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기초


 1.성령에 대한 일반적 개관

 

   우리가 영적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성령에 의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인도함이 없는 모든 예배는 예배의 형식은 있으나, 그 내용은 죽은 예배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령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성령을 알아야지 영적예배를 드리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 어느 형태도 영적예배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령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에 관하여 설교를 통하여, 책을 통하여 수없이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러나 일반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목사들나, 직분자들이나, 심지어 거듭난 형제자매들 조차 성령에 대하여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성령이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삼위일체로서의 영과 같이 지극히 피상적인 것들뿐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성령을 가리켜 불과 같이 뜨겁다고도 하고, 비둘기 같이 온유하다고도 하고, 바람과 같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으로서는 성령이 설명되어질 수 없고, 또한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다거나, 혹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 성령님은 현재 어디에 어떻게 존재해 계시는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기도를 하여도, 아무리 성령님을 찾으려고 하여도,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을 하나의 영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 혹은 이데아 세계의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이를 찾기를 쉽게 포기하고 만다. 이것은 성경에서 인류의 조상이 아담이라고 명백히 규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록된 성경말씀은 믿으려고 하지 않고, 애써 진화론을 믿을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해서도 성경에서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이를 알기를 쉽게 포기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성령님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먼데 있는 것도 아니고,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진리가 알고 보면 지극히 단순한 논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에 대해 알고 또한 깨닫고 보면 이 처름 단순하고 알기 쉬운 진리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본 서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성령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현재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상고해 보기로 하자.

 

(1)하나님의 영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1:10~11))


※ 성령=하나님의 영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말씀의 영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 신약에서의 성령과 가장 근접한 용어로서는 시51:11, 사63:10~11(성신으로 역)에 나타나 있고, 일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는 약 387회나 씌어져 있다. 성령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기도 하고, 아들이신 하나님의 영(그리스도)를 가르키기도 하며, 이와는 구별되는 제 삼의 위격으로서 성령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각각의 사역과 역할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하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위의 인용 구절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는 엄연히 구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두 영이 하나의 영, 곧 말씀으로 구성되어진 ‘말씀의 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바로 뒷부분에 이어지는 말씀에 관한 개관을 읽을 때, 이에 대한 해답이 명쾌히 밝혀지리라 믿는다. 여하튼 우리가 성령, 곧 말씀의 영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전혀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말씀 속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우리가 사람의 영을 받으면 그 사람의 사정을 알 수가 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말을 통해서 표출된다. 사람의 말 속에는 그 사람의 영이 포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표현된다. 기록된 성경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예를 블어 보자. A와 B라는 사람이 각자의 가정형편에 대해 스스럼 없이 이야기했을 때, A는 B의 말을 통해 B의 가정형편을 알 수 있고, B는 A의 말을 통해 A의 가정형편을 알 수 있다. A와B는 상대방에게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상대방의 처지와 형편을 알게 된다. 그런데 만약 A와B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었더라면 서로의 사정을 잘 모를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말 속에는 말하는 사람의 영이 들어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말 속에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기록된 성경말씀 속에서만 존재한다. 말씀을 떠난 그 어느 종교행위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다. 말씀을 떠나게 되면 사람들의 생각이 개입되어 복음이 왜곡되고, 복음이 왜곡되면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되는 개념은 사람의 뜻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의 뜻은 바로 사탄의 뜻과도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그리스도의 영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 성령=그리스도의 영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이 말씀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 또한 말씀으로 표현된다.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선지자나 율법, 제사, 역사, 성막, 말씀등 여러 부문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역사하셨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영은 여러 부문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말씀의 영이 우리 마음 가운데서 확신이 없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에 대한 죄사함과 영적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표현된다. 만약 이 글의 독자가 중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즉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속에 내재하는 사실의 확신이 없다면 말씀을 통하여 자기의 신앙 상태를 재 명해 보아야 한다. 믿는다는 것과 믿어지는 것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을려고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 종교인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 처럼 보일 뿐, 실상은 믿음을 찾아보기란 지극히 어렵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롯되는 것이지 종교생활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목사들이나 교회생활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에는 믿음도, 생명도, 진리도 없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우리가 종교적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영(성령), 곧 말씀의 영을 받기란 극히 어렵다. 이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감취어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진정한 의미는 비밀로 감취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말씀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이 모두 드러난다.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우리의 마음상태와 우리의 삶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영적예배가 된다.

 

(3)진리의 영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 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 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7~11)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이상의 말씀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는 또 다른 객체로서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후 진리의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모든 비밀이 증거되고 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보면 삼위 일체의 영들이 말씀의 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오늘날을 사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마음 속에서 말씀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히브리스의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전하시고 싶은 내용, 즉 모세오경, 시가서, 예언서, 역사서등) 여러모양(말씀, 제사, 성막, 생애, 역사등)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하나님의 영)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그리스도의 영)~”(히1: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오늘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은 성령시대요, 은혜시대이다. 하나님의 감취었던 비밀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또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고 계신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 계시며,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영적예배가 무엇이고, 영적성장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열심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여 와도 단 한번도 성령님을 만나지 못한 실정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어떠한 형태로서 어디에 계시는지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거듭나지 아니한 이방 기독교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복음의 말씀으로 거듭난 형제자매들 조차도 성령님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여 신앙의 목표가 마치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허황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할 때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고 성령님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성령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해 두어야 한다. 이것을 모르고서는 올바른 신앙을 영위할 수가 없다. 앞의 인용 구절들은 지극히 적은 부분만을 도입한 것이다. 따라서 참으로 성령에 대하여 바로 알기를 원한다면 성경 전체를 통하여 주의 깊게 상고해 보아야 한다. 본 서에서 성령에 관하여 전부를 언급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에 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해 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하여 성경의 몇몇 구절을 통하여 어디에, 어떻게 계시며,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성령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신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성령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있어서,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성령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떠한 신앙생활도 불완전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눈 먼 봉사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천천히, 주의 깊게, 정독하여, 충분히 이해 할려고 노력하기를 당부한다. 바울이 여러 곳에 두루 돌아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여 준 복음과 성경 말씀을 제대로 대조하여 살펴 보지도 않고 바울의 복음과 종래의 종교적관습과 자기의 생각을 따라 성경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이 ‘그런가?’하고 성경과 대조하여 자세히 살펴 본 결과 믿는자의 수가 날로 늘어났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대충, 혹은 건성으로 보아질 내용이 아니다. 일년, 혹은 한달에 얼마의 성경 읽기라는 식으로 형식적으로 읽게 되면 지식과 교만만 늘어갈 뿐, 믿음이나 신앙생활과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된다. 성경은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책이다. 인간의 육의 생명을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 생명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어 질 성령에 관하여 비록 짧은 몇 마디의 구절이나마 자세히 살펴 봄으로써 어느 정도 개념이 잡히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필자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믿음과 신앙의 시발점이 다음 구절에 대하여 몇번이고 되뇌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2. 말씀에 대한 일반적 개관

 

(1)말씀으로 계시는 하나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

※ 말씀=하나님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신다. 말씀은 성경책에 자세히 기록되어져 있다. 성경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성경말씀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도 오직 성경말씀밖에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역사를 주관하신 것도 말씀으로 주관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말씀으로 구원하셨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도 말씀으로 심판하신다. 이 말씀은 사람들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다. 이 세상이나 우주가 있기 전, 태초부터 존재해 있다. 이러한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바꾸어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A는 B다’ 혹은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게 이해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이다’라고 이야기 하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잘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말씀을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절대자에 대한 무의식적 관념이 있지만, 하나님과 말씀과의 관계를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이는 세상이 타락되어 사탄 마귀의 영향력이 인간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과 인성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극히 적다. 따라서 더러는 부처라고 하는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신앙의 대상을 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바위에 절을 하고, 복을 구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달이나 별을 보고 신앙의 대상을 삼기도 한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자기의 사상이나 생각을 사람이 아닌, 절대적 존재에 귀의하려는 본능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신앙은 항상 일방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즉 샤머니즘 신앙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샤머니즘 신앙은 타종교나 전통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도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십중팔구의 기독종교인들이 본능적으로 그러한 구복적 신앙에 몰입되어 있다. 비록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이 자연물은 아니라 하나님이지만, 형식만 다를 뿐, 내용면에 있어서는 소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일개의 우상을 만들어 구복적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발대발 하겠지만 사실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어디에 계시며,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어지는 결과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늘을 우르러 아무리 기도해 봐도 응답이 없고, 교회에 나아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봐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닌,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앞 구절을 자세히 살펴 보면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오늘날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쉽게 만날 수 있고, 쉽게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있으며,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어디에 계시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계신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영이 거듭났건 거듭나지 않았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시계명)을 받들어 호렙산에서 돌아오지 않자, 산 밑 광야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종 금을 녹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간주하고 믿고 따랐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기적을 몸소 체험했고, 홍해 바다의 기적, 광야생활에서 여러가지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여, 그 때 마다 하나님께 한 목소리로 영광을 돌리던 자들이었건만,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가 조금 늦게 하산한다고 해서 금새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기록된 성경말씀 밖에 없다. 그것도 율법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으로서 말이다. 성경말씀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나, 과거 어느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거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나, 가르침을 언급한 글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영적생명을 다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어졌을 때,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는 진리의 글이다.


이를 도덕적인 글이나, 세상적인 진리의 글로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바로 하나님 그 자체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성경책은 종이로 만들어진 하나의 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속의 내용은 하나님의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무슨 신출귀몰하는 그런 신비한 분도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인지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계신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정욕적이고 교만하여져 비밀로 된, 감추인 말씀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2)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 말씀=예수 그리스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10:30)

※ 예수님 + 하나님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이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는 바로 말씀 자체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도, 땅에도, 교회에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상고한다면 하늘나라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형이상학적인, 혹은 이데아세계에 계시는 초자연적인, 신비한 베일에 쌓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단순한 성경말씀 속에 계신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 존재해 계신다.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오직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깨달을 수 있다.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바람직한 신앙생활이 될 수 없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말씀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달은 그리스도인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신다. 우리가 단순히 육적으로만 그리스도를 이해할려고 하기 때문에 말씀과 하나님, 말씀과 그리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태어나시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은 교회를 다니건 안다니건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이라고 이야기 하면 모두 이상스럽게 생각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성령님이라고 이야기하면 교회에서 나름대로 삼위일체에 대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부정은 하지 않지만, 또한 쉽게 공감하지도 못한다. 사람은 연습되거나 경험되어 지지 않은 사실에 대해 배타적인 경향이 있다. 학습되어 지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말씀과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수학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공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 응용문제까지 쉽게 풀릴 수 있다. 그러나 원리를 모르고 해답만 아는 것은 응용문제가 주어졌을 때 도무지 풀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 말씀으로 인해 파생되어 지는 모든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근본 원리를 이해하여야 한다.


   또 한가지의 예로서 감기가 걸려 콧물이 나온다고 하자. 감기의 근본의 바이러스 균이요, 감기의 증세는 콧물이다. 콧물을 제아무리 닦는다고 해서 감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근본인 바이러스 균을 퇴치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들의 근본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신앙의 증세나 결과만 알고, 거기에 따른 신앙을 고집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종교생활은 콧물을 닦는 것이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바이러스 균을 퇴치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말씀으로 계시고, 예수님도 말씀으로 계신다. 그리고 이 두분은 하나이시다. ‘A는 X다. B도 X다. 따라서 A는 B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는(예수님)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니라”(요일5:20)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관계와 말씀의 핵심을 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말씀은 지키는 것에 앞서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요5:18에서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정은 있으나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종교적 생활에 입각한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무슨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로 보는 경향이 많다. 과거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초림 예수를 핍박하고 죽인 것이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방인들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자칭 정통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종교인들에 의해 배척될 것이다. 말씀은 지키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믿으려고 애써야 한다. 말씀의 근본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이 글의 모든 핵심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3) 말씀으로 계시는 성령님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 말씀=성령=생명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과, 말씀으로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른 말씀이 바로 성령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말씀이 곧 성령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혼의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이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령은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들이다. 영에 속한 것들은 영적으로서 만이 분별이 가능하다.(요14:17,26, 고전2:10~14등) 즉 말씀을 통해서만이 영적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계시는 하나님과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 그리고 말씀으로 계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우리의 충분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하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본질이 설명되어 질 수 없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윗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이른 말씀이 영이요, 진리이다. 성경에 있어서 보혜사라고 하는 진리의 성령에 관하여(요14:17, 15:26, 16:13,등) 그 중요성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데, 문맥의 전후를 자세히 살펴 보면 진리의 영이 바로 말씀의 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말씀을 많이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을 많이 안다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가 말씀을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하여 하나가 될 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율법의 말씀에, 거듭난 사람들은 거듭난 후에 새로이 다가오는 율법의 말씀에, 그리고 신앙생활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거기에 비례한 율법의 말씀에 제어를 받는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말씀을 많이 깨달으면 많이 깨달을수록 그것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그러나 어설픈 깨달음은 자기의 지식만 증가시켜 교만과 무례함으로 표출된다. 어린아이는 또래 집단에서의 지식이 있다. 어른에게는 사회에서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다양한 지식이 요구된다. 모든 신앙의 결과는 성령님께 의존하자.


   우리가 어렸을 때, 무슨 문제를 당하면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고, 심히 걱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어린아이의 걱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웃는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린 아이 나름대로의 걱정이 있고, 청소년기에는 청소년기 나름대로의 걱정이 있으며, 어른에게는 어른 나름대로의 걱정이 있다. 물론 문제 당사자들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고 심히 고민하고 좌절하게 되지만, 지나 놓고 나면 그것이 당시에 생각했던 것만큼 어려웠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가지의 어려움과 시험을 당하나 성령님은 말씀을 통하여 충분히 해결할 수 있게 해 주신다.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교만하지 말고, 또한 자기의 주장을 너무 강하게 강조하여서도 안된다. 말씀은 우리가 일평생 깨달아도 그 끝을 다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어느 경지에 달하게 되면 나보다도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된다. 나의 영적생명이 중요한 것처럼, 다른 형제자매들의 영적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이시며,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신다. 성경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우리 신앙의 좌표가 될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종교생활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신앙에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자아가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하여야 한다.

 

(4) 진리의 말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 말씀=진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 말씀=예수=길=진리=생명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 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 말씀=진리=성령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8)

※ 성령=진리

 

   헬라어에 있어서 진리란 ‘알레-세이아(aletheia)’인데, 이는 덮인 것을 제거하고 사실을 드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 있어서 진리란 기록된 말씀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을 일컬어 진리로 표현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진리로 표현하기도 하며, 또한 성령님을 가리켜 진리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현재 말씀으로 존재하여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성경말씀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진리는 사탄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각종 이방종교와 우상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아예 차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기독교 내부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근원을 차단시켜 버렸고(종교생활로 전락), 심지어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더 이상 진리의 말씀을 경험치 못하도록 강하게 방해작용을 하고 있다.


   사람이 구원, 곧 죄사함을 받는 유일한 길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진리는 유명한 철학이나,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고 성경은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다만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고,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며,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거듭 난 것은 종교생활을 통해서, 혹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기 때문에 거듭난 것도 아니요, 오로지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믿고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의 영이 거듭나게 되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쫓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마찬가지로 영적성장을 가능케 하는 것도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첫째는 말씀으로 거듭 태어나야 하겠고, 그 다음 말씀에 의한 성장이 있어야 하겠고, 신앙이 장성하여 지면 비로소 신앙의 분량과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영적예배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는 단 한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다.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읽고 깨달아 거룩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기록된 말씀만이 우리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표요,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진리에 관한 참조 말씀으로는 요1:14,17, 3:21, 5:33,40,44,45, 16:13, 14:6,17, 15:26, 17:17, 18:37,38, 롬1:18,25, 2:2,8, 고전13:6, 고후4:2, 6:7, 11:10, 갈2:5,14, 5:7, 엡1:13, 4:21,24, 6:14, 골1:5, 살후2:10~13, 딤전2 :4,7, 3:15, 4:3, 6:5, 딤후2:15,18,25, 3:7,8, 4:4, 딛1:1,14, 히10:26, 약1:18, 3:14, 5:19, 벧전1:22, 벧후1:12, 2:2, 요일1:6,8, 2:4,21, 3:19, 4:6, 요이1:1~4, 요삼1:3~12 등이 있다.


   이 말씀에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개입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따라 유추해석 되어져서도 안된다. 오직 말씀은 말씀으로 해명되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말씀만큼 쉽게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도 그리 많지 않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하는 식으로 목사들에 의해 쉽게 다루어 지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철저히 경계하여야 한다. 말씀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강요를 한다거나, 양심에 무슨 가책을 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말씀이 무엇인지 개념을 올바로 정립한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훨씬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6) 생명의 말씀

 

“이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어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 말씀=영생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 말씀=성령

 

   앞 부분에서 살펴 보았듯이 진리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시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께로 바로 인도하는 진리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생명인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한 분이시다. 가령 사람에게 있어서 직장에서의 지위와 역할이 있고, 가정에서의 지위와 역할이 있고, 교회에서의 지위와 역할이 있고, 기타 사회생활에서의 여러가지의 지위와 역할이 있듯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사역과 역할이 달리 표현되었을 뿐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현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신다. 말씀 속에는 이 분들의 신성과 인성과 모든 성품들이 다 명시되어 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말씀으로 계시고 지금도 우리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신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존재하여 왔으며, 그 말씀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어 질 것이다(마5:17~20, 롬3:31, 눅16:16).


   그 영이 하나님께 대하여 거듭났거나 거듭나지 않았거나, 이제 우리의 자유의지나 종교성으로부터 벗어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의 말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갈등과 유혹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맛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이 세상으로부터 성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 하지 않고, 마치 구약시대의 레위지파(제사장지파)에 속하는, 소위 오늘날의 목사들의 설교에 입각하여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 버렸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이제는 세속적 종교생활과 썩어져 가는 이 세상의 구습으로부터 말씀으로 깨어나야 한다. 어떠한 교회도, 어떠한 목사도 내 영혼을 책임질 수는 없다. 내 영혼에 관한 문제는 오직 복음의 말씀 안에서 내 스스로가 깨달아 해결하여야 할 부분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본 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것은 곧 복음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의 말씀 안에 내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복음의 말씀 안에 있지 아니하면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형식적 종교생활과 세상 욕정에 이끌리어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육신(고기덩어리, 흙)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지만 복음의 말씀, 영적생활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지 깊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우리가 육신의 유지와 보존을 위해서는 끼니마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음료를 마셔야 한다. 한끼만 굶어도 육신의 상태는 식욕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먹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금새 마비되고 만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육신의 유지 보존을 위해서는 시간과 금전과 노력을 투자하기에 게을리 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과 삶을 돌이켜 보면 육신적인 생활과 육신적인 삶에 얽매어 영적생활을 거의 할 수 없다시피 한 것이 현제 우리의 실정이다. 주어진 하루 일과 중 육신을 위해서는 얼마를 할당하며 영적인 부분을 위해서는 얼마를 할당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이야 어떻게 살든지 간에 적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말씀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율법적으로 살라거나 혹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양심을 부추겨 가책을 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육신으로서 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육신을 덧입고 있는 우리로서는 불가피하게 육을 유지보존하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육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육신의 유지 보전을 위해 날마다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의 유지보존 및 성장을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을 공급받아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 우리의 삶이 은혜의 말씀에 의해 지배를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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