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행6:1~7)


1. 두 파의 갈등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6:1


▲헬라파 유대인이란?

과거 남북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앗시리아에 각각 멸망당할 때 적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정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혹은 자진해서 화를 피해 해외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른바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이 생겨났다.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기원전 3세기부터 지중해 지역을 장악한 헬라 문화권 속에 살면서, 그들의 통용어인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에 해외에 살던 유대인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팔레스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혈통상 같은 유대인이지만, 헬라어를 모국어로 썼다.

이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이스라엘이 망할 때, 끝까지 조국에 남아서 살던 유대인의 후손들로서, 히브리어(아람어)를 계속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 한데 섞여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회 안팎으로 볼 때, 히브리파 유대인의 숫자가 헬라파 유대인의 숫자보다 당연히 압도적으로 많았다. 


▲두 파의 갈등

그런데 예루살렘 초대교회 내에서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한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귀환한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는 일가친척이 없는 가난한 과부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가 매일 구제와 봉사를 행하면서도 그들을 제외시키고 있었다.

즉, 구제와 봉사는 오직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자연히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원망(헬라어로 조용한 수근거림)이 일어났다.



2. 히브리파 유대인의 권리포기


사도들은 헬라파의 조용한 항의를 받는 즉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고 구제 사역을 전담할 집사들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행6:2-4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6:5-6


▲7집사는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여기 나오는 7집사 전원이 헬라식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헬라파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실제로 히브리파 유대인이면서 헬라식 이름을 썼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은 그 무대가 외국인 경우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무대는 국내, 예루살렘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이 미국에 가서 영어 이름을 가질 수 있으나 한국인이 한국에서, 한국 교회 명부에 정식으로 이름을 등록하면서

평소에 안 쓰던 영어 이름으로 등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교포가 한국에 온다면, 평소에 쓰던 영어이름을 등재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인구 비율로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소수집단이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다수집단이었다.

이것은 다수파가 소수파를 위해 권리를 포기하고, 일부로 배려한 것이다.註1)


다시 말해서 ‘국내파’가 ‘해외파’를 위해 배려한 것이다.

더욱이 국내파(히브리파)가 수적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데,

소수에 불과한 해외파(헬라파)를 교회의 대표들로 자진해서 선출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중심축이 다수인 히브리파에서 → 소수인 헬라파이동한 것이라는 증거다.


이런 권리포기는 다른 인간사회 집단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3. 헬라파 유대인의 활약


사도행전은 그 이후에 헬라파 유대인들의 혁혁한 활약상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런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파격적인 배려에 보답이라도 한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6:7

헬라파 유대인들이 교회의 전면에 나선 후에, 상상할 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이 벌어졌다.



▲1. 먼저 제사장들이 집단적으로 개종했다.

제사장은 유대교의 성직자로서, 신학자 예레미아스에 의하면 당시에 예루살렘에 약 8천명의 제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 상당수 허다한 제사장들이 믿게 되었다고 한다.


앞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교회의 전면에 배치되어 있었을 때는 이런 부흥이 없었다.


▲2. 행7장에 헬라파 유대인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나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계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의 설교 요지는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세상 어디든지 그의 백성들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신다는 요지였다.


과연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 출신다운 설교였다.

만약 그가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면, 그런 관점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3. 행8장에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던 헬라파 유대인 빌립 집사의 활약이 나온다.

본래 북 왕국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앗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할 때 앗시리아의 혼혈 정책에 따라, 그들의 피가 외국인들과 대부분 섞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정통파(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짐승처럼 간주하고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얼굴마저 맞대기 꺼려하고, 그 동네에 들어가기조차 싫어하는 그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 빌립 집사였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구스 내시에게  세례를 직접 베풀어주었던, 그래서 북아프리카 선교의 교두보를 마련한 사람 또한 헬라파 빌립이었다.


만약 빌립이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면, 이방인을 그렇게 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4. 행9장에 이르면 헬라파 유대인의 거목인 바울의 회심과 활약이 시작된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고 명하셨지만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유대 경계를 넘어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을 때, 복음을 들고,

그 경계를 넘어, 세계를 향해 복음의 씨앗을 최초로 뿌렸던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인 바울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13장부터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아예 자취를 감추고 헬라파 유대인들의 독무대가 된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초대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을 거쳐서,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완결되었음을 증언한다.



4.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완벽한 협력


헬라파 유대인들의 맹활약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의 중심, 사도행전의 중심축이 히브리파 유대인에게서 → 헬라파 유대인에게로 옮겨갔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명칭이 우리에게 답을 준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살던 국내파였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부족했다.

과거로부터 자신들만 선민으로 여기고, 다른 민족들을 사람취급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해외에서 살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방인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외국 땅에서 태어나서 외국인들 틈에 끼어 살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외국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쉬웠다.

그냥 자기 살던 방식 그대로 살면 되었다.


그런 포용성열린 사고방식은, 처음부터 초대교회와 견원지간이었던 제사장 무리들부터 교회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설교했고(스데반) 정통파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간주하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세례를 주고(빌립)

최초로 이스라엘 경계를 넘어,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바울)


이런 의미에서 만약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당시에 교회 내에 없었더라면 사도행전은 오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완결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헬라파 유대인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희생

하지만 여기에서 절대로 간과해서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존재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헬라파 유대인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주고 밀어주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존재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히브리파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헬라파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사도행전은 오늘처럼 쓰여 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편협함을 확인하는 즉시 대인(이방인) 관계에 있어서 자신들보다 탁월한 헬라파 유대인들을 거리낌 없이 전폭적으로 밀어주었고 그 결과로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처럼 헬라파히브리파의 완벽한 협력 속에서 사도행전은 완성되었고 바로 거기에 초대교회의 위대성이 있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부인의 토대위에서 자기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이 일에 누가 더 적합한지 생각해보고, 그대로 실천하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본문은 오늘날 축구경기에 비유한다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멋진 골을 터트리는 스트라이커이다.

이에 반해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스트라이커들이 멋진 골을 작열시킬 수 있도록 그들을 성실하게 도우는 어시스트 들이다.


수적으로 보나, 기득권적으로 보나 히브리파들이 얼마든지 자신들이 골마저 넣겠다고 앞장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더 나은 헬라파 유대인들을 돕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축구경기를 볼 때 어시스트(도움)보다는 스트라이커(골잡이)들을 더 화려하게 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상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절대적인 평가를 하신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완결한 헬라파 유대인이나 그들을 적극 도왔던 히브리파 유대인이나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상대평가) 소중한 도구였다.



5. 분별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귀중한 메시지를 얻게 된다.


누구든지 자신이 헬라파가 되어야 할 때와, 히브리파가 되어야 할 때를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 믿음이요, 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미진한 점

복음을 독점하고, 복음을 자기 자신들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제도에 맞서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낸 개혁자들은,

그들의 삶 자체가 탁월한 헬라파 유대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개혁자가 단 한 사람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역에 따라 수많은 개혁자들이 있었다.

그들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히브리파 유대인이 되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에 맞서는 혁혁한 전과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사이에서는 각자가 헬라파 유대인(스트라이커)이 되려하다가 개신교를 종교개혁 초기부터 사분오열 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489년이 지난 지금까지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의 문제도,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관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헬라파히브리파가 되어야 할 때를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전면에 나설 때와 뒤에서 도울 때를 잘 분간하라

행복한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형제가 각각 헬라파(전면)가 될 때와 히브리파(도움)가 되어 주어야 할 때를 잘 분별하는 가정이다.


대통령의 개혁은, ‘국민을 앞서 나아갈 때’와 ‘국민의 뜻을 겸손하게 뒤에서 밀어줄 때’를 구별하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는,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이 헬라파가 될 때와 히브리파로 살아야 할 때를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믿음이며, 개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분별이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한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초대교회처럼 든든히 서 갈 것이다.


註1)

이들 히브리파 유대인, 소위 국내파들은 최소 6백년 이상, 끈끈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온 애국적인 국민들이었다.

그들이 그동안 민족정체성을 지키느라 당한 수모는 높이 숭상할만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유야 어떠했건 간에 조국이 가장 어려웠을 때에, 조국을 등지고 해외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동안 조국을 지켜오느라 애쓴 국내파 해외에서 안일하게 살던 해외파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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