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기독교 자료



[사진] [[성지자료]]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한국 초대교회 서적과 신문 )


1897년 4.1 창간, 주간 편집과 발행인은 언더우드이며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 발행이다.

8면으로 3단 조판 순한글 내려쓰기이다. 종합적인 신문이다.

기독신보, 1915년 12.8 창간된 초교파 기독교 주간신문이다. 장로교의 "예수교회보"와 감리교의

"그리스도회보"를 통합하여 발행한 것이다. 민족주의 기사를 많이 실어 검열 대상이 되었다

텬로력정, 1894년 간행된 기독교소설로 번연 저 게일 번역본이다.

서울 삼문출판사 발행으로 서구 소설의 최초의 번역본이다.


다락방 , 1939년 강행된 기독교 계간지.

에먼스(G.C. Emmons) 편집. 양주삼-임영빈 공역. 미국의 가정기도서를 번역한 것이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발행


언문초학, Jesus Saves(with alphabet) 1917년 간행된 전도지. 밀러(F.S. Miller) 저술.

청주 선교부 소속 밀러 선교사가 특별히 청주 지역 지방 선교를 위해 혼자서 한글을 배우며

기독교 교리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대한역사, 1908년 헐버트 선교사가 저술한 한국 역사책이다.

단군 시대부터 조선 왕조때까지 편년체로 기록했다.


구세론 . Discouese on Salvation or the Law and the Gospel.

1908년 간행된 기독교 교리서. 마펫(S.A. Moffett) 저술.

대한예수교장로회 발행.


사민필지 , 1889년 간행된 천문지리서. 헐버트(H.B. Hulbert) 저술.

초보 단계의 천문과 세계지리에 관한 교과서로 국립학교인 육영공원 초빙 교사로 온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저술한 것.


진리편독삼자경, 1908년 간행된 기독교 계몽문서이다.

존 원저에 마펫 번역이다.

천자문식으로 되어 초등학교 교과서로 사용 되었으며

한자와 한글을 배우며 기독교 진리를 깨닫도록 하였다

진리편독삼자경, 1908년 간행된 기독교 계몽문서이다.

존 원저에 마펫 번역이다.

천자문식으로 되어 초등학교 교과서로 사용 되었으며 한자와 한글을 배우며

기독교 진리를 깨닫도록 하였다


선민, 1919년 1월 배재학교 교사 강매가 발행한 잡지으로 조선민족을 줄여 선민이라 하였다

성산명경

1911년 감리교 초대 목사 최병헌이 지은 전도문서이다.

기독교와 유불선 토착종교의 대화를 담고있다.

그림에 학을 타고 내려오는 백운은 (도교), 소나무 아래 도포 차림의 진도는 유고,

선비에게 인사하고 있는 승려 원각은 불교,

성경 짐을 지고있는 매서인 신천옹(최병헌)은 기독교를 상징


아모권면, 1906년 간행된 기독교 계몽도서.

노블(W.A. Noble) 부인 저술.

대한예수교서회 발행


원입교인구조

1904년 간행된 기독교 안내서. 로스(J. Ross) 원저.

스크랜튼(M.F. Scranton) 부인 역술.

대한예수교서회 발행


1893년 간행된 전도 문서이다.

밀른이 저술하고 마펫이 번역하였다.

서울 예수성교서회 발행으로 54면 순 한글이다.

본래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것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내용은 기독교인 장씨와 유교인 원씨의 대화를 나누는것으로

기독교가 유교의 부족한 것을 채워 완성한다는 "보유론"이다.


조만민광, 1894년 간행된 성공회 발췌 성경이다.

트롤로프 편저로 서울 영국 성공회가  발행하였다.

복음서와 사도서신 중 384절을 발췌하여 편집 주일예배용 성서독서집과 전도용

소책자로 사용 되었다.


초학디지, 1906년 밀러가 지은 지리교과서


파혹진션론, 1897년 배재학당 출신 노병선이 저술한 기독교 변증문서이다.

대한성교서회 발행으로 기독교가 본래 동양의 종교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동양도, 서양도 아닌 하늘의 종교이다"라고 반대론자들에게 변증하였다.


해타론, 1904년 간행된 기독교 전도문서이다.

길선주 목사 저술로 평양신학교 졸업반 때 쓴 것이다.

해타(게으름)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히 신앙생활 할 것을 권고한다.


1906년 헐버트가 쓴 한국근대문화사



- 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노춘경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통해 지식을 얻은 후 알렌의 집에서 몰래 가져 온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읽는 중 기독교를 접하였으며

1886년 언더우드에게 생명을 걸고 세례를 받았다.


- 최초의 교회(새문안교회) 

언더우드는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 1887년 9월 14명의 교인을 데리고 두 명의 장로를 세운 뒤 교회를 조직했다.


- 성경번역사업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성경이 이미 번역되어 있었으나 오류와 문제점이 있으므로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1887년에 <성서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철저한 심의과정을 두어 선교사들이 조사와 번역을 하고 다른 번역자들이 수정하고 의견을 개진한 후, 위원회에서 토의를 하고, 의견이 이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표결을 하여 확정지었다. 1900년에 신약, 1910년에 구약이 완역되었고 1937년에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 사경회 

1890년 언더우드 집에서 성경공부반이 시작되었는데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이다. 지교회 지도자들을 일년에 두차례씩 모아 6주에서 한달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893년부터는 모든 교회가 사경회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 

1905년 복음주의선교협의회에서 공과책을 제작하였고 1907년 소아회를 조직하고 아이들만 따로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3년 4월에는 창경궁에서 모인 야외집회에 14,700명이 모였다. 1932년에는 주일학교가 1071개, 교사가 4천, 그리고 7만명의 학생들이 공부하였다.


- 선교부들의 내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1889년에 데이비스와 메리를 파송했는데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순교한 첫 희생자가 되었다. 성공회는 1889년 찰스 코르프를 첫 주교로 임명하였다.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는 언더우드의 절대적인 공헌에 기인했다. 미국 남감리교회는 윤치호의 요청이 커서 리이드박사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3년 솔내에서 한국인과 동거동락하며 살다 순교한 매캔지의 솔내교회의 요청으로 계속되었다. 일링 딩 선교단에 의해 침례교회가 시작되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1885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을 맺으므로 선교가 시작되었고 아관파천으로 1903년 축성식을 가졌다.


선교부의 선교정책과 한국교회의 성장


- 네비우스 선교정책 

선교방법론에 탁월한 네비우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원칙으로 선교사는 폭넓은 순회선교를 통해 전도하며, 성경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모든 예배단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으로 건축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하며, 엄중한 훈련과 치리를 해야 한다. 적어도 지역을 분할하여 일한다. 보통 3자정책으로 부르는데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전(自傳)이다. 선교지 분할 정책은 예양협정으로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북을, 남장로교회는 전라도, 충청도를, 캐나다장로교회는 함경도지역을 담당하여 선교하기로 합의하였다.


- 초기 한국 교회 급성장의 원인 

한국에는 강력한 국교가 없었고,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 국내외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국왕이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보였으며 서구와 서구의 종교에 반감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전도열이 뜨거웠고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일찍 확보하였다. 한국이 문자와 언어의 통일이 되어 있었고 교인들의 기도운동이 뜨거웠으며 한국교회는 사회개혁과 애국애족의 교회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 초기 선교사 순교자들 

데이비스, 헤론, 윌리엄 메켄지, 기포드, 조지 렉, 헨리 아펜젤러, 월터 존슨, 안나 밀러 부인, 번턴 부인, 윌리엄 헌트 부인, 피터스 부인, 사무엘 무어, 전킨, 게일목사 부인등/ 어린 생명들이 의료시설이나 의사 부족으로 이국 땅에서 죽어갔다.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수난


- 서민들의 입교 

조선의 40년간의 기독교의 통계표는 다른나라의 1백년의 선교보다 더 나은 성적을 보고한다. 천주교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전도인 반면, 개신교는 아래에서 위로의 형식을 취했다. 특히 학교와 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기관이었고 교회는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가르침으로써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서민들의 기독교 입문은 이기적 내지 감정적인 부분이 많았을 것이며 국가가 이제에 넘어가는 불안한 상황에서 생명과 재산의 안전과 안정을 구한 것으로도 보인다.


- 지식층의 입교 

그 동기는 초기에 유학자들이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심에 접함으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기독교를 통해 국가의 자주독립을 쟁취해 보고자 하였다. 기독교를 통하여 이 땅의 민도를 높이고 부국강병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보다 국가의 안위와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초기 기독교의 수난 

가족 중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 이름을 호적에서 삭제하였고 쫓아냈다. 1888년에 '어린이소동'이 있었고 1894년 평양감사 민병석이 신자를 체포 구타한는 사건이 있었다. 1899년 경무사 김경준이 1900년 12월1일을 기해 국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드과 기독교인을 박멸하려고 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천주교에 의한 박해도 있었으나 분별력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회연합운동


- 대부흥운동(1907) 

1903년 감리교선교사들이 원산의 바닷가에서 기도회를 갖었고 강원도에서 선교에 실패한 하디의 통회자복이 불씨가 되었다. 그때에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체험함을 목도하며 부흥의 불길이 시작되었다. 1906년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일주간 기도회를 갖었고 이때 뉴욕의 존슨목사가 방문하여 인도와 웨일즈의 부흥을 전해 주었는데 장로인 길선주가 일어났다. 1907년 장대현에서 열린 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졌다. 1907부흥운동의 직접적원인은 선교사들의 자성하는 성경공부와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


- 길선주 목사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관성교 등 종교편력이 다양했지만 아무것도 그의 영적 만족을 주지 못했다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본 후 김종섭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907년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여 20년간 목회였고 1935년 11월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강대상에서 졸도한 뒤 하늘나라로 갔다.


- 대부흥운동 결과 

기독교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 축첩, 노비소유 등의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하였다. 신자들의 전도에 힘입은 교회의 부흥이어서

1906년 54,987명에서 1907년 73,844명으로 34% 증가했다.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어 새벽기도회, 통성기도,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에큐메니컬정신이 구현되어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간에 갈등이 해소되고 형제의식이 굳어졌다.


- 백만명 구령운동 

1909년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갬불, 리드 등 3인이 사경회와 기도회를 갖은데서 비롯되었다. 이 운동 기간에 가난한 교인들은 물질로 헌금할 수 없었기에 시간을 바치는 '날연보'를 하였다.


-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한국에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으나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의 비협조적 태도로 실패했다. 또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연합에 대한 열의 부족이라고 했다. 1905년 개신교 복음주의선교 협의회가 구성되어 연합학교, 신문위 연합 발행, 선교지 분할 문제가 이루어졌다.


- 예양협정 

장로교와 감리교는 지역분할을 한 후 그 지역내의 교인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선교지 분할과 교인들의 교환은 한국교회사의 가장 빛나는 에큐메니컬 정신의발현이었다.


- 성서공회 

1889년 문서선교를 위해 '죠선성교서회'가 조직되어 연합찬송가 발행, 연합교회신문, 주일학교 공과 등을 한국어로 출판하였고 1910년에 신약성경이 완역,

구약도 1911년에 완성, 출판되었다.


교회의 애국과 사회개혁활동


- 을미사변(1895)과 선교사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한국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때 선교사들은 국왕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국왕, 대신들,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애국충군의 종교로 이해하도록 인식되게 되었다.


- 춘생문 사건 

을미사변후 연금된 고종을 춘생문울 통해 고종을 출궐하려던 사건인데 변절자의 신고로 실패했다. 우연챦게 선교사들이 연루되었지만 국민들의 눈에는 국왕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비쳤음에 틀림없다. 을미사변이 나고 4개월 후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하였고 고종은 1년후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 고종의 탄신 기념행사 

1896년 9월 2일 국왕 탄신일에 기념예배를 드리고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럼으로 이런 기회를 통해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황해도 은율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 교회의 사회개혁활동 

복음 선포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사회적 구원의 틀이 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의료와 교육이다. YMCA는 1903년 10월 게일이 첫 회장으로, 윤치호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기술교육, 체육교육, 운동 소개, 국민보건과 경기력 향상에 공헌하였고 사회계몽운동을 펼쳤다. YWCA는 3.1운동이후 여자전문학교와 중학교에서 비롯되었다. 종교적, 교육적인 출판물의 간행이었고 음주의 해독에 관한 교육 및 금주운동, 공창반대운동을 했다. 엡윗청년회는 1897년 복음선교와 사회봉사의 목적에서 조직되었는데 1905년 애국운동에 나서자 정치참여라는 이유로 1906년 해산되었다가 1920년에 재결성되었다.


- 신분제도 타파 

사농공상의 신분계급을 타파를 위해 기독교가 공헌했는데 1894년 갑오경장 때 23개 조항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실질적인 면에서는 교회가 앞장서서 이들에 대한 전도를 강화했다.


- 한글전용 

1893년 선교원칙을 보면, 가능한 한 성경을 빨리 번역한다는 것과 모든 문서는 순수한 한글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기전까지는(서른살까지) 세례를 받지 못했고 교회는 민족교화의 차원에서 한글교육에 열성을 다하였다. 언더우드는 한어사전(1890)을 간행했고 한글 통일 철자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 결핵/ 나병 퇴치 

한국은 결핵의 온상으로 250만 중 결핵감염자가 5할이었고 100만명이 앓고있었다. 1920년 세브란스 병원의사인 스타이츠가 처음 결핵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고 셔우드 홀 부인은 결핵퇴치운동을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판매하여 기홀병원을 세웠다. 남장로교회는 잔남 광주의 제중병원을 세워 결핵환자 전문병원으로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나병퇴치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어윈, 빈턴, 스미스에 의해 시작되어 1909년 부산에 처음으로 나병환자 수용소가 세워졌다. 장로교 총회에서도 나병에 관심을 깆고 특별헌금을 하기로 결정하여 12회 총회에서 12월 첫주를 나병원 연보주일로 지켰고 14회 총회에서는 근멸회가 조직되었다. 나병환자를 위해 애쓴 한국인은 최흥종으로 선교사 포사이드의 헌신에 감격하여 나병환자를 위해 살았다. 그는 나병근절협의회를 만들고 나병환자 모금운동을 펼쳐 소록도에 나병원을 세웠다. 특히 일본 황실과 총독이 지원금을 보내준 것은 특기할 만 하다.


- 맹학교 

로제타 홀이 1894년 앞 못 보는 소녀 하나를 데려다 가르쳤는데 이것이 맹학교의 효시이다. 1915년에는 4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였다. 점자, 뜨개질을 가르쳤고 남자맹학교는 마펫 못사의 부인 앨리즈에 의해 시작되었다.


- 교회의 항일활동 

교회의 방법은 복음적인 방법, 즉 비폭력, 무저항의 방법으로 항일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기독교인들은 태극기를 올렸고 국가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후 민영환이 자결을 했고 홍태순, 정재홍이 자결하였다. 장인환, 전명훈은 스티븐슨을 격살했고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격살했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습격했다.
경제적저항은 일본상품불매운동과 조세저항이었다. 도로, 시설을 위해 일제가 제공한 차관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금주, 금연, 탈환, 감선운동이 일어났고 1920년에는 조만식에 의해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 민족단결, 협동정신, 상부상조, 생활개선 등의 다양한 목적을 갖고 출범되었다.


한국교회의 조직과 수난


- 장로교회의 조직 

1901년 마펫은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교육울 시작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1915년에는 등록학생수가 250명을 넘었다. 1907년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양전백, 서경조 등 7명이 첫 졸업했다.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창립노회를 개최하여 목사7명, 장로 53명, 교회988개, 세례교인 70,000명의 교회로 출발하였다. 1912년에 7노회로 총회가 창립되었는데 총회장은 언더우드, 부회장은 길선주 목사가 선출되어 한국장로교회는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총회 창립후 중국 산동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파송하였는데 크게 성공했다.


- 감리교회의 조직

1908년 정동교회에서 한국연회가 창설되었고 남,북 감리교회는 각각의 조직을 운영하다가 1930년에 하나로 통합되었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 : 줄기찬 탄압과 박멸로 일관되었다. 이등은 기독교에 대해 유화적이었으나 사내정의는 노골적으로 반기독교적 태도를 보여 1913년에는 모든 학생들이 국가적 축제일에 일본 천황의 사진에 절하도록 강요했다.


- 해서교육 총회 사건 

장로교회 계통의 학교만도 1907년에 405개, 1908년 561개, 1909년에 719개로 늘었다. 1908년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해서교육총회가 조직되어 한 면에 한 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자고 다짐하였다. 안명근이 서간도에 학교를 세우려고 모금하러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었는데 일제는 해서교육총회의 회원을 모두 체포하였다.


- 105인사건 

1907년 안창호가 결성한 신민회는 한국인들에 의한 학교들이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설립되었는데 일제는 105인사건을 '사내 총독모살사건'으로 규정했고 총독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기독교인들이 왜곡했다고 주장하여 목사 6명, 장로50명, 집사 80명을 포함하여 서북지방 지도자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다. 이 사건에서 선교사들과 미국 본국의 역할이 커서 일제의 음흉함을 세계에 폭로했다.


- 기독교 학교의 탄압 

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일본학생과 한국 학생들의 차별교육을 규정했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대학설립 인가를 청원했으나 거절되었다. 1919년까지 보통학교가 전국적으로 249개교에 불과하였다 1915년 3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면서 성경교육을 정규시간에서 빼고 예배를 철폐하라는 규정은 학교의 존립과 관계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1910년에 2,080교가 1915년에는 1,154교로 다시 1923년에는 649개로 감소했다.


- 일본교회의 조선교회 간여 

일본교회는 조선교회에 일본조합교회를 이식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앞장 선 도뢰상길의 노력으로 1912년에 전국에 16개 교회가 일본 조합교회에 가입하였으며 총독부는 이 교회들에 보조금을 비밀리 지급하였다.


- 교회내의 분쟁

전북 대리회 지역의 최중진 목사는 장로교회를 탈퇴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했다. 이유는 선교사에 대한 적개심인데 최중진은 사기죄로 체포되었다가 후에 일본 회중교회에 합류했다. 김장호는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을 부르짖고 나선 사람이다. 1918년 노회는 목사직을 박탈하였고 김장호는 노회를 탈퇴하여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하였다. 이만집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주동자로 활약하였는데 한 청년이 당회에 문제를 몇가지 건의한 것에 대해 출교와 책벌하자는 의견에 이목사와 선교사들이 대립하였다. 이 문제는 법정으로까지 비화하였고 이는 반선교사 정책을 쓰는 일제의 정책이 교묘히 작용하기도 했다.


- 일제의 대한 정책

동화정책과 우민화정책,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고 퇴폐문화를 유입하여 공창,아편을 허락했고 교회를 조직적으로 억압하여 모든 일을 허가제도로 모든 교회활동을 철저히 제약했다.


한국교회와 3.1독립운동


- 3.1운동의 과정 

신한청년단은 김규식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파견하였다.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구성하였고 2.8독립선언식을 동경YMCA에서 거행하였다. 국내에서는 기독교인 16인, 천도교측에서 15인, 불교 2인이 종로의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고 파고다에서는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행해졌다. 대개 기독교 학교가 있는 곳에서 그곳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퍼져 1920년 3월까지 사망자 7,645명, 부상자 45,562명, 체포자 49, 818명, 가옥소각 724채, 교회소각 59개소, 학교소각 3개교 등이었다.


1920-30년대의 교회상황


- 길선주목사의 사경회 

민족 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길선주목사는 2년의 옥고를 치렀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요한계시록을 거의 외웠고 <말세학>이라는 계시록 강해집을 만들었다. 그의 종말사상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내세지향적으로 이끌고 간 것이 아니라 말세학에서 지상의 낙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독특한 신앙을 가졌다.


 김익두 목사의 이적집회

스왈른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고 성례를 받기전에 신약을 백번이나 읽었고 '기도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3회 졸업생인데 1926년 남대문교회에서 지식층청년들이 기독교신앙을 미신적으로 이끌어간다고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는 억압속에 있는 대중들에게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3.1운동 후에 용기를 불어 넣어 준 예언자였다.

부흥회수가 776회, 설교횟수가 2만 8천여회였다. 불행하게도 해방후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고 공산당 어용단체에 협력하고도 학살당하는 운명에 처하였다.


-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 

개인의 영적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주님과의 합일, 이것이 그가 끌어낸 신앙의 결론이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열화 같은 반향을 일으켰다. 1931년 8월 황해노회는 이용도가 재령교회를 훼방하고 여신도와 서신을 거래하며, 불을 끄고 기도하고, 무교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금족령을 내렸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으나 세속화된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공격함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좁혔고 유명화에게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느모로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는 교회안에 분규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느꼈다 무교회주의자인 내촌감산 문하에서 공부하며 영향을 받앗다. 1927년 귀국한 그는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과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기성교회의 교리, 주직, 예배의식을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갔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교회사적 사명을 강조하고 선교사들이 전해준 교파적 신앙을 거부하고 민족신앙을 주창하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 '2C'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는 Christ와 Chosun이었다.


- 적극신앙단 

YMCA총무였던 신홍우는 민족주의적인 의식과 반선교사적인 경향을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반서북', '반선교사', '반보수'로 나타낸 운동이다.


사회적변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 공산주의 사상의 대두 

레닌은 약소국가들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기에 뜻있는 지사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복음으로 들렸다.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였는데 기독교가 들어가 전도해야 할 대상을 공산주의가 침투하여 그 사상을 집어넣고 기독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연해주의 한인사회당, 바이칼호 근처의 이르크츠크 한인공산당지부, 아사원의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한인겅산당도 여러 갈래인데,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상해파, 여운형의 이르크츠크파, 일본 유학생 중심의 엠엘파였다.


-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의 피해 

한양청년연맹은 1925년 10월 주일하교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반 대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성탄절을 '반기독교의 날'로 정하였다. 특히 동아기독교회의 윤학영, 김이주등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 교회의 농어촌 문제 

토지 소유권을 잃은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전문가인 러츠가 1920년에 내한하였고 숭실전문학교는 농과를 신설하였다. 특히 YMCA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0개의 농민지도소가 개설되고 '한국 농촌'이라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 사회계몽운동

탄링의 강연회를 시작으로 절제회가 조직되어 금주, 단연,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다. 장로교선교사들은 공창폐지운동, 축첩과 잡기하는 폐습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국산품을 애용하고 이제 상품을 배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성경구락부는 1929년, 킨슬러에 의해 시작되었다.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야학을 시작하여 1938년 5천명으로 늘어났으나, 신사참배문제로 결국 폐쇄되었다. 한국전쟁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54년에는 7천명 이상이 공부를 하였다.


- 신학적 갈등 

한국의 신학적 갈등은 미국이나 일본에 유학한 해외파들에 의해 비롯되었고 지방색까지 겹쳤다. 표면화된 것은 송창근 목사의 사임이었고, 논란은 박형룡과 김재준이 대표적이다.


일본 군국주의 통치하에서의 교회의 시련


- 황국식민화정책 

신사참배,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 일본어상용등의 한민족말살정책을 통해 전 국민의 일치성과 한민족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일본화하려는 정책이다.


- 기독교학교에 대한 억압 

일제는 신사참배는 종교적의식이 아니고 국민 한 사람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로 수행하는 종교성이 없는행위라고 역설하였다. 각급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기독교학교를 굴복시키려 하였다. 결국, 숭의중, 숭의여중 교장인 매쿤과 스눅크는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1937년 이들 학교는 폐교신청을 하였다.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의 학교들은 모두 신사참배 절대 불가라는 입장을 가졌으므로 각급학교를 폐쇄하였다.


- 교회교회지도자들의 굴복 

로마 가톨릭은 1936년 종교행사가 아닌 애국적행사이므로 허용한다고 했고 이어 안식교, 성결교회,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회 까지모두 참배를 결의했다.


- 장로교회의 굴복

친일파 김일선 목사는 평북노회장이 되면서 신사참배를 결정했고 9월 총회까지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굴복했다. 1938년 총회에서 일제는 반대하던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김선두목사등을 투옥시키고 경찰의 위협속에 회장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었으니 감옥에 가기 두려워 신앙의절개를 꺽고 우상앞에 절하는 애처로운 장로교회의 변절이 시작된 것이었다.


- 신사참배 거부운동 

신사참배에 거부한 신앙인들이 2천명에 이르고 감옥애서 순교한 분들이 50여명 되었으며, 폐교된 교회만도 200여곳이 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이사장 방위량, 교장 나부열 등 선교사들의 강경한 입장에 따라 폐교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그는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서 중생의 체험을 한 후 신학을 했다. 1938년 2월 신사참배를 반대하므로 검거당하였고 그는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일사각오로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였다. 그후 노회 명부에서 제명처분 되었고 산정현교회는 폐쇄되었다. 옥중에서 온갖 고문을받으며 5년 수개월을 보낸 주목사는 1944년 4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 박관준 장로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진정서를 작성하였고 13차례나 총독을 만나려고 했으나 실패한 후 안이숙을 대동하고 일본에서 정부 인사를만나

설득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자 일본 제국의회에 유인물을 살포하여 체포된 후 옥중에서 순교의 관을 썼다.


교회의 마지막 변절


- 교회의 친일행각 

1939년 종교단체법을 만들어 각 도시에 한 교회만 허용하고 신책 설치, 국미의례 및 수탈과 부역을 강요하였다. 감리교는 1940년 10월 일본정신의 함양, 일본적 복음을 결의하였다. 1942년 교회수가 750개 감소했고 교인수도 76,747명이 줄었다. 9월에는 전국장로교회가 국방헌금을 모은 돈으로 비행기1대, 병기 2정을 사서 헌나하기도 했다. 일제는 찬송가에 제재를 가했고 사도신경도 금지시켰고 예배5분전에는 천황의 사진에 요배를 하고 출정장병을 위한 기원, 황국식민서사를 한 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일제는 결국 기독교회 파괴 공작을 노골화하여 작은 교단들을 해체시켰다.(성결교, 안식교, 성공회등)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주권사상, 재림설, 반정론 및 평화사상, 극제적 제휴둥의 이유로 군소교단을 해체시켰다.


- 혁신교단 

전쟁 수행을 원활히 하기위해 장, 감이 통합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혁신교단이다.

또한 일본은 1941년 30여개에 이르는 교파를 통합하여 하나의 교회로 합동을 이루었다.

교회병합에 의해 없어진 예배당과 건물로 인해 생긴 돈은 모두 국방헌금로 전환되었다.


해방후의 한국교회


1946. 9.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설립(박윤선, 한상동 목사)
           한상동 목사 경남노회 탈퇴

1947. 4.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
1948. 2. 박형룔 고려신학교장 사임
1951. 한국신학대학 문교부로부터 대학인가
        총회신학교 개교,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의 합법성 부인
        고려신학교파 소위 고려파 장로회 분리

1953 조선신학교파 기독교장로회 분립
1954 통일교 조직(문선명=>이단으로 정제함)
1955 감리교에 전밀라 목사 안수로 한국 최초의 여목사 탄생
1955 전도관 창설(박태선=>이단으로정제함)
1959. 9. 장로교 통합, 합동 양파로 분열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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