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서서히 사라지고 이제는 인생백년왕왕지사(人生百年往往之事)라고 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안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 생애를 마감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면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홍안소년 미인들도, 영웅호걸 열사들도, 부귀공명을 누리며 잘나가는 사람들도, 세상을 호령하던 왕후장상들도, 하루 하루 호구지책을 위해 고생하며 살가는 저자거리의 힘없는 필부들도... 빈부귀천 남녀노소 구분없이 그 누구도 이 죽음 앞에서 공평하게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 갑니다.


결국 사람이란 집행날짜만 모른채 살아가는 사형수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그래서 언젠가는 반드시 한 번은 맞이해야 할 이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앞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13년간 호스피스 생활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 보았던 어떤 분은 "죽음이란 적이 아니다. 위엄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 인간삶의 종착역이다"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生命)이란 살라는 명령이고,사망(死亡)이란 죽어서 망한다는 뜻입니다. 곧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본래 없었던 것이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이를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를 비본래(非本來的)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생명은 창조 질서이기에 애착을 갖게 되는데 이를 본래적(本來的)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어 종결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믿으며 살아 갑니다.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세상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를 너무 많이 지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자기는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사후에 관련해서 아무런 마음의 준비나 확신이 없는 사람들로서 개중에는 아예 의도적으로 그렇게 결론짓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확실한 근거도 없이 혼자 결론짓는 것이 너무 주관적이고 독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보다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여 위로 받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깊은 학문이 있고 세상에서 존경받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많이 배운 그 사람들이 저렇게 그냥 살아가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깨닫고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다수가 그렇게 살아가니 나도 그렇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다수라는 인간적인 기준에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맡긴채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세상 살면서 선한 일도 많이 했고 내 양심에 크게 가책받을 만한 일은 한적이 없으니 사후의 세계가 없으면 그만이고 만약 있다면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조상님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시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기 선행이 보험에 가입한 것처럼 자신의 내세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 보다 더 악하게 살던 사람들도 잘먹고 잘살다가 죽었는데 굳이 확실치도 않는 사후의 세계를 대비하는 문제 때문에 이 좋은 세상을 즐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불편하게 살 필요가 있겠는가?


이처럼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면서도 당장 즐기는 세상 것 때문에 잘못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나이도 젊고 아직 죽을 때가 멀었으니 나중에 늙어서 할일 없고 힘없을 때 차차 생각하면 되겠지...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사후의 세계가 있다면 분명히 신이 존재할테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은 악한 사람이 득세하고 선한 사람이 고생한단 말인가?

이것만 보더라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사후의 세계란 것도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인간이 만든 허구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던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당신의 자유로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필연(必然)이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후의 세계를 믿지않는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 많은 불쾌감을 느낄 것이라는 짐작이 갑니다만 그렇더러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심성 깊은 곳에 사후의 세계를 인정하는 인간 본래의 영성이 자리잡고 있어 조건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아닐런지요?


좌우지간 이것은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도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무엇엔가 실패했을 경우 칠전팔기의 집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문제는 단회성(單回性)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죽음은 연습해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듣고 보고 하기 때문에 죽음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던가 또는 면역이 생겨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죽은 후에는 두번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재수도 삼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과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한 번쯤은 마음의 문을 활짝열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재미가 아니라 의미를 위해서 당신의 소중한 시간 잠시만 빌리겠습니다.



2. 인간은 죽음으로 소멸되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공자의 제자 계로(季路)가 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문제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아직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신 섬김을 알리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계로가 다시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르침이 이조500년간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고

동양의 성현으로 추앙받는 공자님조차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신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15:51-54)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히브리서9:27)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術客)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사26:1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8-29)
•사망도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4)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8)


죽음이란 존재방식의 변화를 의미할 뿐이지 의인이던 악인이던 존재 자체가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육신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보다 더 본질적 존재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마치 컴퓨터가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문제는 종교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속시원하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과학적 증명이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죽음이란 영혼이 그 육체와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임사체험(臨死體驗) 경험자들의 말을 빌리면 사후에는 육신에 거할 때 보다 훨씬 더 명료(明瞭)한 의식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정정도 높이에서 죽어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게 됩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신을 소생시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기도 합니다. 가족들이 자기의 시신을 부등켜 안고 울부짖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교통사고로 임사체험을 했던 어떤 사람은 소생 후에 여러명의 교통 경찰관들 가운데서 자신의 사고현장을 담당했던 경찰관을 정확히 찾아 냈고, 자신을 응급치료했던 의사도 찾아 내었으며, 응급실에 찾아 왔던 가족들이 누구 누구였다는 사실도 명확히 알아내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또 임사체험후 소생한 어떤 맹인은 죽은 후에 밝히 볼 수 있게되어 병원을 찾아왔던 유족들의 옷색깔을 정확히 말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체험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를들면 문을 열지않고 나갈 수 있으며 벽을 그대로 통과하는 체험을 한다던가 어느 곳을 생각하면 이미 그곳에 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던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린도전서15:19)

이 모든 사실들은 현대과학이 풀 수 없는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좋은 사례들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비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신비한 내용입니다. 의인의 육체던 악인의 육체던 결국에는 모두 부활하게 되며 분리되었던 영혼과 재결합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아파트를 재건축하려고 철거하면 거기에 살던 사람은 이사를 가게 되고 재건축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보다 더 좋은 집에 들어와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의인의 부활은 영생을 위한 영광의 부활이지만 악인의 부활은 불못에 던지우는 영벌을 위한 심판의 부활입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 믿고 부활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부활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 받아 지옥 가기 위해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하는 이유와 목적이 서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을 영생(永生)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을 영벌(永罰)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을 받던 받지 못하던 모두 영원히 존재케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와 같이 죽음을 부활과 함께 말하며 아울러 영생과 영벌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군데에서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실적인 내용들이라는 점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고 어떤 사람에게는 황당스럽게까지 느껴질 수 있는 이 말들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엄청난 비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는 결코 더 이상의 비밀이 아닙니다. 오직 신비할 따름이요 소망중에 그날을 기쁨으로 기다릴 뿐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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