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종말론과 윤리


현경식 (전주대)


Ⅰ. 들어가는 말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yet)의 긴장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서는 종말의 “현재”와 “미래”의 두 차원 사이에서 오는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묵시 사상의 토양에서 태동하여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예수 재림의 지연에 대한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 종말의 지연과 종말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종말을 먼 미래에 갖다 놓거나 현재로 끌어들임으로써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감을 희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종말의 시간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임박한 종말과 지연된 종말은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미래적인 종말론(futuristic eschatology)에 속하고, 이미 과거의 사건을 통해서 미래에 일어날 종말을 현재의 시간에서 해석하는 종말론은 시간적으로 현재적인 종말론(present eschatology)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 안에는 이 두 가지 종말론이 모두 혼합되어 내포되어 있다. 그 중에 어느 하나를 더 강조하느냐가 특정한 책의 특별한 종말론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의 종말론은 현재적인 종말론과 동의어로 쓰이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으로 불리워진다. 요한복음이 종말의 시간적인 두 차원 중에서 “이미”, 즉 종말의 “현재성”을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한은 미래적인 종말보다 현재적인 종말을 왜 그렇게 현저하게 강조하는가? 그러한 종말론을 강조하게 된 공동체의 상황은 무엇인가? 요한이 종말의 현재적인 차원을 설명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그것의 윤리적 요청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요한이 종말론적인 시간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떠한 방법으로 표현하는가를 통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Ⅱ. 요한 공동체 이해


  사회적인 단위로서의 공동체는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등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설명될 수가 있다. 요한 공동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공동체가 속한 사회 구조의 한 일원으로서 “종교적 모임”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종교적인 요한 공동체의 산물로서 특정한 상황 속에서 쓰여지고 전해졌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가 쓰여지기 위한 긴급한 상황이 요한 공동체와 주류 사회와 관련하여 존재했다는 것을 전제할 수 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요한 공동체의 이해는 요한복음의 본문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며, 요한 공동체는 반드시 그것의 사회적인 맥락(social context)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Wayne Meeks에 의하면 한 공동체의 “사회적인 세계”(social world)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공동체의 내적인 환경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공동체가 속한 사회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 내부 구조, 조직 등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그 공동체가 속한 주류 사회의 배경에 관한 것이다. 요한 공동체를 이러한 두 차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요한 복음이 예수의 전승을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본문 안에 공동체의 사회-역사적인 체험과 정황이 내포되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 복음의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요한 공동체의 사회-역사적인 배경을 완전히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는 요한복음의 몇몇 구절들을 통해서 믹스가 제안한 대로 그 사회와 관련하여 요한 공동체의 내적인 모습과 외적인 상황을 간단히 살피려고 한다.


  요한 공동체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본문은 회당 축출에 관한 구절들이다(요한 9,22; 12,42; 16,2).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유대교 회당으로부터의 축출을 AD 90년경 랍비 가말리엘 2세의 주도하에 있었던 바리사이적인 유대교가 각 회당에 칙령으로 내린 18개의 축복 기도문중 12번째 기도문에 속하는 이른바 “이단자들에 대한 축복문”(birkat ha-minim)과 연관시키는 학자들이 많다. 이 기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배교한 자들에게 희망이 없게 하소서 오만함의 다스림이 우리의 시대 안에 곧 사라지게 하소서. 나사렛 사람들(nosrim)과 이단자들(minim) 이 한순간에 멸하게 하소서. 생명의 책에서 그들을 말소시키시고 의인들과 함께 그들이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오만한 자를 꺾으시는 주여 축복 받으소서.


  기도문 중에서 “나사렛 사람들”(nosrim)과 “이단자들”(minim)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쟁적이지만, 이들이 정통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가 초대교회에 참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Jewish Christians)을 지칭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기도문은 또한 유대교 회당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사회적으로 증폭되어 왔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Birkat ha minim"과 같은 회당 축출에 관한 언급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 때문에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15,20-21; 9,22; 16,2). 회당 축출은 유대 사회에서의 매장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친지 가족들과의 유대를 상실하게 되고, 경제적 불이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요한 공동체는 유대 사회로부터의 소외감과 세상을 향한 적대감이 깊어졌을 것이다.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은, 유대교 회당과 연관하여 사회학적으로 정의한다면 유대교에서 파생된 하나의 “종파”(sect)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와 같이 기원전 2세기경 유대교의 헬라화를 추진했던 하스모네어 왕가의 통치 시대에 일어난 하시딤(경건한 자들) 운동과 비슷하다. 이 그룹들은 주후 1세기 중반까지 유대교 내의 종파에 불과했다. 종파는 사회 구조적인 면에서 종교 전통을 포함한 주류 사회와의 긴장을 유지하는 반사회적(anti social) 혹은 반문화적(anti cultural)인 특징을 갖고 있고, 이념적으로는 종말론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회당 축출을 실제로 경험한 공동체로서 유대인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진 공동체로 특징지어진다. 더 나아가 예수와 공동체를 향한 세상의 미움과 박해는 유대교 회당으로부터의 축출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15:18 이하).


  요한 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유대교 회당과 세상과의 관계 말고도 초대교회의 다른 그룹과의 갈등을 더 첨가할 수가 있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요한 공동체는 반-베드로적인(anti-Petrinism)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3장 2-20, 31-38절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부정적인 모습과 사랑하는 제자와 베드로의 날카로운 대립 등이(13,23-25; 18,15ff; 19,26; 20,1-10; 21,1-23, 등) 그 원인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렇듯 요한 공동체는 외적인 갈등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종말론의 수정을 통해서 공동체의 생존과 보전을 위한 새로운 종말 사상을 강조해야만 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강력한 사랑의 윤리를(13,31-35; 15,12-17) 통해서는 신앙의 돈독함과 유대감을 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외적으로는 예수를 격하하려는 유대교를 향한 반란으로 인식되어졌고 더 심한 박해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 처한 요한은 자신의 현재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을까? 그리고 현재의 시간을 극복하는 그의 종말론적인 시각은 어디서 나오게 되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요한 공동체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그들이 현재의 시간을 이해하는 방법을 살펴보려고 한다.



Ⅲ. 요한복음의 종말론적인 시간 이해


  요한복음의 시작은 시간으로 시작된다. : “태초에”(en arche). 로고스인 예수의 선재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사 이전의 시간으로부터 복음서가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현재의 시간에서 영원적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여러 시간의 표현 중에서 “때”(hour)라고 하는 단어는 요한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 요한복음 안에서 “때”로 번역되는 희랍어는 다음과 같이 3종류의 단어가 있다: 카이로스(kairos), 크로노스(chronos), 호라(hora) 등. 이 단어들 중에서 chronos는 일반적인 시간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kairos와 hora는 요한의 종말론적인 시간 개념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A. 종말론적인 사건의 때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오심이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의 “때”는 예수의 첫 번째 오심의 사건을 현재의 시간을 의미하는 “지금”(nun)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된다 :


… 당신들이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때(hora)가 옵니다(4,21).

과연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hora)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nun)입니다(4,23).

…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hora)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nun)입니다(5,25).


  “아버지께 예배할 때,” “죽은 이들의 깨어남의 때”는 모두 하느님이 정하신 종말론적인 시간이다. 하느님에 의해 정해진 때는 정해진 시간보다는 상황이나 징조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때는 종말론적인 사건과 연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때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으로 실현된다. 사마리아 여자는 이 때를 메시야가 오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4,25), 미래적인 종말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지만, 요한은 종말의 때가 이미 실현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이며(4,26), 그의 오심과 함께 하느님의 종말론적 때가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실현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신을 예배하고 죽은 자가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때는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B. 나의 때


  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지금”이라는 단어와 함께 종말론적인 때로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예수는 그의 삶 가운데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시간을 종말론적으로 “나의 때”로 표현한다.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2,4; hora, 7,6; kairos).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하였어도(5,18) 그들이 손을 대지 못하고 붙잡지 못한 것은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고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7,30; 8,20).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의 시간, 즉 예수의 때는 예수가 스스로 결정한다(12,23). 12장 23절 전까지 예수가 스스로 예시했던 “나의 때”가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그 시간은 역사적인 예수 스스로가 견디기 힘든 수난과 고난의 시간이지만 예수는 바로 이 때를 위해서 세상에 왔다(12,27). 예수는 “지금”(nun; 12,27) 자신이 죽음의 시간을 가져야 함을 결단하고 있다.


  예수의 현재적인 십자가의 죽음은 곧 아버지께 가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13,1). 위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내려온(descent) 예수는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 가야함(ascent)을 강조한다(7,33; 8,21). 그 때는 곧 인자가 아버지께로 가는 “떠남”(depatrure)의 때이고(3,13; 6,62), “들리움”(exaltation)의 때이기도 하다(3,14; 8,28). 이 사건은 물론 “지금” 일어난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당신이 지금(nun)은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hysteron) 따라올 것입니다”(13,36)고 말한 것처럼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에 십자가 사건의 우선권을 두고 있다. 이와같이 요한은 예수의 현재적인 십자가의 사건 안에 모든 종말론적인 시각들을 포함시켰다.


  더 나아가 예수의 때는 죽음의 때임과 동시에 또한 영광의 때이기도 하다(12,23; 17,1).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영화롭게 되는 시간임을 깨닫고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의 기도,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12,28)는 예수의 삶이 아버지께 복종하는 삶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7,18; 8,50,54). 예수의 죽음의 시간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때임을 보여 주고 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이 드러나는 순간 예수는 그 때가 곧 영광의 때임을 선언한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인자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얻으셨도다”(13,32).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죽음을 결심하고 죽음의 시간을 감지한 “지금”(nun)이 곧 영광의 때이다(13,31).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나의 때” 안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모두 결합되어 있다.


  C. 심판과 부활의 때


  심판, 영생, 부활과 같은 용어들은 모두 전형적인 종말론적인 용어들이다. 공관복음서에서 종말론적인 용어로 쓰이는 “하느님의 나라”와 같은 용어는 요한복음서는 쓰여지지 않는다. 대신에 심판과 부활과 같은 주제가 요한복음의 종말론을 특징지어 주고 있다. 이 용어들은 모두 요한의 종말론적인 시간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심판이라는 단어는 전통적으로 묵시 사상적이며 종말론적인 용어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심판의 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차원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전통적인 심판의 때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느님이 심판할 것이라는 묵시 사상적인 미래의 심판에 관해서 언급한다(5,29; 12,48; 6,40.54; 15,2 참조). 특히 요한 복음 15,18-16,4에 언급된 환난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직전에 신앙인들이 핍박을 받는 “메시야적 환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의 이 땅에 오심의 사건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심판의 때”이기도 하다(9,39). 예수의 오심으로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는 것 자체가 심판이기 때문이다(1,5). 예수의 오심은 어두운 세상을 심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배자인 사탄이 심판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 세상이 심판을 받습니다. 이제야말로 세상의 두목이 밖으로 쫒겨날 것입니다”(12,31); “심판에 대해서 (밝힘은) 이 세상의 두목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6,11). 이는 세상과 세상 임금의 심판이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5:22,27; 9:39). 예수는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종말론적인 심판의 주체이다. 그가 심판하는 심판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빛을 거부한 자들에게 해당된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자의 불신 그 자체가 심판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3,19-21). 반면에 예수를 받아들인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다(5,24).


  요한복음에서 심판의 때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가운데 있다. 미래의 심판을 배척하지도 현재의 심판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미래의 마지막 날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요한 공동체는 현재의 심판을 체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심판의 기준이 믿음과 말씀이라면 그것은 이미 현재 믿음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보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3,18; 5,24).



  심판의 때와 마찬가지로 “부활의 때”도 현재와 미래의 두 영역 안에서 언급된다. 전통적인 부활의 사상처럼 죽은 자의 부활과 그들에게 부여되는 영생이 미래의 사건으로서 강조된다(6,39-40, 44, 54; 11,24). 묵시사상적인 마지막날에 있을 미래의 심판도 부활과 연관되어 있다(5,28f). 또한 요한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때를 예수의 생존시기 안에서 일어나는 현실로써 설명하는 것과 같이, 부활과 영생을 역사적 예수 안에 소급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부활과 영생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현재적 선물로 언급된다(5,21.24; 17,3). 예수는 생명을 소유한 자이며(1,4), 그를 믿는 자는 미래에 얻을 생명이 아니라 현재에 누리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3,36; 5,24). 부활의 생명은 첫 번째 오신 예수가 살아 있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5,25).


  요한은 믿는 자의 죽음과 종말론적인 “부활의 때”에 대해서는 11장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예수 재림의 지연과 연관하여 종말론의 위기를 느낀 요한이 11장에서 죽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말론의 수정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지체했다(11,6). 예수 오심의 지연에 마르타가 불평을 하고(11,21) 유대인들은 조소를 보낸다(11,38). 제자들은 예수가 나사로가 잠들었다라고 한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나사로가 죽었음을 의미한다(11,11-14). 부활의 전제는 죽음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죽은 나사로가 “지금"(nun) 살 것이라고 마르타에게 말한다(11,21-22).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전통적 묵시 사상적인 부활의 때를 말하고 있다(11:24). 예수는 마르타의 단편적인 종말론적인 신앙을 수정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입니다.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11,25-26). 요한은 수정된 새로운 종말론적인 신앙을 요구한다(11,15.26). 부활과 영생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포함하며 그것은 생존하는 예수 안에 있다.


  

 Ⅳ. 요한의 종말론적인 윤리


 A. 사랑의 윤리


  요한의 윤리를 한마디로 “사랑의 윤리”(the love ethics)라고 부른다. 요한복음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새 계명” 이외에 다른 윤리적 명령이나 가르침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랑-명령(the love commandment)은 2군데서 나타난다: 3,31-38과 15,12-17이다.


넓은 맥락 속에서 보면 사랑의 윤리는 예수의 “떠남”(depatrure)의 때를 주제로 하는 “고별 담론”(13장-17장)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랑 윤리는 매우 종말론적인 요구라고 할 수가 있다. 특히 두 번의 사랑-명령이 모두 예수의 종말론적인 언급과 연결되어 있다. 13,34의 사랑 명령은 예수가 지금(nun) 자신의 때 곧 죽음의 때를 인식하고(13,1), 종말론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광의 때가 성취되며(13,31f), 그 때가 바로 자신이 아버지께로 떠남(departure)의 때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면서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첫 번째 사랑 명령은 예수의 죽음과 떠남이 눈앞에 닥친 시점에서 배반자 유다의 떠남(13,31)과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언급(13,38) 사이에 주어졌다는 점에서 갈등과 위기의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사랑-명령의 긴급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중요성이다. 사랑 명령의 긴급성과 중요성은 예수가 죽음의 시간을 앞에 두고 한 명령은 제자들에게 마치 유언과 같이 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예수의 지상의 삶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준 사랑-명령은 매우 현재적이다. 요한의 종말론적인 현재의 시간은 지상 예수의 현재며 자신의 공동체의 상황의 현재이고 미래를 앞당겨 결정짓는 종말론적인 현재이기 때문에, 요한의 종말론적인 윤리는 현재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요한 공동체는 예수와 제자들의 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을 동일시하며(Ⅱ장 참조), 예수의 사랑-명령을 믿음을 소유한 현재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종말론적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결국 믿는 자들의 제자직으로 연결된다(13,35).


  “서로 사랑하라”(agapate allelous)는 예수의 긴급한 명령은 앞서 벌어진 예수의 세족례(13,1-17)에서 상징적인 모델을 찾을 수 있다.


  예수의 서로 섬기는 가르침은 사랑의 윤리를 통해서 강화된다. 예수가 베드로의 발을 씻김으로 본을 보인 것처럼 예수의 사랑-명령. “서로 사랑하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양자적”(dyadic)이고 “상호 교환적”(reciprocal)이다. 예수와 베드로 사이에서 일어난 양자 관계(dyadic relationship)는 모든 제자들에게 확대된다. :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13:14b). 사랑의 윤리는 공동체 내의 상호 관계 안에서 양자 관계를 형성하는 도구가 되며 예수의 세족은 그것의 상징이 된다. 이런 점에서 요한의 사랑의 윤리는 강한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의 유대감과 소속감을 요구하고 또한 증가시킨다.


  15,12-17에 있는 예수의 사랑-명령은 13,31-38의 반복이다. 사랑-명령의 긴급성과 중요성은 여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5장의 사랑-명령은 제자들과 예수와의 관계(15,1-11)와 세상과의 관계(15,18-6,4)와 관련하여 주어진다. 요한 공동체의 현재는 예수와의 관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박해 가운데에도 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미움 가운데서 믿음의 공동체를 지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사랑-명령을 다시 강조하면서 그것을 제자들을 위한 친구로서의 죽음과 연결시킨다(15,12-13). 사랑-명령은 예수의 죽음을 암시하는 종말론적인 표현과 함께(15,13),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하는 것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15,6) 또한 현재적 심판이 전제된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는 친구를 위해 목슴을 내놓을 정도의 사랑을 가진 “우정”(philia; friendship)에로 제자들을 초청하고 있다(15,13-15). 13장의 세족례가 사랑-명령의 모델이 된 것처럼 여기서는 포도나무의 비유(15,1-11)가 이러한 우정을 강화시켜주는 비유가 되고 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우정의 상징적인 표현은 가지로서 포도나무에 거함(abiding)의 주제(15,4)와, 열매를 맺는(15,2.5.16)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강한 양자적인 관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그 관계에 의해서 요한 공동체가 특징지어질 수 있다.


  예수와의 친구의 관계는 예수와의 동등성을 의미하는가? 아버지를 안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15,15; 10,34-35 참조). 이러한 사고 역시 요한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의 관계는 “양자적”이고 “상호 교환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다.


  요한의 종말론이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두 차원을 모두 수용하고 있음을 보았다. 예수의 첫 번째 오심과 지상의 삶이 현재와 미래의 모든 종말론적인 현상들을 수용하고 있다.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재림이 아니라 예수의 현재적 삶이므로 그에 따라서 미래적인 종말을 현재적 종말론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의 윤리는 이러한 요한의 종말론적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B. 사랑 계명의 변화


  요한복음의 사랑-명령은 왜 “새 계명”인가(13,34)? 요한이 사랑의 계명에 관한 성서 전승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옛 계명”에 해당하는 것이 구약의 계명인지, 공관복음의 계명인지, 바울로의 것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다. 사랑 계명에 관한 공관복음 전승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원수를 사랑하라”(마르 5,44; 루가 6,35)이고, 다른 하나는 큰 계명으로 불리는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르 12,30-32; 마태 22,37-39; 루가 10,27-28)이다. 요한의 사랑-명령이 구약으로부터 왔다면 그것은 “새 계명”이 될 수가 없다. 또한 요한은 공관복음과 같이 신명기 6장 5절(하느님을 사랑하라)와 레위기 19장 18절(이웃을 사랑하라)의 합작된 계명을 소개하지 않는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사랑 계명은 예수로부터 직접적으로 명령이 되지만 다른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요한의 사랑 계명은 바울로의 전승과 병행구를 이루고 있다. 요한의 사랑 계명에 관한 성서적 전승에 관한 물음은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전제할 수 있는 것은 새 계명으로 간주되는 사랑 계명에 관한 전승이 요한 자신의 사회-역사적 그리고 신학적인 틀과 상황 속으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의 만찬 설화는 요한복음의 세족례로 대치되었고, 공관복음의 성만찬 제정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사랑의 계명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만일 당시의 그리스-로마 문화와 철학의 영향을 고려한다면 요한이 성서 전승이 아닌 그리스-로마 전승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요한의 사랑 계명의 전승을 헬레니즘 철학에서 찾는다면 헬레니즘 철학에서 우정(friendship)을 가리키는 “philia"의 개념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요한 15,15 참조). 기원전 1세기경 왕성했던 스토아학파, 플라톤학파, 에피큐리안학파 등이 모두 philia(friendship)koinonia(fellowship)를 중요하게 여기고 가르쳤다. 특히 에피큐리안학파에서는 삶의 목적을 즐거움에 두었고 우정은 가장 근본적인 즐거움이라고 가르쳤다. 스토아학파에서는 Seneca, Epictetus, Plutarch 등이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진정한 우정에 대해서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헬레니즘의 철학 학교들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고려한다면 요한과 요한의 공동체에 헬레니즘의 “우정”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간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공관복음의 사랑 계명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류사회를 향한 사회적 동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사랑해야 할 원수의 대상은 로마가 될 수도 있고 믿음의 공동체가 속한 지역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와 갈등을 의미할 수 있다. 반면에 요한의 사랑 윤리는 공동체 내부에 제한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이나, 이웃, 원수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요한 공동체의 특별한 상황에 기인된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의 사랑의 계명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사도들의 예루살렘 공동체와의 갈등이 예시되는 가운데 주어졌고(13,6-8, 36-38), 15장 12-17절에서의 계명은 이웃 사랑이나 원수 사랑보다는 친구 사랑이 강조되며, 세상과 유대인 회당과의 갈등이 예고되기 전에 주어진다(15,18-16,4a). 이렇듯 요한의 제한된 사랑계명은 요한 공동체의 박해와 갈등의 상황과 연관하여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 계명의 좁은 범위와 관련하여 요한의 첫 번째 관심은 사랑 계명의 성서적 전승을 지키는 것보다 공동체의 현실적인 생존에 있었다. 요한 공동체의 현재적인 삶에 가치를 두는 실현된 종말론. 종파적인 성격, 유대교와 세상과의 갈등 등, 복잡한 요인들이 요한의 사랑 계명의 범위를 좁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의 사랑 계명은 공관복음 전승과는 다른 새 계명으로 변화되었다.



  Ⅴ. 나가는 말


  현재적 종말론의 뒤에는 분명히 예수 재림의 지연에 관한 문제가 전제되어 있다. R.Kysar는 요한 안에 존재하는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을 “두 전승”(two traditions)으로 이해했다. 요한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전승이었던 임박한 미래적 종말론을 유지한 채 “여기 그리고 지금”을 강조하는 현재 지향적인 종말론이라는 또 하나의 종말론적인 전승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와 미래적인 종말론을 모두 포용하는 변증법적 종말론(dialectical eschatology)이 요한의 종말론임을 강조한다. 불트만의 주장처럼 요한이 묵시문학적인 미래적 종말론을 완전히 부인하고 단순히 비신화하기 위해서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했다는 주장보다는 카이사의 양시적인 입장이 타당하다고 본다. 예수 재림의 지연은 믿음의 공동체가 박해와 환난이 기다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생존하느냐하는 문제를 가져오게 된다(16,33; 17,11.18 참조).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종말론의 수정(11,21-27 참조)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요한은 현재적인 종말론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에 살아 남아야 하는 믿음의 공동체의 현실이 존재하고 이를 위해서 종말론적인 “사랑의 윤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현재적 종말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방법으로서 종말이라는 “시간”을 재이해한 것이라고 본다. 요한은 신앙의 대상인 예수의 오심과 관련된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인 긴장을 ‘이미’라는 현재적인 종말론을 통해서 ‘아직’이라는 미래적 종말론을 해결하고 있다. 다른 주제이지만 요한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문제를 역사적 예수의 전승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유일한 복음서라고 본다. 요한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떠나가신 아들”(departed-Son)이지만 그의 과거의 첫 번째 오심과 죽으심, 올리우심, 떠나심이 가장 중요한 종말론적인 사건이며 모든 것 우위에 있다. 요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과 동일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20,29 참조). 마찬가지로 요한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인 시간을 역사적 예수의 사건 안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요한은 시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Being)안에 귀속시켰다. 시간을 통해서 예수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라는 역사적이고 연대기적인 시간의 때를 예수라는 존재 안에서 해석한 것이다. 시간의 처음이 로고스 안에서 시작되었으니 모든 역사적 시간의 마지막도 로고스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말론적 현상들은 (예를 들어, 심판, 영생, 부활과 같은) 지상의 예수의 현재적 삶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두 번째 오심이나, 그 시점이 언제이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예수의 첫 번째 오심을 통해서 모든 역사적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통해서 존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서 시간과 역사를 보는 눈을 가진 것이다.


  선재했던 로고스는 첫 번째 파라클레토스(paracletos)로서 시간 속으로 왔고 시간 안에 있는 존재들(beings)을 위해 구원을 이루었다(19,30; “다 이루었다” 참조). 예수의 떠남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다. 그는 세상 안에 남아 있는 존재들(beings)을 위해 다른 파라클레토스를 예수라는 존재를 믿는 자들에게 보냈다(14,16). 믿는 자들은 현재 예수와 똑같은 영원을 소유한 존재(Being)인 성령과 함께 지금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언제 다시 오느냐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예수와 함께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요한의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세기말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요한의 가르침은 우주의 종말이 언제인가를 계산하는 것도 무의미하며, 현재의 삶을 무시하고 예수께서 언제 다시 올 것인가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도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한 시점을 전해 놓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한부 종말론이나,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우주적 종말이나, 예수님 시대에는 계산할 수도 없었던 연대기적인 2천년대의 시대를 과대하게 포장하는 것이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받아들인 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종말론적인 삶은 “지금”(nun)이라는 현재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냐 하는 것뿐이다. *



「밀레니엄과 신약성서의 종말론」(한국신약학회편/한둘.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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