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가장 많이 행해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금식'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금식철야기도를 행하기도 하고 또 다른 교회는 아예 금식일을 정해놓고 지킵니다.
과연 성경에서는 금식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회개를 위한 금식
금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는 ‘회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금식은 ‘회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위한 금식을 기뻐 받으셨으며 백성들은 금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은 언약궤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의 실수로 인해 블레셋에게 언약궤가 빼앗긴 이후에 다시 언약궤가
아비나답 집에 안치되었습니다. 그곳에서 20년동안이 언약궤가 안치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삼상 7:2).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없는 이스라엘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불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미스바에 이스라
엘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
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언약궤
가 없이 지낸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이방신을 섬겼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방신을 제거하라 선포했으며 그것을 위해
금식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금식은 회개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을 통해 아이를 낳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치시고 앓게 하였습니다.바로 그때 다윗은 금식을 행하였습니다(삼하 12:16). 다윗이 금식했던
이유는 아이를 살려달라는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다윗이 간음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죽게 된 것은 자신의 간음죄 때문임을 다윗이 깨달았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다윗은 금식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금식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요나가 니느웻 성에 들어가 40일 후면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했을 때 니느웨 왕이 곧바로 금식을 선포했습니다(욘 3:5). 니느웨 성에 사는 모든 백성뿐 아니라 짐승
까지도 금식을 선포하면서,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8)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니느웨 성은 금식 덕분으로 멸망당함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금식은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에는 금식을 행하십시오. 회개를 위한 금식을 통해서 당신
의 마음은 상한심령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의 손길을 뻗쳐 주실 것입니다.
상한 심령을 만들어주는 금식
금식을 하게 되면 우리의 심령이 곤고해집니다. 성경은 그러한 증상을 가리켜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는 압제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다윗은 말하길,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3)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금식했을 때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했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금식은 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금식은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 줍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될
때 비로소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할 때 비로소 주님을 향한 사모함이 최고조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소유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식은 또한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마음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 뜻대로 행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고 뭔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금식을 하게 되면 몸에 영양분이 공급되지 못하기 때문에 몸에 힘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금식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애통케 되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마음껏 먹을 때는 사회적 활동이 자연스러웠으나 배고픔으로
인해 세상의 활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없이 세상일에 바쁘게 살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을 드려다 볼 시간이 없어지는데 금식을 통해서 자신 스스로를
드려다 볼 수 있게 합니다. 이렇듯 자신의 내면을 드려다 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죄 많은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마음
속에서 애통함이 생겨나는 것이고 눈물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 한 방울 흘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눈물 한 방울 흘려 본 적이 없는 사람도 금식을 해야 할 것입
니다. 금식을 통해서 저들의 심령이 상함을 얻게 될 것이며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눈물이 저들의 시야를 가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는 금식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8장에는 금식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문제는 금식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해도 하나님께서 그 수고를 알아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사 58:3 상반절)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금식을 행하는 백성들로서는 금식을 해도 하나님께서 그 금식을 받아주지 않으며 금식하는 자를 기뻐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은
금식하는 사람의 마음에 큰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금식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오며 왜 금식을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사 58:2)
이사야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날마다 찾아 나섬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길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을 즐거워할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가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즐거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 의로운 판단을 구하며 늘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는 것은 하나님과 늘 함께 있어 동행하기를 기뻐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렇듯 이사야가 언급한 사람들을 볼 때 이들은 분명 의로운 사람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로운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토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보통 믿는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하는 금식도 잘 드리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식하는 저들을 돌아보지 않으셨고 저들이 금식함으로 마음을 괴롭게 하였을 때에도 전혀 저들의 상한심령을 알아주지 않으셨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불만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저들의 불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꾸짖는 말을 하였습니다.
“…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사 58:3 후반절)
하나님께서 저들의 금식을 받아주지 않으신 이유는 바로 저들이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켰기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오락’이라는 뜻은 자신
의 마음이 기쁨을 갖기 위해 원하는 대로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육신의 쾌락과 정욕을 위해 행하는 것들이 바로 ‘오락’을 위한 일인 것입니다. 또한 ‘온갖 일을 시키
는도다’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강제적으로 일을 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내포하고 있는 모습은 “나는 금식하기 때문에 육신이 힘이 드니까 네가 내 대신해서 나의 일을 다 해라!”라는 강제적인 요구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의 금식을 기뻐 받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금식은 무엇일까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금식은 당신으로 하여금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에게 압제 당하고 있는 사람을
자유케 해 주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입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준다’는 것은 악한 행위로부터 자유케 함을 뜻합니다. ‘흉악’이라는 말은 <레샤> 로써 ‘부정’ ‘사악’ ‘유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정하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다던가 사기를 친다든지, 아니면 간음죄를 범하거나 다른 유죄를 범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런 ‘흉악’에
의해 생겨난 ‘결박’을 풀어 준다는 것은, 현재 범하고 있는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줌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누군가 나에게 악한 행동을 한 모든 사람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용서’를 뜻합니다.
여기서 ‘결박’이라는 뜻은 <하르춥바>로써 ‘족쇄’나 ‘결박’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경찰에게 수갑이 채워져
끌려가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그런 ‘흉악의 결박’으로부터 풀어준다는 것은 죄악된 생활에서 자유케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악된 생활을
살지 않고 보다 정결한 삶을 살게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죄 지은 어떤 사람을 용서해 줄 때 그 사람은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라는 말은 우리의 혼적인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멍에’라는 단어가 단순히 ‘막대기’나 ‘멍에’라는 단어에 불과하지만 성경에서는
그 단어가 흔히 ‘압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멍에’라는 단어가 ‘묶음’이라는 뜻을 가진 ‘줄’과 연결됨으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압제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일종의 ‘스트레스’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수많은 스트레스를 통해서 압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압제를 당하고 아내로부터
압제를 당합니다. 자녀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질병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재정적인 위기를 당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심한 압제에 묶임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금식은 이러한 정신적인 문제로부터 ‘끌러줍니다’. ‘끌러준다’는 단어는<나타르>로써 단순히 ‘풀어주다’는 뜻 외에 ‘놀라 펄쩍 일어나다’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은 우리의 혼(마음)을 압제하는 모든 묶임으로부터 해방시켜 줌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살아나 놀라 펄쩍 뛰며 일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
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지 않는지 스스로 살펴 봐야 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를 억압하고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면 그 멍에의
줄을 끌러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금식은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압제 당한다’는 뜻은 앞서 설명했던 ‘멍에’가 아닙니다. 한국 성경에서는 압제 당한다고 해석했지만
사실 이 단어는 보다 영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압제하다’는 단어는 <라차츠>로써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압제하다’는 뜻 외에 ‘으깨다’
혹은 ‘부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심령과 연관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상한마음’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의
심령은 악한 세력으로부터 압제를 당하여 부서지고 으스러짐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니고 있던 꿈이 한꺼번에 충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난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세워놓은 계획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심령이 압제를 당할 때 우리의 심령은 낙담하게
됩니다.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를 정신적으로 압제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압제당하는 사람을 자유케 해야 합니다. 당신의 이러한 금식을 통해 그 사람의 심령은 ‘압제
함’으로부터 자유케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는 금식은 이러한 것이 추가적으로 행해져야 하다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7)
당신이 금식을 할 때에 함께 행해야 할 것은 바로 ‘구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당신이 굶주린 형제에게 식물을 나눠주고 방황하는
자에게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는 일을 행하며 당신의 가족과 친척들을 구제하기 싫어 스스로 숨지 않을 때 당신의 금식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것입니다.
금식을 통한 놀라운 역사
당신이 위에서 언급한 것을 모두 지켜 행하여 금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놀라운 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 58: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행할 때 당신의 질병은 급속히 치료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과
늘 함께 할 것입니다. 당신의 질병이 급속히 치유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행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늘 당신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금식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간구가 속히 응답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르짖음에 늘
경청하실 것입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상반절)
또한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셔서 당신 영혼을 만족케 할 것이며 당신의 뼈를 견고케 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영과 혼과 육이 모두 강건해지고 풍성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 58:11)
또한 당신을 통해서 당신의 가문이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후손이 당신의 가문을 회복시킬 것이며 자자손손 대대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가리켜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고 말할 것이며 당신이 하는 일마다 잘 되어 당신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자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금식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righteousness)’를 행하기 위해서 지켜야만 했던 세가지 덕목은 세 가지입니다. 바로 ‘기도, 금식, 그리고 구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가지 덕목을 지키기 위해서 매우 열심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열심히 구제합니다. 또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열심히 의를 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와 구제에 대해서 설명하신 후에 금식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이미자기 상을 받았느니라”*마 6:16)고 말씀 하셨
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고 덧붙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식을 하면서 그것이 자기 자신을 남들보다 의롭게 보이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자랑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싫어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식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금식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초췌한 모습으로 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누구든지 “어디가 아프세요?”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금식 중이라서요”라는 답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초췌한 모습으로 다니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초췌한 모습으로 다니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금식 중이라는 사실을 떠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8)
마치 기도가 주님과 일대일의 관계로 해야 되는 것처럼 금식 또한 주님과 일대일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남에게 보이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금식 또한 남에게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에 대한 잘못된 생각
금식을 통해서 뭔가를 성취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의 대학입학을 놓고 작정 금식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식기도를 하면 입학할 수 없는 자녀가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식기도를 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교회 건축헌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작정 금식기도를
선포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누군가 질병에 걸렸을 때 금식기도를 선포함으로써 질병이 치유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식은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금식은 상한심령을 갖기 위해 행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내 지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가 차마 부끄러워 금식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죄로 인해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금식기도를 드리면 절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구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금식을 밥 먹듯이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9-20)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찾아와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곧잘 하는데 왜 당신은 제자들에게 금식을 시키지 않습니까?”라고 힐책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누가 금식하더냐?”하시면서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을 상징하시는 것처럼 단순히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지극히 영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을 빼앗길 날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랑을 빼앗길 날’은 언제일까요?
그 날은 바로 우리가 죄를 범하는 날입니다. 죄를 짓게 될 때 우리는 신랑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신랑이라는 의미를 당신 앞에 서 있는 남편이나 아내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간음죄를 범했을 때 당신은 배우자의 심령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의 배우자는 예전처럼 당신 앞에 있을지라도 당신의 죄로
인해서 당신은 배우자를 빼앗기도 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악은 우리로부터 주님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죄로 인해 주님을 빼앗겼습니까? 그러면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금식은 당신을 죄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며 당신에게 상한 심령을 제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상한 심령을 바로 보시며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당신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비록 주님께서 당신과 항상 함께
하시지만 당신의 죄로 인해서 당신 스스로 주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양심이라는 것이지요.
비록 당신이 배우자에게 죄를 범했을 때 배우자가 당신을 용서했다고 할지라도 당신 스스로 용서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신 스스로 당신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면 당신은 영원히 배우자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죄를 범했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죄를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어쩌면 이미 용서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신입니다.
당신 스스로 당신의 죄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돕는 것이 바로 금식입니다.
금식은 이처럼 당신을 죄에서 자유케 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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