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山  丁若鏞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은 改革의 先驅者(선구자)
1. 다산의 생애 年譜(연보)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정재현과 어머니
 해남 尹씨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羅州 丁씨 집안은 弘文 館 학사를 8대 연속 배출한 가문이었고, 外家는 고산 尹善道(윤선도)의 후손이었다.
1768년(7세) 五言詩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일 세>를 지음.
1770년(9세) 어머니 死別하다. 자기의 詩를 엮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三眉란 흉터로 인해 눈썹이 세 개로 보이는 것을 비유한 것).
1771년 어지러운 정계를 떠난 부친을 따라 간 시골에서 經書와 史書 등을 직접 교육 받다.
1773~4년 20세인 庶母 金씨에게서 친자식과 같은 돌봄을 받았고, 杜甫(두보)를
 모방해 지은 시를 본 아버지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다.
1776년(15세) 아버지가 戶曹佐郞으로 복직되어 한양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承旨인 풍산 洪씨 홍화보의 딸과 결혼했다. 
또 같은 해에 英祖가 승화하고 孫子인 正祖가 등극함.
1777~81년(16~20세) 李家煥과 매형 李承薰(이승훈)에게서
 李瀷(이익)의 유고를 얻어 그를 통 해 私塾(사숙) 했는데, 
이승훈은 朝鮮 最初의 天主敎 영세교인이며, 
이가환은 이승훈의 外叔父이고 이익의 宗孫이다. 17세에는 아버지의 任地인
 전남 화순의 동림사에서 공부했으며, 20세에 치른 과거시험에 낙방했고, 딸이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죽었다.
1782~3년(21~22세) 한양 창동에 집을 마련하여 이사했고, 經義初試와 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正祖를 최초로 알현하다. 22세에 장남 학연(學淵)이 태어나다.
1784년(23세) 율곡 이이의 說을 원용한 <中庸講義>를 정조에게 바쳐 큰 칭찬을 받다
. 맏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에게서 天主敎에 대해 처음 전해 듣고 관련된 책 한 권을 받다. 
1786~7년(25~26세) 차남 학유(學游)가 태어났고, 중희당에서 정조로부터
 兵學通을 하사받으면서 兼有將才特賜此書(장수의 자질까지 아울러 갖췄으니 특별히 이 책을 하사한다)라는 敎를 받다.
1789년(28세) 大科에 甲科로 급제하고 희릉 直長에 임명되어 中宗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을 관리하다가, 정조로부터 재능 있는 文臣으로 선발되어 奎章閣에서 일정기간 학문을 연구 
 하는 抄啓文臣(초계문신)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大學을 강의하다. 관직 등급은 종7품을
 거쳐 정7품이 되다. 아버지 思悼世子의 능이 있는 수원의 현륭원을 찾는 正祖의 大行次를 위한 
漢江에 놓을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추진하여 백성들이 당하는 폐단이 줄어들게 했다. 
1790년(29세) 정9품 藝文館檢閱(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노론벽파의 탄핵을 받아 
서산 해미현으로 유배되었다가 13일 만에 풀려났다.
이어서 정6품 正言이되고, 이어 정5품 司憲府 持平(지평)에 오르다.
1791년 正祖가 詩經에 대해 조목별로 질문한 것을 강의 형식의 800여 
조로 대답한 <詩經講義>를 바쳐 칭찬을 받다.
1792~4년, 31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고, 진주 牧使로 있던 아버지가 임지에서
 별세하다. 王命을 받아 수원 華城을 설계하고 擧重機와 녹로를 고안한
내용을 담은 <水原城制>를 바치다. 
거중기의 활용으로 水原城의 축조 경비 10만 냥 중 4만 냥을 절약하다. 33세에
 成均館 直講이 되다. 暗行御史로 임명되어 경기도의 적성, 마전, 연천,
 삭녕지방을 순찰하며 민정을 살핀 결과 
官家의 부패와 비참한 百姓들의 삶을 보면서, 당시 부패한 儒學을 절감하였고,
 西學(천주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는 서구의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천문, 지리, 과학 등을 
 깊이 탐구하게 되면서 當代를 앞선 進步的 思想 을 바탕으로 “實事求是”를
 추구하였다. 弘文館 副校理가 되다.
1795년(34세) 司諫院 司諫(사간)에 임명되고, 이어 정3품 同副承旨에 올랐고 
兵曹參議가 되었으며, 3월에는 右副承旨가 되다. 7월에는 중국인 神父
 周文謨 밀입국 사건에 연루되어 
 충청도 금정의 종6품 察訪으로 좌천되다. 이때 성호 이익의 유고를 교정했고, 
직접 만난적은 없지만 李瀷(이익)을 본받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학문을 尺度로 삼았다. 
1796~800년(35~39세) 35세에 奎瀛府(규영부) 校書가 되어 <史記英選>, 
<奎韻玉篇,규운옥편> 편저에 참여, 97년에는 천주교 信奉의 죄로
 좌천된 황해도 곡산의 副使로 있으면서
 홍역 치료법을 기술한 <麻科會通>을 저술하다. 99년에 政府로 복귀하여
 兵曹參知와 刑曹參議가 되었지만 또다시 노론 벽파의 무고를 받고 自明疏,
(자명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다.
1800년 가족과 같이 마현의 고향집으로 귀향했다가 왕명을 받고 상경했지만
 正祖가 승하하자 다시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할 집을 짓고 與猶(여유)라는
 堂號(당호)를 붙이다.
1801년(純祖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40세에 옥에 갇히다. 천주교도의 책장에서
 정약용 집안의 서찰이 나온 책롱사건으로 정약용은 포항의 장기로 유배되고,
 매형 이승훈과 셋째 형 정약종은 
 참수당했으며, 둘째 형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되다. 조카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대책을 중국에 알리기 위해 쓴 글이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兄 丁若銓(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1805~18년(44~57세)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간은 강진에서의 고된 
유배 생활이었지만 후세들에 대한 가르침과 경전 연구, 저술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05년에는 장남 학연이 찾아와 周易과 禮記를 가르쳤고, 08년에는
 강진읍내를 떠나 귤동의 茶山으로 거처를 옮겨 대를 쌓고 연못을 만들고
 꽃을 심고 초당을 지어 주변을 꾸미고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
 (이곳을 인연으로 호를 茶山으로 정함).
11년에는 역대 우리 땅덩이와 지리를 고증한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를
 완성했고, 13년 에는 韓, 中, 日 고급 학자들의 論語해석을 총괄하고
 재해석한 <論語古今註>를 완성하다.
14년에는 <孟子要義>, <大學公議>, <中庸自箴, 중용자잠>을 완성하다.
 17년에는 국가 통치 질서의 근본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邦禮草本>의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는 못 했지만 
 훗날의 <經世遺表>이다. 또 조선사회의 개혁과 지방관의 역할을 밝히고자
 하는 목적으로 <牧民心書> 저술에 착수하여 18년(순조 18년,
 다산 57세)에 48권을 마치다. 
그 해 8월 이태순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나 9월에 18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 마현의 집으로 돌아오다.
1819~36년(58~75세) 58세에 형벌 집행의 엄중한 원리를 서술한 
<欽欽新書,흠흠신서>와 우리말의 어원과 용법을 밝힌 
<雅言覺非,아언각비>를 완성하다. 61세(1822년)에는 回甲을 맞아 자신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총괄하여 서술한 <自撰墓誌銘,자찬묘지명>을 
짓고, 벗, 제자들과 함께 金剛山을 다녀오다. 66세 때는 윤극배가 
茶山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죄 없음이 밝혀지다.
36년(憲宗 2년) 75세가 된 해에 回婚日 3일 前, 結婚 60주년을 기념하는
 <回巹詩,회근시>를 지었으나, 정작 정약용은 回婚日인 2월 22일 
親知와 弟子가 모두 모인가운데 고향 마현(마재)에서 別世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유언에 따라 與猶堂(여유당) 뒤편의 언덕에 장사되었다.
 그리고 1910년 (純宗3년), 大韓帝國이 끝나는 해에 정약용은 正憲大夫,
 奎章閣 提學(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文度公이라는
諡號(시호)를 받았다. 또 1934~8년 사이 정약용의 저술을 총 정리한
 문집을 外玄孫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 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한 
활자본 <與猶堂全書>가 154권 76책으로 간행되었다. 
2. 牧民心書란 어떤 내용인가 
 목민심서는 다산이 저술한 500여 권의 책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대표작으로
 배성들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역할을 밝힌 책이다. 관리들의 실무를 다룬 
행정적 지침서로 끝날 수도 있는 이 책이 그의 대표작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유배기간 18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여 五經과 四書를 반복해 연구하여
 修己(수기, 스스로 자기를 먼저 연마)의 학문을 오롯이 익힌 바탕에, 
고난스러운 유배 삶에서 백성들의 괴로움과 짓밟힘을 상세히 듣고 보며 
 마음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였기 때문이다. 
진정 백성을 위하는 정치란 무엇인지 그리고 백성들 가까이에서 힘을 행사하는
 首領이 그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도록 어떻게 방향 설정을 할 것인지를 폐부로
 고민한 결과의 산물이 “목민심서”라 하겠다. 목민심서는 23종의 중국 역사책과
 우리의 역사서가 기타 저술, 문집 등의 서적에서 옛날의 司牧이 백성을 기른 
 자취를 골라 정리, 분류, 수합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48권 16책으로 편성하였다. 
1부 6조로 도합 12부 72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다. 
1부는 부임, 2부는 律己(스스로 단속함), 3부는 奉公, 4부는 愛民,
 5~10부는 六典(육조의 집무규정), 11부는 賑荒(진황=구휼), 12부는
 解官으로 이루어졌으며, 부임하여 고을을 다스리고 임기가 끝나 고을을
 떠나는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을 세부적으로 나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약용이 특별히 “司牧”의 자취를 선택한 것은 古來로 요임금과 순임금, 문왕, 
맹자가 “牧”을 백성을 부양하고 기르는 일로 여긴 뜻에서 비롯하였다. 정약용은 
聖賢의 가르침에서 자신의 思想과 政治論을 정립하기를 학문의 목적은 修身이
 半이고 나머지는 牧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聖人의 올바른 말씀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산은 이 책을 
기술적인 지침서로 저술한 것이 아니라 백성과 국가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고자한
 바람이 본질이었다. 하지만 곧장 부패한 체제가 改革되고 平等한 政治思想이 
구현되기에는 社會的 기반이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愛民의 精神을 具體的으로
 提示한 것이다. 
 [聖人의 시대는 너무 멀어서 그 道 또한 점점 희미해졌으니 오늘날 배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중략). 首領이라는 직분은 관장하지 않는바가 없으니 여러 조목을 차례로 
      드러내더라도 오히려 직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살 펴 행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라는 글은 정약용이 현실 정치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문장이다. 
또한 책의 제목을 “心書‘라 함은 백성을 위하는 벼슬아치가 될 자격이 충분함에도
 현실 정치에서 소외(유배생활)되어 몸소 행할 수 없는 정약용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다. 
3. 신유 천주교박해와 정약용의 유배
 정약용은 이승훈, 이가환을 통해 星湖 이익의 서적을 접하고 經學에 대해
 교류한 것뿐만 아니라 천주교도 접하게 되었다.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것은 1784년(정조 8년)부터였다. 맏형 정약현과 그의 처남인 이벽 등과
 함께 모여 토론하면서 학문 연구를 계속하였고, 이때 이벽의 제안으로 
천주교 교리를 강학의 토론 주제로 정하게 되었다. 이벽은 선교사가 없는
 조선에서 독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천주교신자로서 같이 
학문하던 사람들을 시작으로 천주교를 키워나갔다.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였고, 그 뒤 이벽, 정약용 등은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게 됨으로서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것이다. 그러던
 1791년(정조 15년), 외사촌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 권상연이 천주교 교리에 
따라 神主를 불사르고 祭祀를 지내지 않은 일로 반대당파의 탄핵을 받고 
처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약용으로 인해 천주교를 받아들인
 윤지충이 목숨을 잃고 또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자 정약용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정약용의 천주교 信仰이 朝廷의 制裁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정조는 儒學을 진흥시키면 邪敎(사교)는 自滅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적극적인 탄압을 하지 않았으나 1800년 정조 승하 후 純祖가 王位에 오르면서
 수렴청정을 시작한 貞純王后 金씨 집안은 老論 벽파의 중심 
가문이었기에 자신들의 반대파인 南人 時派를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었다. 
남인 중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기에 벽파는 배후 정치 세력을 탄압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정순왕후)의 언교로 박해 령을 선포해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이 사건이 신유박해로 정약용 형제, 이가환, 이승훈 등을 비롯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고, 300여 명의순교자가 발생했다. 
4. 詩, 散文, 편지에 담긴 茶山의 思想과 愛情
다산 정약용의 개인적인 글들에는 사회를 개선할 방도를 구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 정치가의 면모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精髓(정수)가 들어있다
. 자식이 대상인 편지에서는 아이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훈계하거나 학문이나
 문학 등의 가르침이 많은데, 이는 멀리 떨어져있어서 볼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교육법이었다. 다산이 강조한 孝와 弟는 일방적인 위계논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윤리개념, 인간의 예의를 말한 것이다. 
그의 글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여 읽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특히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왔던 치마 다섯 폭을 유배지로 보내오자, 
담황색으로 빛바랜 치마를 재단하고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전한 
<제하피첩>에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자식을 향한 커다란 애정이 
상징적으로 들어있다. 
弟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산은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고
 대결할 것을 요청하고 바랐다. 모친 풍상을 겪었음에도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열린 사상을 깨치고 탐구하며, 부패한 세상에서 짓밟히는 백성을 
위해 사회를 개선할 방도를 구하는 다산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유배를 
떠난 극한의 고립 속에서도 자신을 다스리고 극복하는 성찰, 백성과 
사회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지 그 그릇의
 크기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다산은 또한 詩와 문학작품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감정을 솔직히 나타냈다. 
가족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 아내에 대한 그리움, 유배지에서의 고통스러움,
 소외된 자가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드러난 개인적 심상을
 다룬 내밀한 작품을 비롯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적인 작품들도 썼다. 
다산의 학문이 그러하듯 사회와 백성에 대한 관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주제인 사회성 짙은 문학작품도 많다. 이와 같은 사실적인 작품들은
 1794년(정조 18년) 33세의 나이로 암행어사가 되어 부패한 현실과 비참한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시작되었다. 고단하고 불합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낸 다산의 
삶을 시, 산문 그리고 편지에서 두루 느낄 수 있다. 
5. 茶山이 後世에게 전하는 敎訓
 茶山은 일평생을 통하여 몸소 체험하면서 연구하여 깨달은 愛民思想을 
기초로 정치나 사회개혁을 위한 具體的인 實踐方案을 제시했고, 敎育으로
 弟子들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實事求是의 精神에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방안으로 西學(천주교)을 받아들이면서 東道西器(東洋의
 전통을 지키면서 서구의 文物을 받아 利用)의 思想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우리 近世史에서 改革의 先驅者였다.
18년간의 긴 유배생활로 廢族(폐족)이 된 가정의 두 아들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 희망을 잃지 말고 經書를 공부하도록 독려하면서 자신도
 많은 연구를 하여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위기를 기회로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또 자기 주위 환경을 스스로 개선하면서 
혹독한 고독과 괴로움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었던 생활의 실천은 健康을
 유지하여 당시로는 長壽라 할 수 있는 만 74세까지 살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韓半島는 민족과 강토가 남북으로 갈라져 적대관계에 있으나 언제 
統一이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또 南韓 내에서도 계층, 이념, 노사 간 갈등이
 계속되어 國論統一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고위 관료층이나 정치권에서도
 부패와 연루된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그러면서도 일부에서 181년 前의
 茶山을 연구하면서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많은
 것이 개혁 되어야 한다는 所望 때문이다. 그 소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原則에 充實한 삶, 이웃도 생각하면서
 법과 질서를 지키는 行動이 중요하다. 

 <이상은 신윤학이 엮은 책 “다산이 살아온 날들”에서. 2017, 4. 24. 崔煥吉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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