앞에서 계속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가 복면한 그 사람의 얼굴을 벗겨 보니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를 가장 방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제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극복해야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중표 목사님에게도 열등감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합니다. 저에게도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입이 둔한 편이고, 자신감이 없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늘 저 자신을 학대합니다. 제 아내가 교회를 개척하자고 권유했으나 저는 못한다고 반대했습니다. 못한다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나는 기장이라 안돼. 시골 사람이라 안돼. 학력이 낮아서 안돼. 능력이 없어서 안돼. 돈이 없어서 안돼.”하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버트 슐러 얘기 하면서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조용기 목사님은 돈 가지고 했나요?”

그분은 능력이 있었지. 그분은 키가 크지.”하면서 여러 가지로 변명하면서 안된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아무리 저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를 하여도 저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개척을 안 하려고 했던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바로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하는 말마다 안된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나왔습니다. 아내는 날마다 안된다고 하는 저를 데리고 신반포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때 신반포 지역은 아파트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현장을 보는 순간 저를 감동시키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 모세에게 들려 주셨던 감동이 제 가슴을 뜨겁게 하면서 나의 못한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하고는 개척의 용단을 내리고 청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여섯 달 동안 산에서 기도했습니다.

 

그 열등감으로 개척을 안 했다면 오늘의 한신교회가 어떻게 생겼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합니다. 그 열등감으로 교회 개척을 안 했다고 한다면 50개의 개척 교회가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이 종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별세의 신학과 수많은 저서가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시골에 갔으면 이런 저서도 못 나왔을 것입니다.

 

내가 나약해서 무엇을 못한다고 할 때 주의 음성을 들읍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 보면 열등감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하는 악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부인에게 여보, 설교를 들으면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해줘.”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이 설교할 때 사투리를 쓴다든지 표정이 밝지 않으면 메모해서 지적해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목사님에게는 열등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모가 펜만 들면 기가 죽어서 설교를 더 못했습니다. 남편이 설교를 못하게 되니까 사모가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일날 목사님이 설교할 때 메모를 하지 않고 아멘 아멘하면서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내려가서 여보, 오늘 뭐 잘못한 것 없소?”하니까 아내가 아니에요. 당신 설교가 너무 은혜로워서 적을 것도 없어요.”하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이 말에 더욱 힘을 얻어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었고 그 교회는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고 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만을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비극이며, 역사상의 모든 질병, 전쟁보다 더 큰 불행을 안겨 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넷째, 현재 있는 것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을 하여야 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못합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라. 너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말로 못하면 내가 네 지팡이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말로 못한다고? 네 손에 지팡이가 있지 않느냐? 내가 네 입의 둔한 것을 지팡이의 권능으로 역사하리라. 네가 네 입이 둔하다고 그렇게 부정하니 네 손에 있는 지팡이로 일을 하리라.’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로 큰일을 했습니다. 아마 모세가 하나님께 주여, 내 입술에 능력을 주시옵소서.”했다면 모세 입에 능력이 나타나 얼마나 큰일을 했을 것인가를 상상하여 보십시오. 그런데 모세가 입으로 부정하다가 결국은 입으로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모세는 입술의 열등감으로 받아야 할 복을 상실합니다. 어디에서 망합니까? 므리바에서 망합니다. 민수기 208절을 보십시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네 말로 명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라.’고 할 때 그는 말을 안 했습니다. 끝내 입이 둔한 자라고 부정하던 모세는 말을 못했고 지팡이로 반석을 쳤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20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을 끝내 부정하면 하나님은 노하시고 모든 복을 거두시고 심판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에게 입으로 못하고 다른 능력으로 일하셨습니다. 지팡이에 능력을 주셔서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을 깨뜨려 생수가 흘러 나왔습니다. 지팡이 하나로 수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지팡이를 높이 들면 수많은 군중들이 그 지팡이를 보고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고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합니다. 원래 말로 하려 했던 것을 지팡이로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체적인 열등감이 있었고 말이 둔한 자였습니다. 그가 말로 했으면 2천년 전 소아시아의 설교자로 끝나 버렸을 것인데 글로 써서 교회에 보낸 것이 13편의 서신이 되었습니다. 말은 사라져 버렸으나 글은 2천년, 앞으로도 종말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변화를 일으키며,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며 교회를 세워가는 위대한 일을 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못하면 저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짧으냐 왼손으로 하라. 눈이 멀었느냐 입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입으로 못한다면 지팡이로 하십니다.

 

우리 선배요, 한국 교회의 자랑스런 맹인 교수인 양정신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렸을 때 맹인으로 태어나서 아무것도 쓸모없는 자라고 집안 식구들이 구박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주여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 “딸아, 네가 눈은 쓸 수 없으나 귀는 쓸 수 있지 않느냐, 입을 쓸 수 있지 않느냐, 머리를 쓸 수 있지 않느냐, 손을 쓸 수 있지 않느냐?” 그때 어린 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나이다.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나이다.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하겠나이다.”

그는 위대한 목사요, 위대한 교육학자가 되어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다섯째, 큰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내게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가져갈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열등한 것으로 하나님을 보여야 합니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16)

 

하나님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나의 약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 나의 좋은 것으로는 아무리 나타내도 그것으로 누가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말 잘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병을 고쳐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같이 봅니다. 내가 무능하고, 약점이 있고, 허물 많은 사람인데 의로워지고, 변화되고, 새로운 일을 하게 될 때 하나님같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너무 열등화시키고 패배자로 좌절하면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상상하십시오. 영광스런 자신을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나를 맞이할 그날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당당하게 일어서십시오. 우리 마음속에 담아 주는 새로운 자아상을 가지고 우리의 입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신비한 하나님의 언어를 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말 대신에 할 수 있다는 말로, 불평하는 말 대신 감사의 말로, 못났다는 말 대신에 쓸모 있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에 대하여 무시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내 인생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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