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대해서
글 / 김영규 목사
목 차
1. 성경이해를 위한 기초개념들
2. 계시의 근본성격
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신다.
②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의 머리와 지각방식 및 모든 형태에 적용하신다.
③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에게 감추신다.
④ 계시는 그 자체로 충분하고 분명하다.
3. 일반계시의 의미와 그것의 불충분성
①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에는 충분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일반계시
②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필요성
③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와의 관계
④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
4.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의 무오성
① 무오성의 개념
② 무오성의 최종적이고 가장 객관적인 근거
③ 무오성의 객관적 성격
1. 성경이해를 위한 기초개념들
과학과 역사와 성경과의 관계는 사실과 성경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성경이 바로 과학 교과서가 아니고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은 다른 중요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우리가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사실들은 잠정적이고 임시적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면 성경은 과학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 이전에 선과학적인 해석 혹은 신적해석이란 점에서 사실에 대한 참된 해석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그러나 맨 먼저 계시나 성경의 진리는 그 자체로부터 진리이다는 것은 근본사상이다. 즉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의 진리성이 궁극적으로 사람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증거된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 진리가 틀릴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성은 신앙의 차원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반면에 성경이 객관적으로 우리 안에 역사적 사실들과 만날 때 그 객관적인 증거들이 그 기록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 그 증거들이 성경의 객관적 진리로서 시대의 보편 인간에게 기여한다는 점이다. 성경의 자체 가신성을 확고히 믿되, 보편 인간에게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경우를 또한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예를들어 문법적 해석, 역사적 해석이란 이런 보편인간에게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해석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성경에 대한 실증적인 학문이 가능하다. 이런 해석이 없이 성경의 자체 가신성만을 믿으면 성경에 있는 역사적 계시를 파괴하게 되고 따라서 성경의 판명성을 결국 파괴하게 된다. 성경에 대해 자연과학적 이해, 고고학적인 이해, 문헌학적인 이해, 언어학적인 이해를 시도할 때, 이렇게 양면적으로 생각하는 기초적인 이해가 중요하다.
이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초개념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객관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성경은 보편인간이 타당하게 인정할 수 있는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개념들이 성경전체를 위해서 기본적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보편은혜와 특별은혜등 산상보훈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차원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로마서처럼 일반계시 혹은 보편계시와 특별계시로 이해할 것인가? 혹은 하나님의 일반역사와 특별역사로 이해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사로 이해할 것인가? 물론 각각 장점들이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성경에 대해서 다룰 때, 가장 기초적으로 그리고 모든 것에 선행하여 계시와 개념아래 이해한다. 즉 일반계시의 불충분성과 특별계시의 필요성을 다루는 논리에서 성경이 등장하고 오히려 성경이란 특별계시가 불충분하고 부패된 일반계시를 바르게 해석한다는 입장이다.
20세기에 와서 헤르만 바빙크의 새로운 시도를 예를 들어보자. 바빙크의 신학적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근본원리와 계시, 영감, 조명 사이를 구별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서 구시대적인 것은 버리는 작업을 선행시키고 있다.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다든지, 자연과 초자연을 양립시킨다는 사실을 버리는 작업을 하였다. 즉 자연 자체가 초자연적인 성격이 있고 또한 일반은총(보편은혜)은 목적에 있어서 특별은총(특별은혜)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일반은총(보편은혜)의 개념은 특별은총이 일반은총의 회복에 있다는 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반은총의 상실과 왜곡의 역사가 자연과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라는 강한 인식이 배경으로 있었다.
따라서 중생된 이후의 사명이란 일반은총의 회복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에서 비로소 바빙크는 기독교적인 학문과 예술의 길을 열고 있다.
바빙크에 따르면 일반계시이든 특별계시이든 계시라고 할 수 있고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반계시 속의 하나님의 말씀과 특별계시 속의 하나님의 말씀 사이와 차이라는 용어사용도 그에게 가능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구별되는 것은 계시의 방식의 차이에 있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이해와 병행한다. 그 하나님은 범신론적인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연과 역사속에 심어놓은 식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아닌 특별한 방식을 계시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이적들, 내적으로 입과 입으로 말씀하시는 방식, 꿈과 같이 선견과 환상으로 말씀하시는 방식, 마지막 영감의 방식인데 이것은 성령이 내주하여 역사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이루어 지기까지 이런 계시의 방식들에 따른 계시들이 전제되고 있다.
이런 계시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전제하는 것은 바로 계시라는 개념은 지금까지 혼돈되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모든 종교들이나 기타 문화활동들에서 계시의 필연성, 가능성과 현실성이 부정되지 않고 있지만, 계시의 개념을 잃었던 것은 그것을 너무 추상적이고 초자연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인간론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계시가 이성의 판단에 맡겨짐에 따라 계시와 이성이 구별되지 않는 성격으로 나타났고 계시를 인격이나 역사와 동일시하였던 일이 있었다는 그런 비판이 바빙크에게 있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외적인 신적계시를 바로 영감과 동일시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그의 개혁교의학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사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후에 발전된 그의 하나님의 계시의 개념은 다음 몇가지 성격으로 정리되고 있다.
1) 특별계시이든 일반계시이든 계시는 자유로우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2)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계시는 모두 자기 계시이다.
3) 그 근원이 하나님이요 그 내용도 하나님이면서, 그 목적도 하나님에게 있다.
이런 발전된 개념들에 의해서 칼빈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보완하여 현대신학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변명할 수 있다고 본다.
2. 계시의 근본성격
2.1.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신다(Deus se nobis patefacit).
로마서 1:18-21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이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자신에 관한 지식을 보이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타락 후에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고 자신을 보이신 것은 그에게 가까이 하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담이 원하였던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아담에게 가까이 오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심판하러 가까이 오신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실 때, 그런 가까이 오심은 어떤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명령의 형식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은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만물의 창조도 말씀으로 명령하고 이루어지게 하셨다. 즉 계시라는 성격 자체에 이미 은혜의 성격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으로 그렇게 인간에게 가까이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적응하는 방식으로 오신다는 사실이다. 그때에도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방식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듣도록 말씀하신 성격을 고려할 때, 이런 이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간이 알아 듣도록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인간이 이해하는 방식이요, 따라서 인간의 한계에 따라 말씀하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 내에로 들어온 신적인 지식이란 인간의 제한된 이해에 따라서 오류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특별히 K. Barth)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한 것들은 신적인 것에 거의 도달할 수 없고 다만 찰나적으로 만나는 계시이며 인간의 이해란 변증법적으로 겨우 얻는 정도의 것으로 돌리는데 땅에서 이루어진 거의 모든 계시를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나 말씀이 하나님의 같은 말씀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나 말씀이 포함하는 식의 이해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에게 판명하게 이해되도록 계시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이해하도록 말씀하셨어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계시를 받는 과정에 대한 심리학주의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이 무오하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무오하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판단과 이해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계시에 대한 상기와 같은 정의는 성장의 무오성과 판명성을 보증하기 위한 필연적인 정의이다. 역시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시는 것도 스스로 감추시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에베소서 1:17에 근거하여 칼빈의 해석대로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미 너는 모든 지혜와 계시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듣는다(Iam audis, omnem sapientiam et revelationem esse Dei donum). 그 정의는 우리에게 또한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이 스스로 그렇게 계시하신 것은 문자적으로 가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이다.
2.2.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의 머리와 지각 방식 및 모든 형태에 적응하신다(Deus se ad captum nostrum/ad nostrum modulum-accomodans, attemperancs, conformans).
하나님의 긍휼과 그의 무한한 선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의 방식에 적응하신다. 그 적응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그가 친히 가까이 계시기 위해서 세계를 창조하셨다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일을 시작하신 것이 창조라 한다면, 그 창조는 우리에게 가까이하시기 위한 긍휼을 확증하는 시작이다. 그 창조가 무한한 능력의 산물이고 그 안에 모든 신비가 감추어졌다면, 그 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것도 우리에게 신비에 속한 것이다. 창조 안에 그 피조물에게 그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길을 두셨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의 심오한 부분이다. 우리에게 눈이 있고 우리에게 귀가 있고 그 눈과 귀가 있는 머리가 있으며 동시에 그 지체가 한 가지로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 신비라면,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심이 얼마나 면밀하게 긍휼과 사랑이 무한하신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성 자체가 그의 사랑과 긍휼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피조물도 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 분의 긍휼에 근거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신비로 두심은 그가 친히 감추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요 그가 가까이 오셔서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신 것은 그 만큼 무한한 선으로 된 것이다. 그 사랑을 부정할수 없을 정도로 그 만큼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존재성이 문제이요 인간의 타락이 문제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나타내심이 우리에게 명료할수록 그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타락과 죄성, 그에 따른 그 한계성을 넘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더 은혜임에 틀림없다. 그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 자체가 우리에게 선 자체이요 지혜의 정점이지만, 우리가 이 은혜를 죄로 인하여 감당할 수 없어 왔다. 그러나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우리의 한계들에 적응하심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는 주시지 않으신 하나님께 더욱 더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실 때, 그 피조물을 통해서 그리고 그 질서를 통해서 그 계시를 고정하시는 형식으로 나타내셨지만, 그 보다 더 은혜로운 형식은 우리에게 그 분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이 들린다는 사실일 것이다. 더구나 그가 우리의 귀를 통해서 알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그 친밀하게(familiarius), 친구와같이 말씀을 낮추시고 우리의 이름을 정하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며 더구나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정하셨어도 그 이름으로 부르시며 더구나 개인적으로(priveement) 부르신다는 것은 너무나 큰 은혜인 것이다. 우리의 미련하고 부패된 마음에, 그리고 부패된 보편성으로(populiter) 우리에게 스스로 나타내시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그 계시와 그 말씀이 부패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패가 거기에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오류와 우리의 오류가능성이 거기에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다. 판단할 자격이 없다. 은혜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의 지각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칼바르트에 대해서 이런 하나님의 적응계시론에 의해서 성경의 판명성을 변명하였던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의 입장은 부분적으로 의미가 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계시의 특성에는 이미 그 분의 무한한 사랑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한한 신비만 있는 것이다. 그가 가까이 하신 형식들이 우리 밖에 있든, 우리 안에 있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 형식들로 나타난 내용들이 소리로 나타나든, 말씀으로 나타나든, 말씀이 명령이든 서술이든, 설명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것이 더 분명하면 할수록 우리가 몸둘 바를 몰라야 할 은혜만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만이 남아 있다. 찬양만이 남아 있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그 전체성이 찬양해도 모자라는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찾으면 그가 친히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그분의 무한한 은혜의 하나님만이 증명하고 우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증명하는 것은 없다. 우리에게 그 분을 향한 마음과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은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2.3.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에게 감추신다(Deum se nobis occultare)
이에 대한 히브리어 표현들은 “여호와께서 스스로 영원히 감추신다”(חצנל רתסת הוהי 시편 89:47) 혹은 “내가 나의 얼굴을 그들로부터 감춘다”(םהמ ינפ יתרתסה/הריסא 신 31:17; 32:20; 시 10:11; 13:2; 22:25; 사 64:6; 겔 39:23, 24, 29)는 등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비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역사에 신비한 것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감추시기 때문이다. 이런 스스로 감추시지 않으신 하나님은 스스로 개방되는 인격이란 말이요 저절로 개방되는 인격을 의미한다. 신비 자체로 있는 우리의 신관은 필경 범신론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감추실 때는 의미가 다르다. 하나님을 구하도록 정하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지도록 정하신 것이요, 그를 찾고자 하는 강한 마음을 가질 때나 혹은 찾을 지 모른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기를 원하실 때, 찾아지는 것이다. 그 분에 대해서 신비로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감추시기 원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와 그가 세상에 만물을 다스리시고 경영하시는 모든 신비가 있다. 신비 자체는 우리에게 신비일 뿐, 하나님께 신비가 아닐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여기에 우리를 위한 차원이 있으며 그 분의 속성들이 발휘되는 차원이 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까지 면밀하게 그의 결정을 지체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차원들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감추신다는 그 분의 존재성만큼이나 신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감추시고자 하는 것을 알고자 해서는 안된다. 그가 침묵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고자 해서는 안된다. 그 정도를 넘어설려고 할 때, 거기에 우리의 모든 호기심이 집중될 때,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2.4. 계시는 그 자체로 충분하고 분명하다(revelatio ipsa per se satis clarus esse).
특별계시만이 그 자체로 충분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다. 일반계시도 그 자체로 충분하고 분명하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어느 것이든 그 자체로 충분하고 분명하다. 그럼에도 계시가 계속되고 여러 가지 차원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는 것이 지속적이고 은혜의 차원이 높고 깊다는 말이다. 그 부분이든 그 전체이든 계시와 그의 말씀이 충분하고 분명하다는 것이 이런 계시 자체가 그 자체로 충분하고 분명하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그 근거 없이는 그 부분이든 그 전체이든 아직도 불충분하고 분명하지 않다. 즉 조그만 계시라도 그것이 충분하고 분명한 것은 바로 모든 계시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계시의 충분성과 판명성은 계시를 주신 분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계시 만이 계신 분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 계시의 성격도 계시를 주신 분과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계시의 충분성과 판명성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에게 충분하고 판명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에게 충분하고 판명한 것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충분하고 판명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충분하고 판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판명하고 충분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판명하고 충분하게 나타내신 정도만큼 판명하고 충분하다. 이러므로 계시의 판명성과 충분성에 있어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이에 전적으로 도약된 면이 있다.
3. 일반계시의 의미와 그것의 불충분성
3.1.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에는 충분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일반계시. 같은 로마서 1장 18절이하에 바울이 경고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진리로 막는 사람들 속에 보이셨다고 하였다.
둘째로 창세로부터 그 만드신 만물에서 그것을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
셋째로 사람이 그런 계시로 인하여 핑계할 수 없다.
넷째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는 여기에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문맥에서 결국 우상숭배자는 자신 안에 하나님의 진노의 근거를 갖는다. 더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도 바로 자신 안에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실재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신론은 원래 불가능하고 단순히 회의주의에 불과하며 그의 회의주의가 깊고 그 회의적인 기간이 길수록 자신의 사악함에 대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더러움에 내버려두신 것이 이미 하나님의 진노일 수있다. 그래서 바빙크는 인간의 죄책, 부패, 무능력을 하나님이 죄에 내리신 첫 진노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창조물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의 섭리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의 양심에 죄책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즉 아무리 무식한 자나 미련한 자도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에 충분하고 분명한 계시를 그런 형식으로 경고받고 있다는 말이다.
3.2.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필요성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혼돈세계로 들어갔다. 양심은 처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 생겼다. 양심이 있다는 것은 질적으로 부패된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결국 그렇게 많은 등불이 사람들에게 비춰 주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하고 그 바른 길로 인도받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이란 이런 면에서 타락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 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고 하였다. 그래서 친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singulare donum)로서 스스로 지극히 거룩하신 자의 입을 여신 것이다. 거기에서 “어떠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지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자신이 예배되어야 할 자임을 선포하고 있다. 택자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어떤 분을 경배할 것인지 친히 제시하시고 있다. 그는 처음 자신의 교회에게 이 원칙을 세워 그 일반적인 증거들 이외에 말씀을 역시 첨가하였다. 그것이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정확하고 확실한 징표이다(noque tantum promulgat colendum esse aliquem Deum, sed eum se esse simul pronuntiat qui colendus sit: nec elcet modo in Deum respicere, sed se quoque e. hibet in quem respiciant. Hunc ordinem ab initio erga Ecclesiam suam tenuit, ut praeter communia illa documenta verbum quoque adhiberet: quae rectior est et certior ad ipsum dignoscendun nota, Instutio 1559, Ⅰ, ⅵ, 1).” 즉 인간의 전적인 부패 때문에 하나님은 스스로 교회를 위하는 특별한 객관적인 징표들을 나태내신 것이다. 이제 이런 객관적인 특별한 징표들이 모든 계시들의 정점으로서 일반계시들로부터 점점 더 구별되었고 그 성격과 내용에 따라서 모든 일반계시의 집약이나 핵심으로 혹은 궁극으로 주어지게 되었다. 이 중에서 직접 언어화된 것만이 성경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바빙크의 말대로 자연계시에 이런 신비들의 계시들이 첨가되었을 때, 그 계시들과 기록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일한 하나님의 것으로 특별한 신뢰와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3.3.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와의 관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이를 구별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구별일 뿐이다.
실제적으로 일반계시 없이 특별계시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어느정도 연속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의 내용에 있어서도 연속성이 있다.
계시의 내용의 연속성이란 일반계시에서나 특별계시에서나 하나님께서 같은 것을 전달하시고자 하신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모두가 기원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이다. 다만 이적적이다는 면에서 즉 자연을 초월하거나 자연과 역행하는 계시이라는 면에서 특별계시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그것은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특별계시가 일반계시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연장이나 그로부터 도약의 방식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특별계시는 이런 일반계시와 연결되어 그것을 이용하여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이 기사들이고 그 설명들이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조건없이 엄밀하게 구별하면 성경의 기록을 파괴한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현상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때에는 목격된 것이 기록되어도 특별계시에 대한 기록이 된다.
그러나 모든 특별계시는 일반적으로 목격된 것이기 때문에 해설할 수 있는 것이고 그 해설도 특별계시에 대한 기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계시일지라도, 일반계시와 독립적이지 않고 그것과 분리할 수 없다. 오히려 특별계시 자체가 그 일반계시를 특별계시와 함께 자신의 권위를 갖게 한 것이다. 비록 기록을 위한 영감이 특별계시의 한 방식일지라도, 그것은 일반계시와 전적으로 역행하여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다만 여호수아 24:2절이하가 성경을 어떤 개념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 본문의 중요성은 미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과거 역사적 사실도 이스라엘 여호와의 말씀아래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즉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로부터 여호수아시대까지의 역사가 계시로서 이스라엘 하나님여호와에 의해서 해석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서 창조에 대한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선사시대 역사들은 사람들의 전승사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렇게 성경에 있는 모든 특별계시들은 일반계시들의 참되고 가장 판명하며 충분한 해석으로서 혹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다른 뜻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3.4.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
계시는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이다. 특별계시만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초자연적이다. 즉 자연은 일반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다. 그러나 그 피조물들 안에 혹은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실 때, 그 계시는 계시하시는 방식만을 가리킬 뿐, 그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저절로 발생하여 자연 속에 내재하며 그 자체로 닫혀 있는 그런 하나님의 계시란 없다. 비록 자연 안에 혹은 자연을 통하여 나타나더라도, 그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나타내신 한, 그 계시가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 계시의 근원과 관련하여 언제든지 초자연적인 것이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별이란 모든 계시가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요 이미 계시 자체의 서로 구별된 성격들을 전제한다. 특별계시가 특별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성격을 의미한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친히 보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말이며 특별한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고 보편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내용을 드러내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특별계시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특별계시는 그 계시의 방식들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계시의 내용들에 있어서 질적으로 구별되고 있다. 어떻게 특별한가에 있어서 성경에 따라서 다양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특별한 성격에 있어서 성경이 성립하기 위한 특별섭리와 일반사에서 나타나는 특별섭리 사이를 구별하기 위한 징표들에 대해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성경을 성립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섭리는 지금 종식된 것이요 그로 인한 기록도 종결된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전달하시고자 하시는 계시의 내용들은 더 첨가될수 없이 완전히 종결된 것이요 그 후에 성령의 조명의 모든 역사는 다만 그 같은 말씀을 조명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은 분리할 수 없게 된 것이요 성경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특별계시로 남아 있다.
4.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의 무오성
4.1. 무오성의 개념
무오성의 개념에 대해서 파고들면 아주 애매하게 남아있다. 그 무오성이란 틀리다 혹은 맞다는 말인지, 바르다 혹은 그르다는 말인지 불분명하고 또한 무엇에 대해서 틀리다 혹은 맞다, 옳다 혹은 그르다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예를들어 선과 악(ערו בוט)이란 언어나 선악을 안다(תעדה)는 표현은 고도의 인간 문화적인 말이다. 그리이스 언어인 양심이 여기에 관계하고 있다. 선악을 분별한다는 것은 윤리적이고 법적인 성격이 있다. 잘못이다 혹은 틀리다는 언어 양상이 처음 동사적이었는지, 형용사적이었는지 고증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과 관련하여 의심이나 비난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성경의 내용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면을 강하게 표상되고 있다. 오히려 성경에 대한 의심이나 비난이 변증적인 개념에 앞서고 있다. 근본적으로 잘못이 있다(errare), 오류가 있을 수 있다(fallibilis)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른 언어관념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구별할 근거가 없다. 따라서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이란 말이나 성경의 오류 불가능성(Infallibility)이란 말은 특별히 구별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전자는 모든 오류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고 후자는 기만이나 속임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특별히 후자의표현은 요한복음 10:35에 기록된 성경은 폐하여 질 수 없다(οὐ δύναται λυθήφαι ἡ γραφή)는 말과 상응하는 말이다. 역시 마태복음 5:18의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한다(οὐ μὴ παρέλθῃ)는 표현도 그것을 다른 어감으로표현하고 있다. 어느 것이나 다 성경에 대해서 인간의 깊은 뿌리로부터 신뢰성이 없는지 있는지에 대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무오성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자신과 그의 말씀에 대한 신뢰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다(וכרד םימת לאה)는 것이나 여호와의 말씀(הוהי תרמא)이 흠이 없이 순수하다(הפורצ)는 말이나 같은 하나님과 그 역사에 대한 속성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율법(הוהי תרות)은 완전하다(םימת)는 말이나 여호와의 증거(הוהי תודע)가 진실하다(הנמאנ)는 말이나 여호와의 명령(הוהי ידוקפ)은 바르다(םירשׁי)는 말이나 여호와의 명령(הוהי תוצמ)이 순결하다(הרב)는 말이 성경에서(시 18:30; 19:7ff) 병행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무오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연스러운 속성이요 필연적인 속성인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성경이 누구에게 신뢰성이 없다는 것인가이다. 즉 인간의 천재성 혹은 보편성에 비추어, 누구에게 신뢰할 수 없는 성격이 성경의 일부에 있다는 말일 뿐이다. 결국 인간에게 비추어 볼 때의 무오성인지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무오성이 무엇인가에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미 칸트로부터 비판된 것이다. 초자연적인 개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물자체에 대해서 조차도 무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개념의 경우 스스로 틀리다는 것만이 틀리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것은 성경이 틀리다고 하는 것을 무오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틀리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틀리다는 의미에서 무오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나 욥의 말들이 틀리나다는 것이 욥기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하나님편에서 틀리다는 것이요 욥기가 갖는 문맥에서 틀리다는 말이다. 욥기에 있는 말들이 다른 성경의 본문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틀리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런 말씀도 욥기의 문맥에서는 틀리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만 욥기의 문맥에서 틀리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은 욥기 전체와 함께 무오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유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오한 인간에게 유오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요 신뢰할 수 없는 그에게 신뢰할 수 없는 그에게 신뢰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비신뢰성은 무한한 신비의 사실에 속한다. 그런 비신뢰성은 인간의 구원의 사실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기도 하다. 성령이 확신시켜주기 전에는 성경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어떤 객관적인 설득도 완전한 확신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4.2. 무오성의 최종적이고 가장 객관적인 근거
성경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나 성령의 영감에 대해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을 다룰 때, 몇 가지 대 원칙들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영감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계시를 위한 영감과 기록을 위한 영감 사이를 구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계시나 계시기록을 위한 성령의 영감과 성령의 조명사이를 구별해야 된다는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든, 성령의 영감의 역사가 임할 때든, 인간은 단순히 기계적인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섯째로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특별섭리 사이를 구별해야 된다는 것이다.
여섯째로 하나님께서 계시하고 영감하시는 방식들이나 수단들은 인간적인 오류나 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런 대 원칙들은 최종적으로 성경의 속성들, 즉 성경의 완전성, 종결성과 충분성 및 무오성을 변증하기 위한 원칙들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들은 변명하기 위한 모든 객관적인 시도들은 최종적인 근거들이나 변증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변증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변증들에 긍정할 수 있는 태도들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칼빈의 말대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조명하시는 일이 없이는 어떤 이도 성경에 대한 신뢰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성경의 역사 없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많은 근거들에 대해서 완전히 설득당한다 하더라도, 성경에 대한 의심은 남아 있으며 조그만 비신뢰성일지라도 그것은 수 많은 객관적인 근거들을 무익하게 만드는 폭탄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징표가 아무리 적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만한 객관적인 근거들이 없어 보여도, 그 적은 징표나 그 적은 객관적인 증거로도 사람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만 바로 인간 앞에 성경의 완전성, 종결성과 충분성 및 무오성의 자리가 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인간의 성경에 대한 비신뢰성은 무한한 신비의 사실에 속한다. 그런 비신뢰성은 인간의 구원의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즉 성령이 확신시켜주기 전에는 성경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다. 그런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어떤 객관적인 설득도 완전한 확신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확신도 무한한 신비에 속한 일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의 무오성이란 계시의 속성 자체가 갖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 앞에 그것의 신뢰성을 얻을 때, 거기에 또한 무한한 신비가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의 무오성은 인간의 구원과 성령의 역사및 그로 인한 인간의 신앙과 그의 고백과 연결된 것이다. 그런 성경에 대한 속성은 최종적으로 고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백하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고백은 근원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다른 것에 근거하고 있다. 그 근거 때문에 무오성에 대한 고백은 가장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인간의 보편성의 차원에서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오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런 인간의 보편성이 인정하는 객관성조차도 무오성의 최종적인 객관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영감방식과 구별되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은 인간의 합리적인 모든 논증의 힘과 능력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기에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적인 조명이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한 최종적으로 만족시키며 확립시키는 설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마지막 유일하고 참된 객관성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4.3. 무오성의 객관적 성격
성경에는 어떤 오류(기억의 결함, 무지, 대중적인 편견등)가 혼합되어 있다는 생각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발생하였다: Semler, Ammon, Eichhorn, Paulus, Gabler, Schuster, Restig, M. de Wette, Michaelis, Rosenmüller, Scaliger, Capellus, John le Clerc, Vossius. 그러나 L. Gaussen은 일찍이 이런 파괴정신은 유대주의와 라틴교부들에게 많은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즉 유대주의에 의해서 모세나 선지자들의 무오성을 유대 랍비들에게도 적용함으로 그리고 카톨릭에 의해서 그 무오성을 교황에게 적용함으로, 성경의 저자들에 대한 무오성이 자연주의적인 무오성으로 전략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비슷하게 바빙크도 성경의 불충분성이 파괴된 것은 처음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승의 교리가 등장하면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런 카톨릭적인 구전에 대한 교리가 성경의 불충분성에 대한 의식을 조장하였고 급기야 그것을 파괴하고 정당한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변화는 카톨릭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였고 처음 유대주의에서 발생하여 카톨릭이 모방하는 식이였다는 것을 바빙크는 언급하였다.
동시에 성경의 불충분성을 파괴하는 운동은 신비주의 운동이다. 그 운동의 최종적인 목적은 신비주의 운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파괴에 있는 것이요 성경을 교회 안에 더 이상 안에 자리를 얻지 못하도록 하는 고도의 기도들이다. 전승을 성경과 나란히 놓으려는 정신이나 성경이 발생하였던 이적들이나 계시들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증험들이란 결국 그 중점이 성경에 있지 않고 전승이나 지금의 이적이나 계시에 두는 것이요 언제든지 실제적으로 성경 없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데 있다.
첫째로 무오성의 범위는 단순히 선포된 계시들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기록된 계시에까지 미치며 최종적으로 성령의 내적조명에까지 그 원리적인 무오성이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계시가 전의 계시에 첨가되거나 그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이 있다는 것이 이전의 계시와 말씀이나 주어진 계시와 말씀이 불충분하거나 불분명해서 혹은 유오해서 더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큰 은혜에 대한 증거들일 뿐이다.
둘째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완전하고 바르고 무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감론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ᾀΦʾ ἑαυτού ὀυκ εἰπείν)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의미에서 증거되고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로 인한 사상이 부패되었어도, 성령에 의해서 감동될 때, 그것이 순수한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오설이 원래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고 교회사의 논쟁에서 발생하였고 그것도 종교개혁 이후에 발생하였다는 비난이 있다. 이런 비난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비난이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발생하였다는 근본적인 의도를 무시하는 것이다.
셋째로 성경 자신이 성경의 다른 본문을 인용할 시, 가감하지 않되, 단어 자체의 점이나 획에 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말의 시제나 인칭변화도 변함이 없이 인용하고 있다.
넷째로 사본상의 오류를 인정하되 원본의 무오성을 믿는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원본의 무오설에 대한 주장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사본들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을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사본비평학의 변명할 수 없는 결과이다. 따라서 사본상에 미묘한 많은 차이들이 있다는 것은 원본의 무오설에 대한 주장을 펴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사본의 무오성을 이루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역시 조금씩 다른 많은 사본들이 산재하였기 때문에 원본의 무오설을 필연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또한 원본의 무오설에 대한 가정으로부터 본문비평이란 학문이 가능하다. 즉 본문비평은 단순히 원본을 추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무오성을 지키려는 객관적인 시도로 남아 있다.
다섯째로 객관적인 사실로부터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여진 가장 객관적인 사실로부터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에 대한 사실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사실이나 도덕적인 사실에 있어서도 성경이 무오하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의 그 모든 사실에 대한 무오성을 의미한다.
동시에 자연과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잘못된 시각이나 거짓, 악과 마귀에 대한 묘사가 성경에 있을지라도, 그들이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증거들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여진 가장 개관적인 사실에 대한 무오한 시각이요 무오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무오성이 파기되지 않는다.
이런 원칙적인 입장들을 고려하면서 성경 안에 있는 일반적인 모순들을 해결하는 방식들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로 성경 안에서 어떤 모순들은 사본하는 과정에서 부주의가 있었다.
둘째로 성경에서 다른 같은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묘사되기도 하고 같은 것이 다른 장소에서 행하여 졌다.
셋째로 연대학적인 어려움들이 일어났던 시기와 관련하여 산정방식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부왕의 부재나 살아 있는 동안 왕으로서 통치하였거나 왕이 되었던 사례로 인하여 치정연대의 겹침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될 수 있다.
넷째로 성경의 표현들에 있어서 같은 것에 대한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으로 다른 강조점들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는 다만 하나님 편에서 온다는 것을 강조하여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였고 야고보는 믿음의 열매인 거룩의 실재를 강조하여
칭의를 말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로 두 개의 모순된 주장은 다른 관점에서 모두 진리일 수 있다.
여섯째로 인간편에서 그 판단을 중지해야 할 다른 시대나 경륜으로 인한 모순들이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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