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
참된 회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고린도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전에 보냈던 다른 서신(고린도전서)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그 서신에서 어떤 문제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을 크게 책망했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서신이 그들을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였는데,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회개가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를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에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죄와 관련하여 두 종류의 근심에 관해 말한다. 하나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요, 또 하나는 사망을 이루는 근심이다. 또한
이 두 종류의 회개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이다.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려 한다.
1.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2. 참된 회개의 행위와 그 결과는 무엇인가?
3. 거짓되고 위선적인 회개는 어떤 것인가?
4. 거짓되고 위선적인 회개를 어떻게 식별하는가?
지금은 우리 신앙고백자들이 신앙을 주제로 하는 여러 가지 훈련의 본질과 특성의 진위를 철저히 가려야 할 때이다. 그렇게 해야 교회에 거짓되고 무익한 신앙고백자들이 들끓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나는 오늘날 왜 그처럼 많은 위선적인 신앙이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위선적인 신앙이 야기시키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성경에 비추어 보면 실제로는 전혀 경건치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미혹되고 있는 것인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스스로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신앙의 토대가 되는 교훈에 대한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특히 참된 회개와 거짓된 회개를 올바로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I.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참된 회개를 하면, 죄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달리 하게 되며, 그에 따라서 죄를 향한 감정의 변화도 일으킨다. 감정은 사고(思考)의 소산이다. 죄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되고, 또 이러한 견해의 변화에 부응하여 죄에 대한 올바른 감정을 갖게 될 때 진정으로 참다운 회개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이 때 가지게 되는 견해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갖고 계시는 견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근심,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과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을 때만 그 심령의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를 수 있다.
1. 죄에 관한 견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1) 죄의 본질에 대한 견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참으로 회개한 자가 가지는 죄에 대한 견해는 회개하지 않은 자와는 아주 다르다. 진정 회개한 자에게 있어서 죄는 호감이 가고 매혹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커녕,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즉 자신이 회개하기 전에 그러한 것을 바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게 된다. 물론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도 죄가 자신을 망하게 하리라는 것, 곧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자기들을 벌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죄는 본래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사랑하며 죄를 맛본다. 그들은 죄로 인한 결과가 행복하게 끝날 수만 있다면, 결코 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는 자기의 죄악된 행동을 철저히 증오한다. 그는 회개하기 전의 일들을 회고하며 이렇게 외친다. "내 안에 이런 것들이 있었으니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얼마나 혐오스러운가! 나는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사람이다."
(2) 죄의 특성에 대한 견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왜 끔찍한 징벌로 죄를 다스리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죄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왜 하나님께서 죄를 영원한 징벌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기시고, 그러한 견해 안에서 죄를 보시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에만 그들은 죄를 달리 보게 되며, 그리스도인과 동일한 관점에서 죄를 대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될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감정의 변화를 갖게 된다. 많은 죄인들이 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고 있으며, 죄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이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마귀들과 지옥의 악한 영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한다. 죄에 대한 견해의 변화는 참 회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항상 회개에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견해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는 한, 우리 마음은 결코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회개 없는 견해의 변화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견해의 변화가 없는 참 회개는 있을 수 없다.
(3) 죄의 성향에 관한 견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죄인은 죄가 영원한 죽음을 받을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고도 이 점에 관한 생각이 완전히 변화될 수는 있다. 그러나 견해가 변화되지 않고서 참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죄가 죄의 성향 안에서 영과 육, 그리고 현세와 영원 세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 및 모든 사람들에게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주의 아름답고 복된 모든 만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죄가 자기 자신 및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성향이 있다는 것과 보편적인 절제만이 유일한 치유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귀도 그렇게 알고 있다. 아마 우리 가운데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죄인들이 있을 것이다.
(4) 죄의 응보에 관한 견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회개라는 말에는 앞에서 제시된 견해들의 변화가 함축되어 있다. 이 말은 마음의 상태에 있어서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모든 견해들의 변화가 포함된다. 그것이 생명과 관계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주의한 죄인에게는 죄의 응보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결여되어 있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죄가 영원한 죽음을 받아 마땅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그것을 믿는다면, 부주의한 죄인으로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죄는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미혹되어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각성하고 뉘우친 죄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치 않는 것처럼 이 사실도 의심치 않는다. 그는 죄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2. 참된 회개는 그에 따른 감정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감정의 변화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견해, 즉 죄의 본질, 죄와 하나님과의 관계, 죄의 성향, 그리고 죄의 응보 등과 관련이 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를 가증하고 추악하며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죄를 혐오하고 죄를 미워한다. 사람들은 죄가 해롭고 혐오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죄를 사랑하고 원하고 집착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할 때에, 진심으로 죄를 미워하고 버릴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참 회개를 한 순간부터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행위들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죄에 대해서 크게 애통해 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본질과 관련해서 죄를 볼 때는 혐오를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볼 때에는 눈물을 흘린다. 회개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애통해 하며 통회의 눈물로 회개하기를 원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를 있는 그대로 느낀다. 어떤 사람에게 죄의 성향이 있음을 깨달으면, 그는 그것을 저지하여 그 사람을 죄에서 구하고 사망의 물결을 물리치려는 뜨거운 소망을 갖는다. 그 소망이 그의 심령을 불태운다. 그래서 그는 죄인을 죄의 끔찍한 성향에서 구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수고하며, 그 죄악의 불에서 전력을 다해 끌어내려 한다. 이런 일에 열중할 때,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버리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죽음의 독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처럼, 소리 높여 경고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의 응보에 대해 똑똑히 알고 있다. 그는 범죄하면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지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것이 지극히 옳고 정당하며 공의롭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를 정죄한 율법의 선고를 비난하기는 커녕,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요, 은혜 중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는 죄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처사가 무정하고 가혹하며 불친절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자신이 지옥으로 보내지지 않는 것과 범죄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머지않아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리라는 것에 대하여 크게 경탄한다. 그는 죄인들이 모두 구원받지는 못한다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다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고 놀란다.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야 할 죄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지극히 큰 감사를 느끼게 된다.
Ⅱ. 참된 회개의 행위는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제 참된 회개의 행위는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며, 또 우리가 회개했는지의 여부를 우리 자신이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하려 한다.
(1) 참된 회개를 이룬다면, 죄에 대한 견해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하여 견해와 감정의 변화를 체험했을 때 그것을 의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문제에 있어서도 변화를 체험하면 그것을 의식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옛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2) 참된 회개를 이루면, 죄를 반복하는 경향이 사라진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죄에 대한 두려움이나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피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죄를 범하려는 성향이 없어진 것을 체험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았을 때 즐겨 행하던 죄들을 돌이켜 볼 때 어떻게 보이는가? 그 죄악들이 즐거워 보이는가? 다시 그 죄를 행하게 된다면, 과연 그것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죄의 성향이 남아 있다면, 다만 죄를 뉘우친 것이지 참된 회개에 이른 것은 아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죄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인 것이다.
(3) 참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행동의 변화를 낳는다. 이와 동일한 원리로, 회개는 회개를 낳는다는 말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마음의 변화, 즉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며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자신이 진정으로 변화되어 과거에 탐닉했던 죄악을 다 버렸는가? 아직도 죄를 범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제아무리 마음을 바꾸었다고 해도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즉 실제적인 개혁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회개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회개도 아니다.
(4) 회개가 참되고 순전할 때, 죄를 고백하며 동시에 범죄한 일에 대한 보상을 한다
도둑이 회개했다고 해도 훔친 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한 그는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뉘우쳤을 수는 있지만, 회개한 것은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훔친 돈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속이고 부당하게 취한 것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또는 어떤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서도 자신이 행한 나쁜 짓에 대해 보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5) 참된 회개에 따라 성격과 행동이 영원히 변화된다
본문에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기록된 바울 사도의 말은, 참된 회개란 아주 깊고 근본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옛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종종 "후회할 필요가 없는" 회개라는 의미로 그것을 인용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문에도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절대 후회하지 않는 회개이다. 즉, 너무나 철저해서 되돌아갈 필요가 없는 회개이다. 죄에 대한 사랑을 철저히 버린 상황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에 대한 견해와 감정들이 완전히 변화되었기 때문에 옛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진정으로 회개한 죄인은 결코 회개할 것이 없는 감정들을 구현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이다. 이러한 참된 회개는 천국에서의 안식에 이르는 그때까지 지속된다. 이러한 회개의 결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도의 견인의 교리와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에 대하여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을 갖는다. 그리고 죄에 대한 이러한 감정을 실생활에 적용하면서 살기 때문에 죄를 아주 미워한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한 지 오랜 후에도 계속 인내하며,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회개를 저버리고 다시 과거의 죄로 되돌아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III. 거짓 회개는 어떤 것인가?
거짓 회개, 또는 위선적인 회개는 세상적인 회개, 즉 이 세상을 좇아가는 근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세의 삶과 관련하여 세상적인 것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동기에서 기인하는 죄에 대한 근심이다. 또는 기껏해야 내세에서의 자기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는 근심으로서, 죄의 본질에 주의를 기울인 올바른 근심은 아니다.
(1) 거짓 회개는 죄에 대한 견해의 변화, 즉 참된 회개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견해의 변화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거짓 회개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도, 우리는 죄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죄악이 자기의 명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 또는 우리의 생활을 위험하게 만들 것임을 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우리의 감추어졌던 어떤 행동이 드러난다면 우리 자신이 치욕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몹시 두려워하고 괴로워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적인 근심을 하는 것은 그 저변에 세상적인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 깔려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이러한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2) 거짓 회개는 이기심에 그 토대를 둔다
사람이 회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자신이 행한 죄의 악한 결과가 자신에게로 돌아옴을 알게 되거나,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하여 불행해졌기 때문에, 또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 가족이나 친구들을 상하게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죄로 인하여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어떤 피해를 당할까 두려워서 행하는 일시적인 후회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행하는 회개는 아주 이기적이다. 물론 때로 양심의 가책, 비통하고 극심한 가책을 느낄 수도 있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양심의 가책은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진노나 지옥의 형벌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나 두려움도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만 그 심중에 죄를 미워하는 마음, 혐오하는 마음이 없으며, 죄가 무한히 악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 확신에 따라 생활하려는 마음이 없다.
IV. 거짓 회개, 위선적인 회개는 어떻게 식별하는가?
(1) 거짓 회개는 죄에 대한 감정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상태이다
죄를 향한 성향이 깨지지 않고 정복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죄의 본성에 관한 감정이 변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죄를 향한 욕망을 느낀다. 이런 사람은 죄를 피하되, 죄를 혐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2) 거짓 회개는 사망을 초래한다
거짓 회개하면 결국 위선적인 자가 되어 자신의 죄를 은폐하게 된다. 참 회개를 한 사람은 자기가 회개했다는 것, 자기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거짓 회개한 사람은 변명과 거짓말로 죄를 감추며, 회개한 것을 부끄러워 한다. 그는 속죄를 원하는 사람들이 앉는 앞 좌석으로 나오라고 청함을 받으면, 여러 가지 변명과 구실로 자기의 죄를 감추고 미화시키며 그 흉악함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한다. 지난 날의 행동에 대하여 말할 때면, 듣기 좋은 말로 부드럽게 말하곤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자기의 죄를 계속하여 은폐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거짓 회개는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거짓 회개를 하면 결국 하나의 죄를 숨기기 위하여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심중에 거리낌이 되고 있는 죄악을 솔직하게 터놓고 꾸밈없이 회개하지 않고, 회개에 어울리는 고백을 그럴듯한 말로 구변이 좋게, 마지못해 점잖을 빼며 말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누군가와 함께 우리의 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근심은 세상적인 근심에 지나지 않으며 죽음을 이루는 근심일 뿐이다. 우리는 죄인들이 자기의 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열렬한 진리 탐구자라 자칭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기대한다. 지옥에서도 그와 같은 종류의 근심을 볼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지옥에 떨어진 불쌍한 영혼들은 모두 하나님의 눈을 피하려고 한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에게서는 그러한 근심을 찾아볼 수 없다. 천국 성도들의 근심은 분명하고 꾸밈이 없으며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한 근심은 참된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성도들은 행복으로 충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하여는 깊이, 그리고 공공연하게 근심하며, 이 근심이 용솟음쳐 나온다. 그러나 세상적인 근심은 그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며, 비천하고 비참한 것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죽음을 초래한다.
(3) 거짓 회개하면 행동이 부분적으로만 변화된다.
세상적인 근심으로 인하여 행한 회개에 따른 행동의 변화는 오직 그 사람의 깊이 뉘우친 부분에 한해서만 이루어진다. 아직 그 심령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깊이 뉘우쳤던 중요한 죄들만 피하려고 애쓸 뿐이다.
이제 막 개심한 개종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가 미혹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행동의 변화는 부분적인 것에 그칠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 있어서는 변화되었지만, 이직 그릇 행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이런 사람과 사귀면, 그가 죄를 민감하게 의식하며 전율하고,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모든 일 안에서 죄의 정체를 재빠르게 감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어떤 일에 관해서는 엄격하고 재빠르게 감지하지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 행동이 흐트러져 있고 견해 또한 애매하며, 모든 죄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4) 거짓 근심에서 나온 변화는 일시적이어서, 옛 상태로 되돌아가곤 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옛 죄 속으로 계속하여 다시 빠져들어 간다. 그 이유는 죄를 향하는 성향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두려움으로 인하여 죄가 억제되고 저지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소망을 품고 교회 안에 들어가면, 그의 두려움은 감소된다. 그리고 점차 이 억제의 생활이 싫증나서 머지않아 과거의 죄악된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어려움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이 끊임없이 우상숭배를 비롯한 여러가지 죄로 되돌아갔던 것은 바로 이런 경향 때문이었다. 그들의 근심은 세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지금도 교회 어디에나 이런 세상적인 근심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개심하여 교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지만 곧 다시 과거의 생활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들은 그러한 상태를 믿음이 식었다거나 배교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나 현재나 죄를 사랑하고 있으며,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죄 속으로 되돌아간다. 돼지가 더러운 돼지 우리에서 뒹구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 점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모든 준비와 출발점은 여기에 그 토대로 두고 있다. 사람들은 죄에서 깨어나서 뉘우친다. 그리고 점차 소망을 갖게 되고 차츰 거짓된 안심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 죄에 빠져 멀어져 버린다. 그들은 교회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대단히 조심하였을 것이나 죄의 근원들이 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옛 생활 방식, 즉 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치한 치장을 좋아했던 여자들이 회개한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여자들은 차츰 리본이나 외양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허영으로 되돌아간다. 돈을 사랑했던 남자가 회개하고서도 여전히 돈을 사랑한다면, 그는 곧 옛 생활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회개한 뒤에도 교인이 되기 전에 하던 대로 사업에 몰두하고 세상적인 것들은 아주 탐욕적으로
사회의 각 분야를 두루 살펴 완전히 회개한 개종자들을 찾아 보라. 개심하기 전에 그들을 괴롭히던 죄들이 그들과 거리가 아주 멀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개심한 사람은 옛날에 괴롭히던 죄에 다시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죄를 매우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미혹되어 있고 세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항상 같은 죄로 돌아갈 것이다. 사치한 치장을 사랑하던 여자는 다시 온통 화려하게 치장하고 과거에 하던 생활 속으로 단숨에 빠져든다. 죄의 근원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법을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기 않았기 때문이며, 마음 속으로는 항상 불법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5) 거짓 회개가 낳은 변화는 마지 못해 행한 변화이다.
거짓 회개가 낳는 변화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강요되고 강제된 마지못해 이루어지는 변화이다.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의 변화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변화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죄를 향하는 성향이 없다. 그 심령 안에서 성경의 약속이 성취된다. 그는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 3:17)는 말씀의 참 뜻을 알게 된다. 그는 구세주의 멈에가 쉽고 그의 짐은 가볍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임을 느낀다. 하나님의 계명이 금보다도 정금보다도 더 사랑스럽고, 꿀보다도 더옥 달콤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거짓 회개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율법적인 회개요, 사랑의 소산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말미암는 회개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회개요, 죄로 인한 불순종에서 순종으로의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진정에서 우러나온 변화가 아니다. 우리가 거짓 회개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자신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피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죄를 혐오하기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거리낌이 되거나, 우리의 영혼을 잃게 될까봐, 또는 우리의 소망이나 명예를 잃게 될까 두려워 죄를 피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말씀들을 근거로 한 의무를 행하도록 떠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 대하여 변명하고, 의무를 회피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생활 방식에는 큰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히 거역하여 달아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없다면, 그들은 죄를 범할 것이다. 그러나 참 회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위대한 사랑의 법에 위배되는 일을 혐오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명백하게 명하셨든 명하지 아니하셨든 간에 당연히 그것을 피한다. 그런 사람이 독한 술을 마시거나 만들거나 파는 일을 그만 두는 데에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이 위대한 사랑의 법에 거슬린다는 것을 알며, 그것을 진정으로 혐오하며, 그래서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도둑질하거나 다른 혐오스러운 짓을 행하지 않는 것처럼, 더 이상 그와 같은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동료들이 자기를 핍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릇된 일을 전혀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죄를 회개한 사람은 당연히 죄악된 일을 미워하며 행치 않을 것이다.
(6) 위선적인 회개는 독선을 낳는다.
위선적인 회개를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구원을 위하여 그를 믿고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실제로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행위의 변화를 의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 본다면,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기대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의 속죄보다는 자신의 변화를 더 강조하며, 그것에 희망의 토대를 더 강하게 둔다. 그는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자신의 독선을 꾸며 맞추는 것이다.
(7) 위선적인 회개는 거짓된 안전을 기대하게 한다
위선적인 거짓 회개를 한 사람은 자기가 행한 세상적인 근심이 참된 회개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의지한다. 그들은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느껴본 적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자기가 죄 때문에 근심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당연히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근심한다. 그런 다음에는 안심하여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충심으로 의지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8) 거짓 회개는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
이처럼 세상적인 근심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근심을 한 횟수에 비례하여 마음이 더 완악해진다. 그가 뉘우치는 감정을 강렬하게 느끼고서 마음이 깨지지 않는다면, 감정의 샘은 점점 더 고갈될 것이며,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참된 그리스도인을 살펴보자. 하나님 앞에서 그를 깨지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진리를 증거해 보자. 그는 그때마다 점점 더 부드럽고 아름다워지며, 더욱 쉽게 감동을 받고, 자극을 받으며 용해되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영원히 그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 안에서 깨질 것이다. 그의 마음은 깨달은 것을 뉘우치며 사는 데 익숙해진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쉽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유순해진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 부흥회를 통해서 세상적인 회개만을 한 교회나 개인은 잠시 죄에서 깨어나 회개한다고 크게 소란을 떨고는 다시 냉담해진다. 이런 행위가 거듭되면, 죄에서 완전히 깨어나기가 더욱 어려워지며, 점차 지옥의 연자맷돌처럼 굳어져서 마침내 어느 누구도 그들을 다시 소생케 할 수 없게 된다. 참된 회개를 한 교회들과 신자들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계속적인 소생을 경험한다. 그들은 소생하도록 부르는 나팔 소리를 들을 때 즉시 빛을 내고 타오르며, 그 일을 할 준비를 갖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러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온화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차이는 빛과 어두움의 차이처럼 크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과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서 이러한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소생을 거듭 체험한 후에도 신앙을 비웃고 욕하는 죄인들에게서 이 원리가 예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머리 위에 자비의 하늘이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주의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교회들과 그 지체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참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면 온갖 새로운 자극도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그들이 진리에 이르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9) 거짓 회개는 양심을 마비시킨다.
거짓 회개한 사람은 진리가 그 마음을 비출 때 처음에는 번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 뉘우치는 것처럼 깊이 뉘우치지는 않는다. 참 그리스도인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자마자 곧 평안해진다. 그리고 뉘우침이 거듭될 때마다 그는 점점 더 죄를 경계하게 되고 온화하며 주의깊게 된다. 그의 양심은 눈동자처럼 예민해져서 악의 모습만 보아도 치를 떨게 된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진정한 거부를 낳지 않는 거짓되 근심은 마음을 전보다 더 완악하게 하며, 달구어진 쇠처럼 양심을 점차 무디어지게 한다. 이런 근심은 사망을 낳는다.
(10) 거짓 회개는 소망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다
거짓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변화나 근심, 그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즉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일 수고하는 신뢰를 이루지 않는다.
(11) 거짓 회개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이런 회개는 분명히 후회를 낳는 회개이다. 거짓 회개했던 사람들은 전에 느꼈던 깊은 회개의 감정을 점차 부끄러워 할 것이며,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혹시 그것에 대하여 말한다 해도 경멸적이고 냉담한 태도로 말할 것이다. 아마 그들은 부흥회 때에는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제일 열심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흥회가 끝나면 옛날로 다시 돌아가, 자기가 열심을 냈던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회개했다는 사실 자체를 후회한다.
그런 사람들은 죄 고백을 위한 속죄의 자리인 앞좌석에 나왔던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고조된 부흥의 순간이 지나가면, 그들은 지나치게 열성적인 것을 반대하며 신앙에 있어서 좀 더 냉정하고 일관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나중에 후회할 회개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부흥회에 참석하여 회개하고 개종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 고백의 근거였던 표준들과 수단들, 그리고 교리들을 거역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참 그리스도인은 결코 회개를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부흥회 때에 느낀 고조된 감정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결론
1.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 안에 거짓되고 무익한 신앙고백자들이 많은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뉘우침을 회개로, 세상적인 근심을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근심으로 오해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관찰해온 결과, 나는 세상의 모든 교회에 오늘날과 같은 슬픈 현상이 만연하게 된 데에는 참된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2. 뉘우친 죄인들이 그 뉘우침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큰 십자가로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믿지 않는 동료들과 자신이 즐기던 죄악된 생활을 단념하는 것을 큰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참된 회개를 했다면, 죄를 단념하는 것을 십자가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와 연합한 초신자들을 처음 볼 때마다 마음에 와닿던 느낌을 회상한다. 당시 나는 초신자들이 신앙심을 갖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 천국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에 대체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대단히 불행한 일처럼 여겼다. 그 당시에는 초신자들이 믿는 순간부터 참 행복을 누린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신앙을 갖는 것이 대체로 유익하고 궁극적으로도 좋은 일임을 알면서도 실제로 자신이 그러한 신앙생활을 통해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것은 회개의 참된 본성에 관한 오해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참된 회개를 하면 과거에 사랑했던 죄악된 것들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죄인들은 갓 회개하고 참 그리스도인이 된 친구들이 무도회와 파티, 그리고 죄악된 오락들과 어리석은 것들을 혐오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일들에 대한 사랑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개심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의 아버지는 매우 교만하고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치한 옷과 무도회를 아주 좋아했다. 그녀가 개심한 후에 아버지는 그녀를 강제로 무용 교습소에 데려 가서, 강제로 춤추게 하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울곤 하였다. 때때로 춤을 추려고 무도회장에 서 있을 때에는 혐오감과 슬픔이 거세게 밀려왔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일들에 대하여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로써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런 장면이 그리스도인이 된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과거에 함께 지냈던 친구들에 대한 연민을 불러 일으켜 주었을까?' '현기증 나는 쾌락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게 했을까?' '그녀가 참으로 기도회에 가고 싶어하며 거기에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 또는 세상적인 근심을 하는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관하여 품는 오해이다.
3. 아주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십자가로 여기는 신앙고백자들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의 죄를 변명하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엄격하게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핑계를 댄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있으며, 할 수만 있으면 죄에 깊이 빠지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혐오하고 죄로부터 돌아설 것이며, 죄에 끌려들어 가서는 안된다고 느낄 것이다.
4. 즐거운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즐겁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슬퍼한다. 그들은 항상 용광로 같은 시련의 고통 속에 거한다. 자기 부인을 할 기회가 왔을 때 기뻐하기는 커녕, 자신이 행해야 할 바가 자기의 성향과 습관에 어긋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하는 의무에 대한 말을 듣는 것을 큰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진리가 그들을 괴롭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것을 좋아한다면 빛의 조명을 통해 자기가 행해야 될 의무를 밝히 깨달을 때 크게 기뻐할 것이며, 그 빛으로 인하여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진리의 압박을 받아 고통스러워 하고 괴로워 하거나, 진리에 복종하지 따르지 않는 신앙고백자들은 위선자들이다. 그들이 불안에 떠는 죄인처럼 괴로워하며 죄를 지적받을 때에 괴로워한다면,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내어드린 것이 아니다.
5. 회심의 순간에 깊이 뉘우치고 신앙을 고백한 많은 회심자들이 얼마 후에 변절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깊이 뉘우치고 진정으로 괴로워한다. 그런 후에 그들은 평안을 느끼고, 그래서 기쁨이 매우 커진다. 그들은 얼마 동안은 정말 행복하지만, 차츰 변절한다. 참 회개와 거짓 회개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깊은" 뉘우침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경우를 은혜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이다. 그들은 죄를 향한 성향을 죽이고 소멸시키는 회개를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6. 타락한 생활로 돌아간 사람들이 왜 비참한지 알 수 있다.
죄를 향하는 성향이 깨지고 변화된 것에 관하여 지금까지 언급된 것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모든 참 그리스도인은 완전하다고 생각한다고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결코 그렇지 않다. 타락한 옛 생활로 돌아간 그리스도인과 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한 상태에서 원래의 죄악 상태로 돌아간 위선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위선자는 세상을 사랑한다.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죄를 즐거워 한다. 약간의 두려움과 가책, 그리고 명예를 잃는 데 대한 불안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죄를 즐거워 한다. 그러나 다시 타락한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그는 처음 열심을 잃어버리고 시험의 먹이가 되어 죄에 빠지지만, 죄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 상태에 대하여 항상 괴로워하고 고민한다. 그는 마치 고향에서 떠난 사람처럼 불행하게 느낀다. 사실 그때 그에게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보전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죄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불행하다. 그는 자기가 비참하다고 느낀다. 그는 위선자와는 아주 다르다. 다시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있기 때문에 육체가 멸명되어 성령을 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당분간 사단에게 넘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옛날처럼 죄를 즐거워 할 수 없으며, 과거에 세상의 쾌락을 통해 누렸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또 절대 불법을 물 마시듯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방황을 계속하는 한 그는 비참한 자이다.
7. 뉘우친 죄인들이 죄를 버리겠다고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 두려워 감히 죄를 버리겠다는 약속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죄를 사랑하고 있다. 주정꾼은 자기가 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술을 자제하고 피하지만, 그의 욕구는 여전히 술을 그리워하고 있다. 뉘우친 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기가 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죄를 계속 범하는 태도를 끊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감히 약속을 하지 못한다.
8. 일부 신앙고백자들이 서원을 거부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도 같은 원리이다. 그들은 자기의 죄를 사랑한다. 그들느 자기의 마음이 방종을 옹호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결합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 감추어진 이유는 이렇다. 그들은 마음으로 여전히 죄를 좇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며, 그래서 교회와의 계약의 의무를 행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죄를 지을 경우 교회의 훈계에 순종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9. 세상적인 근심을 하는 죄인들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며, 자신이 회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죄에 대한 생각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참된 회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이 즐기던 죄를 버리려 한다면, 모든 죄를 완전히 버릴 마음이 있다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할 것이며, 또 자신이 죄를 포기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고, 그러한 약속을 지킬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회심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회개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은 계속 그 죄악을 좇아 행하다가 결국 자기 앞에 놓인 종말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회개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지옥 깊은 곳에 떨어질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제까지 언급된 방식으로 회개를 표현하고 나타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죄를 사랑하며 죄에 빠져 지내는 사람은 여러 사람 앞에 나와 회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그릇 행하고 있다는 것은 뉘우치면서도 아직도 죄를 사랑하여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처해 있는 상태가 무섭고
끔찍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 계속해서 "2. 참된 회심"을 올리겠습니다.. )
<구원에 이르는 회개(True and False Repentance)>(도서출판 은성)
- 찰스 G. 피니 지음 엄성옥 옮김 -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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