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수로 터널(Hezekiah's Water Tunnel)


 

예루살렘에 가면 히스기아 수로 동굴이 있다. 성지순례의 코스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지하동굴 순례는 권장하지 않는 코스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빼놓을수 없는 성서상의 가장중요한 코스 중에 하나이다. 

 

히스기야는 주전 716년에 유다의 왕에 올랐다. 당시는 앗시리아 제국이 중근동을 장악했을 때로서 주위 소국들에 대한 수탈과 침략으로 번영을 누렸다. 고대 시리아는 앗시리아에게 주전 73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722년에 정복당했다. 따라서 즉위했을 당시의 히스기야의 주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유다가 세계 최초의 포악한 제국과 맞서 생존할 수 있을지에 집중되었다.

 

         

          예루살렘성안에서 성전밖 기혼샘 까지 터널을 파서 물을 끌어드렸다. 

 

        

히스기야는 다윗 왕이 주전 1000 년경에 수도로 정한 예루살렘에 거했다. 그 도시는 다윗이 점령하기 2천 년 전에 이미 시온 산의 가파른 경사 위에 세워져 있었다. 시온 산의 주위는 험난한 산과 언덕들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시온 산 자체도 동, 남, 서 세 방향으로는 깊은 절벽으로 주위 계곡과 분리되어 있었다. 이런 험준한 지세 위에 견고한 성벽으로 지어진 예루살렘이기에 가나안 족속이 “소경과 절뚝발이라도”(삼하5:6) 외적을 방어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칠만 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시에 최후에 함락시켰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것이 허풍이 아님을 입증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결코 난공불락이 아니었는데 아주 작은 약점 하나로 물 문제가 있었다. 도시 자체 내의 물은 풍부했다. 시온 산 동쪽 자락에 있는 기혼에서 샘이 솟았다. 그러나 문제는 도시는 산 위에 있는데 반해 물은 산 바닥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땅을 파서 수로 동굴을 똟었다.          

 

그래서 가나안 여부스 족속이 이 도시를 처음 지을 때에 아주 어려운 군사적 결정을 했어야 했다. 성벽을 산꼭대기에 건설하여 침략군이 가파른 산턱을 올라 올 때에 수비군의 창과 화살 세례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 방안이지만 문제는 물의 공급처가 성벽 밖에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만약 원활한 물 공급을 위해 성벽을 산 아래에 건설하면 적군의 침공이 용이해진다.

 

 

그래서 결국 둘을 조화시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성벽은 시온 산등성이에 짖기로 했다. 대신에 단단한 바위를 뚫어 기혼 샘의 바로 위 부분까지 닿는 터널을 성벽에서부터 성 밖으로 약 30미터 길이로 파기로 했다. 또 거기서 샘물까지 4층 건물 높이의 수직 갱도를 파내려갔다. 성안에서 수원을 학보하면서 성벽은 산꼭대기에 지었던 것이다. 이 터널과 수직 갱도를 Charles Warren 이 발견하여서 “Warren 갱도(Shaft)”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부스 족속은 이런 예루살렘 성채의 견고함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다윗과 그 부하 요압이 수구로 침공해 들어오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삼하5:8에 언급한 수구(水口)는 원어로 ‘tsinnor’ 인데 학자 간에 의견이 많지만 대체로 바로 이 Warren 수직갱도(높이 약 12미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지금도 맑은 물이 흘러 예루살렘으로 이동되고 있다.

 

         

말하자면 요압 군대는 여부스 족속의 수자원 보호 및 성벽방어 비밀시스템인 터널을 이용해 예루살렘을 정복한 셈이다. 다윗 사후 수백 년이 지나 히스기야 왕은 물 문제를 가지고 다시 씨름해야 했다. 우선 다윗 시절보다 도시가 많이 커졌다. 앗시리아에게 북이스라엘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피난민이 예루살렘으로 몰렸다. 산꼭대기 성벽에 쌓인 도시로는 그 많은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필연적으로 시온 산 서쪽의 "Tyropoen" 혹은 "Cheesemaker's Valley"에 거주케 되었고 점차 그곳마저 찰 정도로 인구가 불었다. 히스기야는 예상되는 앗시리아의 공격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그곳까지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 구약시대는 물이 없으면 전쟁에 승리할 수가 없었다.

 

         

히스기야는 이 서쪽 계곡과 산언덕 전체를 두르는 성벽을 15ft(약 5미터) 두께로 쌓았다. (이 성벽의 일부가 발굴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은 두 언덕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계곡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혼 샘이 동쪽 성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어서 물 공급 문제는 여전히 골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히스기야는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야심찬 토목 공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Tyropeon 계곡 가운데 실로암 저수지를 만들고 기혼 샘에서 예루살렘 성 밑을 통과해 그 못에 이르는 백운석의 수로 터널을 뚫었다. 약 5/1 마일 (약320미터)에 길이의 수로를 통해 성안으로 물을 안전하게 공급하게 된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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