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족보에오른 여인들
(마 1:3~6)
서 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족보인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여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우리야의 아내(6절), 마리아(16절) 등 다섯명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혁명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전통에 다르면 여자의 이름은 결코 족보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동에서는 여자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최근까지)
예수님 당시에도 여자는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마 14:21)
우리가 알기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또한 이삭의 아내 리브가(창 24장)도
성경 속에서 유명한 여자인데 빠져있고,
더군다나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방 여인들이고,
또한 다말과 라합은 정결한 여인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여자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셨을 까요?
어떤 이유로 그 이름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는지 한번 살펴봄으로서
우리 역시 하나님나라의 생명록에 올려지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첫째 : 다 말 (창 38장)
다말은 가나안 여인으로 “책임 있는 여인”입니다.
먼저 다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회의 가족법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율법은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을 대신하여 형의 대를 이어주도록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신 25:5-6)
그런데 불행하게도 다말은 남편뿐 아니라 시동생까지도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서 죽었습니다.
계속해서 아들이 죽자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를 지키기 위해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 셀라가 장성 할 때까지 수절하며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어도 며느리 다말을 부르지 않고, 율법을 지키기 보다는 아들을 지키는 편에 섰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다말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래 나는 불행한 사람이야 하고 처지를 비관하였다면 예수님의 족보에 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다말은 “믿음의 계보”, “축복의 혈통”, “신앙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창녀의 차림을 하고 시아버지에게 접근을 하여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다말은 행음한 여인으로 오해를 무릎 쓰면서 까지 대를 잇고자 한 것입니다.
비록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다말은 피해자입니다.
나중에는 이러한 다말의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이 자기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인정 하였습니다(창 38:26)
이러한 다말의 희생과 집념의 결과로 다윗과 요셉으로 혈통이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말에게서 “신앙의 대”를 잇겠다는 집념과 책임을 배워야 합니다.
나만 잘 믿는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그보다는 최선을 다하여 믿음의 가문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와 권세와 명예가 아니라, 믿음을 물려주려고 노력하는 우리 영원토록 신앙의 계보를 이어가는데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 라합 (수 : 2, 6장)
라합은 “믿음의 여인”입니다.
라합은 가나안 여인으로 여리고 성의 기생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기생은 술을 파는 여자 보다는 창녀에 가깝다고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정탐꾼을 도운 라합은 여리고성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입니다.
이러한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든 이유는 라합의 믿음 때문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서 애굽을 탈출하게 하시고 아모리의 두 왕을 전멸 시켰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수 2:10)
라합은 그러한 소문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 시니라”(수 2:11)고 신앙고백을 하였고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생명을 모두 맡겼습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 맡기지 못함으로 스트레스와 불면증 등으로 고민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용사가 되려면 라합 처럼 창문에 붉은 줄을 달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수 2:21)
창문에 걸린 붉은 줄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 라합과 그 가족을 살릴 생명줄, 언약의 줄입니다.
라합은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생길 때 마다 붉은 줄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의 삶을 원한 다면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셋째 : 룻 (룻 1:·4)
룻은 모압 여인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 되었다(신 23:3)
룻은 “효부”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와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룻이라는 이방여인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 왔습니다.
시아버지와 남편과 시동생은 죽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빈손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동서인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 인생을 찾겠다고 하였습니다.
룻은 좌도 우도 아닌 위에계신 하나님을 택하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이스라엘백성이 되겠다고 결단하고 시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 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그 결과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와 보아스와 결혼을 하고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정답을 이미 다 알려 주셨습니다.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의 선택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에 불과 하다고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 이니 이다”(시 119:105)라고 말씀 하십니다.
선택해야 할 것은 항상 우리 발 앞에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머리로 예상되는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택하면 우리 앞에 “보아스”와 “다윗”과 같은 복이 기다리니까요.
넷째 :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삼하 11장)
밧세바는 ”맹약의 여자“라고 하며 다윗의 부하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마 1:6) 합니다.
다윗의 신복인 우리야의 아내 이었습니다.
우리야가 전선에서 적군과 싸우고 있을때 그의 아내 밧세바는 그녀의 미모에 반한 다윗왕에 의하여 동침하게 되었고
그후 다윗은 우리야를 적군의 손에 죽게하고 그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은 후에 선지자 나단의 말을 듣고 침상이 흠벅 젖을 만큼 통곡을 한것이 단지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죄에 대한 애통함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간교하게 계획된 살인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끝까지 충성을 하였던
우리야의 신실함에 대한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한 뉘우침의 눈물일 것입니다.
이 여인이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낳았으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 : 마리아
마리아는 “믿음과 희생”의 여인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분 나쁘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상숭배, 주일성수 하지 않는 것,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가정에서 아버지들이 기분 나쁠 때가 언제라고 생각 하십니까
그것은 “능력 없는 아버지” 능력 없는 남편“으로 대접받을 때일 것 입니다.
반대로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아버지, 남편을 믿는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똑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 능력을 의심한다면 기분이 무척 나쁘실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족보에 든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율법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그 모든 위험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눅 1:37·37)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렘 32:27)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때,
구세주가 탄생하신 것처럼 기적이 일어 남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생명록에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결 론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마리아 이 다섯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부끄럽고 못난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가장 낮고 천한 신분 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것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일 것 입니다.
여자로서의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와 모욕을 받을 줄 알면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시대를 초월 합니다.
인물이나 가문이나 인종이나 인격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믿음의 혈통과 신앙의 족보가 이어진 것입니다.
내 신앙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가문을 이루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의 족보를 이어가십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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