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비교 및 평가  
 

애비스는(Paul D. L. Avis)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있어서 교회'라는 저서에서 루터와 칼빈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켰다.

"루터는 일차적으로 복음의 순수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칼빈은 교회의 순수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루터의 생애의 모든 위기들은 복음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칼빈의 모든 위기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여기서 애비스가 대비시킨 것처럼 칼빈의 노력이 순수한 교회를 확립하는데 기울어진데 반해 루터의 노력은 순수한 복음을 확립하는데 기울어 졌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비교

교회를 사랑했던 루터

루터의 교회관은 로마 교회와의 충돌 이전부터 루터가 성장해 오던 배경속에서 형성됐다. 그는 "교회는 나의 성이요 저택이요 거실이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에서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교히를 발견해야 한다.

 

교회는 나무나 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회중이다. 사람은 거기 머물러 있어서 어떻게 그들이 믿고 기도하고 가르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들이야 말로 확실히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들이다."

이렇게 교회를 사랑했던 루터가 교회를 상대로 투쟁했다는 것은 로마 교회가 그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나 극심하게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세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심각한 부패상황에서 교회 본연의 자세를 찾기 위해 루터는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를 제시해야만 했다.

루터는 교회를 정의하기를 '성도들의 회중'이라고 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의 회중 모임'이나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무리들','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회중은 성령을 통하여 함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또한 복음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하여 모여든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복음이다. 루터의 교회관은 그의 시편 강해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와 대결을 주목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인간의 자기 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그 아들을 제물로 주셨다고 한다면 인간은 오직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죽임이야 말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인간의 첫걸음은 인간이 스스로의 교만을 극복하기를 배우고 하나님의 심판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총의 약속을 하시고 의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을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선한 의지, 즉 스스로 즐거이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따른다.

 

이러한 선한 의지는 부단히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순종을 통해 항상 순결해지고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훈련을 거쳐서 인간은 의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여기서 칭의의 전과정의 출발점을 인간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깊은 곳을 파고 들어오는 것이다.

복음을 통해 그의 마음과 의지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동일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은 또한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다.

 

복음은 의문 과는 달리 영이요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주시는 복음에 깊은 이해가 있을 때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십자가의 복음에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연합의 길, 즉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 교회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루터의 교회관은 그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반의 교회론 - '거룩한 공회'에의 믿음

칼빈의 교회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성령의 활동에서 시작했다. 그는 교회의 본질을 성서본문(Biblical Text)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두 개의 교회를 말했으나 카톨릭적인 '가시적인 교회'도 반대하고 당시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불가시적인 교회'도 부정하면서 이 둘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로 다루어 나갔다.

칼빈의 교회론의 본질은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데서 출발한다.

'거룩한 공회'는 지상의 가시적 교회 뿐만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전부를 포함하는 불가시적 교회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가시적 교회나 불가시적 교회를 막론하고 모든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거룩한 공회'(Holy Catholic Church)를 교회로 보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 택하신 자들을 이 세상에서 불러서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고 '위에서 온 것'(From above)이요 '거룩한 것'이고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것'(Catholic or Universal)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칼빈의 가시적이면서 불가시적인 것, 또는 불가시적이면서 가시적인 교회의 구분은 모두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데 불가시적인 교회를 그리스도와 영적교제를 통한 교회라고 본다면 가시적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현재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지상교회를 말한다.

 

실제로 불가시적인 교회는 하나님만 알고 계시며 내적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결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한편 지상의 교회는 한 머리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른 신자들과 서로 지체로서의 결합을 의미한 것으로서 이것은 미래의 유업을 받을 한 소망속에서 '용서함을 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로 보았다.

 

그러기에 가시적인 교회는 필연적으로 불가시적인 교회에 연결된 것으로 보았고 이 가시적인 교회도 부분적으로 불가시적인 교회에 포함되어 있는 고로 그 보이지 않는 교회와도 일치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가시적 교회는 또한 신자를 양육하는 어머니로서 양육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은 언제나 가시적 교회를 불가시적 교회와 연관시켜서 '거룩한 공회'의 본질을 추구하려 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성성(聖性)을 항상 보유하고 있다고 보았고 지상의 가시적 교회는 이 완전한 거룩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루터와 칼빈 교회론의 유사성

루터의 교회이해는 한 마디로 '성도들의 회중'이요 '성도의 교제'였다.

단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에는 '복음이 올바로 설교된','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는' 회중이었다.

그래서 그의 교회론은 제도적 측면을 많이 간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교회론이 영적이고 관념론적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루터가 말한 성도들은 제도적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고 교회는 그런 신자들의 회집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가 교회의 불가시성을 말할 때도 그것은 세상 사람이 알 수 없는 선택자만의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의 역설성에서 오는 교회의 은폐성을 가리킨 것이었다. 신앙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가 동시에 죄인이며 그래서 그의 의인됨이 숨겨져 있듯이 그 성도들의 회집인 교회는 그 거룩성이 숨겨져 있다는 뜻에서 교회는 불가시적이었다.

루터는 모든 신자가 사제라고 하는 그의 교리에 근거하여 새로운 교회제도를 제시했다.

모든 신자가 사제이기 때문에 교회의 직임자가 더 이상 사제역할을 독점할 수 없으며 대신에 말씀을 가르치는 봉사자의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루터는 교황제도가 성서적 근거가 없음을 들어 부정했으며 성서에서는 감독과 사제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단어였다고 함으로써 감독제도를 부정했다.

그리고 성서에서 집사직이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나누어 주는 사역이라고 함으로써 중세교회의 부제직을 부정했다.

 

루터는 회중이 직임자를 선택하는 회중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에서 사도로, 사도에서 디모데나 디도로, 다시 그들에게서 감독으로 이어온 직임자의 계승과 그들에 의한 추인과 안수를 인정함으로써 중도적인 입장에 섰다. 1528년 루터는 선제후가 감독자를 임명하여 교구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제안함으로써 국가교회로 나가는 길을 열게 했다.

또 다른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교회론도 루터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경건함으로 말씀이 들려지고 성례전이 외면되지 않는 곳에서 ...

우리는 교회의 출현을 발견한다"라는 칼빈의 이해에서 말씀과 성례전은 교회의 두 표지로 나타났다.

칼빈에게 있어서 사실상 교회는 모순적이며 상반되어 보이는 요소를 가지는 실제이다.

교회는 신성하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며 일하시는 몸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인간적이며 유한한 불완전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교회는 영적인 동시에 또한 세상에 속한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지만 죄 있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교회는 인간의 조직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하여 교회는 항상 불안과 긴장속에 있으며 이와 같은 유혹과 위협을 당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도 없다.

 

즉 우리의 구원이 무슨 변동이나 실패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존패를 같이 한다는 사실에서 칼빈의 불가시적 교회에 대한 언급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와 불신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기의 교제안에 불러 들이시고 자기에게 봉사하는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서, 또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구속 사업을 계속하신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그의 교회론에 예정 교리를 사용하는 것도 우리를 한가한 사변이나 불확실성이나 두려움으로 우리를 몰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확신을 더해 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칼빈이 불가시적 교회를 가시적 교회에 늘 대립시켜 논한다고 해서 가시적 교회의 중요성이 결코 약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4편을 분류해 보면 20장에 걸친 전 논의 중 겨우 두 장이 교회의 본질에 대한 논술이고 나머지는 거의 유형교회의 조직, 훈련, 성례전의 집행 규례, 세상 정치와의 관계 등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근원에서 비롯하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잊은 채 무비판적이며 나태한 정신으로 교회의 현존 형태에만 집착하려는 태도를 고발하는 칼빈의 논의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가시적 외형은 점점 비대해져 가는데 참된 교회상을 추구하려는 치열한 몸부림이 없다면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에 불과하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재연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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