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와 약자의 심리학



지은이와 책에 대하여

톨 투니어 :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병 의사이며 제네바 대학의 교수인 폴 투니어 박사는 병든 자와 외로움에 거하는 자와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새 희망을 주신 분입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서, 사람들은 믿음으로 모든 질병을 고치며 마음과 정신을 새로이 함으로써 어떠한 육체적 질병도 고칠 수 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 생활의 파괴와 개인의 내적인 숨겨진 비밀의 고민과 갈등으로 울며 지내는 수백만의 우리 세계민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나아갈 출구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인 스위스 폴 투니어 박사의 유명한 책[ The Strong and the Weak]를 강자와 약자의 심리학이라고 우리말로 펴내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자는 강자와 약자의 심리로 우리의 개인, 가정, 사회 및 국가 세계가 존재해 감을 보았고 또 개선되어지고 쇠퇴해가는 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것들을 직접 경험하고 상담한 케이스 스터디를 기록했으며, 어떻게 강자와 약자의 심리에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계발하여 자신의 부족한 면을 채워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해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전문적인 심리학자이기 때문에 이 책은 어떤 피상적인 면을 다루기보다는 더욱 구체적인 면을 다루어서 이 면에 종사하는 상담자들, 의사들, 교사들 및 목사님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 1 부 인간에 관해서


1. 외양과 실제 


 우리 모두는 사람을 강자와 약자, 둘로 구분하는 습관이 있는데, 패배당하고 짓밟힐 운명의 소유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 경쟁사회에서 빈번히 패배를 해서 언제나 또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바로 그와같은 생각이 그들의 힘을 빼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은 그 점을 기대하고 자신들에 대한 힘과 확신을 얻는다.  설사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직감적으로 그들의 약점을 알아내서 겸손하게 혹은 호존적으로 대하지만 겸손하든지 호전적이든지 그 모두는 그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는 셈이다.  반면에 상대편이 힘이 있다고 느낄 때는 상대편의 힘을 확실케 해주는 겁먹은 혹은 복종하는 태도를 보인다.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람에게는 강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약하다.  사무실에서 못된 상관에게 계속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그의 부인이나 아이들을 못살게 굴어 복수를 하고, 그 상사는 집에서 부인에게 당하는 것을 사무실에 나와서 갚는다.  부하 직원은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꼼짝없이 당하고, 자기는 물질적 이익 때문에 자기 명분의 정당성을 희생시키는 비겁자라는 생각에 모욕감을 더 느끼게 되고, 또한 자기 멸시의 요소를 늘리는 셈이 된다.  그래서 결국 집에서는 더욱 화를 내게 된다. 그러나 주위 사람을 못살게 굴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흔히 짓눌려버린 이 후회감은 그의 성질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우리는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이 서로 얽혀 있어 방금 언급한 두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약자는 패배를 거듭함으로써 더욱 약해지고, 강자는 승리를 거듭함으로써 계속 강해지는 것이다.


"신경성 질환자"들은 남의 성공과 자기들의 실패는 과장하고, 자기들의 성공은 과소평가한다. 약자의 절망 강자의 불만 그리고 그 모두의 불행에는 큰 환상이 개재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모두는 다같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약하다. 우리는 모두 짓밟히는 것을 무서워하고 내부의 나약함을 남이 알까 봐 두려워한다.  누구든지 남이 모르는 결점을 갖고 있다. 인간은 숨기고 싶은 어떤 행위 때문에 나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 신과 자신과 인생, 그리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들의 평판이 다소나마 실상과 다르다고 느끼고 있고, 그 사실이 밝혀질까봐 겁을 낸다. 인간도 마음의 번민에 강한 반응을 보이거나 반대로 약한 반응을 나타내는 형이 있다.  강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우리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또 상대편을 두렵게 만들어서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위해 덕을 과시하는 것이다.  또 약한 반응은 어떠한가?  좌절하게 되어 숨기고자 하는 약점을 노출하게 되면, 그 약점을 의식함으로써 강자의 약점을 감추게 하는 은폐반응이 작용을 못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약자가 항상 강자보다 정직해 보인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실 강자는 결국 자신을 속이게 되는데, 왜냐하면 남에게 약하게 보이지 않으려 함으로써 결국에는 그 약점을 자기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약점을 제거하지 않고 억누름으로써 자신의 약점에 대한 무의식적인 의식을 늘 갖게 되고, 그것은 더 큰 은폐반응을 조장하게 된다.


반대로 약자는 자신들의 약점을 너무 많이 의식하기 때문에 병자처럼 보이거나 실패한 사람 혹은 인생에 끌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강자는 아프지는 않지만 그들의 은폐반응으로 사회를 병들게 한다.  약자는 강자의 힘이 위선임을 모르고 그대로 믿음으로써 좌절하고, 강자는 반대로 승리로 자신감을 얻기 위해 약자를 짓누른다. 약자가 자신의 번민에 시달리듯 강자도 또한 자신의 반응에 고심을 하는 것이다.


강한 반응은 부당하고 격렬한 행동으로 나타나 깊은 죄의식을 준다. 이러한 죄의식은 격렬한 행동의 희생자를 더욱 괴롭힘으로써 억제되는데,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먼저 우리는 욕설을 퍼붓거나 노골적인 공격을 하고 적어도 내심으로 비난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는 죄의식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죄의식에 우리는 보다 큰 호전성을 가짐으로써 감추려 하는 것이다.  신경쇠약, 열등감, 자신감의 부족, 과민증, 병적인 죄의식, 정서불안, 강박관념, 공포, 육체적 기능장애, 우유부단, 우울증 등은 약한 반응에서 유래되는 것인데, 이 모든 건전치 못한 징후들은 약자의 감정 속에 용해되어 더욱 더 약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불안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아주 약한 모세관을 갖고 있어 조금만 맞아도 상처를 입는다.  육체적으로 쇠약함으로써 정신적으로도 약해지고 또한 정신적 사회적인 좌절은 그들의 약한 반응의 표출과 같이 새로운 육체적 동요를 수반하게 되어 하나의 병을 치료하자마자 또 다른 병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병의 연속이라는 복잡한 그물 속에 갇히게 된다. 일시적으로 명랑했다 우울해지는 싸이클로시미어병을 생각해 보라.


인간에게는 두개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인간이 마치 홀로인 것처럼 살려는 욕구와 남을 정복해 그의 권력에 얌전한 도구를 만드는데 거추장스럽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말살하려는 욕구와 또 모든 부당한 행위를 후회하고 탓하려는 강력한 도덕적 양심과 자연이나 사회에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각자의 영역을 조화있게 정해 놓았다는 직감으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 등이 서로 우리의 마음속에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양심이나 감정을 억제는 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들을 침묵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양심이나 감정은 그것을 감추기 위한 일련의 강한 반응의 무의식적 원인이 되어 억압감만 더욱 심화시킨다.
심리적 방법에 의한 치유는 약한 쪽에서 강한 쪽으로 가는 것이고, 종교적인 구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재발견하여 삶에 대한 본능과 양심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대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올바른 기능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를 건전하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길이다. 이러한 경험을 함으로써 약자와 강자는 모두 그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약자의 용기를 되찾아 주고 강자의 자만을 꺾어 준다.  약자는 인생과 자신과 본능과 화해를 하고, 강자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힘이라는 가면 아래 숨겨 왔던 남 모르는 약점을 인정함으로써 생기는 새로운 다른 힘을 얻게 된다. 약자로 하여금 그들이 관용이라 생각했던 비겁을 구분하게 해주고 강자로 하여금 그들이 권리라고 주장했던 비행을 인정하게 해준다.  "서로가 변하기를 원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 자신들이 변하는 문제입니다"



2. 패 배 자 


남들이 비난이나 비평을 해도 좌절하고, 이해와 친절로 대해 주어도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고, 비난을 받거나 애정 어린 대우를 받아도 꿋꿋하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민한 사람은 대체로 여러가지 지각력이 날카로워 소음, 추위, 통증, 동정, 아름다움, 자연, 즐거움이나 슬픔, 지적인 문제나 도덕적 혹은 영적 문제에 민감하다. 지위가 높으면 도덕적으로 그만큼의 의무가 수반된다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며, 바로 그 개념에 도달하게 되며, 바로 그 개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좌절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딱지를 붙이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고,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나이에는 더욱 그렇다.  한 아이를 거짓말쟁이 취급을 하면 그 아이는 진짜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며 이기심이나 자신감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부모가 아이를 귀찮은 말썽꾸러기 취급을 하면 아이는 정신적 외로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다 선한데 자기만 악하다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렇게 혼자 죄의식을 느낌으로써 아이는 더 심한 야단을 맞을 각오를 하게 된다.  어느 사람은 자기 만족의 성격이 형성되고, 어느 사람은 약한 성격이 형성되었는데도 똑같은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생활이나 육체적 조건, 원인과 결과의 심리적 구속 등의 차이 때문이다.  복음이란 면에서 보면 전자는 후자보다 더 나쁘다.


불행하게도 어릴 때부터 자신의 외모에 자신을 잃은 여성들이 많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의심을 하면서 결혼을 했다면 그러한 의심은 결혼생활에도 연장이 되어 남편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사랑을 남편에게 기꺼이 주지도 못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정신 신체 상관의 교류에 의해 육체적 반사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여성들에게서 우리는 종종 난소 호르몬의 부족이라든가 월경불순 혹은 지나치게 털이 많은 현상을 볼 수 있다. 의심이 많으므로 여성의 여성다움이나 아름다움을 조정하는 내분비선의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위선되지 말고 진실하라" 했다.  또한 아이들이 좋은 자질이나 나쁜 자질을 갖추었어도, 있는 그대로를 보고 아이들이 곧 알게 될 우리 자신의 결점이나 장점뿐 아니라 아이들의 결점이나 장점에 대해서 솔직하게 얘기를 해라. 그리고 우리자신의 노력만으로 혹은 위선을 함으로써 떨쳐버릴 수 없는 자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고백을 해라.  신에게 용서를 빌고 자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신의 은총을 빌라고 쓰여 있다.


자신에게 솔직한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을 비난 하지만 자신들의 결점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도 되지만, 신의 은총을 경험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교육의 결실을 맺으려면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교육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어두운 면을 보게 해야 하는 반면, 또한 자신의 재능도 인정하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교육은 아이를 비판하는 대신 이해하려 해야 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 인생을 유아적 태도로 살아가는 어른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아기를 무한정 연장시키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유아기 때에 본능이 요구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3. 두 려 움 


두려움은 암시의 촉매작용을 하고, 암시는 가장 지적이고 용기있는 사람의 마음속에조차 끈질기고도 불합리한 두려움을 심어 준다.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수상가를 찾고 그 손금쟁이의 어리석은 말로 인해 그릇된 두려움만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감하고 감수성이 강하고 겁이 많은 아이들을 위협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는 점이다.


아이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래의 후회의 유령을 아이의 마음에 그려 주는 어머니들도 있다.  "두고 보면 알 거야.  내가 죽으면 네가 나를 괴롭힌 것을 너 자신도 용서하지 못할 거야"라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녀 앞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억제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병뿐 아니라 대중이 자주 거론하는 폐병, 정신병, 암과 같은 특정한 병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자기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같은 병으로 죽을 거라는 두려움, 폐경에 대한 두려움, 세균에 대한 두려움, 터무니없는 걱정인 지도 모르는데 의사의 진단으로 자기가 염려하는 병이 확인될까 두려워서 의사에게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 혹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 될 때 정상아가 아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자다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산 채로 매장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불면증의 원인이 되는 것, 불면의 심한 원인인 악몽에 대한 두려움, 마취 상태에서 남 모르는 비밀이 폭로되지 않을까 겁이 나 수술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 병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이 죽을 맞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다. 아버지, 남편 혹은 아이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일은 그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연달아 생기게 된다.


고독에 대한 두려움, 가정이 없는 데 대한 두려움, 자기가 익숙한 환경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책임에 대한 두려움, 미지의 사물에 대한 두려움, 돈이 없다는 두려움, 누구를 상심하게 했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으로 진실성이 결여되게 된다.  혹은 오해를 받는다는 두려움,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솔직하지 못하고 둘 사이의 오해의 도랑을 파게 된다. 혼자 남아 있게 된 데 대한 두려움. 이러한 경우는 진실된 사랑이 결여된 약혼을 결국 깨뜨리지 못하게 된다.


친구에게서 실망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이러한 두려움이 수반되면 우정에 금이 간다.  즐거움은 언젠가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그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 현실에 실망할까 두려워 환상을 추구하게 되는 일.  충고에 대한 두려움, 남의 영향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 충고를 따를 경우 얻게 되는 착하다는 칭찬 혹은 따르지 않을 경우 듣게 되는 나쁘다는 책망에 대한 두려움, 남을 실망시키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꾸지람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 수없이 많은 두려움이 있다.


모든 두려움은 성 프린시스 드살이 말한 대로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식으로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낳게 한다. 그 두려움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음이 두려움에 대한 저항력을 일으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이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우리는 성공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듯이 서로 배타적인 두려움에 시달린다.


나의 환자 한 사람은 나에게 "죽는 것도 겁이 나고 사는 것도 두려워요"라고 늘 말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병을 앓는 것도 두려워하고 또한 회복이 되어서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도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그것을 두려워도록 만든다.  무대공포증 때문에 대중 앞에서 말을 못하고,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같이 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더욱 그들을 닮아간다든가 혹은 적어도 유전된 것 같은 행동을 한다.


결심을 이행하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결심을 하지 못해 결국 실패를 하게 되고, 수음에 대한 유혹에 빠질까 두려워함으로써 그 유혹에 빠진다.  또 화를 내면 안되는 데 어떻게 하나 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욱 불안해져 주위 사람들이 우리가 화를 내기 직전이라고 확인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  맡은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힘이 빠져 좌절한다.


자기 약혼자를 실망시킬까 두려워 그녀는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해 결국 약혼자를 실망시킨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한 여성의 인생관이 비뚤어져 남편이 싫증이 나서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쁘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외모에 자신을 잃고 우스꽝스럽게 화장을 한다던가, 부인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 속이게 되어 결국 부인의 불신을 사게 되며, 늙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영원히 겉늙게 된다.


또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없는 실수를 범해 결국 끝없이 고통을 겪게 되고 돈이 없다는 두려움에 투기를 해서 몇 푼 가진 것조차 날려 버리기도 한다.  실직하면 어쩌나 해서 다른 직업을 택하다 결국 영원히 직업을 잃어버리는 젊은이도 있고, 좋은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해 결혼을 못한다는 두려움으로 그 직업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정력을 잃는다. 


언젠가 한 여성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하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 것이다.


결혼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와 반대로 결혼하지 않고는 순결을 지킬 수 없다는 두려움, 정결치 못하다는 두려움 때문에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지며,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이 싹틀 수 없는 실험적 관계를 갖게 된다. 또한 불륜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을가 두려워함으로써 지나치게 운동에, 혹은 작업에 몰두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런 직업을 가지면 두려움이 사라지리라는 생각에 마음에도 없는 성직자가 되기도 한다.  자기 암시는 두려움을 생기게 하고, 그 두려움은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생긴 도덕적 고독 속에서 더욱 커진다.


참된 용기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행동하게하는 위험을 안고 살고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데 있고, 그러한 위험과 영원히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있다. 우리의 본능을 억제함으로써 피하는 대신 그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크리스찬의 태도는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기가 멸시하는 본능이 생길까 조심하는 문제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결혼생활에 부여한 한계를 넘는 본능에 굴하는 것도 아니다.  크리스찬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을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본능을 남용함으로써 더럽히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욕망이 없는 삶은 없고, 두려움이 없는 욕망은 없다. 그러므로 그 욕망을 충족 시키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일을 갈구할 수는 없다. 즉 우리는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을 달성하는데 안과 밖에서 방해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없이  살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을 달성하는데 안과 밖에서 방해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없이 살 수는 없다.  밖에서 받는 방해한 자연의 힘과 다른 사람들의 뜻을 말하고, 안에서 받는 장애는 우리 자신의 도덕적 양심이다.  마음의 비난에서 도피하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인간은 양심의 소리를 억누를 수는 있어도 그 소리에서 해방될 수는 없다.


두려워하면 할수록 그만큼 실패하기도 쉽다.  경쟁자는 상대방을 서로 두려워하고, 모든 일이 잘 안될 때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자신감을 드러낸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남을 겁주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지만 또한 안심하고 싶어한다.  그들이 얻는 학사 학위 그들이 본을 삼는 성공한 사람들, 그들이 훌륭한 행동을 함으로써 얻으려 하는 존경, 그들이 보여 주는 용기, 그들의 관점을 방어하는 열정, 그들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인성, 그들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존경 그리고 그들의 재치있는 말들, 이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무기이다.


이 모든 것이 죄를 짓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과의 싸움이다. 감정에 휩싸임으로써 죄를 범하지 않을까 두려워 감정을 억제하는 사람들은 사랑에 너무 목말라 가장 순결한 애정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나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결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승리하지 못한 그리고 승리를 했다 해도 잠시 동안 갖게 되는 불완전한 것에 대한 약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의 자신감은 없어지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약한 반응이 그만큼 많아지며, 또한 우리의 도덕적인 힘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털어놓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가장 용감한 사람들도 자신의 놀랄 정도의 비겁한 행동의 기억에 시달리며 형식을 많이 지키는 사람들도 그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상기하고는 얼굴을 붉힌다.


갈등이 계속되는 동안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저항의 본능적인 힘이 생기는데, 그 갈등의 대상이 없어지자마자 저항력도 없어지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아 인간적인 두려움은 언제나 죄의식과 연관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마슨 오우슬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모든 것에 굴복하는 사람도 있고, 모든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만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위대한『꼰대』의 경구는 잘 알려져 있는데 그 경구는 " 멀리 있는 적을 무서워해야 한다. 그래야만 적이 가까이 있을 때는 겁이 나지 않는 법입니다."라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무대공포증과 싸우지 않는 배우가 없고 대중 앞에서 떨지 않는 연사도 없다.  성 어거스틴이 지적했듯이 욕구, 두려움, 슬픔 등은 선과 순결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도 모른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포하지 않고는 또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고는 사랑이 될 수 없다.  모든 시적 감정은 사랑과 미의 대가인 이 두려움의 공명에서 생긴다.  두려움은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이며, 그것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은총은 자기의 약점을 인식하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것이지,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365번이나 반복된다.  그것은 또한 지혜를 얻기 시작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말이기도 하다.


“크리스찬도 두려움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의 두려움을 하나님에게 전가시키는 것 입니다. 신앙이 두려움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진토록 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억누를 수는 있지만 그 두려움을 없애지는 못한다.  두려움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 생활에 제약을 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과 타협할 수는 있다. 그런 그것이 승리는 아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직시하고 하나님에게 털어놓는다면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일찌기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쟁에서와 같이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상대편의 힘을 과소 평가하는 자가 가장 강한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상황을 받아들여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매일 매일 우리는 두려움이 갖고 있는 죄스러운 것은 버리고 우리의 비참함을 인식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 주신 두려움에 대한 자극을 간직해야만 한다.



제 2 부  반  응


4. 약한 반응 


 약한 반응들은 억제의 반응이고, 강한 반응은 자극의 반응들이다.  약한 반응에는 우울, 낙담, 슬픔, 자기연민, 자기비난, 삶의 권태, 지나친 자기비판, 공포, 도피주의,과묵, 침묵, 지둔 등이 있다.
반면 강한 반응에는 환희, 행복감, 쾌활, 자기만족, 생색내는 것, 낙관주의, 타인에 대한 과장된 비판, 경솔함, 호전성, 쾌활, 다변, 그리고 흥분하기 쉬운 것 등이 있다.  다른 형태의 약반응은 무기력 상태로 심리학자들이나 병리학자들의 용어로는 "억제"라 한다.  번역을 할 수 없는 독일어 "헤뭉" (Hemmung)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꼼짝없이 묶여 있는 듯한 이 기분을 훌륭하게 표현 해준다.

  ☞ 피로의 원인을 네 가지로 구별해 보면


첫째, 과로로 인한 피로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성질에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도 남들이 게으르다고 생각할까봐 혹은 유약하다는 비난을 들을까 겁이나  과로를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피곤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데 특별한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다른 원인은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중단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탐욕이나 재정적인 걱정도 우리를 과로케 하는 빈번한 원인이 된다.  서틸란지 신부가 "진정한 휴식이 없이 진정한 자업은 있을 수 없다.


  ☞ 피로의 두 번째 원인은 지나친 정열이다.
육체적인 긴장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정신적 긴장 때문에 피곤하다.  자신의 일에 불만을 갖고 있고 계속적인 마음의 번민을 느끼며 일을 하는 사람은 환경을 탓하거나 자신의 힘에 부치다거나, 능력이나 관심을 무시하고 자기에게 일을 맡겼다고 주위사람들을 탓하며, 과거에 겪은 실망을 되새기고는 자기 주인이 자기를 이용하고 착취 한다고 생각하고 과로로 건강이 악화될까 두려워 휴일을 고대한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피로를 느끼기 때문에 곧 지쳐버린다.


이러한 생각을 함으로써 자기의 일을 의식하게 되고 실제보다 더욱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둠으로써 피로감을 더욱 느끼게 되며 따라서 마음속의 반항도 커진다.  이런 경우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피로는 벗어버린 외투처럼 사라져 버린다.  몸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피곤해지기도 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네번째 원인이다.  무엇엔가 몰두하고 유익한 활동을 해야만 마땅한 정력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은 몸 안에 끓고 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무익한 피로에 빠지게 된다.  계속적인 내부의 갈등이 가장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심리적 컴플렉스, 성장 과정에서의 실수, 갈등, 혹은 두려움 따위를 이러한 사람들의 신경상태 속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의 불감증, 남성의 발기불능도 상대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마음속에 둠으로써 생기는 성적 파업이다.


몸이 지나치게 여위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인생에 대한 일종의 파업이다.  더 큰 상처를 입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대한 본능적 방어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갑옷의 갈라진 틈을 메꾼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각박한 현실을 잊기 위해 몽상이나 감상 속에 빠진다.  그것은 놀랍거나 유쾌하지 못한 일을 무시하는 자기기만의 기술이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에게서 일어나는 감정을 약화시키기 위해 생활에 제동을 건다.  그저 피상적인 대화를 끝낼 때 그들은 너무 감정에 북받칠까 두려워 나를 보러 온 일에 대해 상의할 용기가 안난다고 말을 하고, 잔뜩 감정이 격해져 낙담한 채 돌아간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활을 가로막을 때 우리는 잔뜩 누적된 실망 속에서 우리 자신을 격리시킨다.  그들은 마음의 긴장을 드러내는 징후를 감추기위해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있을 뿐이지 쉭쉭거리는 남비와 같다.  결국 뚜껑이 막힌 남비는 폭발하고 만다.


우리가 감정을 막으면 그 감정은 더욱 난폭해지고 감정을 드러낼까 겁이 나 숨기기 위한 한 노력이 배가되어 그 악순환은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술을 좁은 술잔에 따르면 넓은 잔에 부을 때보다 더 높이 올라온다.  그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인 사람들은 자기들 생활의 밑부분을 제한함으로써 감정도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자기들의 애정을 한 곳에만 집중시킴으로써 친구를 신과 같이 완전하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결국 그들이 각성하게 될 시기가 있어 그 때는, 친구는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져 전과 같이 격렬한 비방의 대상이 된다.  억제된 애정과 원한간의 마음속 갈등 때문에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기만당할까 두려워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믿어야 할 때, 의심을 하고 의심을 해야 할 때 믿는다.


남편이 벌컥 화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인은 은폐와 당혹으로 남편의 화만 더욱 자극한다.  고부간의 싸움에 겁을 먹는 약한 남편은 그 둘을 즐겁게 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싸움만 일어나고 서로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 자신이 싸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약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은 애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애정을 표시해 주는 사람에게는 더욱 의존하며 이러한 의타심은 자기가 약하다는 느낌을 더욱 많이 갖게 한다.


약자들이 시달리는 또 다른 악순환은 소위 말하는 어색함이다.  오랫동안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다가 그들은 갑자기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고 그들은 엉뚱하게 자기들을 내세운다.


이것도 어려워서 못하겠고 저것도 못하겠고 모두 못하겠다고 말함으로 사람들은 심각한 문제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 그들의 진정한 정신적 고통도 쓸데없는 불평이라고 일축해 버림으로 결국 그들은 홀로 남게 된다.  그들은 너무 많은 실언을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말해야 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해 자기들의 본능과 감정에 따르는 대신, 그들은 외교적인 노력을 하려 하므로 실수에 실수를 거듭한다.



5. 강한 반응 


 아무도 남과 충돌을 하지 않고 무한정 자기의 성격을 발전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의 강한 반응은 강자와 충돌을 하고 약자를 깨부수는 수많은 갈등을 겪는다. 진정으로 강자들은 평화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를 원하고 그들이 저항을 하지 않는 한 잘 지낸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실수와의 싸움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후퇴를 한다면 강자들은 그들에게 우정어린 손길을 뻗칠 준비가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학대하면서도 자기는 남부끄럽지 않게 며느리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녀가 며느리를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며느리의 행동이 자기 눈에 잘못되었다고 비칠 때마다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나는 내아들을 알아.  그를 어떻게 다루고 그 애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아.  그것이 너도 마찬가지로 원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그럼으로써 너도 행복해지는 게 아니냐?  그러니 네 가정에서 잘못 배운 그 바보 같은 관습을 그 아이에게 강요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행동한 대로 너도 따라해라 내가 학생이었을 때 나의 지적 활동이 얼마나 많이 무의식적 컴플렉스에 자극을 받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사실을 나 자신이 인정은 하지 않았었지만 나는 상당히 외로웠고 다른 사람이 두려웠다. 자존심을 지탱하기 위해 내가 바랐던 애정과 존경을 얻을 수 있었다.  카드놀이도 했고, 연극도 썼고, 수학을 지독하게 공부했고, 법률도 연구하였다. 또한 긴 연설도 해보았고, 학생회 회장도 했으며, 적십자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교회에서 일도 했으며, 의기양양하게 의학 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활동으로 나의 컴플렉스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컴플렉스를 숨기는데 도움을 주었다.  마음속으로는 타협과 패배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으나 나는 적어도 어느 정도 그것들을 잊을 수가 있었다.  지금도 나는 젊었을 때의 그 정열과 내가 추구해 온 지적, 종교적 진리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 후에 나는 영적 위기를 겪었고 그 위를 통해서 얼마나 자주 내가 나의 실생활에 속아서 그릇되게 나의 주의들은 보호했는가를 알았다.  그와 같은 발견은 나의 확신을 저해하기는 커녕 강하게 했고, 새롭게 하여 이론과 실제를 더욱 부합시키도록 노력하게 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못하게 생각될까봐 또 권위가 없게 보일까봐 두려워한다.


그러한 성공은 우리를 기만으로 끌고 가는 미끄러운 언덕과 같다.  그리고 일단 발을 디디면 더욱 깊게 빠지기 쉬운 영역이다. 그렇지만 최상의 기만이란 현명하게 기만을 함으로써 기만당하는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겸손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우리 자신을 위해 기분 좋게 사회적 성공을 얻는 것이다.


성공이란 모든 강한 반응에 숨겨진 목표라는 것이 사실이다. 성공을 하기 위해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는 영적으로도 우리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어느 관점에서는 운동, 체육에 지나치게 탐닉한다거나 육체적 힘을 개발하려는 생각에 푹 빠진다거나 하는 것은 그 목표가 육체적 힘을 길러 성공하려는 것이다.


강한 반응에는 분노, 주먹으로 책상을 치는 일, 문을 꽝 닫고 나가는 일, 감정의 폭발, 약점을 잡아 상대편을 괴롭히려는 정직하지 못한 주장, 감정적 소동, 히스테리의 발작 등이 있다.  우리들은 각기 가정에서조차 가면을 쓰고 있다. 또한 우리는 수 천 가지의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 자신이 혹은 남이 우리에게 부여한 그럴듯한 외양을 지키는데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역할을 하려 노력하며 가면을 벗고 감추어진 약점을 인정하는 것이 언제나 모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성령의 기적이 없이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더구나 사회생활이라 볼 수 있는 숨바꼭질에서 서로 돕고 있고 우리는 상대편이 우리의 가면을 벗길까봐 두려워 다른 사람들의 가면을 진짜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주 가느다란 나무 뒤에 숨는 장난을 할 때 우리도 함께 그를 못보는 체하고 그가 어디 숨었는지 모르는 체하는 것과 같다.  베르그송은 "악마는 아주 철저히 가려져 있어 이 경우 각 개인은 모두와 똑같다.  아무리 잔인하게 우리가 남을 판단한다 해도 마음 속으로는 우리 자신들보다는 그들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견해 차이가 생길 때 하나님은 우리편에 서 계시다고 주장하려는 유혹이 상당히 크다.  하나님 뜻의 전달자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강한 반응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가장 큰 영적 불안이, 하나님의 뜻을 진실로 구별하는데 겪는 우리의 어려움과 우리의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불확실성에서 생기기 때문에 은폐반응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남들이 신의 예언자로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속박이란 모든 영적 생활의 부정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신념을 말해 줌으로 남들을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우리의 실패와 의혹도 또한 솔직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남들도 우리가 걸어온 길로 신앙이 인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렇게 강요한다면 결국 그들을 해치게 될 것이다.  그런 종류의 압력은 그들의 결정을 강요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지위를 찬탈하는 격이 될 것이고, 그들의 저항을 야기시킬 경우에는 그들이 신앙의 길로 인도되는데 장애물 역할을 하는 꼴이 될 것이다.


개종이라는 강한 반응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은 때로 우월감 혹은 몇몇 믿는 자들이 한심스럽게 말하는 진리를 갖지 않는자, 죄를 짓고 사는 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또 한번 우리는 바룩 박사가 설명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귀의를 하는데, 그것이 인간 번민의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다.


하나님 앞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점점 더 잘 알게 되고, 우리의 약점은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모두 동시에 분명히 알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찬양을 받기위해 그것을 숨기는 대신 하나님에 용서를 받기위해 그것들을 고백해야 한다.


기도를 한다고 우리가 강하거나 혹은 약하고 자연스런 반응에서 구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의 진정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에 은총을 새로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6. 상호 반응 


"두려움, 공포, 정치" 라는 제목을 가진 사려 깊은 연구에서 오스카 포렐 박사는 "인간은 자기 자식에서 삶의 기술을 가르친다.  그것은 자신의 근본적 두려움을 감추는 기술이며 동시에 남의 두려움을 알아내는 기술이다 "


그러나 힘의 상호 관계는 강하고 약한 반응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곁으로 보기에 평화로운 상태로 정화하기 쉽다.  그리고 상호 묵인과 같은 것이 생기는데, 그것은 각 개인은 강하다고 인정한 자에게 굴복하고 약한 자들을 이용하며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매단계의 표면 밑에는 연합, 통합, 음모, 전투가 진행되고 있고 그 모든 경우에 있어 당하는 자는 언제나 똑같은 사람들이다. 수줍음과 자만이란 쌍둥이가 있는 데 너무나 똑같아 혼동하기가 십상이다. '자만심 양은 언제나 반격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동생 수줍음 양과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을 속이려 한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똑같은 사람에 관해 동시에 상반되는 감정을 갖고 있다.  열렬한 사랑 뒷면에는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약자는 강자가 필요하다. 만일 그들은 지배하던 사람이 없어진다면 즉시 다른 사람이 나타나고 그들은 그가 자기들의 개성을 보이지 못하게 한다고 비난한다. 강자도 또한 약자가 필요하다.  횡포를 부리는 어머니의 딸이 결혼을 하면 어머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어머니는 횡포의 대상을 자기 남편으로 바꿔 그를 사위를 공격하는 장기알처럼 사용한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을 진정한 생명력의 표현으로 간주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생의 환상을 부여하기 위한 심리과정을 배양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행동은 창조적 상상에 필요한 많은 노력을 요하며, 어떤 가정에서는 한 가지의 상투적인 형태가 놀랄 만큼 규칙적으로 재생산되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남편은 언제나 식사가 제시간에 준비되지 않는다고 똑같은 항의를 하고, 아내는 그러한 불평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기가 하던 대로한다.  칭찬을 받을 만큼 노력을 해도 그녀는 제때에 준비를 하지 못하다.  남편이 등한히 해서 자기가 쓸데없이 많은 일을 하게 한다고 욕을 하며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할 뿐인 것이다.  일이 이렇게 어설프게 시작이 되고 나면은 그 불평에 아주 익숙해 있으면서도 언제나 화를 내고, 분은 남편이 자기를 오해하고 있으므로 자기는 불행하고, 그래서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며 약한 반응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러면 전축판에 기록된 것처럼 아주 똑같은 예전의 공격과 암시가 예측 못할 전쟁에서 비밀 무기 같은 최후의 논쟁이 벌어져 부인이 눈물을 흘리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그 무기란 승리자나 패배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사용되는 무기이고 애초부터 그 둘은 언쟁이 그렇게 끝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강자는 자기의 힘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 권좌를 오래 연장하려고 그들이 몰락을 자초할 때까지 강한 반응의 방어 뒤에 깊게 몸을 숨김을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이 모든 독재자의 역사이고 그러한 모습은 어디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다.


단순한 사람들은 대체로 강하며, 복잡한 사람들은 약하다.  예를 들어 정신적 구성이 단순하고 사물을 흑과 백으로만 보는 의사는 자신감에 차 있다.  그는 진단의 결과를 주저하지 않고 즉시 선언하고 권위있게 치료에 대한 처방을 하여 결과가 성공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반면에 정신적 구성이 복잡해서 모든 문제에 많은 것을 생각하는 의사는 주저한다.


그는 자기의 모든 진단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결정을 내리는 것을 뒤로 미루고 일이 어떻게 진전되는지를 본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러이러한 치료를 할 수도 있지요. 의사에게서 무엇보다도 강자의 자신감과 지지를 바라는 환자도 있고, 약자의 위안과 이해를 찾는 환자도 있다.


이와 같이 인간관계는 약자를 약하게, 강자를 강하게 만든다.  그들이 더욱 가련하고 비참하다고 느낄수록 약자는 더욱 남의 도움과 충고를 얻으려 한다.  강자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해야만 할 올바른 일인가를 말해 줄 수 있다는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아주 기꺼이 충고와 도움을 약자에게 준다. 강자가 갖고 있는 것은 자신감을 주는 자연스런 낙관적 생각인 것이다. 그들은 행복의 길을 찾았고 즉시 그 비밀을 남에게 전달해 준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흔히 존재한다. 아내는 남편이 논리적 사고를 갖고 모든 일을 설명하고 증명하는데 기가 죽고, 남편은 아내의 직관력과 민감함을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그 직관력과 민감성을 가진 아내는 영적 분야에서 그보다 낫고 그로 인해 남편은 아주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편은 자신의 논리적 체계 속으로 움츠려 들어간다. 그는 아내가 남모르게 감정에 휩쓸리기 때문에 냉정한 철학 이면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과로로 자신을 지치게 한다고 업신여긴다.


 남편과 아내는 그들이 서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 상대편에게 설교를 해댐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감춘다. 또한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므로 상대도 똑같은 반격을 한다. 갈등이 그리 심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부부는 서로를 견제하고 서로의 고민을 가중시킨다. 


 아내가 수줍어하면 남편은 대담한 척하고, 남편이 걱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아내는 더욱 두려워진다. 남편이 경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아내는 사치스러워지고자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아내가 돈을 많이 쓸수록 남편은 절약을 강요한다. 아내가 말이 많으면 남편을 더욱 침묵을 지키고, 말이 적을수록 아내는 무서운 침묵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말을 한다. 아내가 자기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 더욱 시끄럽게 떠들어 대면 남편은 자기의 신념을 더욱 숨기고, 그럴수록 아내는 그를 전도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서로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장을 취한다. 그래서 상대편 태도에 대한 잘못을 서로 탓한다. 이것이 견제효과를 영속시키고 심화시키며 서로의 태도를 변화시킬 기회를 감소시키게 된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짐에 있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가치는 하나님에 의해 고취된 만큼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행동을 표현하는 만큼 부여된다. 때로 하나님의 힘이 인간의 용기와 권위와 힘에 나타나 그 권위로 말을 하고 그 힘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약자의 마음속에서 찾아볼 수 있고,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창조적 고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막에서 좌절하여 낙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조용하게 말씀하신 것을 이해한 그 커다란 행동의 경험을 기억해 보라.


 사실은 우리의 모든 문명이 잘못된 가치 척도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 문명은 강한 자에게 모두 긍정적 가치를 주고 약자에게는 모두 부정적 가치를 준다. 그래서 약하고 민감하며, 동정적이고 애정적인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직관이란 우리의 약한 환자들이 풍부하게 갖고 태어난 재능이란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놀랄 만한 일을 그들이 그 재능에 긍지를 갖는 대신 저주로 간주하고, 그 재능을 이용하는 대신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억제한다는 사실이다.


 직관력이 사회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직관력은 무의식적일 때도 자신에 관해 말하는 상대자의 변호의 움직임, 비판, 빈정거림, 혹은 멸시를 눈치채게 해준다. 바로 그것이 신경성 질환 치료로 성실성에 대한 훌륭한 훈련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상대편을 의식적으로 위로해 주겠다는 이유 때문에 자동적으로 억제한다고 해도 그리고 직관력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참지 못한다고 나 자신이 느낄 때 그는 그것을 눈치채게 되고 그러면 모든 일은 망쳐지게 된다.


 또한 그가 만일 나를 충분히 믿는다면 나의 어떤 태도가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해주었는가를 얘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나 자신을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그러한 비난이 당연하다는 것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 점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사이에 동료의식이 재정립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귀찮은 예지에 대해 자신들을 방어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까다롭고 비판적이고 의심이 많다고 비난을 받는다. 우리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공격한다. 다른 식구들도 그들에게 그들은 모든 일을 상상하고 있다고 말을 한다. 아무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예민성 때문에 너무 야단법석을 피운다고 그들은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이 될 때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끼고 그들에 대해 더욱 불평을 한다.


 강자들은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어떻게 그들의 손을 눌려야 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 게임의 포로가 된다.


 우리가 강해지려면 인생이 갖고 있는 골치아픈 복잡성을 무시하고 단순화해야 한다. 그와 같이 강자는 그들을 고갈시키고 참된 삶에서 단절시키고 마는 체계화하는 마음의 습관과 지나치게 단순한 철학의 포로가 되고 만다. 


 그들의 계속적인 성공으로 그들은 남들보다 낫다―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약자들보다는 낫다―고 믿게 된다. 그들의 성공은 그것이 부당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로 간주되고, 그로 인해 이세상이 제공해 주는 가장 유익한 경험 즉 하나님의 은총의 경험을 그들에게서 박탈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참회이다.


 만사가 잘될 때 우리는 쉽게 우리 자신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는가!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 사실을 잊고 인간의 잔인성과 우리 자신의 불법성에 눈을 감아 버린다. 우리가 강할 때 받는 존경이 양심의 자리를 뺏은 것이다.


 남들의 존경을 받게 해주는 육체적인 힘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의 정신적 혹은 지적인 힘, 더 나아가서 우리의 도덕적인 힘은 우리의 진정한 운명을 바라보았을 때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이나 나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 힘이나 나약함을 사용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강하고 약한 것은 자연의 사실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자연에서 생기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중립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선악에 대한 위험, 특권, 잠재력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강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약하다. 바로 이런 차이가 그들과의 관계를 다르게 만든다. 한 집단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는 사람은 가장 큰 위험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힘이 다른 모두로부터 그를 분리시키고, 그래서 그는 외롭기 때문이다. 


 강하고 약한 것은 인간에게 가면을 씌우고 이웃과의 친교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한 벌의 갑주이다. 바로 그것이 강자와 약자가 안고 있는 큰 문제의 비극적인 측면이다. 우리는 조롱과 마찬가지로 찬양에 의해서 격리될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남에게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써 격리되기도 한다.


 “시기와 두려움으로 인간의 모든 관계가 고갈된다.”고구스타프 티보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쟝드 루즈몽은 “인간은 자기로부터 달아나는 동료를 찾고 있으며, 또한 자기를 찾고 있는 자로부터 자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도망가고 있다”라고 썼다.


 서로가 상대편을 약하거나 강하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 사이에 진정한 친구관계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같다라는 것이 사실인 반면 그 사실은 우리의 강하고 약한 반응의 장막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대 사회에서 우정의 길을 다시 열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이 그들의 강하거나 약한 모습에 따라 판단을 하는 현시대의 큰 오류를 중단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 겉 모양의 장막을 헤치고 그 인간 자체를 발견해야한다. 그 인간이란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거나 혹은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야망과 저항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내 이웃이 나보다 강하다면 두려워할 것이요, 약하다면 멸시한다. 만일 우릭 평등하다면 나는 그를 쓰러뜨리려 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가 복종을 해야 하며, 어떠한 이유로 그를 사랑해야 하는가?”라고 쟝드 루즈몽은 명확하게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병자, 예민한 사람,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그 큰 아이들은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귄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보다 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들을 찾고자 갈망하고 있다. “환자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비난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다”라고 마에다 박사는 말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과학적 지식으로 환자를 도울 수는 있으나 건강한 자와 병든 자 모두에게 솔직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약점을 말해 줌으로써 도와 줄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인간으로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며 증세만을 관찰하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이 인간적인 태도로 오늘날 모든 인간관계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한가지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될 점은 이러한 새로운 태도는 하나님의 은총의 개입이 없이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빈곤을 인식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온 인류의 진정한 형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찾아야하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없이는 약한 반응을 나타내므로 나약함에 굴복을 하거나 혹은 강한 반응 아래서 그 약한 반응을 숨긴다.


 그러나 약한 반응도, 강한 반응도 우리에게 인생을 주지는 못한다. 산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지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이나 혹은 억제 심정에서가 아니라 확신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면 낙관적인 것도 없고 비관적인 것도 없다. 강자로 하여금 그의 약점을 볼 수 있게 도와 주는 것은 약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남모르는 힘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도록 도와 주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은총에 대한 놀랄 만한 일은 그것이 이와 같이 외관상 보기에 상반되는 쌍방적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약한 동시에 강하기 때문에 은총도 또한 우리 자신들의 비참함을 확신시켜 줌과 동시에 그 절망에서 우리를 구해 준다. 은총은 우리를 화해시켜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크리스찬 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치 저울의 한 쪽에 추가 계속 보태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추가 더해질 때마다 우리는 균형을 이루게 하기 위해 다른 쪽에 더 많은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균형은 언제나 불안정하기 때문에 약간의 추가 더해진다 해도 그 균형은 깨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 쪽에 약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 강자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쪽에는 자신들의 나약함을 충분히 인식학 모든 정신적 보상이 갖고 있는 허무함을 알아 결국 하나님의 은총에만 의존하는 약자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자신들의 강한 반응과 신조와 성공과 자신들의 덕의 가치를 믿고 있는 약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제 3 부  심리학과 신앙


7. 정당한 방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동행하라.”(마 5:39­41)
 성경에는 비저항 요구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산상에서 설교하실 때 그는 한 대를 맞으면 한 대를 칠 수 있는 강자가 그러한 기회를 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보복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사람에게 제시한 무저항은 비겁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힘의 승리인 것이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강자가 예수를 따르고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 그 힘을 버리는 것과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나약하게 굴복을 하는 것과 는 큰 차이가 있다. 


 같은 성경 말씀의 깨달음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며, 비겁하여 극복하려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항 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듣게 된다. 영적 삶은 강자의 힘을 약하게 하며 약자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삶은 강자의 언제나 풍성하게 된다. 그릇된 관용인 패배에 의한 관용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모두에게 해로운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승리에서 나온 관용은 굴복한 자의 마음을 고양시켜 주고 부당한 승리를 얻을 뻔했던 사람의 존경을 얻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의 계시에 바탕을 둔 인간의 정당한 방어가 있고 이 정당한 방어를 억제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무저항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비교 될 수 없는 보물로 또한 우리가 사용하고 보호해야만하는 재능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결실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좌절케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심어 주신 야망을 질식시키고 우리의 신념을 자신들만이 가지고, 자신의 인격을 버리며 남들이 우리의 기호와 의지와 생각을 대신케 한다는 것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하인과 같이 우리의 재능을 땅 속에 묻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불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질서의 모든 파괴의 궁극적인 목격자인 질병이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심리학적 분석의 기술로 우리는 새로운 삶 대신에 질병을 가져오는 그릇된 자기희생을 추적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인정, 억제, 증오는 무의식적으로 그 자체가 자아에 대한 파괴적 증오로 변형 될 수 있다. 기분이 상했을 때 아주 정상적으로 발생하는 방어적 반사 작용을 억제한 것 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는 방어라는 정당한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은총에 의한 인간의 또 다른 행동은 용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어렵고, 언제나 기적적이며, 언제나 선을 창출하는 진정한 용서는 정당방어의 첫 번째 운동을 너무 이르게 억제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진정한 용서란 마음 속의 모든 원한을 없애 주는 영적인 승리이다. 억제란 아무것도 변제하지 못하며 마음속에 심한 불만만을 축적시키는 약한 반응에 불과하다. “원한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라고 마에다 박사는 말하고 있다.


 진정한 용서에 의해 얻게 되는 비교도 안될 만큼 중요한 해방을 염두해 두고 우리는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는 모든 불평을 약자들의 마음속에서 없애도록 도와 주어야한다.


 사악하게 보일까 두려워 약자들은 방어의 정당한 반사작용을 억제하고, 그렇게 되면 자기를 해친 자들에 대한 그렇게 많은 원한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들을 꾸짖는다.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사악하다고 믿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사악함을 숨기기 위해 더욱 억제를 하게 된다. 억제는 우울을 낳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건강이 나쁜 것은 그가 당한 침해를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의 사악함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한 강박관념에 시달린 환자가 나를 찾아왔었는데 나는 그녀가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목적을 드러냈다는 무의식적 감정과 그녀에게 주어진 직관과 올바른 판단이라는 보물을 매장해 버렸다는 갈등이었다. 심한 우울증에 걸린 지성적인 여성이 부정적인 양육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 약하게 반응하도록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우울증에 싸여 자기를 부당하게 취급한 모든 사람이 옳다고 말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자신의 멍청하고 쓸모없고 자기가 맡았던 그 중요한 책임을 질 만큼 적당하지 않다고 탓했다.


 그녀는 기도를 하는 동안 거대한 평화가 자신을 감싸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의 모든 원한은 녹아 없어졌고 그녀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진실로 용서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의 엄격한 양육으로 결코 자신을 구할 수 없었던 성격의 결함도 극복할 힘을 찾았다. 이 승리로 그녀는 건강을 회복했던 것이다. 

 자기희생의 컴플렉스는 사실을 왜곡한다. 당사자는 남모르게는 비평을 하면서도 남들이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남 모르는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실제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길이를 잴 때 앞에 육인치가 없는 자로 재었기 때문에 자를 옮길 때마다 육인치를 더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인상과 판단을 고쳐야만 한다.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은 모두 성경의 자유로윤 영감으로부터 인간을 차단시키고 그들의 심리과정에 맹목적인 결정으로 끌어들임으로 인간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그와 같이 도덕인은 개인에 접목된 가지에 비유될 수 있겠다. 그 가지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줄기를 파괴해서는 안되며, 그 줄기가 파괴되고 말라 죽었들 때 체계적인 자기극기를 설교하기보다는 “인간의 훌륭한 정원사”와 같이 그것에 영양분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그는 그것이 살고 자라도록 의지를 주신 것이다. 또 다른 환자는 수없이 자신을 억제한 결과 소아기적태도에 정지되어 있어서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 마음속 이기심과 싸워야 하는 전투를 치러햐 하는 것과 그 싸움에서 도망하여 질투심을 숨기고 그러한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문제입니다. 그 질투심이 억제되고 무시되어 무의식 속에 남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듦으로 병이 되고 맙니다.”


 인간이 진실로 하나님께로 인도되기를 바란다면 그는 어떤 상황에서 승복하고, 어느 상황에서 확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때때로 실수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홀로 그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도는 약간 다르다고 해도 개인적 확신이나 정당한 욕구를 “이웃이 무어라 할까” 두려월 포기할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편견에 굴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가족이나 남편, 아내, 국가, 혹은 교회의 어떠한 압력에도 자기의 내부 조화와 자신의 건강한 생명력을 파괴하지 않고 대항하는 어떤 신념이 있다. 일단 이러한 양보를 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양보를 하게 된다. 차례로 포기하는 결과, 사람은 결국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모두 잃고 만다.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가 되고,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모르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택하게 된다. 일단 이 미끄러운 언덕에 발을 디디면 그는 인격을 계발하는 대신 병에 걸리고 만다. 


 사람들이 자기방어의 적당한 권리를 포기할 때 자존심도 파괴되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성격을 헐뜯는다. 때로 그들은 마치 그들의 면전에서 자신들을 멸시해야 할 거대한 욕구에 몰리는 것처럼 악에 자신들을 던져 버린다. 그들은 자신들을 증오하고, 사용하면 남들이 못마땅하게 여길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들에게 거칠고 공격적으로 말을 한다. 


 자기비하의 습관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습관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을 돌보고 자신을 위해 돈을 쓰며, 다른 사람의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을 변호하는 것으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들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는 큰 인내가 필요하며, 그 자존심없이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만인을 평등하게 완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다짐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그의 사랑에 대한 지울수 없는 보증이라는 것만큼 자존심을 회복시키는데 효과적인 것은 없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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