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과 신,구약
1) 로마 제국의 유대 통치
B.C 8세기에 시작된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을 거치면서 발전하다가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B.C.2세기 중반부터는 제국의 길을 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오르자 로마는 원로원 체제가 아닌 제정으로 바뀌면서 식민지를 다스리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제정 체제에서의 로마는 황제가 총독을 파견 및 소환하는 체제로 황제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는 이런 통치방식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대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유대의 통치자로 분봉왕을 임명하고 동시에 총독을 보내어 정치와 군사를 맡기고 종교는 유대의 대제사장에게 맡겨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유대 안에 3분야의 분할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이유는 당시 고대 근동 모두가 다신교였으나 유대만은 유일 신앙을 가졌기에 그들의 독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는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강대한 나라에게라도 철저히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유대의 분봉왕으로 이두매사람 헤롯을 임명한 것은 유대처럼 껄끄러운 나라를 다스리는데 매우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헤롯은 공식적으로는 B.C.40년 유대의 분봉 왕 자리에 올랐으나 실질적인 통치는 B.C.37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4년 전까지였습니다. 헤롯은 로마와의 관계에도, 유대의 대제사장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하였습니다.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로마의 1차 삼두정치 두 핵심인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잘 지냈고, 2차 삼두정치의 실권자 안토니우스와도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권력을 쥐고 악티움 해전을 치를 때 헤롯은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섭니다. 이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고, 헤롯의 지원 덕분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면서 헤롯의 유대 분봉왕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헤롯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봉 왕 자리를 세습할 수 있었습니다. 헤롯 안티파터는 후에 말리쿠스라는 열광적인 유대인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헤롯 안티파터의 뒤를 이은 둘째 아들 대 헤롯은 아버지를 죽인 암살자를 처형하고 유대 통치자로 돌아와 자신이 다스리던 때에 건축 붐을 일으켜 많은 도시와 요새를 건설합니다. 예루살렘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이 왕궁도 건설하였으며, 국경의 마사다와 같은 요새를 정비했습니다. 또한 당시 배를 건조하는데 필요했던 아스팔트를 사해에서 추출하여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배분하여 독점하였고,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키프로스의 구리광산을 임대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그가 건설한 도시로 유명한 것은 카이사레아 마르티아와 그 항구, 그리고 옛 사마리아의 유적 위에 세워져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세바스테가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추억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하면서도 로마의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짓는 등 유대 전통과 맞지 않는 이교적인 일을 많이 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의 분봉 왕으로 있으면서 뛰언나 건축술로 로마와 유대 모두의 마음을 얻어내는 왕이었습니다.
또한 헤롯은 유대인 마음을 얻고자 명목상 힐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미리암은 아직 10대였으나 헤롯의 첫 번째 부인인 도리스와 3살 난 아들 안티파트로스를 버리고 미리암과 결혼하여 전통적 유대 제사장 집안과 결합하였으며, 34년간 유대의 왕으로 다스렸습니다. 이후 유대 분봉왕으로 유대를 통치하면서 하스몬가의 주도적인 인물 45명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결국 부인과 아들들까지 죽이며 하스몬 왕조와의 관련을 모두 끊어버립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4년 봄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헤롯 아르켈라오스에게는 자신의 전 영토를 주었고,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갈릴래아)와 페레아를, 헤롯 빌립보 1세에게는 골란 지역과 베타니아, 트라코니티스를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유언은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얻지 못했고 결국 세 아들 모두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로 파견된 총독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로마가 유대의 총독으로 보낸 총독들은 초대 옥타비아누스 황제 때 파견된 코프니우스, 마르쿠스 암비불루스, 안니우스 루푸스가 있습니다. 두 번째 황제인 티베리우스가 파견한 총독은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와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입니다. 후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로마 총독으로는 펠릭스(벨릭스)와 베스도 등이 유대 총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 백성에게 평화와 관용을 베푸는 이미지를 가지기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점령지에 총독을 보내며 소수의 병력만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함부로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던 것은 로마가 언제든지 대규모의 병력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겨난 말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입니다. 로마 총독은 유대를 통치하면서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고자 병력을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에 주둔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도 가이사랴에서 근무하던 군인이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은 그 군단의 군인들을 로마 시민 가운데에서 뽑지 않고 사마리아와 가이사랴 지역에서 뽑았습니다. 유대인은 군사로 모집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도 약간의 수비대를 주둔했는데, 그 병력은 700~1,000명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폭도들에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에 천부장 루시아가 이 수비대를 이끌고 즉각 출동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것도 이 수비대였습니다.
로마 총독이 유대에서 가진 중요한 권력은 ‘사형집행’이었습니다. 유대에게는 정치 이외의 문제는 처리할 수 있었으나 사형집행권은 로마 총독의 권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로마 총독의 결정에 내려진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는 유대를 통치하면서 그들의 독특한 종교성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종교문제를 건드리면 그들은 상대와 상관없이 불같이 일어남을 지난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종교인들에게는 절대 권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는 많은 양의 금이 늘 존재했습니다. 그 이유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에 많은 양의 헌금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를 통치하는 제국들도 늘 성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민중들은 정치와 종교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그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메시아사상을 늘 가지고 살았습니다.
2) 분봉 왕 헤롯의 정치
헤롯은 그의 아버지 안티파터에 의해 25세에 갈릴리 지역의 총독에 임명되면서부터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합니다. 먼저는 갈릴리 사람들이 가장 원하던 일을 해줌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풍요한 갈릴리 지역을 자주 넘보던 도적들을 소탕함으로 시리아 사람들의 고마움을 한 몸에 받습니다. 그렇다고 물렁한 통치를 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전폭적인 지지로 왕이 되면서 하스몬 왕조를 처단함으로 헤롯에게 얼마나 크고 힘 있는 권세가 있는지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헤롯은 불모지를 개발하고 예루살렘을 아름답게 꾸미면서 흉년이 들자 사재를 털어 구제에 나서는 등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건축가 출신이던 헤롯이 가장 잘 할 수 있던 사업 역시 건축이겠지요.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확장 증축과 로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이사랴 신도시를 개발했습니다. 당시 성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불타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한 것으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성전이었습니다. 이에 헤롯은 재위 18년째에 예루살렘 성전을 거대한 규모로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쓰던 수도시설을 그대로 예루살렘에도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성전공사 중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공사하기 위해 1,000명의 제사장들에게 석공훈련을 시켜 그들을 공사에 투입시켰습니다. 많은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것에 대비해 피와 고기를 대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정화시스템을 갖추었고, 성전 뜰 안에는 34개의 수조가 있어서 많은 양의 물을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을 치장하는 외부장식, 성전 문, 내부 시설에는 막대한 재원을 지원하였습니다.
성전이 완공되자 헤롯은 크게 기뻐하며 수소 300마리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으며 백성들도 하나님과 헤롯에게 감사표시를 했습니다. 이 성전은 화려함과 규모가 대단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한 예로 B.C.15년 옥타비아누스의 사위이며 헤롯의 친구이던 마르쿠스 아그리파는 황소 100마리를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헤롯의 또 다른 건축은 가이사랴 신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원래 지명은 스트라토의 망대라고 부르던 곳을 요새화하여 가이사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가이사랴는 ‘카이사르의 도시’라는 의미로 로마 황제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해변을 마주한 지역에 호화로운 왕궁과 큰 건물들을 지었습니다. 또한 사시사철 파도와 상관없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구도 건설했습니다. 이 항구는 아테네의 피래움 항구와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스포츠경기가 진행되는 원형 경기장도 건설했습니다. 이 경기장에서는 5년마다 로마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회를 열었습니다. 항구에는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와 신성한 로마를 위한 큰 규모의 신전도 지었습니다. 그래서 항구로 들어오는 배는 로마황제의 동상과 신전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이사랴 신도시는 재위 28년에 완공되었고 총 12년 동안 건설하였습니다. 헤롯이 지혜로운 것은 가이사랴를 지으며 황제의 동상과 신전을 지은 것이 유대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카이사르의 초상화와 동전 등 그와 관련된 것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했다는 것입니다.
헤롯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가 관용과 친절을 베풀었다는 기록과 함께, 잔인무도하다고도 합니다. 야욕과 허영이 가득하다고 하여 그를 이중성격이라고 평가합니다. 헤롯의 개인적인 성격은 잔인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헤롯의 정치력은 옥타비아누스가 인정할 만큼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헤롯을 베들레헴에 유아살해명령을 내린 잔혹한 왕으로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십니까?”하며 물었으며 그에게 경배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헤롯 왕과 예루살렘에 큰 소동이 일어나지요. 즉시 헤롯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느냐고 묻습니다. 구약성경의 ‘미가’서를 근거로 베들레헴이라고 말하자 헤롯은 박사들에게 조용히 베들레헴으로 가보라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아이를 찾으면 자신도 경배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만난 박사들은 헤롯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기들의 나라로 돌아가 버리자 헤롯이 내린 명령이 베들레헴 안에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립니다. 자신 이외에 유대인의 왕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아내와 아들까지 죽인 헤롯이 어린아이라고 해서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헤롯의 치세 중 가장 잔인했던 기간은 마지막 10년간이었습니다. 헤롯은 10명의 부인 가운데 2명을 죽였고, 3명의 아들과 처남, 처조부를 살해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에게 베들레헴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헤롯이 죽자 유대는 그의 아들들에 의해 셋으로 분할됩니다.
3) 로마제국의 산물
누가복음 2장 1절을 읽어볼까요?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란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성인 카이사르를 가리키는 것으로 나중에는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호칭이 됩니다. 아구스도는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이는 로마 원로원이 옥카비아누스에게 바친 존칭으로 ‘존엄한 자’라는 뜻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국 전체에 인구조사를 실시한 이유는 세금을 철저히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로마가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에서 황제 중심의 제정으로 바뀌면서 공화정 후기에 발생했던 내전으로 국고가 비었고, 기금을 고갈시켜버렸습니다. 이는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내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내전이 국고를 비게 만들었으며 이는 국가재정의 위기로 찾아왔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오른 후 가장 먼저 할 일이 로마 재정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문제였습니다. 이에 로마 제국하의 모든 식민지 백성들은 정해진 날까지 반드시 고향에 가서 인구조사에 응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해산을 앞두고도 베들레헴까지 가야 했지요.
복음서에서부터 등장하는 세리는 로마의 식민지 세금 수거와 관련하여 생겨난 산물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서 이스라엘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끊임없이 세금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다른 지배국보다 더욱 본격적으로 세금의 탈루를 막으려 했고, 식민지 자국민을 세리로 임명해 이를 수행하게 했습니다. 로마 제국 하에 세리는 자국민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고 과외로 징수한 것을 가지고 생계를 이어가는 형태였습니다. 이로 인해 세리는 유대인들의 증오의 대상이었고, 로마 정부에 고용당한 사람이며 정치적인 배신자로 여기게 되었기에 몹시 멸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유대 사회에서 창기와 동급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세금으로는 도시 대 도시의 상품 수출입세, 주에서 주로 가는 선편에 대한 세, 세금에 부과한 세, 다리 통과세, 입항세 등이 있었습니다.
백부장과 천부장 또한 로마 제국의 산물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도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등이 등장합니다. 이는 군사지도자를 지칭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신약시대의 백부장은 백인대장을 의미하고 천부장은 로마 제국의 호민관 혹은 지역 사령관을 일컬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의미상으로는 100명의 지휘관이지만 실제로는 50~100명 사이의 부하를 거느리는 로마의 하사관급 장교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백부장이 자주 등장합니다.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이 있고, 두 번째는 사도행전의 고넬료 백부장으로 베드로를 초청한 인물입니다.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책임을 지던 율리오도 백부장이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로마 병사들을 지휘한 인물도 백부장입니다. 천부장은 고대 로마에서 군사적인 문제를 처리하거나 시민들을 위해 일했던 관리로서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직책에 속했습니다. 언어적으로는 1,0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나 실제로는 700~1,000명을 지휘했고,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이송시켰던 책임자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천부장이었습니다.
로마시대에 탁월하게 발전한 것은 도로망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은 로마를 중심으로 제국 전체로 이어지는 뻗은 길이 있었고 이 길을 통해 많은 군대가 신속히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도로와 수도시설 등 공공시설에 대해서 다른 어느 제국보다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우편제도를 잘 발전시키면서 넓은 제국에 원활한 소통과 이동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넓은 도로망을 잘 분할하여 규칙적인 간격으로 우편역과 파발꾼들을 두어 우편로를 만들었습니다. 보통은 도로 끝과 끝을 편도로 가려면 90일 정도 걸렸으나 우편역에 건강한 역말을 사용할 수 있는 왕의 사자들은 일주일 만에 그 길을 주행했습니다. 이 길이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바울이 도로와 뱃길을 이용해 먼 거리를 전도여행 다니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1년에 3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명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가능했습니다(행2:5~11). 그만큼 로마 제국의 도로와 항해 사정이 좋았으며, 여행자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앗수르나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 시대에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여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사형 틀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의 사형법입니다. 로마 제국의 십자가 처형으로 유명한 것은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면서 반란에 가담한 6,000여명의 노예들을 한꺼번에 십자가에 매단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되심으로 인류역사에 가장 유명한 처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사형법은 돌로 처형당하는 방법이었으나, 주님은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십니다. 그리고 사형도구이던 십자가가 이제는 로마 제국 가운데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지는 일도 생기게 됩니다.
십자가보다 조금 못한 처형으로 채석장으로 보내지는 형벌이 있습니다. 이는 광산이나 채석장에서 평생 고된 노동을 시키는 벌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 채석장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지요.
로마 시민권은 로마가 지배하던 시기에 하나의 권력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힘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유대 폭도들로부터 로마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투표에 참여하고 각종 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는 권리와 로마 군단병이 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시민권자가 죄를 짓거나 시비에 말려 재판을 받을 때 로마 황제에게 탄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는 그 시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이 가능했으며, 사도행전 22장 28절에서 천부장이 거액을 주고 샀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살 수 있기도 했습니다(행22:27~28). 그만큼 로마 시민권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 시대를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모두 로마 제국의 배경 하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4)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멸망
B.C.37년부터 시작된 분봉 왕 대 헤롯의 통치는 세습되면서 A.D.44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옥타비아누스 황제에 의해 폐위된 뒤에는 유대, 이두매, 사마리아가 로마 총독 코포니우스에게 지배를 받게 되고, 대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가 죽은 뒤에 로마는 더 이상 분봉왕을 통한 통치를 그만두고 유대 전체를 총독에 의한 직접 통치로 바꾸었습니다. 물론 로마 총독이 유대를 직접 통치하면서도 유대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제사의식도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로마가 간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와 유대가 충돌하는 부분이 생겼습니다.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매년 한 사람이 두 드라크마씩 예루살렘 성전에 내는 성전세를 로마가 간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대제사장을 로마가 지명하자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로마의 두 번째 황제 티베리우스가 유대의 총독으로 본디오 빌라도를 보냈는데,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수도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예루살렘 성전 금고에 들어간 것입니다. 유대 민중은 크게 반발하며 빌라도를 포위하였고, 빌라도는 로마 군인들의 도움으로 그 자리를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그 후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이어서 사마리아인들을 살해하는 실정을 저지르고 맙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시리아 통독 비텔리우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비텔리우스는 빌라도를 유대 총독에서 면직시키고 로마로 보내 재판에 회부시킵니다. 마침 유대인들은 헤롯 이후로 로마인들이 보관해오던 대제사장의 예복을 돌려줄 것을 비텔리우스에게 요구하였고 비텔리우스는 예복을 유대로 돌려줍니다.
얼마 후 로마의 세 번째 황제인 칼리굴라가 황제 숭배를 강요하면서 또다시 유대에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칼리굴라 황제가 스스로 신을 자청하여 제국 전역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게 하면서 유대와 로마간의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숭배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유대 민중은 페트로니우스를 포위하고 격렬한 시위를 하였고, 페트로니우스는 겨우 목숨만 건져 시리아로 도망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열심당 세역이 커지게 되었고 로마와 결탁한 제사장들을 학살하거나 채무 문서를 빼앗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이 전쟁에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가 참전하게 되었고, 로마의 네 번째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유대 총독으로 쿠피루스 파투스와 티베리우스 알렉산더, 쿠마누스를 보냈습니다. 그들 이후 네로가 로마의 황제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로마의 다섯 번째 황제인 네로는 유대의 총독으로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플로루스를 총독으로 보냈습니다. 바로 플로루스 총독 때에 유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A.D.66년 플로루스는 로마에 바쳐야 하는 세금이 밀리자 예루살렘 성전 금고에서 17달란트의 금화를 몰수해 세금으로 환원시켜버립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플로루스에게 저항하면서 총독을 경멸하기 위해 구호금을 모금합니다. 이에 화가 난 플로루스는 이들을 잡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실시했고, 곧이어 유대인들은 로마 정권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 폭동 소식을 전해들은 네로 황제는 즉시 시리아의 민정 책임자였던 케스티우스 칼레스 총독을 예루살렘으로 급파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강경한 대응에 케스티우스 칼레스 총독은 5,300명의 보병과 380기의 기병 전사자를 내고 시리아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건강상의 이유로 안디옥으로 가자마자 죽고 맙니다. 이것이 유대와 로마간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까지 피해가 커져갔으며, 다메섹에서는 유대인 18,000명이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이 유대 전쟁에 참가했던 요세푸스가 [유대 전쟁사]를 남겼습니다.
4년간의 유대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기간은 마지막 5개월이었습니다. A.D.70년 예루살렘은 도성 전체가 완전히 로마에게 넘어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버렸고, 성전기물들도 로마에 빼앗겼습니다. 끝까지 저항한 마사다 성채 안에서 저항하던 자들은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960명이었고 그들은 모두 자결함으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자결한 근처에는 양식이 많이 쌓아져 있었습니다. 즉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자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유대에서 도망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다시 유대인들을 선동하였으나 그 일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의 보병 대대가 주둔했으며, 유대인들의 성전세는 로마의 신중에 하나인 주피터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유대 전쟁으로 말미암아 산헤드린 공회는 없어지고,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A.D.116년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 유대는 또다시 반란의 기미를 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A.D.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완전히 추방하고, 유대교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공식적으로 유대가 문을 닫은 연도는 A.D.70년이지만, 실제적으로 유대인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된 것은 A.D.130년입니다. 그리고 그 후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 세계를 떠돌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지내다가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5) 끝맺음
민족의 역사가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면서 긴 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눈앞에 닥치는 환난과 어려움에 집중할 때가 많으나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면 지금의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당장 눈앞에 일어나는 일을 보기보다 큰 역사를 이해할 때 비로소 신앙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역사가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대한민국, 그리고 한 민족 두 국가로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역시 아브라함에서 출발하여 히브리 민족, 이스라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유대인,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택한 민족이라고 하여 민족적 우월감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이스라엘은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 했고, 다른 나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망각해버렸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를 들어 이스라엘을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율법을 통해 훈련시켜 온 세계 민족의 제사장 나라를 삼으신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고 처형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민의식이라는 고립된 멤버십은 그들의 시야를 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복장, 사고방식, 생활습관들은 그 결과의 산물이겠지요.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유대인들은 꿈에서라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함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지독한 고집, 편협된 사고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택은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오실 주님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가야할 사명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각자가 고민하셔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처럼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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