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와 유대교의 종교적 분파들


 

    주전 538년에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두가지 뚜렷한 사실이 나타났다. 

하나는 제사에 관한 일인데, 대제사장이 종교와 정치를 함께 장악하는 일이였다. 이것은 마카비 반란 이후에 더 현저하였다.

다른 하나는 율법에 관한 서기관들의 관심이다. 즉 서기관들의 율법의 전수와 해석이다.  

   유대교가 생사를 걸고 했던 새 질서에 대한 이상은, 주전 3세기의 대 제사장 시몬의 말 가운데에 나타나 있다:66)

  즉 세계는 세 기초 위에 서 있다. 그것은

 

  (1) 토라-- 계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

  (2)(성전)봉사--예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

  (3) 선을 행하는 것--자비,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요 생활의 법칙이다. 

  마카비 시대 이전에는 성전은 헬레니즘에 대한 방파제적인 상징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 유대교의 초점은 그 자리에 토라가 자리 잡게 되었다.  

 

 

1.  토라 종교

     토라란 신의 계시로서 구전이든 문서이든,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종교에 대한 포괄적인 유일한 표준이요 규범으로 만들에 되었다.67)

  토라(?) '가리키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그래서 토라하면 단순히 '율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토라는 (1) 가르심(Instruction), 교리(Doctrine)(욥 22:22)

             (가) 육신의 부모로부터 받는 교훈(잠 1:8;3:1;4:2;7:2)       

             (나) 예언자를 통한 계시(사 1:10;8:16;,20;42:4,21)

         (2) 율법

             (가) 인간적인 법--인간이 따를 율례와 관습과 규례(삼하  7:19).

             (나)  신적인 법--제사법, 예배법 등(레 6:7;7:7;),

                              혹은 수집된 법, 율법의 책(수 1:8;8:34;

                              왕하 22:8,11;느8:3; 출 18:20;레 26:46) 

 

   안티오쿠스 4세 (B.C. 175-164) 로부터 베스파시안(A.D. 69-79)(교안 35p. 참조) 시대까지 전 기간의 유대교는 이 토라에 근거하여 발전하였다.

  그럼으로 '토라'라는 말속에는 헬레니즘과 이방 문화에  항거하는 신앙과 사상이 깊이 숨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전에서 토라로,

    바벨론 포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위력을 격하 시켰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제사를 들린 장소를 상실한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제사 보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 때엔 제사장 보다는 평신도인 서기관(Shoperim)의 활약이 컸다.  그러나 이것은 극소수에 불과 했고, 민족적으로 망각된  토라에 대한 민족적인 각성과 부활은, 탈무드에 따르면, 에스라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전수한 자들이 서기관들이 였다. 이들은 헬레니즘의 홍수를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70년경 대 제사장 시몬이 죽자 서기관의 영향도 그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주로 평신도로 구성된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서 사사로이 토라를 공부하였다는 증거가 남아있다.68)


  이러한 독자적인 가르침은, 주전 196년 까지 계속되가 산혜드린이69) 조직된 이래, 이 기관이 종교적 문제를 취급하게 되어, 끝이 났다.  그러나 이미 토라는 유대인의 생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주전 4 세기경 토라가 완성된 때부터 주전 167년 마카비 폭동이 일어나기 까지의 어느 시점에서 토라는 결정정으로 성전을 대치하게되었다.

  성전은 그들과 가까이 있을 수 없었으나, 토라는 그들이 가시적인 신앙의 상징물이 되었다.


  마카비의 성공, 회당의 발전, 예루살렘과 디아스포라의 학교들의 설립, 등의 요소득이 토라 공부의 박차를 가해주었다. 

 

  동시에 토라는 외세에 항거할 수 있는 구심점을 이루었다.

  또한 토라는 유대인을 거룩한 공동체로 묶어주고, 거룩한 계약의 백성으로 굳게 세워주는 지주가 되었다.

그것은 아득히 먼 그들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계약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주후 70년 최후로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유대교가 살아남은 것은 토라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이다. 

 


  2. 토라와 종파들

 

  I.  바리세 파.  예수님 당시에 가장 영향력을 가진 종파이다(행 26:5 참조).

     가.  기원에 관하여

 

   1.  요세푸스는 B.C. 166/159-141년에 활약한 대제사장 요나단의 시대에 바리세파, 사두개파, 엣세네파의 세 종파를 언급하고 있다. 70)

   어떤 학자들은 바리세 (Pharisee)란 명칭은 "구별하다" 혹은 "..로부터 분리된다."란 의미를 가진 페루쉬 (perush)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71)

바리세란  명칭의 최초의 사용은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던 B.C. 135년 으로 거슬려 올라간다. A.D. 70년 이후에는 바리세인의 정신은 계속되었지만  그 명칭은 유대교의 연보 (annual)에서 그 자취는 살아지고 만다.

 

  바리세 주의에 영향을 미치게 된,


  첫째 요인

  바벨론 포로시대로부터  찾아야 한다. 그것은 즉  Torah (율법)이다.

 우리는 그 출발을 매우 아름답게 평가해야 한다. 즉 이스라엘이 형식적인 제사 종교에 깊이 빠져서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면서 야웨의 토라를 경멸한 탓으로 포로의 쓰라림을 경험했기 때문에 바리세라는  종파가 탄생하여 말씀의 종교로 전환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것도 후에는 율법주의로 몰락되어서  예수시대에는 외식하는 무리로서 전락되고 말았지만.


  그들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 성전, 제사종교의 확장으로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 공부를 장려하게 되었다.

  에스라와 느혜미아와 같은 지도자들이 선봉이 되어 전통적인 율법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에 적응하기에 힘썼다.

 

  둘째 요인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nationalism) 요인이다.

즉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율법에 근거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고수하려는 강렬한 애국심에서 외세에 혼합된 종교에서 분리된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바벨론에서 부터 그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후에 헬라시대에 가서도 더욱 강조된 것이다. 그들은 수리아의 군사적 세력에 유다의 민족혼을 고수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민족주의 정신으로 무장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요인; 하시팀의 등장이다.

 이 신앙의 집단은  종교가 세속화하여 가는 데에 경악하였다. 특히 헬라화 정책에 가담한 제사장의 무리들로 인하여...


  팔레스틴의 주요도시에는 상당한 그리스인이 살았다. 요단의 동북부 데가볼리 (Decapolis)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라인이 살았다.  헬라의 찬란한 문화는 유대의 젊은이들을 유혹하고도 남았다. 헬라의 생활방식과 예절과, 어투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그리하여 헬라의 철학과 문학, 종교에 의하여  유대교의 신앙은 도전을  받았다.


  어느 시대에나 한 나라가 타국가에 의하여 통치를 받게 될 때에는 통치자에게 친근히 접촉하는 계열과 그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국수주의가 있듯이, 하시팀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헬라화에 접근하는 유대를 적극 방어하려한 보수주의 자들이었다.


  이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10 율법과 야웨 경외, 조상의 종교와 전통을 고수했기 때문에 마카비 반란 때에 탁월한 실력을 수행하였다.

 하시팀은 마카비 전쟁이후 계속 그들을 후원했으나, 하시팀의 후원에 대한 내력을 잘 모르고 있던 요한 힐카누스 (마카비가문의 시몬의 아들) 의 하시팀에 대한 薄待로 결렬이 되었다( 31 폐지 참조). 요한 힐카누스는 바리세파 후손이였는데, 사두개파에 가담하였다.72) 


  "하시팀"은 이름을 밝히지 안은 바리새파의 선구자였다. 그들의 교리는 전통 유대교의 교리가 되었다.

  아렉산드라 (76-67)의 남동생은 바리세파의 지도자 였고, 그의 남편 알렉산더 얀네스의 유언을 따라 바리세인 유대정책으로 인하여 바리세파는 매우 득세하였다.(p. 32 참조).  요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알렉산드라는 명목상의 통치자였고, 실제적으로는 바리세파가 주도하였다고 한다.73)


   바리세파의 특징은 주전 135 년경부터 유대의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을 이루었다. 그 년대는 힐카누스가 (134-104) 사두개파로 전향할 시기이다.


    (1) 바리세파는 율법이 완전히 준수될 때 메시야가 강림하시며 유대인들이 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된다는 신념을 가르치고 지키고 있었다.

    (2) 그들은 십일조를 엄수하였다.

    (3) 성결을  매우 강조하였다. 죽은 시체를 만진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였고, 

    (4) 어떤 이유로든 불결하다고 여기는 사람과는 접촉을 금지하였다.

    (5) 그들은 이방인이나 다른 파에 속한 평민과의 접촉을 금하였다.        

    (6) 이방인과의 결혼도 금하였다.  헬레니즘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7) 복장을 구별하였다.

 

        마태복음 23장에 그들은 차는 경문(Phylactery)을 넓게하며, 옷술을 크게하였다.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경문(신6:6-8, 11; 출 13:1-16)을 이마에 두르고 손목에 매었다. 경문의 가죽 주머니에서 Shema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 바리세인을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요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그 때에 6000명의 바리세파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바리세파는 유대인의 세계 어느 곳에도 구성원이 있었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무리를 제외하고 제사장직은 가지지 않았다.  모두가 평민이었다.

   바리세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서기관이었다.  이들은 신약성서에서는 바리세인과 서기관이라는 말이 같이 등장한다. . 서기관들의 대다수가 바리세파에 속했으며, 이들은 산혜드린과 민중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바리세파는 예루살렘에는 물론 팔레스틴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들은 국수주의자들이 였고, 또한 그들은 전통적인 종교의 정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상류 층에  있는 사람들은 민중의 힘을 모으고 있는 바리세파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두개파와  바리세파는 피차 경계하고 적대하였다. 


  요한 힐카누스가 임종시에 자기의 아내 알렉산드라에게 사두개파를 떠나 바리세파로 전향할 것을 유언하였다.  그리고 바리세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회복시켜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라 때부터 바리세파는 정계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바리세파는 본디오 빌라도가 두려워할 정도 였으며,  72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의 대다수가 바리세인이 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예수 시대에 그들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는가? (마 23: 참조).

  Mould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하게도 내적인 정신을 도회시하고   외적인 예배 형식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편협하고 비판적이며, 스스로 의인이였으며, 교만하였다.  반면에 십일조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보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였다."74)

 

   바리세파의 서기관들은 그들이 개발하고 전수한 전통적인 규례들을 준수해야한다는 극단적인 강요를 하였다. 그래서 우발적으로 나마 범하지 그 규례들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의 울타리"를 쳐야 했다.


  이에 대해서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바리세인들은 모세의 율법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조상으로부터

       전승된 많은 율레들을 백성에게 가르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바리세인을 배척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는 기록된 말씀 안에 있는 것을 준행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것들을 준수해서는 안된다."75) 

사두개파는 구전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반면에 바리세파는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였다.


  바리세인들은 구약을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드렸으며, 한편  그들은 풍유적인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ion)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조상의 전승을 구약과 동등한 서열에 두고, 그 가치를 높이 인정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풍유적인 해석에 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의 식민지로 있는 국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풍유적인 해석이 발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리세인은 의인의 부활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것도 다분 이해 할 수 있다. 상선벌악의 사상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보상이 없으나 부활의 날에 모두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민중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요세푸스는 "그들은 모든 섭리를 하나님께 돌린다.  그러나 섭리가 모든 행위에 있어서 협력하지만 옳은 일을 행하거나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게만은 "이러한 교리는 바리새파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종교는 율법의 준수에 있었고,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한다는 것이 바리세 주의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종교는 외부적이고 형식적에 면에 흐르게 되었다."76)


   예수 시대의 바리세인의 모습은 극히 외식과 형식에 치우친 것을 볼 수 있다.  장로들의 유전 엄수, 안식일 엄수. 길게 기도 하는 것, 불필요한 십일조,  금식, 결례. 경문을 넓게 하고, 옷술을 크게하고 교만, 탐욕 ,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랍비'라 불리우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들과 같지 않으면 사람을 경멸하였다(마태 23장 참조).

 

 

 II. 사두개파

     유대인의 두번째 중요한 종파이다. 

그들은 구전 율법은 인정하였으나, 서기관과 바리새파의 장로들의 유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도 인정하지 않았다(눅 20:27-40, 행 23:8). 

또한 미래의 심판도 부정하였다.

이들은 바리세파의 중요한 교리는 모조리 부정하였다.

      

    요세푸스는 사두개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로의 유전을 대단히 강조하는  바리새파와는 반대로

        사두개파는 그들이 성전 안에서만 발견하였던 교리들로

        그들의 신조를  국한 시켰다. 

        그들은 기록된 율법만이 준수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77)

 

  사두개라는 명칭은 헬라어의 sadukaioi (의롭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의 zadukim에서 파생했다고 보는 견해와,  다른 한편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이 었던 zadok에서 그 유래를 찾는 이도 있다(대하 31:10; 겔 40:46; 48:11). 사독의 자손들은 포로시대에 세습적으로 제사장 가문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수적으로는 적었으나 학식과 사회적 지위를 겸하여 유다 나라의 계급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의 운세는 시대와 함께 번하였다. 

  요한 힐카누스의 말년과 알렉산더 얀네스(103-76) 때에 그들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친 헬라화에 선두주자들이었다. 본래 귀족들은 외세에 기우러지기가 일수였다.  로마가 유다를 다스릴 때에 대제사장은 의례히 사두개인이 되였고, 특히 주후 60-70년 사이에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 인이 였다.

  사두개인의 본거지는 성전이였고,  바리세인의 본거지는 항상 회당이었다.

 


 III. 엣세내파

  이상하게도 신약에서 엣세네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바리세파나 사두개파와 같은  어떤 사회에 영향력을 주는 그런 집단이 아니였고,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운둔 생활에 기울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인간사회와 극히 제한된 교류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각 그룹(Colony)은 개체의 회당을 가졌고, 식사와 회집을 위한 공동의 장소가가 있었고, 공중 목욕탕을 가지고 있었다.78)


  엣세네 파에 가입을 원하는 자는 세가지의 상징물을 받았다고 한다.  즉 곡괭이, 앞치마, 흰옷이다.  1 년간의 견습 기간을 마친 후에 지원자는 목욕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2년의 견습기간이 지나면 지원자는 공동의 식사에 참여하도록 허락이 되었다.  정규 회원이 되기까지는 내부의 규약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했다.  아이들은 정규회원의 자격을 못 가지며, 다만 교육은 받을 수는 있었다.  회원들에게는 사유 재산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공동의 소유물이 되였다.  대부분의 엣세네 사람들은 자기들의 독특한 옷을 짜서 입었으며, 농사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바리세인들과 같이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왕도 인정하지 않았다. B.C. 21년에 헤롯은 엣세네 사람들에게 자기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엣세네 사람들은 주로 독신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는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금했다. 각도시에는 엣세네 사람의 편의를 위하여 숙박 시설을 설치하고 무엇인가 필요를 충당하여 주었다. 그리고 엣세네 파에는 노예제도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기름 붙는 일이 금지되었다. 매 식사시에는 식전에 찬물로 목욕을 했다. 그들은 동물의 불결을 피하기 위하여 식물성 실로 짠 옷을 입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유지를 위해서 예물을 보내기는 했으나, 종교의식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에 관하여 요세푸스의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에게는 몸은 썩어질 것이며,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일시적이다.  반면에 영혼은 불멸하며 썩어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다.  최선의 정기(精氣) (ether)에서 발산되어진  이 영혼들은 일종의 자연적인 마력에 이끌려 신체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은 마치 오랜 노예의 생활에서 해방이 되듯이 신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기쁨 중에 위로 올라가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인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선한 영혼은 바다 건너편 어느 처소가 예비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비나 눈이나 열로 어려움을 격지 않으며, 바다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부드러운 바람으로 신선해진다고 믿었다. 


반면에 악한 영혼은 음침하고 격렬한 소용돌이의 지옥으로 추방되어 결코 끝이 없는 극심한 형벌을 받게 된다."79)

Tenney는 엣세네 사상은 헬라의 스토아 철학과도 일맥을 같이한다고 말하였다.80)

 


 IV.  쿰란 종파

  사해의 북단 서쪽에 불모의 분지에서  주전 2세기에서 주후 70년까지 이 종파는 번영하였다. 고고학의 발굴로  그들 공동체의 일부 유물들이 발굴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은 수도원 생활을 했고, 그 외에는 그 근방의 동굴에서 생활했음이 드러났다.  특히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그들의 유물은 현재의 성서연구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들은 매시야 대망과 세례를 지키는 집단들(세례요한)과 상통하며, Bruce 와 같은 이는 쿰란에서 새롭게 발견된 유물의 주인공을 엣세네파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겠는가고 말하였다.  Fritsch는 "넓은 의미의 엣세네파라는 명칭 아래 쿰란의 언약 공동체를 포함시킨 것 같다."고 말한다.

 


V. 열심당

   요세푸스는 열심당(Zealots)의 시작을 갈릴리인 유다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그후 6년으로 잡는다.  열심당은 로마에 조공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반대하였다.


  파이퍼 (Robert Pfeiffer)는 열심당의 시작을 로마통치 이전으로 잡으면서, "바리세파가 하시딤의 후예인 것과 같이, 열심당은 마카비 일파의 후예이다."

  그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헬라화 정책을 유대인에게 강요했을 때, 마타디아스와  그의 가문이 열심을 내어 대항한데에 본을 받았기 때문에 그 무리를 열심당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 비느하스 (민 25:11; 시 106:30-)의 본을 그들이 쫓는다고 믿었다.

   A.D 66-73년에 있었던 전쟁에 열심당은 매우 활동적이 였다. 이 반란은 A.D.73 년 5월에 맛사다의 마지막 요새를 함락당하는  것과 함께 끝이 났지만  열심당의 정신은 완전히 근절 되지 않았다.81)

  


VI. 쿰란 계약공동체

    핫시딤에 대해서 언급했거니와 핫시딤 전체가 바리세파에 속한 것은 물론 아니다.  주전 2세기 경에 핫시딤의 전통을 가진 일부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광야로 나가 "의의 교사"라는 지도자 밑에서 생활을 했다는 흔적이 있다.82) 


  이들은 성경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고, 메시야의 시대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새 계약"을 맺어 그들을 서로 결속시켰다.

  이 쿰란 공동체가 어느 파에 속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공동체의 관습, 의식, 신조들을 비추어 볼 때 거의 엣세네 파와 동일한 공동체였을 것이라고 하는 의견이 유력하다.


  그들이 얼마나 토라를 사랑했는가 하는 증거는 거기서 발견된 두루말이가 입증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경건한 무리들의 念願과 기도와 헌신으로 전진해 나가고 있다.

 

 


66) Pirke Aboth, 1:2

67) D.S. 러셀,  임태수 올김,  신구약 중간시대, (서울:컨콜디아사, 1982),  p. 45.     

68) D.S. 러셀,  상게서, p. 42.     

69) 이 기관은 제사장과 평신도들로 구성된 일종의 재판소였다.

70) Josephus, Antiquities, Xiii, 5:9; 10:6; XVII, 1, 3-4; XX, 9:1; Wars, II, 8-14.

71) 레이몬드 설버그, 신구약중간사, 김의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P, 78. 

72) 요세푸스, Antig. XIII. 10, 5-6.

73) 요세푸스, Antig. XIII. 16, 21.

74) Elmer W.K. Mould, Essencials of Bible History (New York: The Ronald Press, 1951), p. 475.

75) 요세푸스, Antig. XIII, 10:6

76) Henry Snyder Gehman,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the Bible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0), p. 742.

77) 요세푸스, Antig. XIII. 10, 6.

78) 레이먼드 설버그, 김의원 역, 신구약중간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91).p. 83.

79) H. St.J. Thackeray, Josephus. The Jewish War .Bks. I-III, (New York: G.P. Putnam's Sons, 1927), II. 11  p. 381-382.

80) Merill C. Tenney, The New Testament, An Historical and Analytical Survey,(Grand Rapids: Wm. B. EerdmansPub. Co., 1956).

81) 레먼드 설버그, 김의원 역, 신구약중간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p. 88.

82) D.S. 러셀,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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