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에게 쏟아지는 비난들



I. 들어가는 말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2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교회가 부러워할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룩해왔다.

이런 성장의 역사는 일찍이 교회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급성장이며, 귀감이 되는 발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앙의 선진들이 쌓아올린 충성과 헌신의 결과로 세워진 우리 교회는 한편으로 개인주의, 신비주의, 무속신앙, 물량주의, 인본주의,

합리주의 및 세속주의적인 사상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있다. 


그 결과 개혁교회의 전통과 에큐메니칼 정신(WCC가 이야기 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이 아닌 성경적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하는 성경적, 사도적 교회의 모습을 차츰 잃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실은 교회의 안팎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성과 비판의 소리를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목회자에게 비난이 쏟아져 목회자의 자질과 자세가 문제시되고 있다.


21세기를 맞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바람직한 목회자들이 배출되어야 할 시대적 요청이 절실해졌다.

왜냐하면 선교 2세기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의 성장은 멈추었는데, 한국교회 성장의 멈춤이 목회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 갤럽연구소가 전국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직업인들에 대한 정직과 윤리수준의 평가”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목사에 대한 정직성과 윤리성이 19개 종류의 직업 가운데 제 6위로 나타났다고 보고되었다.

이 문제는 “19개 직업 중 6위 정도면 됐지”라는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천주교의 신부가 1위, 방송매체의 기자가 2위, 승려가 3위, 신문기자가 4위, 초중고 교사가 5위 그리고 개신교의 목사가 30.9%의 신임도를 얻어 6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종교인은 목사, 신부, 승려 등 세 종류로 크게 구분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목사가 최하위라는 것이다. 이것 자체가 목회자에 대한 비난이 아닐까? 이것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까? 목사는 정직성과 윤리성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 신망이 높아야 하는데, 승려들보다 더 못하니 누가 교회에 올 것인가? 그러니 당연히 교회성장은 멈추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숙고하는 것은 위축된 목회와 전체 목회자의 실추된 신망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때문에 필자는 비난의 유형들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 특징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간단하게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비난의 유형들 


신학교를 다닐 때 교수 목사님들로부터 목회자는 물질, 이성, 그리고 명예에 대해 조심하면 목회를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러나 21세기 초부터 목회현장에서, 목회자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것 이외에도 인격에 관련된 비난, 설교에 관련된 비난, 사회참여(봉사)에 관련된 비난, 경건생활에 관련된 비난, 지도력에 관련된 비난, 인간관계에 관련된 비난 등과 심지어는 루머성 비난이나 비크리스천들에게 받는 비난까지 가중되어 목회사역을

위축시키고 목회자에게도 깊은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한 유형을 지면의 제약상 인격에 관련된 비난, 전문성에 관련된 비난 그리고 영성에 관련된 비난으로 나누어 각각의 특징을 기술해 보겠다.

 


1. 인격에 관련된 비난


인격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품격이고, 종교적으로는 신에 대해, 인성을 갖춘 품격을 말한다. 적어도 목회자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와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4)”는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기에, 신자들이 “목회자는 성직자라고 해서 평신도에 비해 특별히 구별된 존재이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목사 자신이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봉사자로서보다 신도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존경만을 받으려는 어떤 특권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목사가 교양 면에서나 인격적인 면에 있어서 또한 인생과 세계를 조망하는 시야에 있어 다른 신자들보다 뒤떨어지면서 다만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목회자는 결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신문지상에 발표된 사건 가운데 전도의 문을 막아버리는 목회자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신앙적인 인격이 없는 목회는 종교 활동이나 종교 사업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더 일반적인 예는, 목사가 담임교회를 사임할 경우 상당한 금품이 수수되고 있는데 이때 그 교회의 재정적 자립도와 출석교인의 수가 액면 결정의 요인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 교계의 관행이라고 한다.


교회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교회를 파는 목사와 교회를 사는 목사가 정상적인 목회자인지 의심스럽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목회일까? 목회자가 목회를 하지 않고 사업을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목회자가 그의 생활 속에서 목회자다운 자질을 발휘하지 못할 때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통해 살펴볼 때 존경받을 만한 목회자의 자질은 다음과 같다.


목회자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죄에서 멀어지려 애쓰고, 실족했을 때도 즉시 회개하고 신앙에 전념할 때 책망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목회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이혼을 해도 안 되고, 이혼을 당해도 안 되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려도 안 된다.


목회자는 근신할 줄 알아야 한다. 근신이란 조심성이라고 바꾸어 써도 좋다. 즉 목회자는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목회자는 아담해야 한다. 이 아담은 인격의 외부적 표현인 좋은 행실을 말하며 목사의 ‘멋’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는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한다. 목회자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 목회자는 술을 즐겨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구타해서도 안 된다. 목회자는 관용해야 한다. 목회자는 다투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목회자는 신앙의 연륜을 가져야 한다. 목회자는 외인한테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한다. 목회자는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목회자는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선을 좋아해야 한다. 목회자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목회자는 거룩해야 한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목회자의 생활상의 자질들은 복음의 빛을 드러낼 수 있지만 이러한 자질들이 결여될 때는 목회자 개인도 교회도 비난을 받게 된다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즉 목회자가 인격 면에서 성실한 삶에 치중하는 목회사역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물량적이며 기업주의의 이미지를 풍기는 목회를 하기 때문에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바람직한 모습은 먼저 인격 면에서부터 정립되어야 한다(사람이 되고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2. 전문성에 관련된 비난


목회자는 성경을 기반으로 한 확고한 신앙 속에서 목회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인 이론적 영역에 속하는 성경신학, 역사신학, 교의학, 기독교윤리학, 종교심리학과 실천적 영역에 속하는 설교학, 예배학, 행정학, 목회학, 교육학, 상담심리 등의 신학적 지식을 갖출 뿐만 아니라 현대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목사가 학문적인 기반이 확고해야 사역하는 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자신 있는 목회를 할 것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목사들에게 가장 기대하는 것은 설교를 잘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결국 목회자는 끝없이 연구하고 책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설교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목회자는 그 어느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도 열심히 연구하고 책을 읽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연구하지 않는 목사는 직무를 유기하는 목사이다. 그렇기에 연구하지 않는 목회자는 설교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목회자에게 설교에 대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목회자가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벗어날 때부터이다. 교회가 부흥이 되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게 되는데 그때부터 목회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회자의 제일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조금씩 돈의 힘에 끌려가기 시작한다.


어느새 기도시간이 줄고 전도하러 나가기가 귀찮아진다. 심방은 부교역자에게 맡겨버린다. 설교도 남의 것 가져다가 쉽게 하고, 기도원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런 식의 목회로 시간에 여유가 생긴다. 시간의 여유가 생기다보면 호텔로, 음식점으로, 커피숍으로 모임을 찾아다닌다. 더욱이 국내나 국외로 여행을 자주 떠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먹는 것, 입는 것, 타는 것에도 눈을 뜨게 되고, 눈을 뜨다보면 목회자의 분수를 넘게 되고, 넘다보면 목회자는 성경에 관한한 전문가이기를 바라는 교인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교회를 개척해나갈 때 기도한다, 심방한다, 말씀을 탐구한다, 온갖 정성을 다해 설교한다, 말씀을 가르친다 하던 열정은 식어버리고 ‘감투’를 쫓게 된다. 그러다보면 개척 당시의 순수하다는 평은 사라지고 목회자에게 각종 비난이 쏟아진다. 


목회자는 설교하기 위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읽는다.

그러나 목회자는 성경이 자신과 자신의 개인적 욕구들에 대해서도 말씀하도록 해야 한다. ‘감투’를 쫓는 목회자는 성경에 대한 이런 헌신적 연구를 경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삯꾼 목회자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목회자의 제사장적인 카리스마적 지배에서 탈피하여 과감한 교회행정의 분배와 책임의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초대교회 사도들도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구제와 봉사하는 일을 전적으로 집사들에게 맡기지 않았던가? 목회자들이 교회행정의 민주화와 운영관리의 과감한 배분을 통해 지도력을 평신도와 공유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말씀의 권위나 삶의 모범이 아닌 인위적 권위를 가지려 하기 때문에 설교를 못한다, 독재한다, 행정력이 없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또한 동역자들에게도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해주기 보다는 명령과 지시로 일관하기 때문에 부교역자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전문성을 가지려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도 없고 지도력을 공유하지 않을 수도 없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문제들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적인 타락으로 자녀들이 탈선하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에게 현대 가정과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때문에 목회자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해야만 한다. 목회자가 성장하는 학습자가 될 때, 누가복음 6장 40절 말씀처럼 목회자만큼은 교인들이 성장할 것이다. 성장이 없다면 목회자의 전문성은 의심받게 되고 비난받게 된다.


목회자는 전문가로서 건전한 교리에 헌신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은 건전한 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매일의 삶 속에서 너무나 많은 세력들이 우리의 교리적 기초를 좀먹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기독교교리는 교회 내부 및 외부로부터 동시에 공격당하고 있는 상황 하에 있다. 보다 심각한 위험은 우리가 이렇게 중요한 교리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교리를 손상시키게 하는 미묘한 세력에 의해 속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목회자는 교회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자가 되기 위해서 성경보다 자기의 감정을 따르는 유혹을 뿌리쳐야만 한다. 항간에서 목회자도 이른바 ‘성공 병’에 걸려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가리지 않는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에도 있다.


성경적 정통성과 정당성이 배제된 허황된 논리로부터 시한부종말론을 유포하여 선량한 교인을 기만했던 사례와, 종교행위를 빙자한 금품의 갈취와, 병자치유를 위한 상해치사 사건들은 목회자의 전문성을 의심을 받게 했기에 충분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면 전문가가 아니지 않는가? 목회자는 어떤 전문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교를 못한다’, ‘독재한다’, ‘목회능력이 없다’ 등의 목회 현장의 비난 속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목사의 책임이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조리 있게 연구하는 것이고(딤후2:15),

 둘째, 부르심에 소명을 가진 목사는 가능한 한 작은 것을 가지고 그럭저럭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딤후2:3-6),

 셋째, 모범이 돼야 하고(딛2:7-8),

 넷째, 준비해야 하고(벧전3:15),

 다섯째, 신자를 알아야 하고,

 여섯째, 말씀에 응답하도록 목적을 가지고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면 목사의 전문성이 얼마나 방대하고 소중한가를 느끼며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바쁜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영성(경건)에 관련된 비난


목회자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크리스천의 영적 싸움에서 최고 선봉에 서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으며(마 3:16, 마 4:1, 요 8:29)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받기를 명하셨다(행 1:8).


이에 대하여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는 목회자의 영적 고갈상태를 심각하게 지적하면서 목회자의 영적 상태는 목회자 자신과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목회자가 영적 상태의 고갈을 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항상 서 있어야 한다(Richard Baxter).

즉,


첫째, 목회자 자신이 항상 구원의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

둘째, 열성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 성경 말씀에 능통해야 한다.

넷째, 항상 체험적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항상 성령 충만 해야 한다. 


위와 같은 영적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항상 기도에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고, 경건한 자세로 성경을 매일 공부하고, 늘 자신을 말씀으로 채찍질해야 한다.


평신도들은 설교를 잘하는 목사를 원하는 만큼 기도를 열심히 하는 목회자를 원한다. 자신들은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목회자는 기도를 많이 하기 원한다. 그래서 목회자가 너무 가정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또 너무 바쁜 것도 싫어하고 비난한다.


더욱이 목회자의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평신도들은 목회자에게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 목회자들이 테니스, 수영, 골프, 볼링 등 운동을 하는 것이나 1년에 한번 정도 목회현장을 떠나 여행을 통해 머리를 식히는 것도 평신도들에게는 비난거리가 될 수 있다(정도에 벗어난 목회자들도 있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의 신학을 전승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할 자기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했다. 목회자란 주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기의 생애 전부를 주님께 드리고, 주의 뜻만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준행하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심령 속에 끊임없는 헌신과 경건이 튀길 때만 참된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영성이 뛰어난 목회자의 모습을 가질 것이다. 


결국 목회자는 골방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과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확고히 서는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목회자는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므로 그 존재가치가 높여지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밖에 없고, 자신과 교인과의 관계들을 심화시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으로 추구해야 한다. 영성은 다른 방법으로 함양 되는 것이 아니다. Fellowship with the Lord에 최고의 Priority를 두어야 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라는 말씀에 영성함양의 대답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성자 McCheyne 목사는 “A calm hour with God is worth a whole with man”라고 말을 했는데, “하나님을 모시고 조용히 지낸 한 시간은 사람과 함께 전 생애를 지낸 것만큼 가치가 있다”는 이 말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주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낸 사람들은 매일 매일 주님과 깊은 은밀한 교제를 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명과 영성의 원천임을 잊지 않는 목회자가 돼야 한다.


 

III. 나가는 말(자기 개선은 비난받지 않는 비결) 


“우리 목사님은 있는 집만 심방가시고 없는 집은 심방도 안가신대”,

“왜 우리 목사님은 저렇게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지?”,

“우리 목사님은 박사님이라는데 설교는 별로인 것 같아”,

“우리 목사님은 모 여 집사와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우리 목사님은 미국에 집이 몇 채 있대”,

“목사님이 사례비를 더 올려달라고 하시고, 차도 쏘나타에서 벤츠로 바꿔달라고 한데”

등등의 상스러운 이야기들이 교회마다 목회자들과 관련되어 떠돌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목회자는 인격적인 면에서는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학문적인 면에서는 끊임없는 연구를 계속해야 하고, 영적인 힘을 갖는 목회자가 되어야 비난을 극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목회자들이 받는 비난의 유형을 인격에 관련된 비난, 전문성에 관련된 비난으로 나누어 문제제기를 했다. 덧붙이자면 목회자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명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비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기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선의 방향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에 목회자의 시간이 최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하고,

둘째로는, 목회자는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배움이 없는 경건은 방향을 상실한 경건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경건’ 은 유세베이아(usebeia)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존경과 경외의 마음을 드리는 것을 가리킨다.

배우지 않으면 겸손해지지 않고 교만해지고 자기 방종으로 흐르고 신앙이 성숙될 수 없다.

때문에 자기 영혼의 성장도수를 측정해 보려는 사람은 자기 심령에 은혜를 사모하여 배우려는 도수를 측정해보아야 한다.

목회자는 항상 주님 앞에서 끊임없이 겸손해지며, 두렵고 떨림으로 배우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빌2:12, 13). 


이은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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