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글 / 정병선 목사


                          
‘한국교회는 비정상이다’ 하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십여 년 전부터 꾸준히 회자되어 온 이야기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다들 지적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교회는 오늘도 여전히 비정상의 모습 그대로 굴러가고 있다. 다들 염려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현실은 별로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인가? 절망은 모든 걸 파괴할 뿐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죄다. 때문에 부활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
교회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도 문제지만 절망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 역시 해법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리면서도 하나님께 구하고, 길을 찾고, 문을 두드린다(마7:7-8). 기다리면서 서두르고, 서두르면서 기다린다.
믿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현실에 절망하거나 안주할 수가 없다.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문제

한국교회 안에는 교회 제도의 수직화와 경직성의 문제, 지나친 헌금 강조와 헌금 관리의 비민주성 문제, 왜곡된 교리와 신학의 문제,

또 윤리적인 타락과 부패의 문제, 지나친 경쟁과 갖가지 환원주의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하지만 문제만 보아서는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문제의 진상을 알 수도 없다.


문제는 결과적 현상일 뿐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넘어설 수 없다. 문제의 진상을 제대로 보려면 반드시 문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한다.


무릇 모든 문제는 결국 그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로 귀착되는 법이지 않던가. 가정, 학교, 교회, 정당, 회사, 나라를 보라. 문제를 파고 들어가면, 결국 사람이 문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늘 교회가 욕을 먹고 흉포한 모습으로 구겨진 것도, 실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요, 우리의 문제다.

그러면 한국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자들인지를 살펴보자.
한국교회를 들여다보면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첫째,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아멘파(순종파). 보수적인 교회의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교회에 실망한 나머지 교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소적인 비판자의 입장에 서 있는 냉소적인 비판파. 이들은 아직까지 숫자는 많지 않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
셋째, 개인적인 신앙에 만족하는 안주파. 이들은 교회에 깊이 참여하는 걸 꺼린다. 교회문제로 깊이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저 개인적으로 영적 필요를 채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들이다. 
  

물론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본래 사람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세상에 사람처럼 복잡하고 오묘한 존재가 또 어디 있는가.

사람이란 한없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끝없이 다른 존재가 아닌가.
때문에 사람을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섣부른 짓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쩌랴. 개략적으로 대별해 볼 수밖에.
하여, 한국교회 구성원의 특성을 세 가지 부류로 대별해보았다.  

 

 

1. 아멘파 성도들

먼저 아멘파 성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소위 아멘파(순종파) 성도들은 교회에서 가장 인정받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며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 칭찬받는 자들이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이 마냥 좋고 예수님이 좋아서 목사님과 함께 교회 일에 헌신하는 자들이 많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기 일보다는 교회 일을 앞세우며 헌신적으로 헌금하고 봉사하는 분들이 많다. 정말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 분들의 헌신과 기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가볍게 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분들의 헌신과 기도의 땀방울로 세운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정상적인 교회, 하나님나라와는 거리가 먼 교회,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손가락질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여러분, 뭐 좀 이상하지 않나?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들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라면 마땅히 아름답고 칭찬받는 교회로 반듯하게 서야 할 터인데, 실제로는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으니, 왜 그런 것일까?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롬10:2). 아, 그렇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요,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진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말씀이다. 


여러분, 바울이 왜 이 말을 했는지 아는가? 유대인 동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성이 있으나, 그 열성이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복음을 억압하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성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지난 날 온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이 뜨겁기만 한 신앙이 얼마나 비참하고 엉뚱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친히 경험했기에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말한 것이다.

이런 일이 또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말한 것이다. 

그러면 오늘 한국교회는 어떤가?
그렇게 많이 바울을 설교하고 있지만 바울이 염려했던 위험한 일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온전하게 가르치기보다는 눈곱만한 쪽복음으로 성도들의 눈을 가로막고 있다.

 올바른 지식으로 무장하면 성도들이 비판적이 되고, 목회하기가 힘들어지며, 결과적으로는 교회 성장을 가로 막는다면서 지식이 없는

열성파 성도를 키우는데 몰두해왔다.


그러다보니 복음을 증거 한다고 했는데 복음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고, 교회를 세운다고 세웠는데 그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가로막는 교회 왕국이 되고 말았다. 사회로부터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우스운 교회가 되고 말았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몇몇 대형교회들로 대표되는 많은 교회들의 행태를 생각해보라. 


  
교회와 하나님나라

본래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매우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함께 임한 나라가 하나님나라요,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도 하나님나라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가르침과 사역이 전부 하나님나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말 한 마디, 몸짓 하나가 다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고 가르치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나라의 실체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출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교회였다. 여러분, 이건 뭘 의미하는가? 교회와 하나님나라는 깊은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 대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교회가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하나님나라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 땅에 증거 해야 할 책임을 맡은 하나님의 기관이긴 하나 교회가 곧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집중하고 헌신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나라를 닮은 모델하우스가 되어야지, 교회가 하나님나라인양 행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타락이요 반역이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언제나 하나님나라를 향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나라에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초대교회 시절, 교회가 힘이 없을 때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힘이 커지면서부터 교회는 점점 하나님나라와 멀어졌다. 하나님나라를 받드는 길을 걷기보다는 교회 스스로 왕국이 되는 길을 걸어갔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이 될 정도로 교회는 스스로 제왕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할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지금의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의 힘이 막강해진 지금, 한국교회는 점차 교회 왕국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은혜를 사모하며 기쁨으로 순종한 성도들의 뜨거운 열정과 순전한 믿음으로 헌신하고 땀 흘려서 세운 교회가 하나님나라와 멀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올바른 지식으로 무장하면 성도들이 비판적이 되고, 목회하기가 힘들어지며, 결과적으로는 교회 성장을 가로 막는다면서 지식이 없는 열성파 성도를 키우는 일에만

몰두해왔기 때문이다.



구원관이 협소함

특히 신앙관과 구원관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본래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경륜을 보아야 한다.

역사와 우주를 아우르는 구원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런 안목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평안과 축복, 가족의 안위를 쫓는데 급급하고 있다.

그게 구원의 전부인 줄 알고 있다.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를 보아야 하는데 교회밖에 보지 못한다.


목회자들이 그렇게밖에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보니 아멘파 성도들의 헌신과 봉사가 하나님나라를 세우기보다는 교회 왕국을 세우는데 일조하는 것으로 오용되고 말았다.


이들의 소중한 땀방울과 에너지가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세우는데 쓰였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고 교회만 보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구원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정상적인 교회가 되고 만 것이다.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인 김동민 교수가 묘사하는 오늘 교회의 모습을 들어보자.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 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 백 명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한겨레21, 1999.4.15>

김동민 교수의 이 그림 같은 묘사는 바로 하나님나라와 거리가 먼, 그래서 기이한 곳이 되어버린 한국교회의 슬픈 자화상을 기막히게 그려내고 있다. 김동민 교수가 말한 대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열심을 다해 헌금하고 봉사하고 모이고 있다.


구심력이 대단하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고 세우는 데로 모아지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정말 아름답고 향기 나는 교회,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기 위해 분투하는 교회가 곳곳에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천사도 부러워하는 교회가 분명히 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커갈수록, 힘이 강해질수록 교회는 더 크고 더 강해지기를 꿈꾸며 교회 왕국이 되려 하고 있다. 



근본주의적 성향

거기다가 신앙의 열정을 강화하는데 익숙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근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의문이나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을 불온시 했다.


의문은 곧 불신앙으로 통하고 사단의 역사로 통하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교회 안에 건강한 이성, 거듭난 이성이 자리 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신앙 앞에서 이성은 찍소리도 해서는 안 된다고, 무조건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하고 배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단 교회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생각하고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을 멈추어야 했다.

이성을 잠재워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오면 으레 생각을 멈추는 습관이 생겼다.

아니, 자동으로 이성이 멈추어 버린다.


마치 개에게 밥을 줄 때마다 종을 쳤더니 나중에는 종만 쳐도 개가 입에서 거품을 흘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자동으로 이성은 OFF가 되어버린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이성을 내려놓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 그럴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성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왜 이성을 주셨을까?

생각하고, 상상하고, 질문하고, 의문을 품을 필요 없이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면 필요도 없는 것을 뭐 하러 주셨을까?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이성이라는 게 신앙의 걸림돌밖에 안 된다면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 없이 살든지, 이성을 죽이고 하나님과 함께 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텐데, 그럴 거면 뭐하려 이성을 주셨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이성을 주셨다는 것은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것 아니겠는가? 이성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로 주신 것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하여, 나는 교회가 이성을 거부하고 불온시하는 것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의문은 또 있다. 이성을 신앙의 걸림돌이라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성을 내려놓고 살까? 하나님 앞에서 생각도, 상상력도, 의문도 없이 백지 상태에서 살까? 정말 이성은 멈추고 성령과만 직통할까? 소가 웃을 일이다.


근본주의자들도 성령 안에서 이성을 통해 말씀을 해석하며, 신학교나 교회에서 배운 것을 써먹기도 하고, 때로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고민하며 의문에 휩싸이기도

한다. 근본주의자들도 목회할 때 수많은 목회적 계산을 한다.


그런데 이성을 내려놓으라고? 이성은 신앙의 걸림돌이라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극단주의의 위험성

근본주의자들은 흑백논리에 강하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절대주의, 말씀 절대주의, 교회 절대주의, 신앙 절대주의를 외친다.

다른 교리나 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배타적이며 전투적이다. 윤리적인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이뿐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은 신앙에 의해서 쉽게 이성이 마비된다.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이름을 내 걸면 쉽게 미치고, 쉽게 전쟁지지자들이 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잔인하고 무서운 전쟁을 보면 대부분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을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 보스니아 내전, 30년 전쟁,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전쟁, 유대인 학살이 그렇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 배후에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주의가 작용하고 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도 그렇다. 이성 절대주의나 신앙 절대주의 둘 다 문제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이성의 한계 안으로 신앙을 구겨 넣으려고 하는 것도 문제고,

‘하나님 앞에 왔으니 이성은 나가 놀아라’ 하는 것도 문제다.


신앙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극단주의나 절대주의가 아니라 진리의 균형 감각이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를 동시에 붙잡는 지혜와

용기다. 신앙은 이성을 활용할 줄 알고, 이성은 신앙의 인도와 지도를 받을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굴복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말씀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굴복과 겸손이 능사가 아니다. 굴복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묻고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없다. 그냥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생각 없이 믿고 따른다.

 

베뢰아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고상해서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17:11).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해야 한다. 스스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자기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자기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깥에서 들은 대로 믿고 따르는 것은 결코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멘파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그들 중에는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를 발하는 성숙한 성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녔어도 신앙적으로 성인이 되지 못하고 유아적인 수준에서 맴도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는 지식도 많고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이상하게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목사 의존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또 단순한 성경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바가 뭔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도 많다.

왜 이렇게 됐을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봉사와 헌신만 가르치고 강조했지, 신앙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눈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세계를 열어서 보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매순간 선택의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과 목회적 필요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을 강조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치하기 그지없는 유아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순진하고 어린 아이 같은 아멘파 그리스도인들은 양과 같아서 목회적인 필요에 의해 걸러진 말씀을 양식이라고 의심 없이 먹고 따르다보니, 결과적으로는 눈곱만한 구원의 세계에 붙잡혀 하나님나라가 아닌 교회 왕국을 세우는 일에 소중한 헌신을 쏟아 부은 격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 안에 고상하고 성숙한 성도들보다는 무지하고 단순하며 편견에 붙들린 아멘파 성도들이 많아지게 된 것은,

목회자들이 진정한 복음의 세계로 안내하지는 않고 신앙의 열심을 강화하는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진정한 복음에 못 미치는 쪽 복음-왜곡된 복음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의 한국교회다.

한국교회가 덩치는 커졌지만 세상에게 욕을 먹고 흉포한 모습으로 구겨져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는 오늘의 교회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 냉소적인 비판파

 

우리가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냉소적인 비판파다. 이들은 아직 많지 않지만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냉소적인 비판파는 아멘파-순종파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교회에 염증을 느낀 자들이다.


지식이 없는 신앙의 자기중심적인 고리타분함에 질린 자들이요, 쉽게 흥분하는 가벼움과 천박한 자본주의에 종노릇하는 교회의 현실에 딴죽을 거는 자들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들도 많다.


한국교회의 지나친 권위주의, 목회자에 대한 일방적인 순종 강요, 지나친 세속화, 비윤리적인 교회의 관행, 성장 제일주의, 편협하고 전투적인 승리지상주의 등등 많은 문제에 대해서 개혁의 목소리를 외치면서 교회 변화를 위해 몸을 던지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자들도 있고, 교회에 절망한 나머지 교회에서 은혜 받는 것조차

포기한 자들도 있다. 심한 경우 아예 교회를 떠난 자들도 있다.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왜 나오는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너희가 하는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니 비판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정작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마7:1-6).


목회자들도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를 많이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점점 냉소적인 비판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왜 그럴까?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과는 동떨어진 가치관과 교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기 때문이다. 자기들 편리한대로, 목회에 유익한대로 진리의 말씀을 농단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가 먼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야 성도들도 기쁘게 순종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보니 성도들이 점차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순종이 아름다운 미덕이 되기는커녕 더 이상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판단과 분별

우선 판단과 분별이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분별은 정직하고 진실하게 실체를 보는 눈이다.

편견이나 장막을 걷어내고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 실체와 그림자, 본질과 껍질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분별이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거짓과 유사품이 가득한 세상, 오염 물질로 더럽혀진 세상을 살아가려면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분별이 없이 어떻게 선을 추구하며, 분별이 없이 어떻게 진리의 좁은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옳고 그름을 파악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아야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다.


바울이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한 것도 분별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단-비판은 분별을 넘어서서 상대방에게 비난의 활을 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재판관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왕좌에 앉아서 상대방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판단과 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고, 자기 판단이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야고보도 말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이처럼 성경은 ‘분별’은 강조하면서도 ‘판단’은 금하고 있다.  



비판의 속성

비판에는 몇 가지 속성이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마7:1-6).

비판하는 자들을 잘 살펴보라. 그들은 자기는 보지 않고 남들의 잘못만 본다. 다른 사람 비판하고, 세상 비판하느라 정작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돌아보지 못한다. 이처럼 비판하는 자들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기 때문에 비판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이기보다는 상대방과 공동체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모든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약4:11,12).

특히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자기들이 의와 진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자기들이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하는 환상과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 이건 질병이다. 그것도 매우 뿌리가 깊은 질병이다. 이 질병을 좀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자기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는 일반적으로 성경 절대주의, 하나님 절대주의, 믿음 절대주의, 기도 절대주의 등등 절대주의가 넘쳐흐른다.

그런데 비판자들 역시 교회의 절대주의와는 정 반대되는 또 하나의 절대주의에 빠져 있다.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는 또 하나의 아집, 또 하나의 ‘자기 절대주의’에 빠져 있다.


이들은 내심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비판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파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바로 이것이 비판하는 자들의 슬픔이요 돌이킬 수 없는 질병이며 한계다.  


셋째, 비판에도 관성이 있다.

알다시피 모든 사물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 하고, 정지해 있는 것은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한다.

사물뿐 아니다. 마음에도 관성이 법칙이 작용한다.


한 번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면 모든 걸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는 시각의 고정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보자. 한 번 미운 털이 배긴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운털을 벗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미운 놈이 하는 짓은 밉게만 보인다. 왜 그럴까? 이미 마음의 눈에 밉게 보이는 관성이 붙어서 그런 것이다.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대해 한 번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비판거리를 찾기 시작하고, 비판거리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즉각 모든 걸 부정하며 싸우려 드는 것은 바로 관성 때문이다.


넷째, 유아독존의 성향이 강하다.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나 제도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전통, 제도, 경험, 어른 등등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도 이 사람을 건드릴 수 없다. 자기가 최고다. 자기 위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며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동이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지체라는 말이다. 지체란 모든 신경과 핏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요, 피차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손은 발의 도움이 필요하고 발은 손의 도움이 필요하듯 너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지체다. 그런데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유아독존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지체성을 허물어뜨린다.

바로 이 점이 냉소적인 비판자들의 가장 큰 해악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의 한계

비판의 속성이 이러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치유하거나 극복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본래 분별과 판단의 거리는 매우 짧아서 분별이 비판이 되는 것은 순간이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라. 분별한다고 분별했는데 분별에서 그치지 못하고 판단하고 비판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더욱이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 죄악을 뒤집어 쓴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 삶은 애당초 비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모순 구조를 갖고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모순된 존재다. 그러니 비판하고 비판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치 않는 진실은 비판이 본인이나 공동체에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비판하는 것으로는 공동체의 문제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살림의 공동체다. 복음이 죄를 보게 하는 것도 윽박지르기 위함이 아니라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기 위함이요, 죽음과 죽임에서 해방되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비판으로는 삶을 일으킬 수 없다.


절망이 스스로를 죽이는 병이듯, 비판은 상대를 죽이는 병이다.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죽임의 문화다. 비판하는 것으로는 결코 삶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런데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작은 흠만 보여도 윤리적으로 고소하고 비난한다.


교회 왕국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비난하다가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까지도 팽개쳐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이들은 차가운 이성으로 판단은 잘 하나 헌신적으로 공동체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하여, 그들은 살림을 지향하는 교회에 죽임의 똥물을 끼얹을 뿐 아니라, 교회공동체 자체를 약화시키며 무너뜨리기까지 한다.  



긍정의 힘?

그러면 도무지 비판하지 말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라는 말인가? 냉소적인 비판이 공동체를 세우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되니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보라는 것인가?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다.


요즘 긍정적인 사고, 긍정의 힘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긍정적인 사고가 성경 말씀에 부합하는 것인 양, 긍정적인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인 양 호도되고 있다. 물론 긍정의 힘을 인정한다. 긍정적인 태도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진리를 따라 사고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긍정적인 사고는 단지 긍정적인 사고일 뿐이다. 부정적인 사고보다 나을지는 몰라도 진실을 보고 진리를 깨닫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현실에 굳건히 서게 할 수는 있겠으나 현실을 넘어서게 하지는 못한다. 기존의 신념을 강화하는 데는 효과가 있겠으나 신념을 넘어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긍정적인 사고의 한계다.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은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정직하게 보고, 진리를 따라 사고하는 것이다.

본래 진리란 긍정적이니 부정적이니 하는 차원을 넘어 서는 것이니까.  



비판과 진리

그리스도인은 진리이신 예수, 예수의 진리를 은혜로 깨닫고 그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이다. 예수의 진리를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런데 진리이신 예수의 눈을 뜨면 그와 동떨어진 현실 세계에 대하여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현실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믿음의 길이고 진리의 운명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비판은 진리의 부스러기인지도 모른다.

 

비판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구체화하겠다고 몸부림치는 자에게서 떨어지는 먼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비판은 진리를 말하는 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오물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진리의 빛이 인간을 통과하면서 드리워지는 그림자라나 할까. 아니, 좀 더 긍정적으로 말하면 비판은 진리의 아들일 수도 있다. 때문에 비판은 철옹성 같은 교회의 권위와 위선을 질타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외침으로써 교회의 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다.

 하나님께서도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비판하셨듯이 교회에도 선지자는 필요하다. 선지자가 없는 공동체는 희망이 없다.

비판의 소리가 사라진 공동체는 죽은 사회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비판이라는 게 창조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인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 사람이 본래 온전치 못한 존재이기에 비판이 가진 부정적 속성으로부터 자유하기가 어렵다. 하여, 사람이 비판의 똥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의 날을 세우고 자신을 살피며 조심해야 한다. 자기 입장을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이해가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아야 한다. 진리의 말씀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눈을 맑게 해야 한다.

그래야 비판의 똥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냉소적인 비판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이상이 내가 한국교회 안에서 배회하고 있는 냉소적인 비판자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소회다.

교회의 현실을 보면 믿음과 헌신으로 무장된 비판자, 비판의 관성에 휘둘리지 않는 비판자, 겸허함과 비전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비판자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자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하여, 교회 안에 쌓인 먼지를 청소하고, 일그러진 것을 바로 잡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고, 진정한 회복과 부흥을 일구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3. 개인적인 안주파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개인적 안주파

한국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개인적 신앙에 안주하는 안주파다.

이들은 교회야 어떻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당연히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이들 중에는 신앙인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다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들에게서 말씀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라든지 의에 대한 굶주림 같은 걸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피차 사랑하고 돌보는 지체적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이들은 그저 신앙생활이 편안하면 된다. 신앙적인 쇼핑을 적당히 즐길 수 있고, 살아가는데 위로와 힘을 얻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이런 자들도 냉소적인 비판파처럼 그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물론 주변부에 머무는 사람들이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건 자연스런 이치다. 모든 사람이 중심부에 설 수는 없는 법,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부에 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달라야 한다. 교회 안에 주변인이 많아지는 것은 교회의 교회됨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하찮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건 교회의 본질이 걸린 문제다. 그런데 교회 안에 점차 주변인이 많아지고 있다.

개인의 평안에 안주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삿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 주변인들이 많아지는 것일까? 그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 예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 했던 사람이 교회와 목회자 때문에 시험이 들어 더 이상 교회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인격적인 교제가 소원해져 자연스럽게 주변부로 밀려나는 자들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인이 주변인 생산의 주된 요인이면서 가장 심각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먹고 사는데 쫓겨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는 자들이 경제적인 열악함 때문에 교회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생존경쟁의 어려움과 경제적 상황 때문에 교회의 주변으로 밀려나간 자들이다.


넷째, 신앙이 나태해지거나 회의에 빠져서, 혹은 본인의 신앙은 확실하지 않은데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이끌려 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앙의 부족으로 인해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대80인 교회 풍경

암튼, 교회 안에 냉소적인 비판파와 안주파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심각한 징후임에 틀림없다. 그 수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어림잡아 본다면 아마 5% 정도는 비판자 그룹에 속하고, 60% 정도는 개인적인 신앙에 안주하는 주변인들일 것이다.


큰 교회는 주변인이 80% 정도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사실은 예수님의 경우도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과 권능을 보고 놀라며 따랐지만 제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때의 호기심과 자기 필요를 얻기 위해 모여든 군중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와는 또 다르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20대80 법칙을 들여다보면 한국교회의 문제가 보인다.

이 법칙은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가 말한 것인데, 전체 결과의 80%는 전체 원인 중 20%에서 비롯되더라는 관찰 결과를 토대로 형성된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20%의 소비자가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든지, 국민의 20%가 전체 부(富)의 80%를 차지하는 경향, 직장에서 20%의 근로자가 80%의 일을 하는 경향 등을 함의하는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불변의 사회 법칙은 아니다. 과거의 촌락 공동체 시절에는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생산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 사회였다. 각각의 역할은 다르지만 전체가 참여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도시화되고, 지식 정보사회로 발전하면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생산력의 차이가 극대화되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개인의 경쟁력과 능력의 차이가 생산력의 차이로 연결되면서 능력 있는 20%가 전체 생산량의 80%를 생산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능력 있는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게 되는 부의 집중현상이 나타났다.


요즘에는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면서 20대80이라는 사회 현상은 세계 전체로 확산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20대80이라는 사회현상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이기적인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의 자화상을 읽어낼 수 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고 하는 끝없는 탐욕이 결국 20대80이라는 사회 불균형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걸 찾아낼 수 있다. 때문에 20대80 법칙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얼마나 비정한지를 말해주는 인간 고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참담한 사실은 20대80이라는 사회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를 보라. 전체 교인의 20%가 교회 일의 80%를 감당하고 있다. 20%의 대형교회가 전체 성도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20%의 교회가 전체 자산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정부와 국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고 중소기업을 살리자는 목소리라도 들리는데, 교회에서는 그런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교회가 하는 말은 이렇다. 대형교회는 하나님이 축복하신 결과라고. 작은 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고. 대형교회를 문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라 인간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입도 벙끗 못하게 한다.


교회는 참 이상하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하셨다고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만 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교회의 편차를 줄일 수 있는지, 작은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갈 수 있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오직 더 크지 못해서 안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까지 20대80이라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들어왔을까? 왜 현대교회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구조를 그대로 빼닮았을까? 간단하다. 교회가 탐욕과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탐욕과 이기심이 교회 안에서도 가감 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주변인이 많아지고, 또 많아질 수밖에 없으며, 주변인이 많아지면 교회의 본질이 훼손된다는 것은 너무 자명한 사실. 그런데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교회는 여전히 교회 성장에 몰두하고 있다.

교회의 교회됨이 무너지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큰 교회를 이루어야겠다는 욕망을 어찌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다.

 

왜? 큰 것 속에 담겨있는 온갖 영광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에. 바로 이 달콤함, 큰 것 속에 담겨있는 온갖 영광의 달콤함 때문에 교회 안에 아멘파, 냉소적인 비판파, 개인적인 안주파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었다. 정리하자.

교회 안에 개인적인 축복과 가정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안주파, 교회 중심에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주변파-관망파가 많아지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무너뜨리고,

교회의 체질을 허약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냉소적인 비판파는 교회를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못하고 차가운 냉기가 돌게 할 위험성이 있다.

 

어린 양 같은 아멘파-순종파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데 참여하기보다는 교회 왕국을 건설하는 용병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 이들로서는 한국교회를 회복시키고 건강하게 세워나가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교회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