杜門不出과 황희정승(黃喜政丞)

고려말 최영장군은 상소를 올렸어요
요동((遼東)은 고구려때부터 우리의 고유 영토인데
명나라가 이곳을 침탈하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하려하니

이를 정벌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에 정벌불가를 외치는 온건파 대신들도 있었지만

도당(都堂)은 중론을 걸쳐 요동정벌에 나섰어요

.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대군이 위화도(威化島)에

당도하자 압록강이 장마로 물이 불어

고려의 5만 대군이 강을 건널수가 없었지요.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으나 장마는 계속되었고

병사들에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이성계는 소위 ‘4대불가(四大不可)’론을

내세우며 상소를 올렸지요.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않은 일이며
둘째, 긴장마철에 군사를 동원하는것은 여러모로 부적당하다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에 남쪽에서는 왜
구의 침입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넷째, 날씨가 무덥고 비가 많이오면
화살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수없을 뿐만아니라


병사들은 많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고려왕실에서는
이성계의 상소를 묵살하고 계속 진군을 명하였으나
참다못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고려왕실과 맞섰지요.


결국 최영장군을 유배시키고 왕을 폐위시켰으며

정도전 남은 배금련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어요.


이때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끌어들인 사람은 정도전((鄭道傳)이었지요.


그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진 고려를 폐하고 유고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계획한 것이지요.


결국 고려왕조는 무너지고 새로운 이씨조선이 건국되었어요
이때 고려의 많은 유생들은
이신벌군(以臣伐君)'신하가 임금을 치다'에

분개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 ‘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길수는 없다’는

정절을 내세우며 고향을 등졌어요.


이들이 모인곳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두문동(杜門洞)이었지요.


이들은 동네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워 걸어 잠그고

일체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산나물을 캐어 먹으며 살았어요.


그러자 이성계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대신들를 보냈으나

끝내 나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지르고 두문동을 불태워 버렸지요.


이때 불에타 숨진 유생들이 72명이라 하여

두문동72현 이란 말이 생겨 났지요.


다시말해
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

또는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은
고려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킨 72인의 유신(遺臣)들을 가리키지요.


공자가어와 사기는 공자의 승당제자를 72명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를 본받아 두문동 유신을 72현으로 부르게 되었어요.


그래서 동국 18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이며
두문동72현은 근대화 이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절개(節槪)와 충(忠)의 표상이 되었지요.


이들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현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인 일명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역조(易朝) 즉,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어요.


조선 왕조는 이들의 학식이 아까워 회유하고
설득 하였지만

끝내 따르지 않자 두문동을 포위하고

산에 불을 질러 이들의 은거지를 위협하였으나
끝내 지조(志操)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고려 충신

72인이 불에타 숨졌다고 전해지고는 있으나
72인은 공자의 제자 숫자이며

실제 불에 타 숨진 유생의 숫자는 불분명하다 하지요.


이후 정조때인 1783년

당시 개경부유수였던 서유방(徐有防)이 두문동 72인 중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맹(孟)씨
세명을

숭절사(崇節祠)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여 이를 관철 시켰으며,


그후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을 모셨고
후대에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등이

추가로 이곳에 배향되었어요.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인 성석주(成碩周1649~1695)가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가문에 전해지고 있었는데,

 

고종때 사헌부 장령 성대진(成大璡)이 두문동실기를 증보한

두문동실기(병)속록(杜門洞實記(幷)續錄)을 편찬하여 전해지고 있어요


당시 많은 선비들은 불사이군의 선비정신을 부르짖으며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이름은 은거의 상징이 되었고
두문동이라 칭하는 곳이 나라 안 여러곳에 생겨나게 되었지요.


이후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하였으며
그 어원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원래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은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중국의 사마천의 《사기》 권68 

상군열전 공자건두문불출이팔년의(公子虔杜門不出已八年矣)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지요.


이후 이성계는 모든 정성을 다해 회유하고 설득하였으나
끝까지 두문불출한 개성 유생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향후 100년간

개성 유생들은 과거를 못보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개성 유생들은

생계를 위해 장사를 선택하게 되었지요.


이들이 훗날 그 유명한 "개성상인"이 되었지요.


이때 황희(黃喜)라는 유생도 고려가 멸망하자

처음에는 두문동에 은둔하며 지냈는데
두문동 동료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두문동에서 나왔다고 하지..


야인 생활을 하던 황희 유생은 동료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태종때부터 세종, 문종까지 3대에 걸쳐

왕들을 보좌했던 명재상이 되었지요.


조선 초기 60여년을 관직에 있었고 영의정(領議政)을

18년이나 지낸 황희 정승(政丞)은 동시대의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청백리의 귀감으로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황희 정승에게는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어요.


어느날 황희정승이 들을 지나다가 밭을 가는 농부를 보고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느냐?”고 묻자
농부가 밭 갈기를 멈추고 황희에게 와서 귓속말로 답하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황희가 되묻자
“아무리 짐승이라도 잘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좋아 할리가 있느냐고 하는 말을 들은 후로는
평생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또 두 계집종이 다투다가 황희에게 와서

이에 시비를 가려줄것을 청하자 자초지경을 다 듣고난후
각자에게 네 말이 옳다 또 네 말도 옳다 고 하였어요.


이 말을 옆에서 듣고있던 조카가
“하나가 옳으면 하나는 그른 법이지

어찌 둘 다 옳을수가 있느냐?”고 하자
“응~ 네 말도 옳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일에 관대했을 뿐

중요한 국사에 임하여서는 시비곡직을 분명히 하여
양영대군의 폐 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되는 등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으면서도
그의 관직생활 중에는 좌천이 2번 파직이 3번

귀양살이가 4년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세상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요.


김종서가 병조판서 시절 의정부 회의에 참석했는데
자세가 바르지 못했던지 회의가 끝난 후 영의정이던 황희가

큰 소리로 여봐라 병판대감 의자 한쪽 다리가 짧은가보다

빨리 고쳐드려라”라고 호통을 치자
깜짝 놀란 김종서가 의자에서 황망히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고 하지요.


이를 민망하게 바라본 좌의정 맹사성이 퇴청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신 대감께서

유독 김종서에게는 왜 그렇게 엄하게 하시오” 했더니
“우리는 늙었고 장차 김종서가 뒤를 이어야 할 것이니
그를 바르게 키워야 하지 않겠소?” 했다고 하네요.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

30세(1392) 되던 해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불사이군(不事二君),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72현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던 황희는,


“젊은 자네는 나가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일하라”는
선배들의 간곡한 권유로
두문동에서 나와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였지요.


반대 인사였다는 질시 속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태종이 등극한 후로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의 정랑을 거쳐
도승지의 전신인 지신사가 된 43세경부터

자기 소신을 펼치기 시작 했어요.


그후 공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태종과 함께한 18년 다시 세종과 함께한 27년 그 동안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18년이나 하면서 <경세육전><국조오례>등을 편찬하여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내치에 힘써 태평성세를 이룩함으로써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등 위업을 달성할수 있게 하였지요.


세종 31년(1449) 87세 되던 해에 60여 년간의 관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3년후 90세로 한양의 석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지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종대왕이 문병을 왔다고 하는데
재상을 20년 넘게 지낸 90세 노인이
초가삼칸집 멍석자리 위에 누워있었어요.


이를 본 세종대왕이 깜짝 놀라 이럴수가 있느냐고 하자
그는 태연하게 늙은사람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가 십상입니다 라고,

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청백리(淸白吏)로 살아온 황희정승은

많은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의 공직자들은 어떠한가요?
특히 국회나 검찰 ,법원 그리고 언론들은

뼈를 깍는 자성(自省)이 있어야 하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조동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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