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의 역사적 배경


1450 -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 발달

1485 - 헨리7, 튜더 왕가 시작, 절대주의정권 기초 확립

1500 - 로마교황청, 면죄부 판매

1509 - 헨리8, 즉위

1517 - 루터, 독일 종교개혁 시작

1534 - 영국 국교회 성립(수장령), 헨리8세의 캐서린과의 이혼문제가 발단

1536 - 칼빈, 종교개혁

1553 - 메리여왕, 교황과 화해, 로마카톨릭으로 돌아감, 수장령 폐지, 신교도박해

1558 - 엘리자베스여왕, 영국교회 기초 확립,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 제정

1560 -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작성

1570 - 교황이 엘리자베스 여왕을 출교함

1588 -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영국이 격파, 절대왕정 완성

1618 - 도르트 총회에서 알미니안주의 배격함

1628 - 영국, ‘의회는 공채나 조세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권리청원 제출

1629 - 11년간 의회 없이 통치함

1637 - 데카르트, <방법서설>

대주교 로드가 스코틀랜드 지방에 영국 국교회를 받아들이도록 강요

이것이 영국혁명으로 나아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됨.  

의회의 요청에 의해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됨.

그 소집하게 된 동기는 종교의 순수성과 좀 더 완전한 종교개혁을 위해서였고 특별히 이를 위해 방해거리가 되었던 교회정치를 성경에 가장 일치하고

또한 스코틀랜드 교회와 다른 개혁 교회와도 더 가깝게 일치하도록 작성되기를 원함  

청교도혁명(~1660), 의회에 의한 통치

1642 - 시민전쟁,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전쟁

1643~7 웨스트민스터총회

1644 - 크롬웰의 철기대, 왕당군 격파, 청교도는 곧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

1645 - 윌리엄 로드 대주교 처형

1647 -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


웨스트민스터 총회

 

런던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웨스트민스터교회당은 중세기에 처음 건축되었다.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1045-1050년에 건축했다.

10651228일에 봉헌되었다. 교황은 에드워드에게 참회의 표로 교회당을 건축하도록 했다. 국왕이 건축한 본래의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

현재의 고딕 교회당 건물은 1245-1517년에 재건된 것이다.

헨리 8세가 에드워드를 추모하는 동시에 자신의 묘소로 만들고자 재건을 했다.

이 교회당에 붙은 두 개의 서편 종탑은 1722-1745년에 건축되었다.

이곳에서 킹 제임스 판 구약성경 4분의 3이 번역되었고, 신약성경의 뒷부분 절반이 번역되었다.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 고백문은 본래 영국국교회의 신앙고백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1642년부터 3년여 동안의 수고 끝에 작성하여 164612월에 영국 국회로 넘겼다. 영국 상원은 16472월에 통과시켰고, 하원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원은 이 고백문의 문장을 따지고 성경참고문을 추가하면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이 첨가한 성경 근거 구절들을 문제 삼았다.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교회 총회는 1647827일에 이것을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기존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를 대체했다.

 

하원이 이것을 즉각 통과시키지 않고 시간을 끄는 동안에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는 국회가 숨결을 느낄 정도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 영향력은 국회가 장로교인들을 숙청하고 독립파 회중교도들을 대체하도록 만들었다. 하원의 숫자는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들조차 크롬웰의 영향을 받는 독립파 신자들이었다. 장로회 특징을 가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영국교회와 무관하게 되고 영국국교회는 오늘날의 감독주의 교회 정치체제로 정착되었다.

 

헨리 8세의 사생활은 영국국교회라고 하는 정치 기형아를 낳았다. 그가 죽은 뒤에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메리가 왕좌에 등극하여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몇 년 뒤에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가 등극하여 영국국교회를 오늘날의 형태로 정착시켰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를 절대 군주로 여기지 않았다. 왕권이 하나님의 뜻과 자연법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회의 권한을 확대했다. 그러나 국회는 왕권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국왕이 국회를 소집했다. 국회는 세금부과, 법률제정 등의 업무만을 다루었다. 외교, 종교, 국가기밀은 군주의 영역이었다. 영국은 이러한 제도로 정치적인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엘리자베스 l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이면서도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그가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스코틀랜드 슈트워드 왕가의 메리 여왕의 독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그는 1603년에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왕좌에 올랐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제임스를 외국인으로 여겼다. 스코틀랜드인이 국왕으로 등극하자 영국 국회 안의 장로회주의 사상을 가진 다수의 청교도들은 왕에게 기대를 걸고 영국국교회가 감독 정치를 지양(止揚)하고 장로교 정치를 도입하고 개혁신학을 대폭 수용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왕권을 돈독히 하는 데는 장로회 정치보다는 감독주의 교회정치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기가 유일한 법 제정자이며, 따라서 국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칼빈주의에 바탕을 둔 장로회 제도가 왕권 신장에 거침돌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청교도들의 청원을 거절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양육을 받았다.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 아래서 자랐다. 그는 칼빈주의 교회관이 왕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확립된 교회 안의 왕권을 확고히 붙잡고자 했다. 문예부흥, 종교개혁, 새 시대의 흐름은 옛날의 권력 구조의 문제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 무렵 영국인들은 배를 타고 세계 이곳저곳으로 탐험하면서 상업을 발달시켰다. 상권(商權)을 쥔 중간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헨리 8세는 수장권(The Act of Supremacy)을 선언하고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선포했다. 이 때 영국교회는 국가교회가 되었다. 그 무렵에 등장한 청교도들은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교황의 잔재들을 제거하고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고자 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가 국왕이 되자 의기양양 청교도적인 개혁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영국이 장로회 정치와 개혁신학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칼빈주의와 장로회가 왕성한 스코틀랜드 출신인 국왕 제임스가 자기들의 말을 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교회의 개혁이나 교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왕권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장로회 정치와 왕정제도가 불일치하다는 것을 알고 조만간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국교회가 감독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감독 없이는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생각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국회의 기능을 과소평가했고, 자신이 필요한 경우에만 그것을 소집했다.

 

1625년에 국왕으로 등극한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훨씬 더 강경하게 감독주의 교회정치 제도에 연연했고 청교도장로교회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국회의 권한에 맞서서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펼쳤다. 정치동맹 관계를 구실로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프랑스의 마르 드 메디치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우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찰스는 귀족들에게 과도한 대출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는 귀족 70명을 수감했다. 국회는 이에 항의했다. 이런 일로 왕권과 국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왕의 의사는 국회에서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격노한 국왕은 국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했다. 국회는 상원에 속한 영국국교회 소속 감독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맞섰다. 찰스는 국회를 해산하고, 10년 이상 혼자서 영국을 통치했다. 독재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신적(神的) 권리를 행사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덕했던 반면에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러나 국회가 없는 이 나라에는 점차 정치 불균형이 나타나고, 청교도들과 의회주의자들의 분노가 커 갔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의 자유의 상징이 된 국회가 유명무실하게 된 것에 분노했다.

 

찰스의 독주는 결국 재정 결핍을 초래했다. 국민은 극도의 내핍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왕실의 활동도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군대는 축소되어 일부만 남았다. 1633년에 대주교가 된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는 영국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영국국교회에 출석하라고 강요했다. 제도를 강화하여 불만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시장 앞에 붙들어 놓고 교회 공예배에 한 번 불참한 데 l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즉각 라우드의 조치를 공개적인 신앙박해로 간주했다. 의회주의자들은 군주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대주교 라우드는 스코틀랜드교회가 예배의식서인 영국국교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채택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같은 예전을 사용하여 왕국의 통일성을 추구한다는 이름 아래서 그는 스코틀랜드에 장로회주의가 일방적으로 정착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기도서를 반대했다. 그것이 처음 낭독된 교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신앙 탄압에 반대하는 내란도 발생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참된 개혁신앙을 추구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 차원의 언약’(Covenant)에 서명했다.

 

이렇게 되자 찰스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해산을 명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효력이 없었다. 명령이 거부당하자 왕은 군대를 보냈다. 그 동안 왕에게 충성을 바쳐오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때 그리스도의 면류관과 언약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영국군과 맞붙어 싸웠고, 영국군대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국왕은 항복하고 국회를 다시 소집한다는 조문을 담은 항복서에 서명했다. 전쟁 관례에 따라 국왕은 영국 땅에 남아있는 스코틀랜드 군대에게 막대한 전비(戰費)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돈을 지불하자면 국회를 열어야 했다. 국왕은 그 동안 소집을 거부해 오던 국회를 소집했다. 전비를 보상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이렇게 하여 1640년에 장기국회’(Long Parliament)로 알려진 국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의원들은 11년 동안이나 회집하지 않은 국회가 다시 열리자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임했다. 감독주의 국교회파, 의회주의 장로회파, 회중주의 독립파로 나뉘어졌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은 독립파 회중주의 지지자였다. 다수를 차지한 청교도 장로회주의자들은 감독주의 지지자들과 제휴를 하고 왕을 움직여 영국국교회가 장로회 정치를 도입하고 개혁신학을 수용하도록 일을 추진했다. 국회가 왕의 신하를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도록 했다. 찰스에게 영국국교회를 개혁하는 총회 소집을 청원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 대표는 영국 국회를 설득하여 모든 의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신앙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과 교리문답에 바탕을 둔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서명하게 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장로회 제도가 양심에 따른 개인 예배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반대했다. 독립파 회중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신앙과 그것에 대한 관용이 국가의 통일을 위해 희생될 위기에 처하자, 크롬웰은 왕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만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자유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왕정파는 영국국교회가 감독주의 제도를 수용하는 것을 지지했다. 군주의 신적인 통치권과 감독주의 교회 형태가 왕정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당에 대항하여 신앙을 위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장로회주의를 따르는 청교도들은 중립을 유지했다. 국회의원 다수를 차지하던 그들은 그 동안 수난을 당해온 찰스를 동정하면서 왕과 국회와 교회가 나라의 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국회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총회를 소집했다. 영국국교회를 보다 더 장로회다운 치리 형태로 바꾸고 신학을 개혁하고 교회를 정화하기 위한 교회 개혁 법안을 제정하자는 안을 결의했다. 국회는 16426월부터 16435월까지 성직자 총회를 소집하기 위해 다섯 번이나 그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찰스는 번번이 서명을 거부했다. 하원은 여섯 번째 그 법안을 통과시키고 발표했다. 상원도 1643612일에 그것을 통과시켜 하원에 동조했다. 종교회의인 총회는 왕의 동의 없이 상원과 하원에 의해 164271일에 소집되었다.

 

국회는 총회를 소집하면서 영국국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 식의 예배가 아닌 단순한 예배모범을, 감독제도가 아닌 장로회 정치를, 로마교 신조가 아닌 개혁주의 신조를 채택하여 모든 국민을 포용하는 국가교회로 개편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퀘이커와 재세례파 신자 등 과격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무정부주의를 야기하려는 자들이나 영국국교회를 갈라놓으려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배격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16번째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할 즈음에 정치 상황이 급변했다. 국회와 찰스 l세가 정면으로 충돌한 시민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국회군은 퇴각해야 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이 필요했다. 스코틀랜드는 지원군 파병의 대가로 엄숙한 동맹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리하여 국회에서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이며 영국국회에서 스코틀랜드 자문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토론의 권한은 있지만 투표권이 없는 상태로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6명 가운데 4명의 장로교 목사들은 신앙고백 초안 작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때부터 신앙고백서 작성의 방향이 달라졌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종교 통일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으로 전향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은 영국 측의 4명의 의원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 기초 위원으로 활약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강력한 개혁신학과 장로교 전통 아래서 만들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56개월 22일 동안 1,163차례의 회의와 수많은 소위원회로 모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164711, 회의를 마칠 무렵에 신앙고백서는 교리 지침서로, 나중에 완성한 소요리문답은 젊은이들의 교육교재로, 대요리문답은 설교자들의 지침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예배모범, 장로회 정치, 시편찬송도 만들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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