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병 네가지

 

글 / 김진홍 목사 


나는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신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 같은 사람을 모태신앙(母胎信仰)이라 일컫는다. 어머니 태에 있을 때부터 신앙을 가졌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교회에서 나서 교회에서 자라 신학을 전공하고 성직자가 되어 지금 37년째 목회를 하고 있다. 이 글의 서두에 이렇게 장황한 소개를 하는 이유는 내가 한국교회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두고 싶어서다.내가 한국교회를 끔찍이 사랑하기에 한국교회의 약점 4 가지를 차례로 적고 이런 약점들을 어떻게 극복하여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자는 뜻에서 이 글을 쓴다. 내가 느끼는 한국교회의 약점 다시 말해 한국교회의 병은 다음의 4 가지이다.

1) 첫째가 무속화(巫俗化)이다.
2) 둘째가 물량화(物量化)이다.
3) 셋째가 세속화(世俗化)이다.
4) 넷째가 귀족화(貴族化)이다.

교회의 무속화란 기독교 신앙이 샤머니즘(Shamanism) 수준으로 변질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샤머니즘이란 쉽게 표현하자면 무당신앙이다. 한국인들이 무당신앙에 쉽사리 휩쓸리는 이유가 있다. 우리 겨레의 종교적인 체험의 원류(源流)가 샤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성경적인전통에서는 무속신앙을 철저히 배격한다. 말씀의 신앙인 성경의 신앙에서는 무속신앙은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그릇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무속신앙에 3대 특성이 있다. 이들 특성을 살펴보노라면 우리가 왜 무속신앙에서 벗어나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된다.

무속신앙(巫俗信仰)에는 3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치병기복 신앙(治病祈福 信仰)이다.

   둘째는 비도덕성(非道德性)이다.

   셋째는 몰역사성(沒歷史性)이다

첫째번의 ‘치병기복 신앙’이라함은 신앙생활의 중심을 진리를 찾고 본질을 추구함에 두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고 복을 비는 데에 두는 것을 일컫는다.

 

전통적으로 무당들은 액귀(縊鬼)를 쫒아내고 복을 빌어 주는 데에 중심을 두어 왔다. 한국교회는 바람직스럽지 못하게도 개인의 병을 고치고 가정의 복을 빌어 주는 무당신앙의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이끌어온 바가 깊다. 그렇게 목회하고 교인들을 가르쳐 온 교회들이 큰 교회가 되고 그렇게 하여 커진 교회의 목사들이 유명한 목사들이 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진리인양 그릇되게 인식하게까지 된 것이다. 다행히 요즘 들어 교회 안에서 이런 점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게 되고 있어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번째로 ‘무속신앙의 비도덕성’에 대한 지적은 무속신앙에는 윤리적인 콘텐츠가 없음으로 인하여서다.

 

쉽게 표현하여 무당이 굿을 하면서 “정직하게 살아라.”든지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 주는 일이 없다. 그냥 병 낫고 복 받고 집안에 악귀(惡鬼)가 침범치 못하도록 빌어 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세 번째 특성인 몰역사성(沒歷史性)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 신앙 즉 성경적인 신앙의 특성 중의 하나가 투철한 역사의식(歷史意識)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의 유형을 크게 나누어 공간종교(空間宗敎)와 시간종교(時間宗敎)로 나눈다.

공간종교는 개인의 수행과 깨달음의 세계를 강조하고 시간종교는 역사적 사명과 책임을 강조한다. 물론 이들 두 가지 형태의 종교가 서로 같은 점을 공유하고 있긴 하지만 그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가 공간종교의 대표격이요, 기독교가 시간종교의 대표격이라고들 한다. 성경이 말해 주는 하나님은 백성들의 삶 속에서, 역사의 한 가운데서 백성들의 삶을 이끄시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친히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신 만큼 그 하나님을 믿는 신도들은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기 마련이다. 부패하고 일그러진 역사를 바르고 건강한 역사로 바로 세워 나가는 책임이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성경의 역사의식을 삶으로 대변해 주는 대변자들인 격이다. 예를 들어 아모스의 경우를 들어보자. 자신의 조국이 내부로부터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되자 변방에서 야생 무화과 과수원을 경영하던 농사꾼 아모스는 예언자로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가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들 앞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다음 같은 메세지를 전하였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장 24절)

성경이 거듭거듭 강조하는 바가 정의로운 사회와 인정어린 공동체 건설에의 책임이다. 그러나 무속신앙에는 이런 차원이 없다. 마냥 개인의 복비는 것과 병 낳는 것, 그리고 운수대길(運數大吉)을 구함에 열중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 이런 역사의식이 결여한 채로 무당 수준에서 교인들을 가르치고 이끌고 있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할 부분이다.

한국교회가 시급히 고쳐야 할 4가지 질병중의 세 번째는 세속화(世俗化)란 질병이다.

 

흔히들 교회와 크리스천의 세속화를 말할 때 크리스천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이나 세속적인 유행가를 부르는 행위 등을 세속화인 것처럼 그릇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세속화의 실제는 그런 류의 피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크리스천이면서 성경적인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살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아무리 교회생활을 오래하였어도 그가 품은 물질관, 축복관, 내지 인생관이 성경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기준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크리스천이라 할 수 없다. 겉모습만 크리스천이지 실제는 세속인(世俗人)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 전체가 우(愚)를 범한 세속화의 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새마을 운동이 한창 왕성하던 때다. 새마을 운동의 주제는 “잘 살아보세”였다. 우리역사 이래 온갖 수난과 가난의 굴레에 찌들려 살아왔던 우리 겨레에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잘 살아보자는 구호는 절실하고도 당연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이 국민들이나 기업을 이끌면서 “잘 살아보세”란 구호를 외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나 우리 교회는 달랐어야 했다.


“잘 살아보세”가 아닌 “바로 살아보세”를 추구해야 했다. 잘사는 것이 좋은데 ‘잘 살기’전에 먼저 거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살아보세”를 거쳐서 “잘 살아보세”가 이루어져야지 바른 가치관, 바른 삶의 방식이 세워지기 전에 “잘 사는 것”만 쫓아가다가는 잘 살게 된 후에 온갖 정신적인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바로 가치관의 혼란이다. 지금 우리사회가 직면한 혼란이 바로 이점에서 비롯된다. 바로 사는 기초위에서 잘 사는 것이 세워지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70년대에 한국교회는 과오를 범하였다. 세속 지도자들이 “잘 살아보세”를 외칠 때에 한 술 더 떠서 이 물결에 편승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라의 경제도 어느 정도 잘 살게 되고 교회도 부흥되었으나 국민들의 정신속과 교회의 골수에 병세가 깊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병을 고치는 시작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어야 한다. 교회가 크리스천들의 가치관, 삶의 방식을 세속주의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성경의 기준에 합당하게 사는 데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1917년 춘원 이광수 선생이 당시의 월간지였던 《청춘》지 11월 호에 개신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실었다. ‘금일 야소교회의 결점’이란 제목의 글 중에 이광수 선생이 자신이 한 때 기대를 걸고 다녔던 교회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당시 개신교의 결점으로 4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가 한국교회의 계급주의적 성격,

둘째가 교회지상주의적 사고방식,

셋째가 개신교 지도자들인 교역자들의 무식,

넷째로 미신적 경향을 들었다.


첫번째의 계급주의적 성격이라 함은 목회자를 마치 양반이나 귀족인 것처럼 인식하고 교인들을 상민이나 하인인 것처럼 인식하거나 목회자를 군대의 장교격으로 높이고 교인들을 병졸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을 지적하였다.이런 경향은 아직까지도 개신교 안에 많은 부분 남아 있다.

 

개신교는 16 세기 종교개혁 당시부터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을 중심으로 하는 평등사상에서 시작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 성직자들과 교인들 사이에 마치 계급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교역자들을 말씀하실 때는 섬기는 자로써의 교역자상을 말씀하였으나 한국교회에서는 어느 사이엔가 섬김을 받는 자로써의 목회자의 위치가 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큰 교회의 목회자는 마치 귀족이나 한 성의 성주와 같은 위치에 이르는 그릇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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