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때 왜 교독문을 읽나요? 


글 / 안재경 목사


예배 때 찬송가 뒤쪽에 있는 교독문을 예배인도자와 회중이 교독하는데요. 그 교독문을 보면 시편이 제일 많기는 하지만 시편의 일부를 선별한 것이더군요. 시편을 찬송하면 굳이 이런 교독문 낭독이 필요없을 것 같은데요. 교독문 뒷 부분으로 가면 세례와 성찬시 교독하기 위한 것도 있고, 새해, 가정주일, 청년주일이라는 제목을 단 교독문도 있던데요. 가정주일이나 청년주일이 있다는 것도 우습고요. 그런 주일에 해당하는 교독문을 만든 것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노동자주일은 왜 만들 수 없는 것인가요? 언제부터 교독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이런 교독문 낭독이 왜 필요한지 알려 주세요.


한국교회에서 예배시간에 ‘교독문’을 읽는 순서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 찬송가 뒤쪽에 이 교독문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교독문이라는 표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교독 성구’라고 말입니다. 교독문 전체가 하나도 예외없이 다 성경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교독문을 읽는 순서를 ‘성시교독’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성구교독’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지적하셨듯이 교독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시편입니다. 교독문의 거의 절반(137개중 66개) 가까이를 차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이 다 들어가지는 않고, 선별적으로 들어가 있으니 성시가 아니라 성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 어떤 시편들이 교독문에 들어가고, 다른 시편들은 들어가지 않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편을 교독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시편 전체를 교독문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어느 세월에 그것을 다 하겠느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너무 지겨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시편이 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자의 기도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도라면 우리는 시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적하셨듯이 예배 때 시편찬송을 도입하면 성시교독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시편을 너무 모릅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직분자들이 시편을 다 암송하곤 했으며, 신자들은 들녘에서 일하면서 시편을 흥얼거렸는데 말입니다.


교독문은 렉시오나리Lectionary라고 해서 교회력에 따라서 매 주일마다 해당 성경본문을 낭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가 무작위로 교독문을 선택해서 읽지만 예전에는 교회력에 따라 일련의 흐름이 있는 성경읽기를 했습니다. 최근에는 2, 3년 단위로 성경 본문들을 나누어서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성경읽기야말로 권장할만합니다. 이것을 ‘연속적인 읽기’Lectio continua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매 안식일에 이렇게 연속적인 성경읽기를 했습니다. 흐름이 있는 성경읽기를 한 것입니다. 그 성구를 읽고 누군가가 해설하기도 했지만 이 연속적인 읽기야말로 성경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데 예배 때 성구를 교독하는 것이 무슨 큰 효과가 있겠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교독보다는 설교시간을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요. 중세 로마교회 예배가 미사로 발전하면서 미신화 되었지만 그나마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제어장치가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성경읽기 자체가 말씀 선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공예배때 성경읽기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예배에서의 성경읽기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찬송가 뒤쪽에 특정주일에 읽을 교독문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나마 렉시오나리의 전통이 최소한이나마 남아있는 셈입니다.


우리 교독문은 특정주일을 제외하고는 성경 한 부분만 교독합니다. 원래는 성경 한 본문만 읽지 않았습니다. 이 성경읽기는 설교를 위한 성경본문을 읽는 것과 다릅니다. 교회력에 따른 읽기였기에 주제가 분명했고, 그것도 구약과 신약을 꿰어서 읽었습니다. 그런 읽기 자체가 하나의 성경해석이었던 셈입니다. 시대에 따라 성경을 몇 부분 읽었느냐가 달랐습니다. 흔히 구약에서 두 군데, 신약에서 두 군데를 읽곤 했습니다. 마지막 읽기는 복음서 읽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가 모든 성경의 절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사시 복음서 두루마리를 들고 입장하는 것을 소입당Little Entrance이라고 불렀습니다. 대입당Large Entrance은 성찬을 위해 성물을 들고 입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중세교회는 복음서를 읽는 것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공예배시에 성경을 읽는 것, 그것도 교독해서 읽는 것, 그리고 연속적으로 읽는 것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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