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전도방법과 교육



제1장. 서론

1. 전도와 교육에 대한 성경적 근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효과적으로 복음전도를 하려면, 그것은 굳건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전도와 신학은 서로 보충하고 의존하기 때문이다. 오트리(C. E. Autrey)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신학과 복음전도의 관계는 뼈와 몸에 대한 관계와 같다. 뼈를 없애면 몸은 젤리같이 흐느적거린다. 뼈에 의해 몸은 바로 서며 움직인다. 신학적 진리의 거대한 체계는

우리의 겉에 보이는 계시종교를 바로 서게 해주는 골격이 된다."

1) 전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
(1) 용어정리
복음이란 헬라어 αγγ λιον(evangelism)에서 온 말로 "기쁜 소식"을 뜻한다.


고전적 헬라어에서 이 말은 종종 적군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리의 소식'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기록자들은 이 단어를 헬라 사상적 배경에서보다 구약의 배경에서 사용했다. αγγ λιον 에 대응하는 히브리어는 (besorah)이다. 구약에서 모두 6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 역시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삼하18:20, 25, 27, 왕하7:9),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삼하4:10, 18:22) 등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종교적 의미가 첨가되어 시편과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이 단어가 ( basar)라는 동사형으로 장차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리키게 되었다.(시40:10, 96:2, 사41:27, 52, 61:1). 여기서 복음의 일반적인 의미는 구약이 예언한 그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기독교의 전역사가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 나라를 위해서 복음전도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1. 유앙겔리죠(ε αγγελ ζω)


이 동사는 신약성경 가운데 52번이나 등장하는데 '복음을 전하다'(to gospelize)는 뜻으로서 좋은 소식을 전하거나 선포하거나 가져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구약의 70인경(LXX)에서는 이것이 가끔 승리의 소식을 가져오는 사자에 대해서 쓰여지거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구원을 선포하는 의미(시40:10, 96:2)로도 사용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여러 가지 다양한 문맥 속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엄격하게 번역하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는 것 이상의 뜻을 가질 수 없지만, 성경 본문에서는 아름다운 소식에 대한 명백한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실로 복음서의 기록들은 예수님의 복음전도 사역에 있어서 전파와 입증, 설교의 행동, 말과 행함을 분리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만들어준다(막1:14-15, 눅4:18-21, 7:19-2 눅8장, 행8:6-2,12, 행10:36-38).


성경에서 '복음을 전한다'함은 결코 말뿐인 전파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행동 속에 설정된 행동이었다. 표적과 기사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보여준 사랑과 돌보아줌과 애정이 나타나는 많은 실례들 속의 행동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15:18 이하에서 자신의 복음전도 사역을 설명하기를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했다. 따라서 복음전도는 말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과 모양으로 나타내야 하며, 이러한 "복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면, 말씀은 결국 공허하고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

2 케루소(κηρ σσω)


이 낱말은 예수님과 요한 그리고 초대 복음전도자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동사만큼이나 자주 나와서 신약 가운데 61번이나 쓰여지고 있는데, 기본적인 개념은 '왕으로부터 주어진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포'이다. "선포하다(to preach)는 말이 본래 가진 뜻은 선포자에 의하여 마을에서 선포되며, 대낮에 나팔을 울리면서 최신의 정보로서 모든 이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왕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 선포자에게 있어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은 절대적인 충성심이다. 그는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 25절에서 "나의 복음( αγγ λιον)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κ ρυγμα)"이라고 언급함으로써 그는 복음과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하나이고 동일한 메시지로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복음전도자와 선포자들의 궁극적인 임무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복음전도자는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에 충성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성령께 의탁하여야만 한다.

3. 디다스코(διδ σκω)


이 낱말은 예수님의 복음전도를 설명하는데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자주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마9:35). 가르침이란 진리를 선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대화형식으로 위대한 영적 진리들을 명료하게 하고 설명하셨다. 진리를 알릴 뿐 아니라 그것을 확증하고 또 예증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구원의 계획에 반응하면, 그 가르침은 곧 전도가 된다. 기독교대학에서 예배시에 전도자가 설교를 하고, 강의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들은 중요한 전도활동이요, 가장 훌륭한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임이 분명하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는 명을 받은 사도들은 진리로써 지성을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실천하였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노력하면서 유대인과 더불어 성경을 가지고 자주 변론하였다. 예를 들면 때로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등에 대하여 논쟁하면서 '변론하곤'(행17:2, 18:4,19, 19:8-9. 24"25)했었다. 그리고 사도들은 또한 '굴복시키기도 하고'(행9:22), '증명하기도 하고'(행17:3), '유력하게 말을 이기기도'(행18:28) 하였었다.


비록 사도들은 그들의 전도여행에 있어서 성읍에서 성읍으로 옮기며 전전했었으나 그들은 가능한 최고의 시간을 복음 전파와 가르치는 일과 변론과 원유하는 일로 소비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논쟁하였다"(행17:3). 고린도에서 "우리들은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였으며 ... 그는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행18:4,11).


아마도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에베소에서의 일인데 그는 거기서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으며", 게다가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했었다"(행19:8-10). 그 결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이 로마에 있어 체포된 상태이었으나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에게로 나아오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행28:23, 30-31).

4. 마데튜사오(μαθητευσ ω)


이 말은 '제자를 삼다'는 뜻으로 '가르치다'라는 낱말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임무를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이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것은 주님의 전도 메시지 중의 하나였다. 그가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그의 선교활동을 계속할 그의 사람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필요한 것은 그의 말이 그대로 인쇄된 산 교본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제자들이었다."


열 두 명의 제자들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상 자기와 함께 동거하면서 자기를 배울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다(막3:14). 예수님은 3년동안 이 적은 공동체를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양육하셨고, 승천하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선언하시는 가장 권위있는 파송을 단행하셨다. 그리고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자기의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대사명을 당부하셨다(마28:18-20).


'제자를 삼으라'고 한 말씀은 제자라는 이름을 12사도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될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하여 적용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요한은 12명의 사도들이 아닌 상당수의 사람들을 제자라고 부르고 있다(요6:66). 특히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저하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행2:41, 6:2,7).


제자란 그의 스승을 닮고, 그의 사역을 계승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노예로서 섬기는 자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하라고 하지 않고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 것은 그가 다스리시기를 원하신 새 왕국의 백성은 예외 없이 자기를 닮고, 그의 사역을 계승하기를 소원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부하신 깊은 뜻 가운데는 단순한 복음 전파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는 일까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5. 말투스(μ ρτυS)


이 말의 뜻은 '증인'(witness)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증인은 곧 증명, 증언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교가 참되다는 것을 나타내는 내 증명이다. 너희는 살아 있는 나의 신임장이다'는 의미로 이 말을 적용하셨다.


제자와 증거가 얼마나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려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보내다'(apostello, pempo)라는 동사가 '제자'라는 말과 같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보내다'라는 말이 무려 215번이나 나오고 있다. 거의 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증인으로 파송하는 내용과 관계된 말이다.


누가는 증인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이 그것을 전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사도들의 증거를 듣고 믿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고백하거나 전하는 경우이다.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면서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선언하셨다(눅24:28).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하셨다(행1:8).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바로 그가 예언한 그 증인들이 탄생하여 이루어진 거룩한 무리들이었던 것이다(행1:22, 2:32, 3:15, 5:31, 10:41).


그러나 증거의 사역은 항상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였을 때 그 자리에는 12사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다른 제자들이 동석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눅24:33). 주님의 명령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제자들이 다 증인이었다. 스데반도 예수님의 증인이었다(행22:20). 스데반은 사도들과 같은 첫 번 목격자가 아니었으나 증인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순교자였다. 증인이라는 말과 순교자라는 말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순교자는 자기가 믿는 증거로써 자기 생명을 내어놓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순교가 그를 증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증거가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성경상에 나타난 복음전도의 개념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복음전도란 인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 복음을 공적 사적으로 선포하며, 많은 시간을 들여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까지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로마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썼다. 여기서 '너희'는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7절)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불신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신자들을 양육하여 제자와 증인으로 삼는 것까지를 생각하게 된다.


앞서 복음전도의 개념을 규정한데 이어서 복음전도의 성경신학적 기초를 고찰하고자 한다. 복음전도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가장 중요한 이유이며,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강림하신 뜻이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과 하나님의 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복음전도이다.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를 개관하시면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친히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 이 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4-48).


위 말씀에서 우리는 복음전도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며, 복음전도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령님께서 전도의 수행능력이 되시며, 주님의 몸된 교회는 복음의 증인으로서 전도의 수행자임을 알게 된다.


제2장. 예수님의 교육과 전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복음이 되셨을 뿐 아니라

복음전도의 모형이 되셨다. 즉 제자들을 택하여 전도하게 했으며 친히 본을 보이시고 또한 그들에게 전도사역을 위임하셨다.

1.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도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눅6:13-17). 예수님이 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 둘을 사도로 지명하신 이유는 그 숫자가 하나님의 메시야적 왕국과 어떤 영적 관계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쉘(Eldwin A. Schell)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열 둘은 이스라엘 영적 숫자이다. 열 두 족장, 열 두 지파, 하늘의 예루살렘의 열 두 문과 열 두 기초 등, 열 둘이라는 숫자는 어디에나 인간 권속 가운데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남은 餘生의 대부분을 이 소수의 제자들에게 바치셨다. 그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전 사역을 이 소수의 무리들에게 걸으셨다.
예수께서 제자를 택하신 일차적인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막3:14)라는 이유에서였다. 예수님은 그의 사람들을 부르신 후 계속적으로 그들과 함께 지내셨다. 예수님이 이 소수의 제자들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다. "실제로 그는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셨다". 그는 그들과 잡수셨고, 주무셨고, 그의 모든 사역의 대부분을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본을 보이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치시되 그들이 부딪히는 모든 상황 속에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방심할 수 없는 훈련이었다. 제자들은 무수한 군중을 시중하면서 인기와 반대, 성공과 실패,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예수님과의 부단한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했다. 그러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들을 서서히 제자로 만드셨다.

2. 전도의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거하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보내사 전도하게'(막3:14)하는데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신 후 , 자신이 지상에서 시작하신 사역을 예수님 대신 제자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복음전도의 본을 친히 보이시고 그들을 훈련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를 키우심에 있어서 거의가 대중을 상대로 사역하시면서 그 가운데서 행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제자들을 상대로 동일하게 사역할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 목적을 깨닫게 하는데 있었다.


때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데 있어서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개별적으로 가르치셨다(요21:15-23에서 베드로). 때로는 특별히 훈련하시기 위해 소집단을 택하시기도 했다(눅8:49-56, 9:28-36: 막14:32-36에서 베들로, 야고보, 요한). 또 어떤 때는 그룹을 대상으로 가르치셨다(마13:10). 또한 군중들과 더불어 가르치시기도 하셨다(마5-7장 산상수훈).


예수님께서는 또한 몸소 본을 보이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교수 방법과 설교와 치료하는 것을 관찰하게 했다. 제자들에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위임해 주시면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도록 허락하셨다. 五餠二漁의 이적 때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앉게 하고 빵을 떼어 나누어주게 하였다(요6:1-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어 전도하게 하시고 돌아와서 경험했던 것을 토의하게 하셨다(눅9:1-10, 10:1-20). 제자들이 사역에 실패해서 그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예수님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하시기도 하였다. 한 예를 들면 간질병 앓는 아이를 제자들은 고칠 수가 없었다(마17:14-21).

주님께서 개인이나 손수 택하신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자기 주위에 몰려든 이름 없는 군중들을 깊이 의식하셨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으로서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무수한 대중들도, 사랑해주어야 할 자로 여기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전도활동을 보면 제자들을 향한, 또한 더불어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이들을 위한 생애의 모범이 되신 것을 알게 된다.


누가는 예수님의 복음전도에 관한 말씀과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내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눅4:43-44). 예수님은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전도하시고자 사역의 범위를 넓혀 나가셨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하셨다.

3. 제자들에게 복음전도와 교육을 위임하신 그리스도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특별히 열 두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궁극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항상 그의 사역에서 제자들이 그의 일을 인계받아서 구속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 때를 위하여 조금씩 준비하셨다. 이 계획은 그들이 동행하면서 점진적으로 명확하게 되었다. 인내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전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께서 세 번째의 갈릴리 여행을 시작하셨을 때(막6:6, 마9:35), 그는 그의 제자들이 더 직접적으로 그와 함께 사역할 때가 왔음을 아셨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보아 왔는데 이제는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그는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셨다. (마10:5,막6:7, 눅9:12)


어미 독수리가 그의 새끼를 둥우리 밖으로 밀어내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것 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바깥 세상으로 던져서 그들의 날개를 시험하게 하셨다. 물론 그드르을 보내기에 앞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전도사역에 대한 지시사항들을 전해주셨다.(마10:5-42)


이 모든 지시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가 자신의 전도와 똑같다는 확신을 주심으로 끝을 맺으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 요13:20)


이 동일성을 생각해 보라! 제자들이 나아가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가 너무나도 분명해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다면, 그 자비의 행위는 반드시 보상될 것이다(마10:42).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눅9:6, 막6:12). 이 적은 무리의 제자들은 마침내 스스로 그리스도의 활동적인 사역을 시작한 것이었다.


전도사역의 임무를 제자들에게 지시하는 이 원리는 그의 십자가와 부활 후 하늘로 되돌아가기 직전에도 결론적으로 설명되었다. 적어도 네 번 그가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그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20:21, 21:15-17, 마 28:18-20, 눅24:48)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시 모든 것을 되풀이하면서, 그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모든 것을 성취하셨는가를 보여주셨다(눅24:44,45).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의 부활 등 모두 다 계획에 따라 된 것이었다(눅24:26).


제3장. 결론


기독교인의 첫째 의무는 예배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전도하시는 이유와 교육하시는 이유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사람들을 전도하고 교육하여야 할 이유도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目的에 의해서 시작되며 인간의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는 일에 이니시어티브를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된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으므로 가능하며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先行條件이 前提된다. 인간들이 영원한 형벌아래 있을 때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의인되게 하시고 양자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救援하신 하나님께 무조건 예배해야되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므로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絶對的 행위이다. 예배는 인간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相關없이 당연히 드려야 할 의무이다.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인간의 덕성을 함양하는데에 있지 않다. 즉 예배는 항상 목적이여야 하며 手段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전도와 교육은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