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공격


1.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da)

 

루키아누스는 120년 수리아에서 출생했고 200년에 헬라 또는 애굽에서 사망했다. 에피쿠로스 학파 소속의 학자였다. 그는 풍자와 조소의 문장으로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풍습을 비방했다. 그는 <페레그리누스의 죽음>(De Morte Peregrini)이라는 책을 180년경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165년 올림피아 경기 때 키니크 학자 페레그리누스(Peregrini)가 불속에 투신 자살했다는 것을 알리는 편지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페레그리누스는 부모를 죽이고 간음한 자였는데 후에 예수 믿고 목사까지 되었고 나중에 악행이 탄로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도움으로 출옥했다. 출옥후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추방되어 키니크 학파에 가입했으나 허망한 명예욕에 사로잡혀 기독교인과 키니크학파를 조롱할 목적으로 이 소설을 지었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2.켈수스(Celsus)
 

루키아누스의 뒤를 잇는 기독교 비판자는 켈수스인데 그는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로마 혹은 알렉산드리아인이며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사람이다. 저서 {참 말}(참 강론)로 기독교를 공격했다. 이 책에 반박하게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대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켈수스를 반박함}이라는 책을 지었다. 180년경에 쓴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약 70년 뒤에 쓰여진 오리게네스의 저서 {켈수스를 반박함} 안에서 상당 부분이 실려 보존되고 있다.

 

오리겐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켈수스는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 상식을 다 동원하여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리 깊지 않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Voltaire),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 나올 정도로 날카롭게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매우 격렬하고 신랄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과 식인을 저지른다는 식의 대중적 비판을 답습할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조의 각 조항을 조롱하고 비방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즉 그릇되게 나가지 않을 세상을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표라고 했다. 만약 관심이 있었다면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으로 선정하셨을 리 만무하다고 했다. 아울러 그 땅에서 저급한 하층민들을 모으고는 그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나간 다른 사람들뿐이다. 켈수스는 제자들의 증언이 예수 생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꾸며 기록에 삽입했을 것으로 보았다.

 

3.신플라톤 학파 (Neo-Platonsism)


여덟 번째의 데키우스 황제와 아홉 번째의 발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시행된 박해는 로마의 기존 여러 신들을 끌어들여 로마 제국을 다양한 외적들로부터 보호해 보려고 하는 중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허사로 돌아가고 박해자인 발레리우스가 260년에 페르시아 원정 중에 생포된 다음에 새로 왕위에 오른 갈리에누스 (Gallienus)는 261년에 사실상 박해 정책을 포기하고 관용을 베푸는 조서를 내렸다. 이렇게 한 것은 갈레리우스가 전임자처럼 물리적 힘으로 기독교를 누르려고 한 군인이 아니라 철학으로 기독교를 누를 수 있다고 믿은 지성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신플라톤학파는 출발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 생겨난 종파였다.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하자 기독교로 인하여 로마의 재래 종교들이 없어질까 하여 이런 철학적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비평만 하는 것을 표방하지 않고 아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 종교를 표방하였다.


신플라톤학파는 재래의 철학사상에다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신비 철학을 구성한 것이다. 시조는 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Saccas, 243년에 죽음)였는데 부모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나 후에 옛 종교로 돌아간 자이다. 이 학파의 중요 학자는 플로티누스와 포르피리우스이다.

 

1)플로티누스 (Plotinus)

신플라톤 학파의 최고 지도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인데 삭카스의 제자였다. 그는 208년 애굽에서 출생하여 244년경부터 270년까지 로마에서 활동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영혼이 감각에 속한 것들(물질)로부터 해방되어 그 근원인 신께로 돌아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배척함은 물론 영지주의적 기독교도 배척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신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영(Spirit)과 마음(Soul)과 물질(Body)의 삼 단계로 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복귀하기 위해서는 첫째, 덕을 쌓아야 하고, 둘째, 신과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에로스(쾌락적 애정)를 통해서 엑시타시 현상에 이름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2)포르피리우스(Porphyrius)

플로티누스의 제자 포르피리우스(Porphyrius)는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 타락, 성육신 구속, 심판 등의 진리를 송두리째 배격했고 박해 기간에 기독교에 대한 비판서를 썼다. 그는 다신교의 옹호자로서 무려 15권의 저서를 저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서는 동시에 그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신약과 구약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 사도들이 서로 분쟁했다는 것, 제자들의 사상이 일치되지 못했다는 것 등을 들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이 불완전하다고 했으며, 더 나아가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으며 제자들의 본이 되지 못했다고 비방했다. 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사후에 주님의 교훈을 곡해하여 사족을 달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철학으로서 종교를 대신하려고 한 신플라톤 학파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그 원인을 다음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敎祖가 없었다. 신앙이나 추종의 대상이 될 분명한 인격적 신이나 교주가 없었으므로 철학적 사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둘째,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법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축복과 평안을 어떻게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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