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학
1장
현대 교부학 연구의 동향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가장 권위 있는 유산으로서는 교부들과 종교 개혁 자들의 유산을 들 수 있다. 교부들의 유산에 대해서는 상당히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여 활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이는 모든 프로텐스탄트교회의 일치된 모습이다. 정통 그리스도교들은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니키이아 신앙고백, 아타나시오스 신앙고백을 공통으로 고백하고 교부들의 글들을 자신들의 유산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 분야로서의 교부학은 먼저 ‘교부’라는 호칭은 영적, 정신적인 ‘아버지들’을 뜻하는 존칭으로서 4세기 교부들의 글들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교부들에 대한 다양한 표현으로는 ‘교회의 스승’, ‘교회의 저술가들’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믿음과 교회의 교훈에 대한 진실한 증인들로서 사도들의 신앙 전승의 계승자들이고 이들을 통하여 믿음의 지속과 일치가 이루어졌다.
교부학의 정의와 시대적 범주에 있어 알브레드 스투이버는 교부학에서 교부학을 정의 교회의 가르침을 위하여 증인으로 불러내었던 고대 그리스도교 시대의 모든 저술가들을 일치로서 파악하고, 역사학 방법론의 기본 법칙에 따라 논하는 하나의 신학적인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드로브너는 교부학에서 전분 분야로서의 Patrologie와 Patristik이라는 용어를 구분하려고 노력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부학은 고대 그리스도교 역사에 남겨진 교부들의 문헌을 바탕으로 역사적, 교리적, 사상적으로 조명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교부학 연구의 동향은 아돌프 마르틴 리터는 1990년에 지나간 12년을 회상하면서 아리우스가 되살아나게 되었는가? 라며 감탄하는 소논문을 기술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동안 교부학 연구들이 자신의 글에 자극되었다고 느낄 만큼 4세기 삼위일체 논쟁사에 집중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기 니카이아주의자들은 와를 동일시하여 삼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일치를 위하여 표제어로 사용하였고, 물론 이들은 삼위의 구별을 위하여 특별한 신학적인 표제어를 제시하지 않는 동안에, 후기 니카이아 주의자들은 를 삼위의 일치에 대하여 그리고 를 삼위를 구별하기 위한 개념으로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전 후기 니카이아주의자들 사이에 신학적인 차이가 없음과 어떻게 그 같은 신학적인 적용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현대 교부학 연구의 커다란 변화는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마르틴 루터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하였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한 개 교회들에게 자구어로 미사 집례를 허용하였고, 교리적인 면에서도 자유롭게 연구하고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명성을 얻고 있는 교부학 연구 학회는 교부학 연구 국제회의로서 매 4년 마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리는 학회라고 할 수 있다.
교부들에 대한 오늘날 연구는 놀라우리만큼 높은 연구 성과들을 이루어내고 있으나 아직도 4,5세기 교부들의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또 성경 해석의 역사나 시대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연구보다 교리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다. 제14차 교부학 연구 국제회의를 분석하여 보면, 학문적 연구가 라틴 교부들 중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집중되어 있고, 헬라 교부들 중에서도 세 카파도키아 인들과 칼케돈 회의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에 대한 연구는 관심도는 높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다섯 번째 전 그리스도교 교회회의(533년)에서 그가 정죄되었기 때문에 그의 주요한 신학적인 글들이 불태워지고 오로지 라틴어로 번역된 것들만 남아 있음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교부학 연구 국제회의와 2년 간격으로 4년마다 학회가 열리고 있다.
2장
초대교회와 참회 제도의 발전
서방교회에서는 종교 개혁과 반종교개혁이 있었는데 비하여 동방교회는 종교개혁을 경험하지 못했다.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영국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라는 상호 관련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웨슬리의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미국 감리교 내에서 일어난 성결운동은 진보적 감리교회라는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성결 운동과 이해를 같이하는 성결 운동은 초대교회에서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성결과 성화는 구별된다. 성결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다 본질적인 것이라면 성화는 성결케 만드는 것이다. 성결을 이루는 것을 성화라 할 수 있다.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십자가에 달리서서 죽으시고 장사 지내신바 되었다가 죽음에 더 이상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신 분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당시 메시아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계시되어야만 했다. 여기에서 예수를 위하여 얻어졌던 민족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초기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母)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즉, 그들은 메시아로서 나사렛 예수가 나타나셨다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또한, 거룩이라는 말을 활용하는 데서 신적인 요소와 수직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면 성결이라는 말을 활용하는 데서 인간의 본성과 고유성과 수평적 사고에 더 무게를 두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25에서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15:26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로 칭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자들이라는 인식은 일찍이 자기 이해로써 발전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자기 이해의 변화와 거룩한 공동체 인식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작이고 핵심이었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팔레스틴 출신의 유대인들 즉,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출신들의 ‘헬라파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한 성전 방문하였고, 솔로몬의 행각이 우선적 모임 장소였다. 신실한 율법 준수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성서해석을 받아들이고, 단지 다른 것은 이미 메시아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들 공동체 구성원들은 회개를 권하였던 설교자 나사렛 예수께서 ‘거룩한 처소’인 예루살렘 성전 위에 구름 가운데 ‘인자’로서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재림신앙은 공동체를 함께 구성하고 있었던 헬레니스트들이 스데반의 순교 후에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또한 그들에 의하여 키프로스와 안디옥, 로마 등에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공동체를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핵심 공동체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의 삶은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135년 유대인 민중 봉기의 패배와 함께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거주와 출입이 금지된 ‘아에리아 카피톨리나’로 새롭게 세워졌을 때 새로운 자기 이해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초기 가톨릭교회 시대에 이르러 성령께 감동된 공동체의 삶은 종말론적인 임박한 기다림으로 채워졌고, 그리스도교는 재림의 역사성을 자각하였다. 초기 가톨릭교회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도교는 자기 이해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역사상 어느 때인가 이루어질 대망의 사건으로 해석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선택된 자들이고 불러냄을 입은 자들이라는 깊은 이해가 있었다. 재림의 대망의 쇠약해짐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의 선택 사상은 교회의 개념 안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거룩하게 된 교회 안에서 개인적인 거룩함(성결)은 거룩한 공동체의 바람이었다.
초대교회의 참회론과 성결에 대해서 살펴보자. 참회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신앙에서 하나님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예언자들의 회개를 위한 호소는 신약성서에서 다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서 일어난 종말론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회개를 더 강화시켰다. 그런데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시대에서는 근본적으로 두 번째 참회가 용납되지 않았다. 믿는 이들은 세례를 통하여 ‘청결한 자’로서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에 가담되어졌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자가 그들의 순결과 거룩함을 잃어버리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세례가 ‘회심과 함께 하나의 근본적인 존재의 변화를 전제’해야만 했기 때문에 ‘세례를 통하여 성사되었던 죄의 용서는 종말론적 - 오직 한번뿐인 기회였다. 당시 그리스도의 부인(배교), 살인, 간음과 간통은 공동체에 반하여 용서받을 수 없었던 3개조의 죄들이었다. 그러나 초기 가톨릭교회에서 고대 가톨릭교회 시대로 경과하는 중에 참회 논쟁을 통하여 ’두 번째 참회의 제도화“가 이루어졌고, 로마 감독 칼리스토스는 참회한 간음 죄인들을 허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받아들였다. 그리고 교회는 서서히 ‘두 번째 참회의 제도화’에서 점차 그 내용을 모든 죄들에 관련시켰다.
“헤르마스의 목자”와 참회에 대해서 살펴보자.
초기 가톨릭교회 시대에 대 도시 로마의 상황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가운데 간음죄와 간통죄의 용인과 제도적 개정을 강요할 때에 “헤르마스의 목자”가 나오게 되었다.
140년경에 헬라어로 기술하였고 이 책은 여러 부분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중심 주제를 풍유적으로 집필하였고 가장 중심 주제는 세례 후 지은 죄들에 대한 회개 가능성이다. 그는 참회론에 있어서 ‘하나의 혁신적 중립 위치’를 취한다. 또 엄숙주의에 대항하고 참회가 단 한 번만 있다는 실행에 반하여 세례 후에도 죄들을 위한 참회가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한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그 중심점이 교회론이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회개를 통하여 존속이 가능하다. 세례를 통하여 죄들은 용서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순결의 삶이 가능해진다. 또 그는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그의 교회론에서 진정한 교회는 만물의 창조 전에 선재하였고, 만물을 위하여 하나님이 교회를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죄의 현상에 대하여 헤르마스는 실제의 교회를 하나의 ‘혼합되어진 몸’으로 그리고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공동생활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결, 거룩이라는 용어는 초기 가톨릭교회 시대에서 성도와 관련된 언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 교회, 안식일, 하나님의 보좌 등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가톨릭교회에서 고대 가톨릭교회 시대로 경과하며 있었던 참회 논쟁은 점차 대교회 안에서 세례 후에도 회개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참회 제도를 정착시켜 갔다. 이 같은 대교회의 느슨한 태도는 언제나 엄숙주의 공격을 받았고, 정통 교회는 지나친 엄숙주의자들을 파문하거나 정죄하였다.
3장
서방교회 삼위일체 신학의 효시
테르툴리아누스의 “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
니카이아 회의 이전에 서방 지역 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의 기본적 특징을 설명하려면 일반적으로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테르툴리아누스는 우리가 아는 라틴어를 사용하여 글을 쓴 서방교회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저술가이다.
“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라는 글은 테르툴리아누스가 213년경에 기술하였고 그는 몬타누스 운동에 빠져 보편적 교회에서 떠난 후에 이글을 집필하였지만,
이러한 그의 행위는 물론 몬타누스 운동은 교리적인 문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물론 몬타누스운동은 교리적인 차이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윤리적인 문제가 그 중심이었기 때문에 교리적 문제는 크게 제기되지 않았다. 프락세아스는 213년경에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반박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알려졌다. 프락세아스는 로마뿐만 아니라 카르타고에서도 그의 추종자들을 통하여 영향력을 미치려고 시도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를 ‘아버지 자신이 동정녀에게로 내려오셨고, 그 자신이 그녀로부터 나셨으며, 수난을 당하셨고, 최종적으로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상을 아시아에서 로마로 가져왔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미 몬타누스 운동에 깊이 빠져 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프락세아스는 두 가지 악마의 일들을 로마에서 이행하였는데, 예언을 배척하였고, 이단을 들여왔으며, 성령을 몰아내었고, 아버지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비판하였다. 즉, 프락세아스는 로마에서 공인되었던 몬타누스 운동을 배척하였고 로마교회가 성경 이외에 몬타누스 운동이 주요하게 대변하였던 ‘새로운 예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신앙 규범’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에 대한 적대적 입장에서 마치 이레나에우스가 영지주의에 대항하였던 것처럼 근본적으로 당시 보편적인 교회의 교리상의 진리를 논쟁의 증거로 대었다. 그는 이 ‘신앙 규범’ 안에서 하나님의 하나이심과 삼위에 대하여 강조함으로써 정확한 삼위의 이해를 제시하고 “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에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역사에 따른 삼위의 구별을 분명하게 밝힌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그의 글에서 프락세아스를 반박하기 위하여 인용하였거나 해석한 프락세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주장과 사상을 정리해보면,
첫째, 성부 수난에 대한 내용들이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그 자신이시고 동일한 자 자체이시다”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셋째, 그들의 주장을 펴기 위하여 단일신론의 이름을 유래케 한 말인 하나님의 단독 통치를 강력히 고수한다.
넷째, 그들의 단일신론적 주장을 위하여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가 동일한 자 자체”이며,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 안에서 왔다”는 논리를 편다.
다섯째, 프락세아스의 그리스도론을 살펴보자. 테르툴리아누스의 반박을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페르조나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말한다.
아들은 육체이고, 즉 인간, 예수이시고, 그러나 아버지는 영, 즉 하나님, 즉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육체가 낳아졌고 또한 육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아버지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죽은 자로’ 언급하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이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정죄한다. 여섯째, 그렇다면 프락세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을 어떻게 보았을까? 로고스론을 반박하는 질문을 한다. “그런 까닭에, 당신이 말하기를, 당신은 말씀이 본질이고, 영과 지혜와 이성을 통하여 세워 진다는 것을 동의하는가?” 그들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두 나눠진 자들’을 말하고 ‘한 분 하나님보다 두 나누어진 자들을’ 설교한다고 반박한다.
이제 테르툴리아누스를 살펴본다.
그의 삼위일체 신학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보완한다. 또한 그는 변증가들의 로고스론에 대한 그들의 염려를 떨려 버리고 삼위의 구별을 유지하면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학을 정리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서문에 기록된 로고스는 교회 역사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입증하는 기본 성구 중 하나로 자주 활용되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테르툴리아누스는 적절한 논제를 택하였다.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는 ‘형태에 따라서’ 둘(아버지와 아들)/ 셋(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하지만 그들의 연합과 결합을 강조한다. 그리고 후방 서방교회에 정립된 삼위일체 신앙에 대한 결정적인 가르침인 una substantia와 삼위 각각의 persona는 그의 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substantia’라는 용어를 가지고, “고유의 특성의 버팀목으로서의 하나의 사물의 실재, 하나의 존재의 토대를 생각한다.” 즉, ‘셋이 상호 결합된 것 안에서의 하나의 본질’을 고백한다.
그리고 ‘persona’라는 용어를 가지고 ‘독자적인 개체로서의 하나님의 실재의 형태’를 의미한다. 또한 ‘보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통한 논증을 살펴보면, 프락세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자 자체이시기 때문에 역시 동일한 자 자체라고 주장한다. 또한 요한복음의 해석을 통한 논증은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와 관련 있는 부분이다.
이 구절을 예로 들어 그들은 동일한 자 자체로 해석한다. 그러나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씀이 하나의 페르조나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론을 살펴본다. 테리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영이 동일한 자 자체로서 말씀이 된다”고 주장하고, “영의 이름 안에서 말씀을 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영은 말씀의 본질이며, 말씀은 영의 사역이고, 둘이 하나이다. ‘하나님의 영’은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말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권능’과 함께 아버지를 언급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령론에서 성령에 대하여 ”성령, 신성의 세 번째 이름, 그리고 존귀함의 세 번째 등급, 하나의 monarchia의 선포자, 그러나 oikonomia'의 해석자라고 정의 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에서 당대의 일반 사상에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논쟁의 궁극적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고, 논쟁은 성경 해석의 문제에 귀결된다.
4장
퀴프리아누스의 “카톨릭교회의 일치에 대하여”와 교회론
-최초의 교회론에 대한 책-
“가톨릭교회의 일치에 대하여”의 배경을 보면 라틴 교부 퀴프리아누스는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카에키리우스 퀴프리아누스 혹은 다른 이름으로 타스키우스라고도 알려졌다.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대한 변증서로서 3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부유한 한 로마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이러한 배경 덕에 훗날 박해 시에 귀족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246년경 카르타고의 사제 카에키리아누스의 영향을 받고 스스로 개종하고, 그로 인해 카에키리우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그때까지의 직업을 포기하였고 사제로,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퀴프리아누스는 로마 감독 스테파누스와 이단자들과 분열주의자들에게 받은 세례의 타당성에 대한 차이로 싸움을 하게 되고, 이 둘 사이의 논쟁은 로마교회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켰다. 발레리아누스황제의 박해로 275년에 스테파누스 감독이 순교하고, 퀴프리아누스도 258년에 목 베임을 당해 순교함으로써, 세례 논쟁은 결말을 보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의 일치에 대하여”라는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서론엔 교회의 분열주의자들과 이단자들 앞에서 성도들에게 한 경고와 권면이 있고 그 중심 내용으론,
첫 번째 감독직은 하나이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성도들의 ‘어머니’이다.
셋째, 일치의 근거와 필연성을 역설하고
넷째, 이단자들과 교회 분열주의자들의 속성과 이에 대한 비난을 하고
다섯째, 이단자들 앞에서 조심하고 삼갈 것을 권면했다.
여섯 번째, 배교자보다 더 악랄한 분열주의자를 비난했다.
일곱 번째, 교회 분열주의자들에 빠진 고백자들을 지적했다.
결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고, 그의 교회도 역시 하나이며,
믿음도 역시 하나이고, 몸의 밀집한 일체에로 조화의 아교로 결합된 백성 역시 하나이다.
또한 퀴프리아누스는 교회의 일치성을 강조하였으나 개체 교회의 구별과 다양성을 정리하는데 관심을 갖지 못했다. 이는 시대적으로 그에게 당연한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계속하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부’로 성도들의 ‘어머니 묘사한다. 그와 더불어 그는 “교회를 어머니로서 갖지 아니한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또, 교회 일치의 근거를 삼위일체 신앙 원리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는 그 일치가 “거룩한 불변성으로부터 나오며, 하늘의신비로부터 결합된 이러한 일치”라고 정의한다. 그런 까닭에 그는 교회가 분열될 수도 나눌 수도 없음을 밝힌다.
5장
퀴프리아누스의 “가톨릭교회의 일치에 대하여”
제4장의 전승의 문제와 베드로(로마교회 감독) 수위권에 대한 논쟁
교회 일치에 대하여 연구하기 위해서는 퀴프리아누스의 “가톨릭교회와 일치에 대하여”가 매우 중요한 책이다. 무엇보다 제4장 때문에 이 책이 더 알려졌다.
사본들을 살펴보면 이 글의 제4장과 제5장의 일부가 사본들에 따라 두 종류로 대별되어 서로 다른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위권본문(Primacy Text)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본문(Textus Receptus 공인본문)으로 분류 된다.
이형우는 1987년 퀴프리아누스의 글들을 번역하고 서문에서 두 사본 문제에 대한 최근의 논쟁을 크게 3가지 가설로 압축하고 있다.
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본문이 원본이고 수위권 본문은 후에 교황권 옹호자들이 위조하였다는 가설
② 두 본문 모두 퀴프리아누스의 글로 수위권 본문을 먼저 집필하였고, 그 본문을 로마교회 감독 스테파누스와의 세례 논쟁 시 퀴프리아누스가 수정하였다는 가설
③ 수위권 본문이 먼저이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사본은 다른 이가 위조하였다는 가설이다.
3세기에 전체 그리스도교의 감독들 중에서 로마교회의 감독이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퀴프리아누스의 교회 일치에 대한 소논문 제4장의 수위권 본문이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퀴프리아누스는 어떤 경우에도 베드로의 수위권을 법과 전권 안에서 하나의 우위로 이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 놓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베드로 안에서 감독직의 일치를 목격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모든 감독들에게 전승되는 것이다. 반석인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이고, 감독들 안에서 연합된다. 그리고 퀴프리아누스는 마 16:18-19을 인용하고 “그 후에 시간과 후계들의 교대를 통하여 감독들의 임명과 교회의 제도가 경과한다. 그와 함께 교회가 감독들 위에 세워지고, 그리고 교회의 모든 활동들이 이러한 먼저 임명된 자들을 통하여 통솔된다.”고 했다.
아돌프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sacramentum unitatis'의 개념을 다루면서 ’szcramentum'의 뜻을 오늘의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성례’로 이해하고 ‘szcramentum unitatis'를 일치인 성례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교회 일치의 성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일치인 교회의 성례는 직제의 일치와 함께(베드로 안에서)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퀴프리아누스의 교회는 감독들의 동료 전체를 평준화할 가능성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 위에 놓여 있고, 교회는 그것 안에서 교회의 본질을 갖는다.
퀴프리아누스는 교회 이해에 관련된 용어 ‘ecclesia principalis(최초근원의 교회)'를 교회 일치에 대한 글에는 사용하지 않고 , 교회론에 대한 해석의 양대 대립, 즉 논쟁에서는 언급한다. 결론적으로, 퀴프리아누스에게 있어서 교회의 일치는 하나의 교회에 복수적으로가 아니라 각 개인의 신자들이 동시에 융합된다. 성도들은 사랑 안에서 나눌 수 없게 상호적으로 교회 안에서 연합된다. 다양성은 역행시킬 수 없는 방법으로 일치를 이룬다.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총체 교회 안에 결합된다. 또, 퀴프리아누스는 교회를 명백히 감독직 위에 세운다. 그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이래로 내려오는 엄격한 계급 조직의 직제 구조와 본질과 신비를 중시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베드로의 수위권에 대하여 한 차례 기술하고 있는데 신앙고백에 따른 수위권이며, 서열에 따른 수위권이라고 주장한다. 또 “역시 믿음이 교회의 기초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문이 그를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고백이 음부의 권세를 이겼다는 것은 베드로의 육체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6장
아리우스 논쟁 초기 국면(318-325년)의 아리우스의 사상
그리스도교가 공인(313년)된 후에 아리우스가 야기한 삼위일체 신앙에 대한 논쟁을 그의 이름을 따라 아리우스 논쟁이라 불렀다. 그리고 당시 신학적인 논쟁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었다.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으로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여 고백할 수 있을지 당대 교회는 늘 긴장 속에 있었다. 논쟁을 일으킨 아리우스는 먼저 알렉산드리아 회의와 안디옥 회의, 니카이아 회의에서 정죄되었고 추방되었다. 그는 리비아에서 태어나 공부를 위하여 안디옥에 얼마 동안 있었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영적 교육과 감명을 받았다. 그는 도시의 주요 교회들 중 하나인 ‘바우칼리스’라는 교회를 이끌었으며, ‘성서의 해설과 함께’, 즉 교리문답과 설교의 임무를 받은, 모든 면에서 변증법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이었다. 그의 신학은 알레고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아나고그 성경 해석을 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과 역사적이고 문법적이며 본문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찾는 해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안디옥의 신학과 역동적 단일신론 및 양자론과 오리게네스 좌파적 요소들이 결합된 것이라고 받아 들였다. 오늘날 우리는 아리우스의 세 편지를 소장하고 있다. 그것은 처음 알렉산드리아에서 논쟁이 일어났을 때 후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니코메디아의 감독 에우세비오스에게 보낸 편지와 자신을 비난하는 알렉산더 감독에게 보낸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편지,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보낸 상투적인 편지이다.
첫째, 니코메디아의 감독 에우세비오스에게 보낸 편지의 1장에서는 자신이 부당하게 알렉산더 감독에게 박해를 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2장에서는 자신의 아버지 암모니오스가 니코메디아로 가시는 길에 보내며, 또 편지를 쓴 이유를 밝힌다. 3장에서는 그의 정적들의 판단이 언제나 편파적이었음을 보이고자 노력한다. 4장에서는 그들 자신이 가르쳐 왔고, 그리고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에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알렉산더 감독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이유가 “아들은 시작을 가졌고 하나님은 시작 없이 계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째, 알렉산더 감독에게 보낸 그의 신앙고백을 담은 편지에 그는 자신이 가르친 내용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알렉산더 감독에게 장로인 아리우스와 그 밖에 5명의 장로들, 6명의 집사들과 3명의 감독들의 이름으로 그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편지를 제출한다. 1장에서는 그들은 편지 수신자인 알렉산더 감독을 축복된파파 그리고 우리들의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2장에서는 후에 아리우스주의자들이라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이 아리우스주의자들임을 부정하였던 유사론 주창자들이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예찬의 말과 함께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그들의 정적들을 반박하고자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한 우위성에 대한 아리우스의 술어들을 기꺼이 활용하였던 내용이 기술되어있다. 3장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오해를 막으려는 내용 4장은 삼위일체 신앙 논쟁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반복적으로 문제가 되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그의 고백이 더욱 심도 있게 드려나 있다.
결론적으로 아리우스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단독자이심을 주장하고 그에게 아들은 피조물이나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같지 않고, 그것들보다 앞서 있고, 그것들을 존재케 하는 자이다. 그는 철저하게 아들을 시간 전에 ‘창조된 자, 낳아진 자, 조성된 자, 피조된 자’라고 변호하지만, ‘아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결국 시간적 유한성을 주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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