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일반 상대성원리" 발표 100주년

 

 

글 | 조화유 재미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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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차림으로 강의하는 아인슈타인, 겨우 10여년 전에 발견된 귀한 사진이다.

 


   무릎이 튀어나온 파자마 같은 바지 위에 소매가 짧고 품도 작아 보이는 스웨터를 끼어입고
뒤가 마려운 표정으로 칠판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은 인간의 우주에 관한 이해를 확 바꾸어 놓은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75년 전 모습이다.
  이 사진이 찍힐 당시 61세였던 아인슈타인은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이 희귀한 사진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역사박물관 창고에서 오랫동안 잠자다가 10여년 전에야 발견된 것이다.
 
  올해는 아이슈타인이 “특수 상대성원리”(The Special Theory of Relativity)를 발표한지 110년, “일반 상대성원리”(The General Theory of Relativity)를 발표한지는 10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 울름에서 유태인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이웃나라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종합공과대학에 들어가 과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지 2년만인 1902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특허국 심사관으로 취직하여 밥벌이를 하면서 독자적인 물리학 연구에 전력, 1905년 독일 물리학 연감에 4개의 논문을 발표한다.
 
   이들 논문을 통해 그는 빛은 작은 입자들이 흐르는 것이라는 사실, 물질과 에너지는 결국 같은 것이며, 물질의 질량(m)에 빛속도(c)의 제곱을 곱한 것이 그 물질이 가진 에너지 양과 같다는 유명한 방정식 e=mc²을 내놓는다. 이 방정식은 후에 핵무기 제조 원리로 이용된다. 그는 또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이론도 주장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6세, 대학 강사나 교수도 아닌 일개 특허청 공무원이었다. 1909년 30세 때 그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 이론 물리학 교수로 초빙되어갔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에는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자리를 옮김과 동시에 독일 물리학 연구소장이 된다. 그 다음해인 1915년 그는 10년전 발표한 "특수 상대성원리"를 더욱 확대시킨 "일반 상대성원리"를 발표, 상대성원리의 보편타당성을 증명한다. 이 공로로 1921년 그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당이 독일 정권을 장악하고 유태인 박해를 시작하자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건너가 Princeton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는다. 1939년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 아인슈타인은 당시 미국 로즈벨트(루스벨트는 잘못된 발음)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나치 독일이 이미 원자탄을 개발하고 있을지 모르므로 미국도 빨리 원자탄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한다. 미국 정부는 그 조언에 따라 역시 유태계 물리학자인 라벗 오펜하이머를 중심으로 세계 최초로 원자탄 제조에 성공, 1945년 일본에 2개의 원자탄을 투하하여 2차 세계대전의 종막을 앞당긴다. 아인슈타인은 1940년 미국 시민권을 얻고 1955년 프린스턴 대학 근처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아인슈타인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은 물리학자였는데 2남 1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부인과 헤어지고 친척이 되는 여자와 재혼한다. 둘째 부인은 전남편 소생 두 딸을 데리고 왔을 뿐, 아인슈타인의 자식은 낳지 못하고 아인슈타인보다 19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홀로된 아인슈타인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후에 나치 독일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여자와 교제를 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으나, 아인슈타인은 당시 그 여자의 정체를 몰랐으며, 그녀를 통해서 미국의 중요한 과학적 기밀이 누출된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은 매우 검소하고 돈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유명 출판사들이 그의 자서전을 출판하겠다고 거액의 선금을 제의했으나 다 거절했다. 그는 자서전 대신 자전적 비망록만 남겼다.
   아인슈타인은 클래씨컬 뮤직(고전음악)을 좋아했으며, 바이얼린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그는 세계평화를 위해 세계정부의 수립을 주장하기도 했고, 1952년 이스라엘의 대통령(형식적 국가원수)으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했다. 그는 어느 종교도 믿지 않았다. 그는 종교들이 내세우는 신(God)은 너무 인간과 흡사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인슈타인은 이런 일화를 남겼다. 한번은 그가 어디를 가려고 열차를 탔는데, 어쩌다가 차표를 잃어버렸다. 차장이 검표를 하러 다니다가 이 유명한 과학자를 알아보고 "교수님, 차표는 없어도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그건 고마운데, 차표가 없으니 내가 어디 가려고 이 기차를 탔는지 모르겠군!"이라고 했다고 한다.
 
 
워싱턴에서
조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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