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음악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글 / 홍정수 교수


1. 시작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주도적 교파들은 미국 교회의 선교를 받고 성장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한국교회의 전제조건을 이루고 있다.

교회음악적으로도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그것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즉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음악을 도입하여 그것을 교회음악의 모델로 삼아 왔다.


미국교회의 찬송가들과 한국교회의 찬송가들은 서로 매우 유사하다. 성가대의 음악 역시 서로 유사하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한국교회가 교회음악적인 면에서 자립적이고 창조적인 면이 현저하게 부족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초기 한국 교회음악의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교회의 창조적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이런 한국 교회음악의 역사를 살피면서 곁들여 한국교회가 보여주었던 교회음악관들을 같이 살필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음악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고, 그 위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해보려고 한다.



2. 역사적 개관


한국 교회음악의 역사에 관해서는 아직 많이 다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앞으로도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국 교회음악사의 정립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한국교회가 교회음악의 자료 보관과 역사 계승, 그리고 연구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음악사의 기술은 쉽지 않다. 여기에서는 현단계에서, 필자에게 가능한 한국의 교회음악사를 살펴보고, 앞으로 올 한국 교회음악에 대해 전망해 보려고 한다.


필자는 한국의 교회음악사를 '유입'('도입'이라해도 좋다)과 '창작'이라는 두 가지 관찰점을 가지고 생각해 보고자 한다. 혹자는 이러한 관찰점이 옳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론은 한국교회에서 연주1)되는 한국인 창작의 교회음악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연주'와 '창작'을 같은 격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필자가 그렇게 본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 첫째 이유는 앞으로 한국의 교회음악이 '유입'과 '연주'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소비적 형태>가 아니라, '창작'과 '연주'라는 <창조적 형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둘째는 한국 교회음악사의 서술은 필연적으로 '창작'을 중심하여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음악사가 활발히 논의.서술되는 때에 이르러서는 '유입'에 관한 것이 주변적일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창작' 중심의 관찰은 음악사가의 주된 임무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 음악사의 큰 흐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제시한다.


(1) 유입 찬송가의 초기 정착단계: 1900년대(중심 시기: 1908년)
(2) 유입 성가곡의 초기 정착단계: 1930년대(중심시기: 1937년)
(3) 어린이 찬송가 창작 시작단계: 1930년대(중심시기: 1936년)
(4) 찬송가와 성가곡창작 시작단계: 광복/전쟁 시기(1940년대 말-1950년초)


여기에서는 시대 구분을 넓게 했다. 그러나 각 시기들은 언제 출판되었는 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구체적 문헌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 문헌들에 담겨있는 곡들은 해당 책에 실리기 이전에, 상당 기간을 두고 사용되다가 채택되었기 때문에 조금 넉넉하게 본 것이다.

하지만 괄호 속에 있는 중심시기는 관계되는 문헌의 구체적 출판 시기이다.


(1) 유입 찬송가의 초기 정착단계: 1900년대(중심 시기: 1908년)
한국교회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온 찬송가들은 19세기의 영미의 찬송가책에 실린 것들이었다. 초기의 한국교회의 음악적 소원은 하루 빨리 부를만한 찬송가들을 갖는 것이었다. 당시에 부닥친 가장 큰 문제는 서양 찬송가에 어느 정도 어색하지 않는 번역가사를 붙이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1908년의 『찬숑가』가 어느 정도 해결해 주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한국교회가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들이 오늘날 사용하는 가사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번역되어 가사가 붙여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시의 찬송가 문제는 무엇보다도 한국말 가사에 관한 것이었다. 외국 찬송가들에 한국말 가사를 잘 붙이는 것은 그 이후로도 계속된 작업이었고, 찬송가 편찬 작업의 대부분이 가사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1908년 이후에도 많은 찬송가들이 발간되면서, 새로운 곡들이 그때그때 더 첨가되었지만, 중심적인 찬송가들은 항상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통일된 단일 찬송가를 출판하는 한국교회의 전통을 최초로 수립한 것이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이 만든 이 책은 1930년까지 사용되면서 영미의 찬송가들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 찬송가책 이후에 나온 다른 찬송가책들이 새로운 곡들을 그때그때 소개했다. 그러나 이 1908년 『찬숑가』 책에 실린 찬송가들의 중심적 역할이 흔들려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 찬송가 편찬 문제들은 1908년에 하던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외가 있다면 상당히 많은 수의 한국인 창작 찬송가 138곡을 소개하려 했던 1995년 년의 증보판 찬송가책이다. 이 책은 교회의 공인을 받지 못하고 폐기처분 되었다. 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즉 한국인이 창작한 곡들을 다루는 것이 얼마나 새롭고 낯선 일인지를 보여준 좋은 예였다. 그 이전에 나온 개편 찬송가에 한국인의 곡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그 수는 전체 찬송가 수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2) 유입 성가곡의 초기 정착단계: 1930년대(중심시기: 1937년)
성가대가 사용하는 번역된 성가곡들은 1930년대에야 그 중심적 레퍼토리가 형성된다. 그 대표적인 성가곡집은 조활용(趙活湧)이 1937년 평양에서 편찬한 『200곡집』2)이다. 이 책은 당시 한국교회에서 불리던 성가곡들을 모은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성가곡들이 오늘날까지도 한국교회에서 불리고 있다. 이 음악들은 '합창으로 하는 노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합창 특유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선율이 합창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다른 성부들은 그 선율에 보조적인 화성을 제공하는 것들이다. 그 선율은 반복하며 나타나는데, 가끔 변주되기도 하고, 조가 바뀌어 불리기도 한다. 그 내용은 가벼운 찬송가 편곡 종류에 해당하거나(「예수 대문 밖에」, 첫 가사는 "주 예수 대문 밖에", 「믿는 사람들아 군병같으니」), 찬송가 수준보다 같거나 약간 더 어려운 음악적 내용을 가진 것들이다. 짧은 전주와 간주가 들어 있으며, 후주는 없는 경우가 많다. 중간중간 독창자가 담당하는 부분도 많다.


이러한 가벼운 종류의 성가곡으로 아직까지 불리는 것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름답다 저 동산」(작곡: Will Thompson, 가사: 산샘),
「행선하라」(C .H .Gabriel),
「도우심을 구함」(C. B. Adams),
「주를 찬송해」(S. S. Myers, 가사 첫줄: "주 찬양하세 온 천하 만민"),
「주님의 크신 은혜 측량키 한없다」(H. Lilienas),
「사공의 노래」(첫 가사는 " 쾌활한 파도에 둥실 떠 있고"),
「찬양하세 찬양하세」(가사: 최동준)
「만세반석 열리니」 B♭
「만세반석 열리니」 D♭
「할렐루야」(헨델),
「신의 영광」(베토벤. 이 책에는 「만민아 경배해」라는 제목으로 실림),
「영화롭도다」(모차르트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합창곡)
「귀한 소식」(T. L. Hall 작곡. 가사 첫줄: "새벽별 아래 들리는 소리")
「거륵한 밤」(A Adam 가사: 산샘)
「기도의 시간」(W. T. Giffe, 남성합창곡. 가사 첫중:"주 앞에 꿇어 업대어")


여기에 거론한 것은 아직도 대단히 많이 불리는 곡들이다. 이보다 덜 불리는 곡들은 여기에 소개하지 않았다. 간주가 없는 곡들은 대개 찬송가들인데, 그 중 많은 곡들이 후일 찬송가책들에 편입되었다. 후에 찬송가에 실려 널리 알려진 곡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가사 첫줄을 소개함):


"기를 손에 높이 들고"(J. R. Sweny 작곡 : "군기를 손에 높이 들고"), "浮雲같은 세상에 그 부귀와 영화",

"한 복지 있으니 저 먼델세" ("내 본향 가는 길"),
"저 요단 강 건너편에 화려하게 빛난 집",
"그 밤 고요히 잠자는 그 날 지날수록" ("내 영혼의 깊은 곳에"),
"저 캄캄한 밤 사망 그늘 아래"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영화로신 주예수의"(제목: 「오 갈보리」),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행군할 나팔 불고",
"죄짐을 벗고서 나가려나"("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기묘하신 주의 빛으로"("내 영혼에 햇빛 비치어"),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름들 가운데 귀한 것 예수니"("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갈보리 십자가 할렐루야 할렐루야"(작곡: J. McGranahan. 개편 찬송가(1967)에 작곡자 이름표기 없이 "주님의 십자가"로 실림)


또한 세속노래에 가사를 붙인 곡들도 많이 있다. 당시에는 이러한 일이 아주 흔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 유입된 일반곡들에 교회음악적 가사가 붙인 것은 무기명으로 기록된 것도 있지만 최동준, 김형준, 홍영후와 같은 음악가의 이름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사붙이기 작업도 일말의 '창조적' 성격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들이 후에까지 불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


「거륵한 구주」(「희망의 속삭임」에 성가 가사를 붙인 것),
「천국이 가까음」 (미국 민요 「올드 블랙 조」에 가사를 붙인 것. 가사 첫줄: "하늘나라 지금 가까웠으니"),
「주여 어서 오소서」(하와이 민요 「알로하오에」에 가사를 붙인 것. 가사 첫줄: "주는 신실한 증거 되사") ,
「영생포구」("朝鮮古曲"에 가사를 붙인 노래. 가사 첫줄: "배 떠나간다"),
「주님을 찬양함」( 바그너의 『탄호이저』 중 「순례자의 합창」에 가사를 붙인 것)
「승리의 행진」(베르디의 『아이다』 중 「개선 행진곡」에 가사 붙인 것)
「평강의 왕」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중 「대장간의 합창」에 가사를 붙인 것. 가사: 최동준 김형준)
「삼위일체께 찬양함」(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중 대행진곡에 가사를 붙인 것. 가사: 홍영후)


(3) 어린이 찬송가 창작 시작단계: 1930년대(중심시기: 1936년)
한국인들이 자신의 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그보다 훨씬 더 늦다. 즉 한국인들이 교회음악에 참여하는 것은 주일학교 찬송가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어른들을 위한 찬송가 작곡을 거의 보여주지 않은 반면, 상당수의 어린이용 찬송가들을 남겨 놓았다. 30년대의 어린이 찬송가책이나 동요집에 나타나는 어린이용 찬송가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많은 한국인들의 참여가 눈에 띤다.


30년대에 나온 어린이 찬송가 중에는 강신명의 『兒童 歌謠曲選 三百曲』(1936)3)이 단연 가장 많은 양을 가진, 그리고 널리 쓰인 모음집이다. 이 책은 어린이들이 부를 수 있는 모든 노래를 모아 두었는데, 그 중 제1부는 주일학교에서 쓰는 어린이 찬송가 100곡이 실려 있다. 물론 여기에는 어린이 찬송가로 발상 되지 않은 교회용 계몽노래도 섞여 있다. 즉 안신영 작곡 작사의 「농촌가」, 박태준 작곡작사의 「금주가」, 그리고 양주동이 외국 찬송가에 가사를 붙인 「절제운동가」와 같은 것들이다.


○ 박태준(朴泰俊) 4곡,
「교가 no.1」, 「생일축하가 no.1」(박태준 작사), 「생일축하가 no.3」(박태준 작사), 「우승가 no.2」(박태준 작사),

○ 탁창신(卓昌信) 1곡,
소년소녀 성경 구락부가(李聖柱 작사)

○ 이순도(李順道) 6곡,
「아침기도」(이순도 작사), 「참새노래」(이순도 작사), 「부르신다」(이순도 작사), 「우리 주님」(이순도 작사), 잠들기 전」(이순도 작사), 꽃주일」(이순도 작사)

○ 강신명(姜信明) 3곡,
「감사찬송」(이성주 작사), 「아 좋을시고」(강신명 작사), 「우승가 no.5」(강신명 작사)

○ 안기영 1곡
「감사일 노래」(방인근 작사)

○ 홍난파 1곡
「크리스마스 종」(주요한 작사)

○ 이흥렬 1곡,
「탄일노래」(김수만 작사)

○ 현재명 2곡
「감사」(백남석'白南奭' 작사), 「가을」(백남석 작사)


그리고 작곡자가 "종교교육부"라고 적힌 "全鮮夏期兒童聖經學校 校歌"인 「더 배우세」는 한국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박태준의 곡은 풍금 반주가 붙어 있거나(3곡), 찬송가식 4성부의 음악을 보여준다(1곡). 현재명의 2곡도 모두 풍금 반주가 붙어 있는 것들이다. 나머지는 선율만 그려져 있다.


작곡가 이름이 없는 곡들도 한국인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곡들이 있다. 특이한 것은 말스베리 선교사가 오음음계로 작곡한 것도 있다(「예수같이 되기 원해」 소안론 선교사 작사). 이 곡들이 정확히 언제 작곡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30년대에 들어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사 말을 쓴 사람으로는 이성주, 방인근, 윤복진, 김수만, 백남석(白南奭), 오형택(吳炯擇). 이순도, 박태준 등이 보인다. 여기에 실린 여타의 "어린이 찬송가" 중 많은 것들이 기존의 일반 찬송가들에 새롭게 가사를 붙인 것들이다. 그러나 이 곡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일반 동요들이 거의 한국인 작곡의 음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의 동요가 거의 한국화 된 상태를 보여주고, 주일학교 노래는 덜 한국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명이 편집한 『아동 찬송가』(1936)4)는 깨끗하게 인쇄된 책으로 모두 101곡을 보여주는데, 대부분은 서양민요에 어린이용 찬송가 가사를 붙인 것들이다. 거기에는 일반 찬송가도, 어린이 찬송가도, 흑인영가들도 들어 있다. 현제명의 주된 작업은 가사를 어떻게 붙이느냐의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들어 있는 한국인 작곡의 찬송가들은 다음과 같다:


○ 박경호 3곡
「조선의 꽃」, 「어린 백합화」, 「동화 감사가」(가사 첫 줄: "아 재미있어라"), 「우리 교장 예수」, 「선물」.

○ 현제명 3곡
「가을」, 「연보기도」, 「아멘』

○ 이상준 1곡
「가자 어디로」


위의 곡들이 누구의 가사인지에 관해서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현제명의 『아동 찬송가』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특이한 현상을 보여준다. 즉 뒷부분에는 일반 피아노 곡이 실려 있는 것이 그것이다. 슈만의 「Traumerei」, 멘델스존의 「Confidence」, 쇼팽의 「Prelude」(작품 28 6번), 벨리니의 『Norma』 중 「Grand March」가 실려 있다. 이러한 특이한 점은 당시에 피아노 곡을 구하기 어려운 실정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당시에 교회용 책에도 일반 음악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강신명의 책에는 어린이용 동요를 주일학교용보다 더 많이 실었고, 현제명이 『아동찬송가』에 피아노 음악을 싣는 일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이런 점을 교회가 지탄했다고 하는 기록은 읽을 수 없다. 이런 일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거기에 대해 대책을 세우거나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어린이 찬송가책에 이 정도의 수라도 한국인 곡들이 들어간 것은 일반 찬송가책을 편찬할 때와 같은 교회의 관심을 덜 받았다는 점이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전체 교회의, 또는 각 교단의 관심을 받았다면 한국인 작곡의 찬송가들은 책에 실릴 가능성이 더 적었을 것이다. 등사본인 강신명의 『兒童 歌謠曲選 三百曲』이나 인쇄본인 현재명의 『어린이 찬송가』 책들은 모두 개인이 만든 것들이다. 물론 후자는 "장로회 종교교육부"가 발간한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기는 하지만, 현제명 단독으로 편집한 것이었다. 당시에 이 책들은 어린이들이 교회에 갈 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책에 실린 노래들은 각 교회들에서 큰 글씨로 쓰여진 궤도로 만들어져 어린이들이 거기에 적힌 가사만 보고 노래를 불렀다. 책들은 풍금 반주자나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사용했다.


1930년대는 한국인이 본격적인 교회음악을 작곡한다는 생각을 펼 수 없었던 시대로 보인다. 당시의 이름난 한국 음악가들은 20대가 주류였으며, 30을 넘는 사람들은 거의 "원로"라 이름할 수 사람들이었다.5)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의 한계를 정해 두고 있었고, 사회에서도 본격적인 음악 작곡을 이들에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물론 당시에도 작곡가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당시의 한국인들이 작곡한 교회음악은 -어린이 찬송가 종류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최동준
찬송가 「안식일 노래」 1917.6)

○ 홍난파7)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찬송가 편곡(모두 1933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갗이 곕소서」, 「하날 가는 길」, 「영화의 신」, 「눈과 같이」, 「찬양하라」(미완성)

○ 조두남: 4성부 성탄노래.8)

○ 현재명: 독창곡 성탄노래.9)


위와 같은 음악들은 위의 작곡가들의 작품들 중에서도 중심적인 것이 아니었고, 한국 교회가 이런 음악을 요구하여 나온 것도 아니었다. 최동준이 작곡한 찬송가는 교회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곡이 찬송가책에 실려 전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홍난파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찬송가 편곡은 오늘날까지도 그가 손수 쓴 수서본(手書本)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곡들은 전도 운동에 오래 동안 참여했던 그가 바이올린으로 찬송가를 연주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두남의 성탄 노래는 그가 작시자인 하도원 목사와 함께 『영가집』이라는 곡집을 편찬하면서 맨 처음 곡으로 자신의 곡을 넣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머지 곡들은 모두 서양의 이른바 널리 알려진 "명곡"들에 교회적 가사를 붙인 것들이다. 이렇게 이미 있는 서양 노래에 교회적 가사를 붙이는 것 중 조두남의 『영가집』이 아마 가장 두드러진 경우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1930년대는 ①유입 성가대 음악, ②이미 있는 찬송가와 유사한 새로운 찬송가의 유입, ③이미 있는 세속음악에 교회적 가사가 붙여진 음악, ④어린이 찬송가의 창작의 특징 지을 수 있는데, 특히 ③번 현상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교회음악의 혼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유럽을 포함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발생하는 모든 문화권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4) 찬송가와 성가곡 창작 시작 단계: 광복/전쟁 시기(1940년대 말-1950년초)
한편 한국인이 일반 찬송가와 성가대용 합창곡을 만드는 것은 1940년대 말에 이르러야 나타난다. 그 뚜렷한 증거는 박재훈이 -부분적으로 장수철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1947년부터 연속적으로 발간한 『찬미』 시리즈물을 들 수 있다.


이 시리즈물의 출판 작업은 전쟁 이전인 1949에 한번 더 있었고,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부터 1954년까지는 매해 출판이 되었다(1951년의 제3집과 1952의 제4집은 장수철과 함께 공동 저작했다). 전쟁도 이 작업을 막지 못했다. 박재훈은 1954년도에 칸타타 두 편을 세상에 내어놓기도 했다(『고난의 주』와 『크리스마스송』).10) 그는 1957년에 다시 성가대를 위한 찬송가를 편곡한 『찬송가 합창곡집』(찬미사 발행)을 출판했다. 이 곡집은 제3집까지 나왔다.11)


박재훈이 60년대에 다시 성가집들을 출판하지만 그것들은 번역된 성가들을 다시 묶는 것이었다. 이는 창작 성가집의 발행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찬미』 성가집의 발행은 한국 교회음악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뜻한다. 여기에 실린 곡들은 물론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번역된 찬송가나 성가곡과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스스로 찬송가와 성가곡들을 쓰려고 한 정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한국음악가들은 -어린이 찬송가가 아닌- 일반 찬송가나 성가곡을 쓸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거나 극소수 시도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곡들은 다음과 같다:

「송영」(작사자에 관한 기록 없음. 찬송가책들에서 보는 일반적인 송영과는 다른 가사임. 음높이로 보아 성가대용으로 보임),


「주여 날 품어 주소서」(작사: 黃仁淳),
「어서 돌아오오」(작사: 田榮澤),
「십자가를 생각함」(작사: 박재훈),
「아기예수」(작사: 具斗會),
「오늘 사신 주님」(작사: 박재훈),
「어린양」(박사: 朴在奉),
「주의 발자취」(작사: 田榮澤),
「부활송가」(작사: 田榮澤)


위의 곡들의 작사자 역시 모두 한국인이다. 그 중에서도 전영택은 3개, 박재훈은 2개의 가사를 쓴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노래들 중 「어서 돌아오오」는 유입된 찬송가 이상으로 한국 교회가 자주 부르는 것이 되었다. 음악적으로 보면 위의 아홉 곡 중 1번 「송영」과 9번 「부활성가」만 성가대용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찬송가 종류들이다. 그러니까 음악적으로 보아서는 대단히 소박한 출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찬미』 제 1집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찬미는 하나님이 人生에게 주신 모든 恩賜中 가장 貴한 것 中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찬미는 靈魂이 기쁠 때에 感謝의 표현으로 또 슬프고 괴로울 때에 말할 수 없는 歎息의 祈禱의 呼訴가 말과 곡조로 나타난 것이다. 故로 眞正한 찬미는 입설과 儀式과 感情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靈의 움직임이오 眞實된 生活의 具現이다. 이제 不肖한 사람이 찬미를 이 땅에 내어놓는 것은 信仰界의 先輩와 同志들의 뜨거운 信仰告白의 一部面인 영의 노래를 不足한 솜씨로 곡조를 부처 우리 敎界에 紹介함으로 우으로 주님께 榮光이 되고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되어 지기를 빌면서 시작한 것이다. [중략]"


박재훈은 스스로 만든 작품들에 관해 민족적인 동기가 아닌, 신앙적 동기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찬송가들과 성가곡들은 의도적으로 민족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있다. 이는 같이 『찬미』를 편찬한 일이 있는 장수철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성향은 이들보다 약간 뒤늦게 작품들을 보이는 이동훈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박재훈은 1960년대 중반에 가서야 "한국적인" 교회음악에 대해 눈을 뜬다.12)


한국적인 것을 강조한 사람은 1950년대 초에 한국 전쟁을 경험하면서 독창용 성가곡을 쓰기 시작한 나운영이 대표적이다. 그는 작품과 글에서 모두 한국적인 것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상당한 정도로 예술 지향적인 교회음악을 보여 주었다. 나운영의 최초 가곡집 『아흔아홉 양』은 1952년 전쟁 중인 부산에서 등사본으로 나왔다. 여기에 실린 그의 성가 독창곡 「아흔아홉 양」은 한국어의 억양을 살린 레치타티보적인 앞부분과 아리아적인 뒷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뒷부분은 명확하게 한국적인 리듬을 보여준다. 이 곡은 아주 쉬운 찬송가에 붙은 장절 가사를 일관적곡된 음악으로 만들었는데, 가사의 내용에 따른 노래와 반주는 당시의 한국 가곡이 가지지 못했던 상당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나운영은 이어서 1954년에 가곡집 『다윗의 노래』를 발표한다.

 여기에는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모두 시편에 음악을 붙인 가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호와여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누가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피난처 있으니」


이 곡들에는 서로 다른 기법들이 사용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한국어 낭송에 대한 나운영의 실험을 볼 수 있으며, 선율과 화성의 면들도 서양적 성격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6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에 광범위하게 불려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도 매우 단순한 음악이지만 서양의 교과서적인 화성을 벗어나 있다. 이 노래는 삼화음의 맨 아래 음을 바탕음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맨 위의 음을 중심으로 3도씩 아래로 쌓은 것이다.13) 이렇게 나운영은 기존의 음악기법으로부터 벗어나는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고, 그러한 모색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3. 교회음악을 동반한 교회음악관들


1950년대에 한국 교회음악은 -'실용적인' 박재훈과 '예술적인' 나운영과 함께-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이들의 작업은 계속되었고, 다른 작곡가들도 나타났지만, 한국 교회음악의 창작적 부분은 아직도 교회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하고, 외곽에 머물러 있다. 그보다는 즉 1905년대에 그 기초가 이루어진 유입 찬송가들과 1930년대에 기초가 형성된 번역 성가곡들이 아직도 교회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번역 찬송가들과 성가곡들은 몇 단계에 거쳐 더 첨가된 레파토리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찬송가는 『개편 찬송가』와 『새찬송가』를 거치면서 기존 찬송가들에 새로운 곡들이 더 첨가되었고, 번역도 꾸준히 다듬어져 왔다. 유입 찬송가들의 위치에 큰 충격을 준 것은 한국인 창작 찬송가들이 아니라, 70년대 말과 80-90년대에 그 유입이 계속된 이른바 "복음성가"(20세기 대중음악적 찬송가)들이다. 그리고 번역 성가곡들도 꾸준히 확충되었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는 많은 흑인영가들이 소개되었고, 80년대에는 대중음악적 요소가 가미된 미국의 음악이 소개되었다(예를 들어 존 루터의 합창곡들). 물론 이러한 곡들을 주로 싣고 있는 찬송가책과 성가곡집에는 한국인들의 곡이 들어 있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한국 교회음악의 전환기인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기간은 단순히 한국인이 본격적으로 교회음악을 창작하기 시작한 것만은 아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교회음악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고, 그 바뀐 사실들이 실제로 발간된 악보집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음악관은 전환기 이전에는 <전도>, <예배>, <생활>의 관계를 매우 강조하는 성격을 지녔었다.14)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전환기 이후에 조금 퇴조한다. 물론 목회자과 일부 음악가들은 아직도 이러한 음악관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심점이 <예배>에 집중되어 있다. <전도>와 <생활>에 관련된 교회음악을 말하는 사람들도 그 우선권을 <예배>에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교회음악인 전도나 생활에 관련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15)


위와 같은 교회음악관의 변화를 악보책들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해방 이전의 성가집들은 많은 경우, 세속음악을 한꺼번에 같이 싣는 경우들이 많았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성가대원이었던 한영길(韓永吉)과 박경호(朴慶浩)가 발간한 음악이론서 『음악대해』(音樂大海, 1923)가 교회음악과 일반 음악을 모두 포함한 것, 강신명의 『동요곡집』, 조활용의 『200곡집』 등이 모두 이른바 세상의 동요나 "명곡"들을 싣고 있다. 또한 조두남과 하두원은 외국 "명곡"들을 교회화하려고 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시도들은 많은 경우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찬송가의 일부는 원래 세속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면서 찬송가가 되어 오늘날까지 긴 생명을 누리는 것들도 있다(찬송가로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등, 성가곡으로는 바그너의 『탄호이저』 중 「음악의 전당」). 이런 현상은 심지어 '찬송가'라는 명칭을 달고 나온 현재명의 『아동찬송가』에도 그런 현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출판물들이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혼합하여 편집한 것은 당시 교회가 클래식 음악의 경우 세속음악과 교회음악의 정확한 구분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마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런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몰랐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특히 음악가들은 그런 구분을 뚜렷이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지 않았다. 물론 음악가들은 클래식이 아닌 세속음악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지고 말했다. 음악가들은 클래식적인 일반음악을 배우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문헌상으로 모면, 당시의 교회가 일반 음악까지도 배우고 접하는 것을 암암리에 용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이 양악 초기에 나타난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기독교인들인 것을 쉽게 이해하게 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광복/전쟁 이전의 한국교회가 가진 교회음악관은 <전도>, <예배>, <생활>의 세 가지 개념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중 <전도>와 <예배>는 거의 같은 정도로 중요했다. 교회음악과 관련되어 이 두 개념들이 서로 배제적인 방식으로 사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초기 한국 교회가 불렀던 노래들을 생각해 보면 실제상에는 <전도>가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한국교회의 찬송가책에 <전도용>이라고 생각되는 복음성가가 <예배용>이라고 생각되는 곡들보다 더 많은 것은 그러한 역사의 흔적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생활상의 교회음악>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선교사들과 상관없는 한국인들의 교회음악관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예배적>으로만 생각되는 교회음악과는 다르게 일정한 형식과 상관이 없고, 삶의 모든 상황과 관계된 교회음악을 말하고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에도 찬양이 필요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만 교회음악을 대하지 않은 것이고, 인간의 정서적 측면까지도 찬양 안에 포용시키는 것이다. 찬양은 정서와 매우 가까운 것이지만 찬양론은 흔히 논리적이기만 할 때가 더 많다. 이런 부족을 한국교회의 음악론은 잘 메웠던 것이다. 조순천은 1930년대 교회음악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만 함축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교회음악론의 세 요소, 즉 전도, 예배, 생활에 대해서 다룬 글을 썼다. 그는 당시 아직 신학생의 신분으로서 당시 교회음악론을 핵심을 말할 수 있었다.16)


한국 교회가 최근에 경험한 가장 큰 사건은 이른바 "복음성가"에 관한 것이다. 특히 80년대 이후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20세기 대중음악적인 복음성가는 그전에 누구나 세속음악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기존 찬송가책들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전도적 내용과 환경이 반영된 "19세기 복음성가"까지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던 터에, 새로운 20세기적 "복음성가"에 대한 비판은 더욱 광범위하고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복음성가를 비판하는 방식을 그대로 새로운 음악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20세기 복음성가들은 19세기 복음성가의 내용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예수님과의 만남을 고백적으로 말하는 내용에서는 19세기 복음성가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또한 전도적, 선교적 노래도 많이 있다. 그러나 더 많은 20세기 복음성가들은 19세기의 것과 음악도 달랐지만, 가사 내용 또한 매우 달랐다.


가사내용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과 성구, 그리고 이른바 "경배찬양"이라 불리는 종류들은 그 내용이 "하나님 찬양"으로만 되어 있다. 이런 점은 한국에 유입된, 영미에서 주로 불리는 것들도 그러했고, 한국인에 의해 작곡된 것들도 그러했다. 외국의 복음성가들의 분류도 어렵지만, 한국에서 작곡된 복음성가들도 하나의 틀에 가둘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젊은이들의 것에서는 -흔치는 않지만- 이미 랩과 같은 음악도 나와 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다양한 음악들이 교회음악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년들이 즐겨 듣는 복음성가까지도 있다. 또한 어떤 것은 조금 클래식한 방향의 것도 있다. 그러니까 그 흐름이 대단히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교회음악가들은 일반적으로 세속음악 양식을 확실히 구분하고 그것의 교회 유입을 막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이 세속음악이냐는 저마다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길선주 목사는 모든 음악이 하나님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세속음악까지도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음악론을 얘기하면서 세속음악과 교회음악,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전혀 구분하지 않았다.17) 이런 폭넓은 교회음악관은 서양의 교회사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으로, 예를 들어 루터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 어떤 작곡가들에게 한국의 민속음악은 세속적이냐 아니냐하는 범주에서 벗어난, 우리 교회가 사용해야할 음악양식이다. 그러나 다른 작곡가들에는 한국의 모든 음악이 무당이나 사탄의 음악이다. 그러나 세속음악의 범주에 드는 것에는 더 뚜렷한 것이다. 그것은 유행음악(대중음악)이다. 세속적 유행음악은 오래 전부터 교회에서 금기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회음악에서 세속음악에까지 가사를 붙여 교회음악을 사용하던 30년대에도 세속음악에 대한 비판은 조금 있어 왔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광복/전쟁 이후 더욱 많아진다. 이는 차츰 음악의 종류에 대해 눈을 뜨는 한국교회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한국의 교회음악작곡가들이 작곡하는 찬송가들의 경향을 보면 완연히 전통음악적인 면이 많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 전통음악적이냐 하는 문제는 작곡가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순수 국악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단히 전통음악적이다. 악기도 옛 악기, 창법도 옛 방식을 그대로 사용한다. 하지만 양악을 배우고 한국적인 것을 '의도하는' 사람들은 옛 악기나 창법에 별 관심이 없다. 한국적이려고 하는 이들의 노력은 -소박한 경우- 5음음계 선율, 일정한 3박자 그룹 등을 통하여 표출된다. 그러니까 선율과 리듬에서 어느 정도 '한국성'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 장단에 충실한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나운영의 경우는 장단은 물론 화성까지도 "한국적"일려고 노력했다.)



4. 한국 교회음악의 현재상황


한국에서 작곡되는 교회음악을 보면 이제 실로 다양하다.

1) 기존의 서양음악적인 교회음악
2) 전통음악적 교회음악
3) 대중음악적 교회음악
4) 현대음악적 교회음악


이렇게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지만 앞에 말했듯이 이 네 방향 안에서도 각각의 다양한 흐름이 존재한다. 또한 이들 그룹간에, 또는 각 그룹 안에서도 서로 간에 자신의 음악이 더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다.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음에도 실제로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1)번 그룹의 음악이다. 또 그런 음악 중 실제로 빈번하게 울리는 것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이 아니라, 실용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즉 찬송가이든지 성가곡이든지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부분에서 무조건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때에 따라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음악들은 한국 교회의 회중이 익숙하게 부를 수 있는 것, 그리고 음악적으로 아마추어인 성가대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선곡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앞으로 한국인에 의해 창작되는 이 방향의 교회음악이 양적으로 많이 나올 것이다. 이미 자주 부르는 한국인 창작의 성가대 합창곡들이 있지만, 아직 그 수는 -유입된 성가곡에 비해- 많지 않고, 불리는 것들 중에서도 얼마나 그 생명력을 유지할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 보인다. 실용적인 방향의 교회음악이 계속 작곡될 것이다. 교회음악은 단지 예술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불리는 것들 중에서도 더 나은 곡들을 기대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불리는 것들도 끊임없이 재편곡되어 개선될 필요는 항상 남아 있다. 사실 어느 음악이나 최초에 작곡된 상태 그대로 불리거나 연주되는 것보다는 항상 새로운 편곡을 통해 개선되어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이는 교회음악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18)


한편으로 1)번의 음악들은 감정적인 상승작용을 쉽게 불러일으킨다. 찬송가들은 아주 조용히 음미하며 불리는 일이 드물고, 그렇게 노래하면 신앙의 열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기 쉽다. 어찌 됐든 찬양이란 "크게" "열정적으로" 불러야 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교회 안에는 많이 있고, 또 그렇게 주장하는 목회자들도 볼 수 있다.19) 이는 한국 교회가 많은 부흥회를 경험하면서 갖게 된 생각으로 판단된다. 한편으로 성가대 역시 쉽지만, 음악의 끝에 감정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음악을 선호하는데, 이는 신도들이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대가 충족되면 신도들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음악 자체와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연주하느냐와도 관계가 깊다.


감정에 치우치는 음악과 연주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는 그런 음악이 사람 듣기 좋으라고 하는 것이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양"이라는 말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있다. 이들은 조용한 음악을 요구하는데, -예를 들어 16세기 모테트와 같은- 본질적으로 조용한 음악은 신도들과 같은 호흡을 할 수 없는 어려움에 놓인다. 그러니까 이러한, 음악가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대안적 음악은 한국교회에서 아직 낯선 것이다.


2), 3), 4)번의 음악은 모두 1)번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로 보인다. 그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이 3)번인데, 이는 젊은이들 층에서 거의 일반화된 음악형태가 되어 있다. 보기에 따라서 이 부분은 마치 1930년대에 있었던 세속 명곡에 교회적 가사를 붙인 것과 유사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30년대의 것과 다른 점은, 이미 있는 곡을 쓰지 않고, 새롭게 작곡하여 쓴다는 점이다. 30년대의 음악은 당대에 별로 비난받은 흔적이 없다. 당대에는 -홍난파, 최동준, 김형준, 조두남과 같은- 음악가들이 클래식 음악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의 대중적 교회음악은 초기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으면서 교회에 들어왔다.


이 음악에는 질적이 편차가 여러 가지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연주할 모든 성부들을 작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선율만 작곡한다. 최덕신, 박윤호, 박정관, 김석균, 최용덕, 백승남, 고형원, 안순 등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정도와 성향의 대중음악적 방식으로 작곡했고 작곡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지향하는 나이층도 다르고, 교회음악적 활동범위도 다르다. 크게는 젊은층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김석균과 최용덕의 노래들은 40-50대의 장년 세대가 선호한다.


이런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CCM처럼 대중음악의 일부로 생각하지는 않고, 교회음악의 일부로 파악하고 있다. 아직 이 음악을 한국교회에서 대예배에 사용하는 일은 많지 않다. 가끔 청년들을 위한 대예배를 따로 드리는 곳이나, 이른바 "열린 예배"를 드리는 곳에서는 이미 기존의 예배음악을 대체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폐회하면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교회는 더러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소수의 현상이다. 하지만 소예배(수요예배, 저녁예배, 청소년 예배 등)와 전도집회에서는 복음성가의 활용도가 매우 높다.


한편 위와 같은 토론에서 제외된, 대중음악을 사용하는 그룹들은 초기에는 아무런 이론적 응수를 하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야 교회음악적 대중음악을 이론적으로 옹호한다. 그리고 이들의 내부에도 여러 가지 다른 교회음악관들이 표출된다. 즉 이들도 자신들이 예배음악임을 주장하는 그룹(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예배음악론적 방향'을 따른다기 보다는 자신들이 가능한 음악을 실제로 행하는 그룹이 더 많다(주찬양 선교단 등). 다른 한편으로 80년대에는 현실개혁적 방향(뜨인돌, 새하늘 새 땅)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대중음악적 교회음악은 젊은 층의 사람들이 기존 교회음악인들이 하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다음으로 성공적인 것이 2)번인데, 이는 이미 한국인의 찬송가 작곡에서 다수의 방향을 점하고 있다. 한국의 찬송가 작곡가들을 보면, -각각 방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적인 것'을 의도하고 있다. 나운영, 김국진, 나인용, 오소운, 문성모, 이건용, 이영조 등이 그런 경향을 보인다. 또한 1965년 이후 박재훈도 -초기의 경향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한국적인 교회음악'을 의도하며 작곡하고 있다. 한편으로 꼭 한국적인 것을 주장하지 않을지라도 가끔 '한국적 음악'을 쓰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한국적인 성격의 음악을 절대적으로 안 된다고 배격하는 사람은 최근에 들어와서는 소수에 불과하다. 광복/전쟁 이전에는 한국적 교회음악을 주장한 사람들이 1900년대의 길선주와 게일(Gale) 선교사, 1930년대의 구왕삼 정도로 소수였다. (물론 당시에도 -그런 주장을 펴지 않으면서도- 5음음계를 사용한 정도로 한국적 음악을 실제로 시도한 사람들이 없지 않다. 예: 박태준).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당시에 크게 들리지 않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4번) 현대음악적 방향일 것이다. 이 음악이 갖는 근본적인 어려움은 주로 실용음악의 성격을 가진 교회음악에서 비실용적인 "독창성"에 집착하는 "현대성(모더니즘)"이 크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음악으로 대단히 성공적인 교회음악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예: 펜데레츠키, 페핑). 한국의 교회도 이런 음악을 가질 수 있으면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여건이 대단히 불리해 보인다.


클래식을 대학에서 공부하고 그런 방향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대중음악적인 교회음악에 대해 꾸짖고 규탄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음악이 세속적이라고 보는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의 방향이 다를 경우에도 세속음악에 대해 일치된 거부감을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한편으로 한국의 전통음악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자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로 구분된다. 한국의 교회음악은 전통음악적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나운영, 박재훈), 그런 음악은 교회적일 수 없고 심지어는 무속적이라고 거부하는 사람들까지도 있다(구두회). 그런가 하면 -18, 19세기 서양음악 위주의- 전통적인 화성학에 남아있는 사람과 현대적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큰 간격을 가지고 있다.



5. 교회음악과 예배음악


대중음악적이냐, 한국전통음악적이냐, 서양전통음악적이냐 하는 것은 모두 음악양식에 관한 문제이다. 이런 양식적인 문제가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매우 큰 문제로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 즉 '교회음악이란 무엇인가?'하는 점이 심도 있게 논의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가 좀 더 진지하게 얘기되어야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전해진 교회음악관은 매우 모순적인 것이다. 그것은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서양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음악이란 예배음악이다"라는 등식이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교회"가 "예배"로 되며, 예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모든 교회음악은 그 존재 자체를 미안해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쉬운 예를 들면, "복음성가"는 "예배"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이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예배" 앞에 "복음"은 몸둘 바를 몰라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적인가?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특히 "의식(儀式)"에 관한 것으로만 이해되는 "예배"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교회음악"을 "예배의 일부"로(만) 분류하는 교회적 전통은 교회음악사가의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실제로 교회음악은 예배와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신자들의 모든 생활 영역과 관계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보면 신자들의 생활 가운데서 나온 '신자들의 음악'(교회음악)이 예배음악으로 발전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나중의 것, 즉 예배에 정착된 교회음악을 강조하다 보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즉 "예배음악"이 형성되는 과정을 없애버리고 만다.


"예배음악"을 강조하는 경향은 새로 발생하는 음악과 쉽게 적대적 관계에 빠진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음악사의 길목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신앙적 열정으로 음악의 "예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세속적인 것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국에 가서 교회음악이 생산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낸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카톨릭이었다. 그러나 카톨릭은 1965년 이후 크게 방향 전환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한국의 개신교 내에는 "예배"와 관련될 수 있는 교회음악만이 허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또한 이들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정한 양식의 교회음악만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본다. "예배"의 강조와 "음악양식"의 강조는 실제로 연결되기가 어려운 사안인데도, 그런 주장은 항상 연결되어 나타난다. 이 둘이 연결될 때에 보이는 근거들은 "본래적인 교회음악"인 옛 음악양식을 해야 한다든지, 클래식 음악으로 이해되는 "최고의 음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본래적인 교회음악"이나 "최고의 음악"보다는 신자들이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찬양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음악의 양식적 면이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형식적 측면의 "예배"를 강조하지 않고 "의식(儀式)의 면"을 초월하려는 성격이 강한,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예배를 강조한다. 최근에 나타난 "열린 예배"는 의식을 멀리하고, "예배자의 자발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성격의 것이다. 이런 예배에는 순서가 따로 없다. 찬양, 기도, 말씀선포가 아주 느슨하게 이어지며, 예배에 참여한 자들은 언제 다른 순서로 옮겨갔는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전혀 미리 짜여진 순서가 없는 이런 예배 형식은 '이성적인 면'보다는 '영적인 면'을 극히 강조하는 성격의 것이다. 따라서 비판자들에게 즉흥적이고 무질서하게 보일 수 있는 예배 형태이다. 이런 경향은 물론 최근에 미국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한국교회는 상당히 느슨한 순서로 되어 있는 집회적 전통이 예배에서 어느 정도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예배 중간에 -집회에서 발생한- 통성기도와 같은 것을 행하는 교회들이 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아직도 전도적(선교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들 때문에 한국교회 예배의 의식적 성격은 아직 견고하지 않고, 많은 면에서 유동적이다. 이는 젊은 교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카톨릭의 미사가 정착되기까지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는 그만큼 예배의식의 정착이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직도 젊은 교회인 한국의 개신교는 앞으로도 음악과 관계되어 <전도>, <예배>, <생활>을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격이 한 순간에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부인하기보다는,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적지 않은 장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은 -예를 들어 카톨릭, 루터교, 성공회- 자체가 국가이거나(카톨릭), 국가교회적인 성격(성공회와 루터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제도적인 교회들이다. 이들은 예배의식도 완비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아직 기관(Instittion)으로서의 성격이 매우 약하다. 아직 자라고 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이런 자라나는 교회가 이미 다 커버린 교회, 잘 제도화되어 있지만, 늙어서 생기를 잃은 교회를 따를 필요가 없다. 한국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아직 고착되지 않은 예배의식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출하기가 더 용이할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음악적으로 보아, 이미 굳어버린 교회음악보다는 아직도 꿈틀거리며 길을 찾는 교회음악이 더 좋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혹자들의 말처럼 "바람직한 한국교회의 예배음악"을 형성하기 위해서, 우선 신자들의 모든 생활 측면에서 일어나는 교회음악을 강조해야 한다. 이런 점이 교회음악 창조에 더 용이하다. 한국교회가 그 동안에 창조적 음악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한국교회가 그 규모에 맞게 교회음악을 생산하고 교회음악가들을 배출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이렇다. 우리는 "교회음악"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우선 외국에서 들어온 음악을 생각하고, "교회음악가"라 하게 되면, 성가대 지휘자나 오르갠(피아노) 반주자와 같은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즉 아직 우리는 충분히 창조적이지 못한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6. 마치면서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음악종류들, 즉 위에서 말한 1)기존의 서양음악적인 교회음악, 2)전통음악적 교회음악, 3)대중음악적 교회음악, 4)현대음악적 교회음악이 각각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측면들을 고려해 주어야 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모든 음악들이 다 훌륭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중 몇 퍼센트만이라도 한국교회에 유용한 것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한국교회음악의 창조적 결실일 수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종류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이 갈등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음악사가 보여주는 교훈은 하나의 음악종류가 지배하는 체제하에서는 교회음악이 자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여러 음악양식의 경쟁을 용인하고, 그것들의 경쟁을 선하게 이용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속음악을 마구 가져다 사용한 1930년대가 교회음악의 혼란기일 수도 있으나, 무언가를 해보려고 한 부흥기의 측면도 있다.


우리가 미래를 위해 해야할 일 중 하나는 광복/전쟁 이후에 나온 한국의 교회음악을 잘 다듬어서 교회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개선하여 나가는 것이다. 돌봄이 없이 교회음악은 자라지 않는다. 교회음악 개선에 관한 관심은 한국 교회음악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1) 여기에서 말하는 '연주' 개념에는 노래 부르는 것도 포함되어 있음.
2)이 책의 원제목은 "特選 200曲集, 附讚頌歌, 樂典知識 其他"(책등), 영문으로는 "A Collection of Special Pieces"(표지)이다. 편찬자 조활용이 손수 그린 등사본 책이다. 평양. 1937.
3) 이 책은 강신명이 손수 그린 등사본 책으로서 출판사 이름이 없다.
4)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1936(소화 11년). 8. 15일 발행됨
5) 중앙 1934년 6월 호에는 한국 음악가들에 대한 소개가 있다. 「조선음악가 일람」 27-30쪽. 그들 중 30대는 현재명(33), 박경희(30), 차재일(33), 김영환(38), 박경호(35), 독고선(36), 홍영후(36), 최호영(33) 정도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20대였다: 정훈모(27), 채선엽(23), 최영순(29), 박경희(20), 이인선(27), 권태호(26), 이유선(24), 안승보(28), 백남철(28), 김원복(27), 고봉경(28), 조은경(26), 이애내(26), 윤성덕(28), 백정진(26), 이순영(23), 김명애(22), 최성두(27), 김영의(26), 김정순(26), 이관준(29), 홍성유(27), 안병소(24), 곽정순(23), 이영세(24), 안익태(28), 곽정선(19).
6) 基督新報 1917. 7. 11.
7) 이 곡들은 필사본으로 남아있고, 『음악과 민족』 1999년 기을호에 발표될 예정으로 있다.
8) 趙斗南/河道源: 『靈歌集』 평양. 1931.
9) 현제명 작곡집 독창곡 제1집. 동광사. 1931.
10) 『고난의 주』는 1997년 기독교음악사에 의해 재발행되었다.
11)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3집까지였다. 제3집에는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2) 홍정수: 교회음악가의 교회음악관 -나운영과 박재훈의 경우- 장신논단 제13집 1997. 449-467쪽.
13) 홍정수: 나운영의 교회음악이 가진 기법적 특징들↗장신논단 3집, 1987. 321-351쪽.
14) 홍정수: 한국교회의 교회음악관 -해방 이전의 교회음악 논의를 중심으로- ↗이화음악논집 제2집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 1998. 308-341쪽.
15) 홍정수: 구두회 김의작 김두완의 교회음악관 ↗장신논단 제14집 1988. 596-626쪽.
16) 홍정수: 한국교회의 교회음악관 -해방 이전의 교회음악 논의를 중심으로- ↗이화음악논집 제2집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 1998. 321-323.
17) 길선주 목사 예화 모음, 기독교문사 1994. 234-235쪽.
18) 예를 들어 독일의 회중찬송가인 코랄들은 그 초기의 악보를 보면 대단히 조악한 음악의 표본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곡들이 끊임없이 후대의 작곡가들에 의해 개선되면서 그 음악은 전혀 다른 질적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특히 바하의 코랄 편곡은 보잘 것 없는 선율들이 예술의 경지가 되는 것을 보여 준다.
19) 홍정수: 목회자의 성가대 헌신예배 설교에 나타난 교회음악관.↗ 나채운 교수 은퇴 기념 논문집 (하나님 말씀과 우리말 성경) 1997. 493-5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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