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34번째 민족대표 파란 눈의 ‘석호필’을 아시나요

 

 


1916년 11월.
파란 눈의 캐나다인이 대한제국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프랭크 스코필드. 한국 이름은 석호필.

스코필드는 선교를 목적으로 우리 땅을 밟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는 선교도 후진양성도 뒤로 미룹니다.

일제의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탄압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 우리의 독립을 위해 나섭니다.
스코필드는 외국인 신분인 자신이 다른 독립투사에 비해 안전하다며 독립투사를 자처합니다.

그는 총과 칼 대신 흑백카메라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일제의 참상을 해외에 알렸습니다.
특히 1919년 3월 1일엔 서울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우리 국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 언론에 전했습니다.

만세현장을 담은 생생한 사진은 일제의 탄압을 폭로하는 계기가 됩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식민지배를 받는 실상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지하게 된 것입니다.

스코필드는 같은 해 4월 15일에 경기도 화성에서 자행된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상에 알립니다.
마을 교회에 주민 29명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집단살인한 제암리 학살사건.

스코필드는 일본이 증거인멸하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은 끝에 여러 장의 사진을 찍습니다.
그는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해 영자신문 ‘서울·프레스’에 투고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극악무도함을 폭로한 것입니다.
스코필드는 이밖에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여성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 일제의 잔혹한 통치방식을 고발하는 글을 수차례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스코필드를 눈엣가시로 느낀 일본은 그를 결국 추방했지만 스코필드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 헌신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후 그는 국빈으로 추대됐고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통해 그의 공헌을 인정받았습니다.
스코필드가 우리땅에 온지 100년이 되는 2016년.

정부는 그를 3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했습니다.

현재 스코필드는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영원히 우리 품에 잠들었습니다.

파란 눈의 이방인 스코필드.
그의 애국심과 정의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꼭 되새기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독립투사 석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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