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본관 안동. 본명 병연.

속칭 김삿갓. 자 성심. 호 난고. 경기 양주 출생.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이 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형 병하와 함께 종이던 김성수의 구원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 거기서 공부를 하며 성장하였다.


뒤에 사면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폐족자에 대한 천대가 심하고 벼슬길도 막혀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즐겨 큰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므로

삿갓이라는 별명도 여기서 생겼는데,

전국을 방랑하면서 도처에서 즉흥시를 남겼다.


그의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고,

그런 작품에 뛰어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방랑을 계속하여

전라도 동복에서 객사하였다. 작품으로 《김립시집》이 있다.


김삿갓은 우리 문학사에서 남다른 시인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봉건적인 체제 속에서 남다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 쳤으며,

그러한 몸부림을 한시의 형식 파괴로 보여 주었다.....


그의 시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더 큰 이유는 그가 한시의 형식을 파괴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형식이 파괴된 한시를 통해서 당시의 통속적인 가치 관념까지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김삿갓의 사상


김삿갓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명을 김란이라 하고 난고 외에 이명이라는 호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명(而鳴)은 중국 서적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있는

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년을 넘으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상에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폐족이라는 계급적 지위, 종의 집에서 자라난 유년 시기의 성장 과정,

또는 일생의 방랑 생활이 말해주는 불우한 사회적 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가 살던 조선 말기의 사회 환경과

시대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만인이 갈망하는 벼슬을 포기함과 동시에 당시 봉건 질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그 사상과 태도 속에는

멸망과 붕괴에 직면한 민중들과 사회의 시대적 기운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이러한 사상 경향의 심도와 강도가 매우 철저하고 강렬했다.
일생 동안 방랑 생활을 하는 중 그의 아들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귀가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점, 모친이 계신 외가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들러서 직접 만나지는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러 온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갔다는 이야기,

친구 정현덕의 주선으로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 받을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둘째, 사상 경향의 표현 방법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우선 방랑 생활 자체가 불평과 반항의 한 표현이었다.

그 이전의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고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기이하고 광적인 행동도 반항적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황오의 녹차집에는 '하루는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

오기를 천하 기남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과연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석우는 해장집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되 어떤 때는 수십 편을 짓고 나오고

어떤 때는 한편도 안 짓고 나오니 그 광태가 이와 같더라....

과거장 밖의 술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사랑하나 그 광태를 무서워하여

술을 모조리 먹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기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 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 보다는

봉건적인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천문학사 발행 <김삿갓 풍자시 전집> 참조.


(어린시절과 성장배경)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선천 방어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함으로써 그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되어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형과 함께

그를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에서 숨어 산다.


여덟 살에 조정의 사면으로 집으로 돌아오나

그 가족들이 온전히 터 잡고 살 곳이 있겠는가.

여주, 가평, 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을 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글공부에 힘 쓴다.



(학문과 업적및 사상에 대해서)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본받을점)


어린시절.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글공부에 힘썼던점


1. 김삿갓 
본이름은 김병연이며,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했기 때문에 흔히 김싯갓이라고 불리움


2. 가정 배경
①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김안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② 다섯 살 되던 해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던 할아버지(김익순)가 반란군과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여 역적의 집안이 되어 멸족의 화를 입기에 이름
③ 후에 정상이 참작되어 벌이 감해지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자식들이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신분을 감추고 삶
④ 나이 어린 김삿갓은 자기 집안의 사정을 모르고 자람


3. 뛰어난 재능
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에 통달하였고, 글재주 특히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남
② 방랑 생활을 하면서 사회 풍자와 해학이 담긴 시를 많이 지음


4. 방랑의 계기
① 20세 되던 해에 영월 고을에서 실시된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함.
② 그 때의 시제가 "가산 군수 정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아라." 였는데,

    그는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백 번을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경멸하는 시를 쓰게 됨
③ 이후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역적의 자손이며,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생활을 하게 됨


5. 계속된 발랑 생활
① 방랑 생활 4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1년 정도 묵기도 했으나,

    다시 집을 떠남
② 한 번은 충청도 계룡산 밑까지 찾아온 아들을 재워 놓고 도망하였고,

    1년 만에 물어 물어 경상도 어느 산촌까지 찾아온 아들을 심부름을 보낸 후 도망을 함
③ 계속된 방랑 생활로 몸이 쇠약해져,

    전라도 어느 선비 집에서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침


6. 방랑 생활에 대한 평가
1)긍정적인 평가 

자신이 역적의 자손이며, 비록 모르고 한 일이지만

할아버지를 욕보인 죄인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방랑 생활을 한 것은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핑계를 대고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삿갓은 양심의 가책으로 속죄를 위해

방랑 생활이라는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였을지 모른다.


2)부정적인 평가 

김삿갓이 방랑 생활을 선택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다른 입장에서 더 나은 대안이 없었을까?


조상에게 지은 죄에 대해 속죄하는 방법으로

다른 것을 찾을 수는 없었을까?


역적의 자손으로 속죄를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또 조상에 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홀어머니를 더욱 극진히 모시고

자식들을 잘 기르고 가르쳐 떳떳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법이 없었을까?


김삿갓이 근거로 삼았던 도덕 원리는 과연 참인가?

모두가 그 상황에서 김삿갓과 같이 행동하여도 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면

김삿갓의 선택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나올 것이다.


※ 참고 자료
큰 삿갓을 쓰고 대나무 지팡이 짚고 한평생을 떠돌아다닌

방랑시인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었다.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할아버지의 잘못으로 집안이 온통 죽음을 당하게 되는 고난을 겪게 된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되어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형과 함께 그를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에서 숨어살게 된 김삿갓은 여덟 살에 조정의 사면으로 집으로 돌아오나

그 가족들이 온전히 터잡고 살 곳이 없었다.


여주, 가평, 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을 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김삿갓은 글공부에 힘썼다.


 나이 스물, 결혼한 그 해,

운명을 다시 바꾸게 한 시골에서의 백일장을 보게 되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공교롭게도 시험의 제목은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찬양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한탄하라" 였으니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보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야만 했다.


"한 번은 고사하고 만 번 죽어 마땅하고 /

너의 치욕스러운 일동국의 역사에 유전하리."


그는 조부를 규탄하는 명문으로 장원에 급제하나

할아버지를 팔아 입신양명 하려고 한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껴

글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 생활을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백일장을 보기 전에는

그의 조부가 김익순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김삿갓은 신분 상승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지만

부패한 과거 제도에 실망을 하고 어느 세도가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던 중 그의 출신 성분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제도권 진입을 포기하고 스물 다섯에 기나긴 방랑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김삿갓의 살림이라곤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는 큰 삿갓,

개나리 봇짐 하나,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가 전부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특이한 복장을 한 김삿갓에게 물었다.

 "어찌 그렇게 큰 삿갓을 쓰고 다니오? 불편하지 않소?"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몸이라 그러오. 허허허"

김삿갓은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그의 본명인 김병언으로 불려지지 않고 김삿갓이라고 된 것이다.

방랑 초기에는 지방 토호나 사대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나름대로의 품위를 유지하나 세상 인심이 한결 같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서민들 속에 섞여서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 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낸다.


타고난 글 솜씨와 영리함으로 급제까지 했던

김삿갓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즉흥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산과 들 그리고 사람에 얽힌 그의 시는

한 수 한 수 철학이 깃들여져 있으며

풍자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세도가와 거만한 부자들의 허풍을

마음껏 풍자하고 조롱하는 그의 시 속에는

당시 부당하게 대우받고 사는

가난한 백성들의 한풀이로서 충분했다.


때문에 김삿갓의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쉰 일곱, 전라도 땅에서 눈을 감음으로써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일생을 마감하고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


영월 와석리에 그의 생가 터와 묘지가 있다.


*걸인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김삿갓은 본래 권문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기구한 운명으로 일생을 문전걸식하며

돌아 다녔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천대를 받고

인생의 어두운 면을 체험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걸인으로서의 체험은 그의 시를 더욱 깊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는 세상의 야박함과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모순을 지적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러한 냉대에 불평과 불만을 토하여

세태를 비웃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하였다.


그는 궁핍한 것도 원하지 않았고 부유한 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굶주림과 잠자리를 걱정해야 했다.


*자연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김삿갓은 풍월이나 자연의 경관을 읊은 종래의 한시에서 벗어나

우리 생활과 밀접한 주변에서 시제를 찾아

예민한 관찰과 심오한 착상, 감정의 미묘한 표현에 뛰어났다.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문자와 기발한 비유로

자연의 경관을 절실하게 표현하였다.


*인생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이전의 사대부나 양반이라고 하면

대개 고상하고 단아한 선비의 기품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위선과 허영으로 가득 찼다.
김삿갓은 권문세가 출신이었지만 다른 사람과는 달리

양반 계층의 허상과 추악함을 묵인하지 않았다.


시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가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허식을 멀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그의 꾸밈없는 감정 및 현실의 노출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가 다룬 문제들은 기성의 가식, 도덕과 인습,

전통에까지 이르고 있고

당대의 선비로서는 엄두도 못 낼 소재를 택하여

인간의 감성을 사실대로 읊었다.


*풍자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그의 시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풍자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풍자성으로 인하여

그의 시가 더욱 우리 가슴에 와 닿는지도 모른다.


그는 역경과 서러움으로 일생을 보내는 동안

때로는 현실을 비관도 하였지만

암울하기만 한 현실을 초탈하여 해학과 풍자로써

자신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때로는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때로는 간접적이고 완곡한 풍자로

뛰어난 재치를 발휘하였다.


*역사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그는 과시(科詩)라는 장편의 역사시를 남기고 있다.
대부분이 중국의 역사에서 취재를 한 것으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는 시들이다.


이 역사시는 대개 18구로 되어 있는데

지식의 해박함으로 헌종,

철종 때의 선비들은 그의 작품을

존숭하였다고 한다.


-범우사 발행 <김삿갓 시집> 참조.


김삿갓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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