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성령론

 


1.   우리의 구원 과정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는 ‘성령은 구원의 적용을 이루시는 유일한 동인이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라고 가르치고 있다. (딛3:5)


또한 그는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증거하기를 우리가 성령으로 살고 있다(영적인 삶을 의미함)고 말하고 있다.(갈5:25)

예수님 자신도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6:63)


구원의 가정 속에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을 우리의 마음과 삶에 적용시키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시며 또한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 (요14:7; 롬8:9; 고전3:16; 딤후1:14).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이것을 매우 생생하게 피력하고 있다.  

‘우리가 다 한 영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한 몸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새 생명의 전부 즉 새 생명이 실현됨도, 새 생명이 전달됨도, 더 나아가 새 생명의 기원까지도 그 근원을 성령과 그의 사역, 능력, 그리고 그의 은사에 두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주의 영(the Spirit of the Lord)(고후 3:17), 그리스도의 영(롬8:9; 벧전1:11),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1:19), 하나님의 아들의 영(갈4:6)으로 불리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참케 될 때, 성령에 동참케 되며,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다.

중생 혹은 신생도 성령의 사역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하셨고,

디도서 3:5에도 하나님이 중생의 씻으심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내용 역시 중생 혹은 신생은 성령께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돌이킴, 혹은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국면 즉 회개와 믿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


또한 이 두 국면은 성령의 은사로 기술되어 지고 있다.  

사도행전 11:15절에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개종을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에게 설명할때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신지라’고 하자, 예루살렘 교회(유대인으로 구성된)의 반응이 18절에 나오는데,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하였다.


하나님께는 이들 이방인들에게도 그들에게 임하셨던 성령을 통해서 회개를 주셨던 것이다. 믿음 또한 성령의 은사이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고(9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12절)

즉 이 세대의 관원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에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들(8저럐을 알게 하신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바울은 로마서 8:16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성령의 이러한 증거는 때때로 발생되거나 단회적이 아닌 성도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되는 것이다.


또한 신약 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이해되고 있는 칭의를 성령과 연결짓고 있다. 

고린도전서 6:11은  가장 직접적으로 칭의와 성령을 연결짓고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안에서라는  뒤에 나오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에 모두 적용되며, 

이 두  문구는 ‘우리 하나님의 성령안에서’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성령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칭의가 부여하는 은혜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양자됨).  

이은혜 역시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갈라디아서 4:4-6에서 우리는 이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로 ‘아들의 충만한 권리들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5절)고 바울은 말한다. 


6절에는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말하고,

로마서 8:15에도 ‘너희는 양자됨(휘오데시아)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이상 종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임을 확신시켜 주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성결함이나 성화와 연관이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들을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으로 구원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서 15:16에도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함이라’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 즉 성화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성령을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시는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령은 믿음 가운데의 인내 혹 견인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인치심(seal)과 보증(pledge)이라는 성경의 두 비유적 표현이 있다.  

에베소서 4:30에는 성령은 우리의 최후의 구속의 보증으로서 인치심의 소유권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또 에베소서 1:13-14에도 바울은 ‘또한 믿어 너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는 하나님의 소유인 그의 백성들을 구속하실 때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자라’(NIV)고 말하고 있다.



2.   성령의 은사들


성령의 은사라는 말로서 빈번히 사용한 단어는 ‘Charisma’이다.  

이 ‘Charisma’란 단어와 연관지어져 약 20가지의 은사가 언급되고 있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은사들을 세어보면 은사는 돈의 관리로부터 예언에 이르는,

또한 병자를 고치는 것으로부터 독신에 이르기까지의 대단히 넓은 폭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 언급되어 지고 있는 은사는 단순히 성령의 기적적이고도 극적인 은사만을 의미하지 않고 있다.  

은사에는 가르치는 것, 권면하는 것, 구제하는 것(롬12:8), 남을 돕고 다스리는 은사들(고전12:28)에 포함되어진다.


그러므로 신 오순절 주의를 –New-Pentecostalism) 카리스마틱 운동이라 부르는 데는 뭔가 매우 잘못된 점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Charismata는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와 같이 오순절 계통이나 신오순절 서클에서 일반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극적인 은사들 그 훨씬 이상의

은사들을 포함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져야할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오순절 주의자들이나 신오순절파들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온교회가 카리스마틱한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구분짓는 일반적인 방법은 기적적인 은사와 비기적적인 은사와의 구분이다.


비기적적인 은사에는 가르침의 은사, 다스림의 은사, 구제와 긍휼을 베푸는 은사들이 있으며,

기적적인 은사에는 병고치는 은사(Charismata iamation; 고전12:9), 기적을 행하는 은사(energemata dynameon; 고전12:10)가 있다.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기능은 바로 믿는자들로 하여금 교회안에서 특정한 형태의 봉사를 행할 수 있게 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특별한 형태의 사역에 관여할 수 있게 한다.


그것들의 목적은 신자들을 훈육하며 교회를 바로 세우며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섬기는 데 있다. 

또한 선교적인 목적도 있어서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으로 강화시키고 그들을 증인된 자들로 무장시키는 것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가운데서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지금도 실재하는 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이러한 기적적인 은사들이 아직도 교회안에 있다라는 주장이 증명되어질 수가 없다는 입장이며,   

‘병고침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와 같은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이 이제는 더이상 현재의 교회 가운데서 기대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약시대 사도들이 행했던 표적과 기사들은 단순히 이방인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보임으로서 순종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오직 구원의 메시지를 보증하기 위한 은사였으며, 사도바울은 자기의 사도됨을 확증키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들을 행한것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어떤 교훈도 찾아 볼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기적적인 은사는 교회 가운데서 더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성령의 역할 p57-61)



3.   성령의 치료 사역


육체의 병고침은 예수님의 사역 중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 12명(마10:1)과 70명(눅10:19)에게도 병고치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러한 병고침은 그의 메시야됨에 대한 표징이었을 뿐이다.


예수님의 사도들에 행해졌던 기적적인 병고침도 그들이 전한 복음을 확증하며,

그들이 그 복음 전파에 합당한 자들임을 밝히는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행14:3)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에 사도들을 인증했던 기적적인 은사들은 더이상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의 치료자라고 부르고 있으며(출15:26),

우리의 질병을 고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시103:3) 

이것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치료를 받는 것이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 지니라’(약5:14-26)에서도 기름바름의 효용이 아닌 기도의 능력을 말한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감람유를 몸에 문지르거나 마사지 하는 것은 병을 고치는 행위였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도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랐던 것(눅10:34)도 바로 약용상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p64-65)

그리고,  야고보서(약5:14-26)에서 장로들이 병든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병든자가 장로들을 집으로 초대하라고 말하는 것은,   

예배중에 행해지는 환자를 위한 기도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 신유집회가 별도로 특별히 권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병든자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언제든지 육체적인 치료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수차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기를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 끝내 제거해 주시지 않으셨다(고후12:7-10)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는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의 질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 이러한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치료의 역할 p62-70)



4.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하나’이며, 육체의 일들과의 대비로서 쓰여져 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많은데 성령의 열매는 하나이다.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은, 영적인 성숙도를 의미할 수 있으며, 또 마치 열매가 자라나는 것같이 성숙된 신앙인으로 자라남의 표현이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하나가 아닌 복합적인 열매이다.


처음 세개의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기본적인 성향이다.

그리고 다음 세개의 열매인 ‘오래참음, 자비, 양선’은 타인과의 관계에 관한 덕목들이다.


마지막 세가지의 성령의 열매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관한 덕목들이다.

이 아홉가지의 그리스도인 덕목들이 바로 성령의 열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5.   성령 세례


오순절이나 신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에 나타나는, 중생과는 구별된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옳지 않다.


고린도전서 12:13에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경우 세례의 주체는 요한이며, 대상은 그의 제자들이요, 요소는 물이었고, 세례의 목적은 회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태복음 3장11절에서 예언되고 있는 성령 세례의 경우는,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집행자시요, 그의 제자들은 세례의 대상이요, 성령은 세례의 ‘요소’이며,

세례의 목적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13절에는 이 세례의 목적은 대상자들로 하여금 한몸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여기에서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함은 중생과 동일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6.   성령의 충만


비록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아니다. 

물론 중생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계속적으로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으로 가득찬 것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4장 1절에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후 성령이 충만하신 것을 기록한다.  

또, 사도행전 13:52절에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더라’고 하였으며,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뒤에 이어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8-21)’고 성령으로 충만함의 증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성령의 충만함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의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맡기고

계속적인 기도와 계속적인 영적 훈련과 끊임없는 경성함을 통해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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