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예배


글 / 김경진 목사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은 실제로 예배개혁이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아마도 "예배(worship)"라는 단어를 좁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앞의 명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실제로 예배학자중에는 "예배의 범위"를 "씌여진 예식서들"(written liturgies)만으로 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1985년에 출판된 Christian Worship in East and West: A Study Guide to Liturgical History의 저자 Herman A. Wegman은 "예배의 범위"를 "예식서 혹은 예식과 관련한 책들"(liturgical texts)만으로 한정하였다. 그 관점에서 그는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개혁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배개혁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예배의 갱신은 칼빈의 긴급하고 우선적인 관심이 아니었다." 예배를 예식서의 범위 안에 한정한 Wegman의 주장은 그러한 관점의 범위 안에서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배의 범위를 좀더 넓게 보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John E. Burkhart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하신 것, 하시고 계시는 것, 그리고 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에 대한 인간의 흥겨운 응답이다(worship is the celebrative response to what God has done, is doing, and promises to do)"라고 말한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다양한 형태의 응답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같은 입장에서, 프린스톤 신학교의 Elsie Anne McKee 교수는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근본적인 존숭의 표현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고 그를 섬기는 모든 형태의 인간행위이다(worship is the fundamental human adoration of God, the reverent acknowledgement and service of God as God, in all the forms that may take)"라고 예배를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McKee는 Wegman과는 정반대로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의 중심은 예배 개혁이었다(the reform of worship was central to the sixteenth-century Protestant Reformation)"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McKee의 주장은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넓은 관점에서 예배를 보았을 때 분명히 종교개혁의 중심에 "예배의 개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는 이미 우리에게 "예배"를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까지 넓은 관점에서 "예배의 역사"를 연구하여왔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글에서도 같은 관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어떻게 중세교회의 예배를 개혁하려고 하였지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글을 통하여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결국, McKee가 말한것처럼, 예배의 개혁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희생제사와 인간의 중보를 반대하는 예배신학

이미 우리가 지난 장에서 살펴본대로 중세시대에 있어서 예배의 변질은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희생제사적 개념의 부활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인간은 단번에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하게 되었다"는 초대교회의 신념이 퇴색해 가면서 중세교회는 또다시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터(M. Luther), 쯔빙글리(Zwingli) 그리고 칼빈(J. Calvin)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이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중세교회가 가진 문제의 중심부에는 "어떻게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신학적 오해가 있다고 진단하였다.

종교개혁가들이 보기에, 중세 교회는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도록 가르치는 대신에,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공헌을 하여야만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심지어 부인하고 있었다. 신비한 예식들(특히 미사의 집례), 살아있는 사제들의 중보, 또는 죽은 성인들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God's mercy in Christ)을 인간의 행위(human works)와 뒤바꾸는 우상 숭배적인 행위(idolatrous attempt)라고 종교개혁가들은 판단하였다.

"인간은 그의 행위와 공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중세교회의 왜곡된 신학은 면죄부(indulgences)의 판매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존 테첼(John Tetzel)은 자기들이 판매하고 있는 면죄부는 "죄인들의 세례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며, 타락 이전의 아담보다 더 순결하게 만들뿐 아니라 면죄부를 판매하는 자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효력이 있다"고 선전하였다고 전해진다. 중세교회는 이외에도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수많은 예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죽은 성인들을 통한 중보이었다. 죽은 성인들은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중보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그것이다. 죽은 성인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대신 감당해 주고 또한 하나님께 중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교회 안에 퍼져있었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Ninety-five Theses)을 게시할 때 1517년 10월 31일, 즉 만성절(All Saints Day)의 전야를 택하여 게시한 것은 나름대로 이러한 성인사상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라는 글에서 미사를 악습 혹은 폐해(abuse)라고 말하였다. 중세의 예배관이 미사를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의 회중들은 미사를 통하여 치유와 연옥으로부터의 해방 및 다른 주술적인 결과들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은혜와 유익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미사는 중재자인 사제를 통하여 대신 드려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회중은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모든 현상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을 뒤흔들고 있었으며 은총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구원을 찾으려는 중세교회의 노력은 종교개혁자들에게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러므로 예배형식과 관련하여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약간의 다른 의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은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는 하나같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 한마디로 "인간의 공로만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종교개혁의 유명한 모토로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할 수 있다:"오직 그리스도로(Christ alone)", "오직 믿음으로(faith alone)", 그리고 "오직 은총으로(grace alone)."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신학

"어떻게 하는 것이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중세교회는 아마도 "예배의 순서를 제대로 빠짐없이 잘 해나가는 것이 바로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예배를 잘 드린다는 것은 흔히 "재연"을 잘 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 유교문화의 경우에도 "제사를 잘 지낸다는 것"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음식을 정해진 자리에 잘 마련해 놓고 정해진 방법에 따라 그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음식을 정해진 자리에 놓지 않으면 "제사를 잘 드리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배관을 극화(enactment)의 예배신학이라고 부른다.

흔히 희생제사를 중요하게 다루는 다양한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배신학이다. 중세교회가 희생제사(미사)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극화의 예배신학이 추구되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중세교회에서 "미사를 잘 드린다"는 의미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예를 들어 사제가 성체를 높이 드는 것이라든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던가 하는--모든 순서를 차질없이 진행하는 것이었다. 예배에서 그들의 관심은 "언제 성체가 실제로 변화하는가? 사제가 성체를 높이 들어올릴 때인가? 아니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인가?"라는 등에 있었지 "예배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이해하는 가?" 하는데 있지 않았다.

중세교회의 예배가 천년이상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드려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극화의 예배신학"덕분이었다.

중세시대의 미사 참여자들은 그저 "사제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할 뿐이었다.

하지만 인문주의(humanism)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자들은 올바른 예배란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즉 "무엇이 제대로 드린 예배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이해가 가능한 예배"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으며 인문주의가 교회에 가져다 준 선물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예배(미사)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우선 라틴어로 드려지는 예배를 이해가 가능한 모국어로 드리도록 하였다. 성경도 모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예배의 표준은 "이해가 가능한 가?" 이었으며 이러한 기준에 따라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입교(Confirm‎‎!ation)를 받을 때에도 "이해가 가능한 나이인가?"가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도 문제는 있었다.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인간은 정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은 인간이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래서 예배가 시작될 때에와 성경말씀이 읽혀지기 전, 그리고 성만찬을 집례할 때에 언제나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온전한 이해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해를 강조하는 예배신학은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준 값진 선물이었다.

성경에 표준을 두는 예배신학

종교개혁자들이 예배에 대하여 우려하였던 또 다른 문제는 극화된 예배가 만들어내는 부작용에 대한 것이었다. 즉 중세교회가 줄기차게 유지해왔던 "예배행위가 결국 우리의 믿음과 행동을 만든다(Lex Orandi, Lex Credendi)"는 모토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중세교회 교인들은 실제로 그들이 드리는 미사와 제 예배행위를 통하여 그들의 믿음과 행동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만성절(All Saints Day)을 지킴으로 그들의 신앙속에 성인(saints)들에 대한 신뢰와, 성인들의 중보에 대한 기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잘못된 예식과 예전들이 잘못된 신앙과 신학을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예배의 모토를 제시하였다. 바로 "신앙(beliief)이 예배의 행위를 만들어가도록 하여야 한다(Lex Credendi, Lex Orandi)는 것이었다. 즉 올바른 신앙이 우선이고 그리고 그 신앙과 믿음에 근거하여 예배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올바른 신앙의 표준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자들은 그 표준을 성경(Bible)이라고 말한다. 즉 성경을 표준으로 하여 올바른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그 표준의 잣대 안에서 예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교회는 예배가 신앙(belief)을 조정하지만,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성경(Bible)을 통하여 얻은 신앙(belief)이 예배를 조종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예배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언제나 예배예전의 개혁에 있어서 그 잣대는 성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종교개혁자들의 또 다른 모토가 예배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오직 성서만으로(Scripture alone)!

삶을 강조하는 예배신학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물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첫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희생제사와 사제의 중보에 치우쳐 버린 중세교회에 대하여 다시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즉 "삶을 통해 봉사하는 예배 신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웃에게 전심으로 봉사하는 일이 옳은 예배이고 기독교인들이 진정으로 해야하는 희생(산제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칼빈은 진정한 예배를 십계명에 두 가지로 요약된 위대한 율법,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pietas)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caritas)로 정리하였다. 즉 칼빈은,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교인에게 나타나는 경건한 믿음의 응답인,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pietas와 caritas에 의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pietas가 우위에 있지만 그것의 권위는 caritas에 의해 검증된다. 즉 칼빈에게 있어서 "헌신과 예배의 행위"는 "이웃을 위한 정의와 사랑의 행위"와 역동적인 긴장관계에 있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율법의 제 3사용(the third use of the law)"은 그래서 칼빈의 예배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칼빈의 이러한 사상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3부 "감사하는 일"에서 십계명이 설명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행하였던 예배순서를 보더라도 십계명은 항상 죄의 고백 뒤에 위치하곤 하였다. 즉 십계명을 "죄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일하도록 격려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삶을 통한 예배"를 한마디로 "소명(calling)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자신이 맡은 일은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예배의 자리가 예배당이 아닌 삶의 자리로 넓혀진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중세시대에 공로사상으로 왜곡되어진 상황아래서 이러한 사상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우리가 인간적 노력이나 공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었고 우리가 삶 속에서 무엇을 하는 것은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기 위한(thanksgiving)것"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은 종교개혁 예배신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의 또 다른 모토는 의미가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맺는 말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예배의 신학은 한마디로 "초대교회 예배신학으로의 회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더 이상의 희생제물이 필요 없으며 그리스도의 희생만으로 우리는 완전히, 단번에 구속되었다"는 초대교회의 신앙적 선언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이제 우리가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이다"라는 초대교회의 확신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려는 것이었다. 중세교회의 예배가 극화의 예배 신학속에 머물러 있을 때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신학으로 예배를 설명하였던 시도는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이라고 보여진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예배와 관련한 이견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의 바른 예배신학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였고 이는 또한 성공적이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다시 변질의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굴레일지도 모른다. 종교개혁이후에 삶을 강조하는 예배신학은 극단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 보게 되겠지만 후에 나타난 청교도 주의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려다가 다시 변질되어 버린 예이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종교개혁이후에 나타난 또 다른 변질의 요소들을 살펴볼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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