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사랑 지나치니, 역사가 바뀌더라


입력 : 2017.12.20 03:04

세종 며느리 잔혹사와 둘째 며느리 윤씨

조선 최고 성군 세종, 여섯 부인 사이 18남 4녀… 며느리 간택에 노심초사
사랑 얻으려 주술 쓰던 첫 번째 맏며느리 퇴출
재혼한 둘째 맏며느리는 동성애로 대소동
넷째 며느리는 정신병이 드러나 퇴출
첫 번째 막내며느리 '병에 걸렸다' 핑계로 강제로 이혼
막내아들은 불륜 끝에 첫 부인과 재결합
막냇동생 불륜을 방조한 둘째 형, 수양대군… 혼맥 이용해 권력 쟁취
남편 수양을 좌지우지한 윤씨, 진정한 승자?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 4대 임금 세종은 자식 농사에 대풍(大豐)을 거두었다. 세종은 정비와 후궁 합쳐서 부인이 여섯 명이다. 자녀는 스물두 명이었고, 그 가운데 아들이 열여덟 명이다. 열한 살이던 1408년 두 살 연상인 청송 심씨와 결혼해 4년 뒤 딸을 낳았다. 나이 열다섯에 아빠가 되고 31년 뒤인 1439년 후궁 신빈 김씨 사이에 막내 담양군 이거(李璖)를 낳았다. 가장 예뻐한 아들은 1434년 정비 소헌왕후가 낳은 막내 적자 영응대군 이염(李琰)이다.

신하들에게 혹독한 상사였다. 본인 스스로 지독한 일벌레였다. 아버지 태종을 걱정시킬 정도로 고기만 밝히는 편식가였다. 말인즉슨 건강에 안 좋은 일은 골라서 다 했다는 이야기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세종은 당뇨와 안질, 비만 따위 성인병을 평생 앓았다.

아들이 많다 보니 며느리도 많았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시대 부모들은 아들 잘 내조할 여자를 찾고 또 찾았다. 세종도 그랬다. 좀 많이 그랬다. 며느리 하나하나를 직접 챙겨 아들 장가보내고, 장가간 아들을 강제로 이혼시켜 더 나은 규수를 며느리로 들였다. 아버지 세종의 며느리 간택 작업, 끝이 잔혹했다. 시작은 1425년 세종 7년 1월 5일 풀린 전국 결혼 금지령이다.

질투와 동성애 맏며느리들

실록에 따르면 이날 세종은 이조판서 허조에게 이리 명했다. '세자빈을 간택하기 위해 열세 살 이하 처녀들 혼인을 금지했는데, 부모가 늙고 병들어 속히 혼인을 이루려는 자가 있을 것이니 합당한 자 두세 명을 간택하고 나머지는 혼인을 허용하도록 하라.' 혼기가 찬 왕세자 문종 부인을 고르기 위해 내렸던 금혼령을 풀겠다는 말이다. 최고 규수를 다른 집안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조치였다. 그런데 뭐가 꼬였는지 결혼 금지령은 넉 달 뒤인 5월 1일에야 풀리고, 2년 뒤에야 장남 문종 혼례식이 거행됐다.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간택된 안동 김씨 규수가 휘빈 김씨다.


아비를 쏙 닮아 학문에 열중한 세자였다. 세종이 만들어준 경복궁 동궁 집무실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남편이었다. 왕이 될 남편이었다. 학업에 열중하는 열세 살짜리 남편을 사무실에 두고, 휘빈 김씨는 속을 앓았다. 공부만 할 줄 알았던 남편이 덕금이, 효동이 같은 궁녀들과 놀아난다는 말도 돌았다. 하여 휘빈 김씨는 호초(胡椒)라는 시녀에게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물었다. 술법은 이러했다. 궁녀들 신발을 태워 그 재를 술에 타서 남편에게 먹이기. 교미 중인 수컷 뱀 정액을 천에 묻혀서 다니기. 그러면 남편이 돌아온다고 했다. 며느리를 심문했던 세종이 이리 말하였다. "뜻밖에도 (며느리) 김씨가 미혹(媚惑)시키는 방법으로써 압승술(壓勝術)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세종 11년, 1429년 7월 18일 일이다. 세종은 호초를 옥에 가두고 며느리를 쫓아냈다. 이틀 뒤 세종은 종묘에 이 같은 사실을 고하고 휘빈 김씨 아버지 김오문과 큰아버지 김중엄을 파면했다. 호초의 아버지 이반도 파면했다. 호초는 목을 베 죽였다. 그날 전국에 다시 금혼령이 떨어졌다.(1429년 세종실록 11년 7월 20일)

석 달 만에 새로운 며느리가 간택됐다. 이번에는 순빈 봉씨다.

왕실의 평화, 딱 7년 갔다. 1436년 10월 26일 세종이 이리 말한다. "괴이한 일이 있는데 이를 말하는 것조차도 수치스럽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한다. "부모일지라도 침실(寢室) 일까지 어찌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세자와 세자빈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고심 끝에 세종이 후궁 셋을 들였다. 후궁 승휘 권씨가 임신을 하자 사달이 났다. 봉씨가 자기도 임신을 했다고 소동을 피웠다. 궁궐 물건을 친정으로 빼돌리다가 발각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행동을 했다. '시녀들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 외간 사람을 엿보고' '시녀들과 잠자리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이 놀라서 소헌왕후와 함께 소쌍(召雙)이라는 시녀를 불러 캐물었다. 소쌍이 답했다.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해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1436년 세종실록 18년 10월 26일) 세종은 그날로 며느리를 쫓아내고 이리 명했다. "추잡한 일은 빼고 다른 일만 적어서 세상에 알리라."

경혜공주를 낳은 승휘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됐다. 권씨는 단종을 낳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 죽었다. 문종은 새로운 왕비를 맞지 않았다. 왕비 없이 권좌에 있던 유일한 왕이다. 물론 후궁은 여럿 있었지만.

골머리를 앓은 시아버지, 세종

며느리에 관해 골치 아픈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순빈 봉씨를 내쫓기 3년 전, 세종이 정승들에게 타는 속을 털어놓았다. 넷째 며느리 남씨에 관해서다. "며느리가 열두 살이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눈빛이 바르지 못한 데다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미친 듯하다."(1433년 세종실록 15년 6월 14일) 하도 이상하여 세종이 탐문한 바, 남씨는 어릴 때 미친 병이 생겨 치료를 받았고, 운수가 좋아서 대군의 배필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오히려 믿지 못하여 날마다 두고 보았더니, 행동이 방자하여 떳떳함이 없으므로 좌우에서 웃었으나 조금도 괴이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과연 소문과 같다." 아홉 살에 궁중으로 시집온 남씨는 3년 만에 쫓겨났다.

수양대군 옷으로 추정되는 저고리.
수양대군 옷으로 추정되는 저고리. 고름이 잔뜩 묻어 있다. 상원사 목조 문수보살상 속에서 나온 유물이다. 수양대군은 평생 피붓병을 심하게 앓았다. /월정사성보박물관 소장


다섯째 며느리 평산 신씨는 엄한 성리학 시대에 불교를 숭상했다. 남편 광평대군이 요절하자 스스로 비구니가 되었다. 시아버지가 내려준 막대한 재산 절반을 털어 절을 지었다. "초파일에 법회를 여니, 승려 수가 천 명이 넘었다."(김수온, 식우집(拭疣集), '견성암법회기') 한강 남쪽에 세웠던 이 웅장한 절 견성암이 지금 봉은사다. 토지가 70결(4만2000평)이 넘고 노비가 1000명이 넘었다. 조정에서 신씨를 처벌하자고 했지만 손자 격인 성종은 묵살했다.(1471년 성종실록 2년 9월 14일)

막내며느리 송씨와 정씨

세종 나이 서른일곱. 지금으로 치면 쉰이 넘은 늘그막에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영응대군 염(琰)이다. 세종은 막내를 무르팍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다른 아들들은 궁중 예법에 따라 그를 '진상(進上)'이라 불렀지만 영응에게는 '아버지'라 부르게 했다.(영응대군 신도비) 함께 사냥에 나가서 지친 짐승이 보이면 일부러 아들에게 몰아주기도 했다. 기력이 쇠하자 세종은 영응대군 집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았다. '어부(御府)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寶貨)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갔다.'(영응대군 졸기)

1444년 7월 세종은 직접 경복궁 사정전에서 규수들을 면접하고 막내며느리를 골랐다. 대방부부인 여산 송씨다. 영응대군 열 살 때다. 그런데 5년 뒤 세종은 송씨를 또 쫓아낸다. '병에 걸려서' 쫓겨난 것이다. 실록에는 병명이 적혀 있지 않으니, 사람들은 '아들 못 낳는 병'이라 추정한다. 아들 영응대군은 해주 정씨 규수와 강제로 결혼했다.

그런데 막내아들은 아버지 등쌀을 참지 않았다. 재혼한 뒤에도 첫 아내 송씨 집을 수시로 찾아가 정을 나누더니 딸까지 태어났다. 그것도 둘씩이나. 급기야 둘째 부인 정씨와 이혼하고선 송씨와 또다시 결혼을 해버렸다. 실록은 기록한다. '부왕 명령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버릴 만한 죄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기고 받아들였다.'(영응대군 졸기) 아비의 독한 간섭과 아들의 독한 사랑이 이후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주인공은 영응대군의 둘째형, 수양대군이다.

며느리 잔혹사의 승자, 정희왕후

첫 아내를 못 잊는 막내를 데리고 다닌 사람이 둘째 형 수양대군이다. 수양은 조카 단종이 등극한 뒤 영응 손을 잡고 송씨 집을 들락거렸다. 송씨 오빠 송현수가 수양의 친구였다. 수양은 세상 손가락질을 받으며 막냇동생에게 사랑을 돌려줬고, 대신 권력에 한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송현수의 딸을 자기 조카, 단종에게 시집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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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며느리 잔혹사의 끝을 장식한 승자, 정희왕후의 묘.


허울만 있는 권력자 주변을 측근으로 채운 수양이 마침내 정적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으니, 그가 세조다. 수양이 김종서를 찾아가 던진 질문이 영응대군 처리 문제였다. "영응대군 부인 일을 탄핵하려고 하는데, 정승이 지휘하십니까?"(1453년 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말 없는 김종서 머리에 철퇴가 떨어졌다. 죽인 자 가운데에는 친구 송현수도 있었다. 송현수의 사위이자 자기 조카이자 왕인 단종도 있었다.

자, 이제 며느리 잔혹사 마지막 장(章), 세종의 둘째 며느리 정희왕후 윤씨 이야기다. 보통 여자가 아니었고, 보통 며느리가 아니었다. 여걸이었다.

'처음에 정희왕후 언니와 혼인 말이 있어 감찰각시가 집에 가니 (정희왕후가) 짧은 옷과 땋은 머리로 주부인 뒤에 숨어 보는 것이었다. 이를 범상치 않게 본 감찰각시 추천으로 언니 대신 동생이 세종 며느리가 되었다.'(송와잡설) 1428년. 수양은 열두 살, 정희왕후는 열한 살이었다. 시아버지 세종 또한 생전에 그녀를 총애하였다. 아이가 싹싹한 데다, 맏며느리 휘빈 김씨에 질린 탓도 있었다.

남편 나이 서른다섯 살 때 부엌에 있는 가마솥이 징징대고 울었다. 이에 비파라는 무당이 아내 윤씨를 찾아와 이리 말했다. "수양대군이 서른아홉 살에 등극할 징조요." 4년 뒤 계유정난이 났다. 쿠데타를 일으키러 나가는 남편 수양에게 갑옷을 입혀 격려한 사람도 그녀였다. 머뭇대는 남편 등을 떠밀었다는 기록도 있다. 부부는 어디를 가든 함께 다녔다.

마침내 수양이 왕이 되었다. 세조는 13년 권세를 누리다 죽었다. 아들 예종이 요절하고 손자 성종이 열두 살에 왕이 되었다. 정희왕후는 이후 6년을 수렴청정하며 성종을 다스리고 권력을 완성했다. 스스로 "나는 글을 읽지 못하니 자격이 없 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여걸이었다. 그 여걸이 경기도 남양주 광릉에 남편 세조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겨울 햇살을 함께 받고 있다.

성실한 천재, 세종이 창조한 며느리 세계였다. 야심만만한 둘째 아들 수양이 그린 큰 그림 속에서 그 세계는 내부에서 붕괴됐다. 수양이 승자였다.
남편보다 야심찬 아내 윤씨가 그 뒤에 있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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