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39권인가? 구약 정경의 범위


넌센스 퀴즈이다. “성경책은 몇 권입니까?” “66권입니다!” “틀렸습니다.

정답은 한 권입니다!” 그렇다. 엄밀히 말해 성경책은 한 권이다.


기독교의 정경은 신구약성경전서 한 권뿐이다.

66권이란 책은 이른바 ‘분책’(分冊)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분책의 수에 있다.


분책의 수만 놓고 여러 구약성서들을 살피다보면 그만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분책의 수에서 구약성서들 사이에 서로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말 구약전서에서 분책의 수는 도합 39권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MT)의 경우 구약을 구성하는 책들은 24권에 불과하다.


반면 희랍어로 번역된 칠십인역 성서(LXX)에서는,

보편적으로 읽히는 인쇄본인 랄프스(Alfred Rahlfs)의 중형판(Handausgade)을 따를 경우,

그 숫자는 크게 늘어나 구약의 분책은 모두 53권이나 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일까?

24권의 히브리어 본문과 39권의 한글 본문 상의 차이는 분책의 방법에 따라 생긴 차이이다.

우리말 성서에서 상(上)과 하(下)로 나뉘어져 있는 책들이 MT에서는 모두 단 권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12 소 예언서’라고 하나씩 계산하는 호세아부터 말라기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열 둘’(세넴 아사르)이라는 이름 밑에 한 권으로 묶여 있다.

또 우리말 성경에서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MT에서는 그냥 한 권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따져볼 때 구약 39권은 24권으로 정리된다.

그렇다면 우리말 39권과 LXX의 53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여기에는 정경의 범위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말 구약성서는 분책의 방식에서 크게 보아 LXX를 따르고 있다.


분책의 방식을 놓고 볼 때 우리말 성경은 MT보다는 LXX 쪽이다. 그러나 LXX에는 우리말 정경에는 들어 있지 않는 14권의 책이 추가로 더 들어가 있다.

이 14권의 책을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외경이라고 부르면서 기독교의 정경의 울타리에서 빼버렸다.

히브리어 성경인 MT에는 없지만 희랍어 번역본인 LXX에 추가되어 있는 책들을 신앙공동체의 정경밖에 있는 책으로 구분해 버린 것이다.

숫자적으로 따지자면, 외경의 수는 14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경의 범위나 구분은 LXX의 사본들과 인쇄본들에 따라 서로 다르다.

1977년 대한성서공회에서 발간한 공동번역성서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배치된 외경은 모두 9권이다.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가 바로 그런 책들이다.

그러면서 다니엘 추가서의 경우 ‘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을 별도로 구분해 놓았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히브리어 본문과 희랍어 번역본 사이에

분책, 책이름, 책 나누기, 각 권 배열, 단락과 장 절의 구분 등을 놓고 서로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본문 내용상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우리말 구약 성경의 형식은 이중적이다.

정경의 범위나 본문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MT)을 따르면서도 분책의 형태와 방법에서는 희랍어 칠십인역 성서(LXX)를 따르고 있다.

우리말 성서번역의 어려움은 이런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모든 백성은 배운 바를 밝히 깨달았으므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주면서, 크게 기뻐하였다”(느 8:12,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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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라는 명칭

우리가 읽는 성경(대한성서공회 간행)의 공식 명칭은 ‘신구약성경전서’이다.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 하나의 전서(全書)로 집대성되어 있는 경전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구약을 첫 번째 경전으로 신약을 두 번째 경전으로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주후 4세기 중반 이후이다.

언약을 의미하는 라틴어 ‘테스타멘툼’(testamentum)을 따서 창세기에서 말라기를 ‘구약’으로,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을 ‘신약’으로 구분하였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구약을 여러 가지로 불렀다. ‘구약’이란 명칭은 ‘신약’이란 명칭 때문에 생긴 것이다.

구약이란 영어의 ‘Old Testament’, 독일어의 ‘Alten Testament’, 불어의 ‘l’Ancien Testament’와 함께 라틴어 ‘Vetus Testamentum’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는 흔히 구약을 ‘옛 약속’, 신약을 ‘새 약속’으로 구분한다.

구약이 신약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약이 없었다면 구약은 불완전한 기록이 되고 만다고 판단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구약이나 신약 모두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렘 31:31,눅 22:20, 히 9:1).

그 하나님의 백성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고 신약에서는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이다.

신약에서 구약은 보통 ‘책’, ‘글’, ‘문서’등을 의미하는 희랍어로 불린다.

우리말 개역에는 그것들이 모두 ‘성경’으로 옮겨져 있지만 희랍어에서 그것들은 여러 가지이다.

가령 ‘헤 그라페’(책, 요 2:22, 행 8:32, 딤후 3:16), ‘하이 그라파이’(책들, 막 12:24, 고전 15:3-4),

‘타 그라마타’(글 또는 문서, 요 5:47), ‘토 비블리온’(책, 갈 3:10, 눅 4:17), ‘헤 비블로스’(책들, 막 12:26, 눅 3:4, 20:42, 행 7:42) 같은 칭호들이다.

구약은 기독교의 경전이기 이전에 유대교의 경전이었다.

유대교에서 이 책은 구약이라고 불리지 않고 ‘타낙’이라고 불린다.

‘타낙’이란 ‘토라와 느비임과 케투빔’이라는 히브리어의 각 머리글자를 따서 합성한 명칭이다.

그 뜻은 ‘토라, 예언자들, 기록들’이 된다.

즉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라는 뜻이다.

‘타낙’이란 명칭의 근거는 ‘시락의 아들 예수’(Jesus the Son of Sirach)가 쓴 외경 집회서(集會書, Ecclesiasticus)의 머리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외경 집회서를 ‘시락의 아들 예수’의 손자가 희랍어로 번역하면서(주전 132년 경) 거기에 서문을 붙였는데,

그 머리말 속에 ‘율법서와 예언서와 다른 저서들’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명칭인 타낙, 곧 ‘율법, 예언자들,

기록들’에는 구약과는 달리 구약성경 자체를 완전한 책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그 외에도 구약의 명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유대 탈무드는 구약을 ‘키드베 하카도쉬’(거룩한 글들), ‘미크라’(읽는 것), ‘하카투브’(기록된 것) 등으로 부른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서란 명칭을 즐겨 부른다.

아람어로 기록된 다니엘서 일부와 에스라서를 제외하고는 이 책들이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베리트 하다샤, 新約)을 세우리라(렘 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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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말, 성경의 글

신구약 성서는 원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엄격히 말해 구약은 ‘성서 히브리어’(Biblical Hebrew)로, 신약은 ‘코이네 그리스어’(Koine Greek)로 기록되었다.

성서 히브리어란 주전 10-2세기에 이르는 구약성서 시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과 글을 가리킨다.

이 히브리어는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와는 다르다.

성서 히브리어는 ‘미쉬네 히브리어’ ‘랍비들의 히브리어’를 거쳐 오늘날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의 모체에 해당된다.

‘코이네 그리스어’란 주후 1세기 이후 사용되던 통속적인 그리스어란 뜻이다.


당시 온 세계가 로마의 통치로 재편되면서 헬레니즘이 확산되자,

그 문화권 속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대중적인 말과 글을 가리킨다.


성서는 바로 이 두 종류의 말로 기록되었다.

신구약 성서에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말고도 또 하나의 말이 있다. 바로 아람어(Aramaic)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친족 관계에 있는 언어이다.


아람어는 구약 성서시대 후반부터 초대 교회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사용하던 세계언어이다.

구약의 경우 다니엘서와 에스라서 일부가 성서 본문을 아람어로 기록해 놓았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아람어를 사용하신 흔적을 군데군데 살펴보게 된다.

그러나 성서 언어의 주종은 어디까지나 히브리어와 아람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 언어가 사람들이 사용하던 통속적인 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그것이 하늘나라 방언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요즈음이야 사람들이 성서 히브리어와 코이네 그리스어를 원전(原典)을 배우기 위한 거룩한 언어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 말들은 본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 주고 받던 일상적인 글이었던 것이다.

신구약 성서의 언어가 통속적인 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전문적인 신학자나 성서학자들, 소수의 목회자들만 알 수 있는 말이 아니고 대중 모두가 알 수 있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소중한 지침이 된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사람의 말로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시대와 장소, 인종과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아멘’이 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면서도 성서는 동시에 특정 시대, 특정 장소, 특정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성서의 역사적 성격을 드러낸다.

성서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언제, 어디에서, 왜 기록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 구실을 한다.
성서의 뜻을 영감으로 캐기 전에, 성서의 말씀을 우선 겸손히 듣고 배워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컨대 아람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 유다 방언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왕하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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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가 맞을까, 여호수아기가 맞을까.

기(記),지(誌, 志),편(篇),언(言),서(書),가(歌) 성경책 이름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구약의 여섯 번째 책을 여호수아서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라기 보다는 여호수아기라고 불러야 맞다.

왜 그럴까. 신구약의 책이름을 굳이 ‘기’(記)와 ‘서’(書)로 구분해 놓은 성경은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뿐이다.

‘표준새번역’이 등장(1993년) 하면서 우리말 성경책의 이름이 중국, 일본의 것과 통일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여호수아는 여호수아기라고 표기되기 시작하였다.
서(書)에는 ‘저자가 한 말이나 직접 쓴 글’이란 뜻이 있다.

편지나 문서, 서예 등 에 ‘글을 쓴다’는 의미가 있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의 서신들이 모두 ‘서’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기(記)에는 ‘누구누구에 대하여 남이 써 놓은 기록’이란 뜻이 새겨져 있다.

기란 본래 ‘사건이나 사물 등을 기록해 놓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신문기사나 기자란 용어가 바로 ‘기’가 어떤 성격의 책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상, 열왕기하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에스라기, 느헤미야기, 에스더기라는 명칭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같은 역사 기록이라고 해도 구약의 ‘Chronicles’는 역대기가 아니라 역대지라고 불린다.

중국 성경에서는 역대지(歷代志), 일본 성경에서는 역대지(歷代誌)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현대 중국어에서 지(誌)와 지(志)가 각각 번자체와 간자체라는 차이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에서 적을 지, 욀 지(誌)나, 뜻 지, 뜻할 지(志)는 모두 기재한 문서를 지칭하고 있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중국 성경이 삼국지(三國志)를 언급할 때처럼 굳이 역대지(歷代志)라고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잠언인 경우, 잠언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잠언(箴言)이란 말 자체가 훈계나 경계가 되는 짧은 말이란 뜻인 까닭이다.

이것은 아가나 예레미야 애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아가란 문답체의 노래이다. 애가란 슬픈 노래이다. 아가서, 애가서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

이것은 시편이 ‘시를 편찬한 책’이란 뜻인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표기하는 성경책이름은 중국 성경과 일본 성경에서 비롯되었다.

사도행전이 전(傳)으로, 요한계시록이 록(錄)으로 표현된 것도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과 일본의 관용어법을 따른 결과이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기와 서를 혼동하거나 오해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기와 서는 서로 혼동하거나 혼용해서는 안 된다.

‘누구누구에 대한 기록’과 ‘누구누구가 적은 기록’이란 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여호수아서라고 부르지 말고 ‘여호수아기’라고 불러야 된다.

성경책의 이름을 ‘서’와 ‘기’로 나눠 표기할 때 생기는 오해는 신약의 경우보다 구약의 경우에 더 흔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경책의 이름에 얽힌 우리의 오해를 바로 잡아야 할 때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왕대일 교수 (감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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