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22) 


 

* 오늘 날에도 유용한 철학의 각 분과 즉,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학’,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학’,

그리고 창작의 원리를 다루는 ‘창작학’으로 학문을 체계화한 철학자이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 논리학자, 시인, 과학자 등으로 말한다.

이는 그만큼 많은 분야를 섭렵한 것을 뜻한다.

그를 자연과학자 특히 생물학자의 범주로 보는 것은 그가 해양생물의 분류에 깊은 관심을 보여,

120종의 어류와 60종의 곤충을 포함해서 500종이 넘는 동물을 분류하고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물 분류는 18세기에 이르러 린네가 분류학을 체계화할 때까지 근 2000년 동안 그대로 쓰였다.


박천홍(출판저널 기자)씨의 글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팔방미인적 사상가의 전형으로 스승 플라톤이 서구사상의 '총론'을 제시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각론'을 덧붙였다고 평가했다.


또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모든 철학자는 두 유형으로 나뉘는데,

 '부드러운 기질의 철학자'와 '억센 기질의 철학자'가 그것으로, 무리하게 일반화시켜 본다면,

플라톤은 전자의 대표자로서 이상주의 또는 관념론의 원류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의 상징적 존재로서 현실주의 또는 실재론(實在論의)의 비조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고 했다.

 

 

* 아카데미아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1. 생애


아리스토텔레스는 BC 384년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였다.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B.C. 384년 그리스의 칼키디케 반도의 스타게이라에서 출생

B.C. 366년∼348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에서 수학

B.C, 348년 헤르메이아스왕의 초빙으로 아소스로 이주

B.C. 343년∼340년 알렉산드로스의 궁정교사

B.C. 335년 아테네에서 뤼케이온 학원 건립

B.C. 322년 칼커스에서 위장병으로 사망

 

2. 사상과 철학


❐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론은 그의 신념, 즉 인간을 포함한 자연 안에 있는 만물에게 성취하려는 분명한 ‘목적’과 수행하려는 기능이 존재한다는 그의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이렇게 첫 장을 서하였다. “모든 예술과 모든 학문, 또한 모든 행동과 추구는 선(善)을 지향한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윤리학의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이 지향하는 ‘선(善)’이란 과연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선(善)과 정의(正義)의 원리는 모든 개인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원리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서의 현실적인 행동을 통하여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알기 쉬운 실례를 들어 자신의 윤리학을 위한 틀을 마련하였다. 모든 행동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그는, 목적을 두 종류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도구적’ 목적(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행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본래적’ 목적(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이었다. “전쟁과 관련되어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은 이 두 종류의 목적을 잘 예증해 준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을 단계적으로 고려할 때, 우리는 일련의 특수한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행위들은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그것들이 완성되어 있을 때에는 결국 다른 목적들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우선 말고삐 제작자의 기술을 살펴보면, 말고삐가 완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목적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말고삐는 전투에서 말을 달리는 기마병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목수도 막사를 건축하는 작업을 끝냈을 때 목수로서의 기능은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막사의 경우도 그것이 병사들을 위한 안전한 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막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실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목수와 건물에 의해 달성된 목적들은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인 것이다. 즉 병사들이 그들의 다음 행동 단계로 이동해 갈 때까지 병사들에게 주거를 제공해 주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한편 배의 건조자도 마찬가지로 배를 출항시키는 것으로 건조자의 목적은 실현되지만 이 역시 군인들을 전장으로 수송하거나 전투를 수행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군들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하지만 전투는 평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평화가 전쟁의 진정한 목적일까? 그렇지 않다. 평화란 인간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목수나 의사나 장군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추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그때 우리는 모든 다른 행동을 수단으로 삼는 데에 도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행동이 “인간이 선(善)임에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 “선(善)”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이라는 단어를 어떤 사물의 특수한 기능과 연결시켰다.

망치의 경우, 어떤 망치가 선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망치들에 대해 기대하는 기능을 그것이 충실히 수행했을 경우이다. 만일 목수가 건축자로서의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 목수는 선하다. 이는 모든 기술들과 직업들에 공히 적용되는 기준이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보편적 사항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인간의 기술이나 직업을 인간으로서의 그의 기능과 구별하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선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 본성의 기능을 판명하게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선한 인간이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 인간의 행동은 그것에 적합한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이러한 목적들은 비록 가치는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선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행위는 “자족적”이며 “최종적”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행위는 “항상 그 밖의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인간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 감정은 매우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과다와 과소의 조화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적절한 중용(中庸)을 발견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설하였다.


덕은 우리의 다양한 감정들과 행동들에 관련되는데, 왜냐하면 그 감정들 속에 과다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공포, 자만, 색욕, 갈망, 연민, 쾌락, 고통과 같은 감정을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느낄 수 있으며 이 두 경우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느껴야 할 때 우리는 중용을 취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밝혔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 최상의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는 곧 덕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악덕은 과다나 과소의 극단이며 덕은 그것의 중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용은 만인에게 동일하지도 않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의 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중용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인간에게 상대적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의 본성은 이성적인 측면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식물적인 면과 감각적인 면도 포함된다. 덕은 이러한 본성상의 여러 능력들에 대한 거부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인간은 자신의 모든 능력들, 즉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모두를 사용한다. 하나는 “지적(知的)”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기능으로서 그 각각은 나름대로의 덕을 가진다. 따라서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지적인 덕은 철학적 지혜와 오성인데 그 덕의 발생과 성장은 교육과 학습에 기인한다.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며 여기서 윤리학(ethike)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 명칭은 “습관(ethos)이라는 단어의 파생어이다.”


모든 도덕적 덕들은 학습되어야 하며 또한 실천되어야 한다. 그 덕들은 행동을 통해서만 덕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들에 의해 정의롭게 되며 질서 있는 행위에 의해 절제를 실현하고, 용기 있는 행위에 의해 용기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덕들 중에서 “기본적”인 것들은 용기와 절제와 정의와 지혜이다. 이 덕들 이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분수에 맞는 재물의 사용, 관용, 우정, 자중과 같은 덕을 고려하였던 흔적이 있다. 비록 그는 이성의 중심 기능을 실천적이며 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지침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철학적 지혜가 실천적 지혜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명상(contemplation)은 인간을 보다 깊게 행복으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1. 어록

❐ “지(知)와 의지(意志)와 인내(忍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저 <논리학(論理學)> <에티카>에 나오는 이 말은 인간의 덕이 어떤 요소와 과정으로 형성되는가를 명쾌하게 지적한 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덕의 체계를 갖는다. 진실․정직․근면․용기․침착․절제, 모두가 인간이 갖는 덕이다.


인간의 덕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먼저 지(知)가 필요하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용기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용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다. 만용과 진용(眞勇)은 다르다. 정의의 인간이 되려면 정의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정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정의의 덕을 실천할 수가 없다.


도덕은 올바른 자각에서부터 시작한다. 덕에는 옳은 지(知)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의지적 노력과 수양이 필요하다. 근면한 사람이 되려면 자기의 나태와 싸우면서 근면의 덕을 수련하고 습득해야 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 속에 있는 거짓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거짓한테 내가 패배할 때 나는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덕의 수련에는 강한 의지의 힘이 필요하다. 덕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꾸준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인내가 없으면 덕의 수련이 불가능하다.


꾸준한 훈련에서 뛰어난 선수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심성의의 수련과 실천이 없이는 덕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지(知)와 의지와 인내의 세 요소가 한데 합쳐서 덕(德)이라는 가치를 형성한다.

 

❐ “행복은 최고의 선이다”

인간의 최고선이 무엇이냐. 많은 철학자들이 그것을 추구했다. 스토아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최고선은 덕이라고 했다.

쾌락주의자들은 쾌락(헤도네 hedone)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신앙을 들었고, 어떤 이는 지혜를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명저 <윤리학>에서 인간의 최고선은 행복이라고 갈파했다. 인생은 목적과 수단의 체계를 이루거니와 인간의 최고 목적은 곧 행복이라고 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의 궁극의 목표는 곧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답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의 귀일처는 행복이다. 왜, 우리는 분주히 지상을 뛰어다니는가. 왜 일하고 애쓰고 싸우는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나는 행복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자기를 속이는 자다.


행복은 인생의 골(goal)이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행복으로 보느냐. 또 둘째 어떻게 하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두 가지 문제에 달려 있다. 전자를 행복관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행복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십팔십색(十八十色)의 행복론이 나온다. 동양의 행복론이 다르고 서양의 행복론이 다르다. 옛날의 행복론과 현대의 행복론이 다르다. 남자의 행복론과 여자의 행복론이 각각 다르다.


목표는 하나인데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 저마다 다를 뿐이다. 우리는 올바른 행복관과 올바른 행복의 방법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중요한 문제다.

 

❐ “스승은 귀하다. 그러나 진리는 더욱 귀하다”


기원전 377년 봄, 철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70년 생애의 비장한 막을 내렸다. 28세의 다정다감한 귀족 청년 플라톤은 스승의 비극적 죽음을 보고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뒤를 잇기 위해서 철학자의 길을 택했다. 플라톤은 국가의 동량(棟梁)은 나무를 기르고 진리의 등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기원전 387년 아테네 교외에 아카데메이아를 세웠다.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숲에 세웠기 때문에 학교의 이름을 ‘아카데메이아(Academeia)’라고 했다. 서양의 대학의 기원이나 영어의 아카데미는 여기서 유래한다.


서기 529년 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교(異敎) 사상의 온상이라고 하여 폐교령을 내릴 때까지 아카데메이아는 약 9백 년간 연면한 생명을 이어가면서 서양의 진리의 전당, 학문의 상아탑을 이루었다.


천하의 많은 청년들이 아카데메이아의 문을 두드렸다. 18세의 청년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원천리하고 아카데메이아를 찾아가서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20년 동안 플라톤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인격적 영향과 학문적 감화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사상적 입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하나는 아이디얼리스트요, 하나는 리얼리스트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철학적 입장을 달리 했기 때문에 아카데메이아를 떠나서 아테네에 따로 학교를 세우고 자기 철학을 강의했다.


20년간 존경하고 사숙하던 스승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스승은 귀하다. 그러나 진리는 더욱 귀하다’는 그의 말은 학문에 관한 엄숙한 선언이다.

 

❐ “자기에게 그 능력이 없는데 자기를 크게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또 자기의 가치를 실제보다 적게 생각하는 것은 비굴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사람,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사람, 자기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 과대평가의 병에 걸리기 쉽다. 이것을 우리는 교만 또는 자만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섯의 능력밖에 없는 사람이 열의 능력이 있다고 맹신한다면 이것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사업을 벌이다가

실패의 고배를 마신다. 우리는 자만이나 교만의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실제보다 훨씬 적게 평가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은 비굴이요, 자멸이다.

자만이 인간의 병인 것처럼 자멸도 인간의 병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능히 그것을 할 수 있는데 자기 힘을 과소평가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는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은 중용에 있다고 보고 중용사상(中庸思想)을 강조한 철학자다. 우리는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자멸해서도 안 된다. 너무 자기를 과대평가해도 안되고 과소평가해도 안 된다.


자만과 자멸의 중용은 자부다. 스스로를 알고 스스로의 힘을 믿는 것이 자부심이다. 저마다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에 대해서 과대도 과소도 아닌 정당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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