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예배하는 법  


1.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과 예배는 동일한 실재(identical entities)이다.

찬양과 예배는 서로 협력 활동(mutually cooperative activities)을 하며 외견상 표현(outwardly expressed)은 비슷하다.

그러나 본질과 목적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찬양의 본질(essence)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서의 찬양은 7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① 맡기다, 위탁하다. to commend

 ② 성원하다. 갈채를 보내다. to applaud(에플러드)

 ③ 동의를 표하다. to express approval

 ④ 감탄하다. to express admiration

 ⑤ 말과 노래로 칭송하다. to extol in words or in sing

 ⑥ 찬미하다. to magnify

 ⑦ 영광 돌리다. to glorify

 

찬양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는 하나님께 대한 칭송과 감탄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찬양은 하나님이 그 어떤 것과 비교될 수 없는 특성(incomparable character)과 경이로운 활동(wondrous acts)을 하셨음에 대해 찬미를 올리는 것이다.

 

찬양의 독특한 관심/관계(distinctive concern)는 외향적 성질(extroverted nature)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celebration)과 기분을 돋우어 주는(exhilaration) 노래와 외침과 춤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찬양은 묵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마음이다.

그러므로 행위가 따르는 것이다.

 

찬양은 공언하는 것이며(declared)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manifested).

시편 66:8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이사야 40:9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찬양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demonstrated)이다.

찬양은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taking place)이다.

찬양은 예배하는 자들이 자신의 감정과 소원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예배자들의 찬양 매너는 자라고 성숙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기대를 찬양하도록 했다.

 

하나님은 찬양을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clone)이나 그의 명령에 율법적(legalistically)으로 따르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정으로(authentically) 진심에서 우러나오는(genuinely) 희생적 의지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단순히 손을 들고 찬양하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기를 필요로 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를 더욱 원하신다.

하나님께 본질적이며 진심으로 찬양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찬양은 의지의 기능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의지와 결심이 우선되어야 한다.

찬양은 우리들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contingent) 느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시103:1에서 말하길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했다.

성도들도 때로는 맥없고 우울하기도 하며(down in the dumps) 영적으로 메마르기도 한다.

그럴 때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에 축복하기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찬양은 감정의 기능이 아니라 의지의 기능이다.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가?

 

우리의 감정이 극도로 나빠지거나 희망이 꺾일 때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가?

시편기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하나님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 가운데서도 찬양을 할 때 축복을 하신다.

언제라도 위대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찬양하게 된다.

 

그러므로 찬양하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 라파라는 치료의 하나님(출15:26), 여호와 이레라는 준비의 하나님(창22:14), 여호와 삼마라는 주께서 거기계시다(겔48:35)라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시편 54: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시편 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하나님은 결코 찬양하는 자를 떠나지 않으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찬양을 들으시고 축복을 하신다.

 

유다(Judah)의 찬양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이고 유다라는 이름을 레아(Leah)가 지어주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이라는 뜻(창 29:35)이다. 그런데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오셨다.

그 이유는 찬양하는 자(praisers)의 지파이기 때문이다.


시편 114:2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성소를 찬양하는 자 가운데에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토(God's domain)이고 유다 안에서 성소(sanctuary)를 세우신다는 것이다.


시편 76:1에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별하여 놓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든 교회의 상징적 존재이다.


유다는 교회를 의미한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찬양하는 자로서 큰 자인 것이다. 오늘도 교회의 위대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를 알리시는 특별한 방법은 찬양을 통해서이다.


이사야 44:26에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요엘서 3:18에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스가랴 2:12에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라고 했다. 성경은 유다가 특별하게 하나님의 사랑받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 108:8에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홀’(scepter)이란 왕권을 의미하는 말로 찬양이 나의 왕권이다라는 것이다. 찬양하는 자를 하나님은 왕위에 오르게 하신다.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

 

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시편 150: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찬양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주신 명령이다.

 

②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시편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은 찬양을 사랑하신다.

 

③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도행전 16:25-26

 찬양은 무기이다.

 

④ 선한 일이기 때문에/하나님이 좋은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시편 92:1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편 135: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기 때문에

 시편 48:1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⑥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이 충만한 사람을 찾고 있지만 이 세상은 사람을 충만하게 할 곳이 없다.

 충만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A.W. Tozer(토저)는 말하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가장 거룩한 아름다움이다’이라 했다.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일이 없으며 힘든 일(arduous task)이 없다.

하나님은 전신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창조하신 목적대로 그 형상을 찾아야 한다.


 
언제 찬양할 것인가?

 

① 어려움 중에 있을 때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시편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찬양은 감격성(emotionalism)이 아니라 감정에 호소하는 것(emotional)이다.

 

② 영적 기쁨을 원할 때

 누가복음 1:46-47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③ 하나님을 바라볼 때

 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④ 항상 성전에 있을 때

 시편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⑤ 어느 장소에 있을 때

 시편 57:8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119: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역대상 9:33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축복하시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찬양하라.

 

시편 34:1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라고 했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하루의 어느 시간이라도 찬양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찬양할 때마다 축복하실 것이다.


 
어디에서 찬양할 것인가?

 

시편 149: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시편 113:3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이것이 찬양의 교과서이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지기까지 어느 곳에 있든지 찬양해야 한다.  


특히 회중예배에서 찬양을 해야 한다.

회중예배 중의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것을 아래의 말씀들이 확인시켜준다.

 

시편 22:22, 25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시편 26:8, 12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35:18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68:26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시편 107:32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


교회의 예배는 찬양하는 예배일 때 위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게 된다.  

찬양은 회중예배의 가장 중요한 연합의 영역이고 사역이다.

회중예배는 함께 일어서고 함께 손을 들고 함께 손뼉을 치고 함께 찬양하는 표현이 좋아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

 

찬양은 우리들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소개된 것을 따를 때 유익이 된다.

 

① 손을 들고 하라(lifting of our hands).

느 8:6, 시28:2, 63:4, 134:2, 141:2.

첫째, 서로 말하는 것으로서의 표현.

둘째, 나를 받아달라는 표현.

셋째, 성령께 마음을 여는 표현.

넷째,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순종하겠다는 표현

 
② 손뼉을 치라(clapping of hands).

시 47:1.

손뼉을 치는 것은 1)찬양을 더욱 강하게 하고 2)하나님께 오르게 하며(ascend) 3)승리를 유지하게 하고 4)하나님께 기쁨의 소리를 바치게 된다.

 

③ 악기를 통해서 하라(playing of musical instruments).

시150:3-5.

찬양을 돕는 시설.

 

④ 일어서라(standing).

대하5:12, 7:6, 29:26, 계4:9-11.

일어서는 것은 찬양의 합당한 표현이다. 두 가지 찬양의 기능으로 존경(respect)과 경계(alertness)를 의미한다.

 

⑤ 무릎 꿇고(kneeling) 엎드리고(bowing) 부복(prostration)하라.

시 95:6, 계 19:4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현이다.

 

⑥ 노래하라(singing).

초이성적, 초합리적(ultra-rational)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현이다.

 

⑦ 들을 수 있도록 하라(audibly).

시 26:7

 

⑧ 춤을 추라(dancing).

출15:20-21, 삼하6:14-16, 시30:11, 149:3, 롬3:8.

노래든 춤을 추는 이런 행위는 몸을 통한 헌신의 진정한 표현(bona fide expression)

 

⑨ 소리를 외치라(shouting).

시47:1, 66:1, 95:1-2, 98:4-6, 100:1.

찬양 중에 할렐루야나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것은 기쁨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⑩ 입술로 증거하라(speaking in tongues).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찬양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전폭적인 헌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편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는 온 몸과 마음과 영으로 찬양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임재예배로 들어가라.

 

하나님의 임재에는 3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편재하신다. God is omnipresent

하나님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나 계신다. manifestation

 

둘째,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그들 중에 계신다.(마18:20)

 

셋째, 성전에 계신다.(역대하 5:13-14 솔로몬의 성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 영광의 구름이 가득함)

하나님은 임재를 통하여 계시하신다.

 

예배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take up with)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see)이다.


 
하나님 임재에 접근(들어가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시편 95: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편 100:2,4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42:2, 45:13-15, 68:24-26, 사30:29, 35:10)

 

둘째, 주의 집(성전)에 들어가 적당한 표현(fitting expression)을 하는 것

 역대상 16: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편 96: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시편 5: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편 132:7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

 

예배하는 것이란 하나님 앞에서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의식(ritual)이나 양식(pattern)에 해당되기 보다는 영적인 부분에 속한다.

예수님은 신령과 진리로 간구하며 찾는 자를 원하신다고 하셨다(요4:23-24).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예배는 바르고 틀린 것을 따지기 전에 그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개인예배(individual worship)와 회중예배(congregation worship)

개인 예배는 개인의 삶을 중요시하는 반면 회중예배는 서로 협력으로 만들어 진다.

개인 예배의 경우 이사야의 예배(사6:1-8)에서 주는 교훈은 회개(repentance)이다.

 

그리고 시편 100편은 회중예배나 공동예배(corporate worship)에 대한 중요한 말씀으로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찬양하며 송축할 것(100:1-5)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어떤 예배이든지 중요한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임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선행 조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2:3에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고 했다.

 

이것은 예배의 완전함을 위한 두 가지 원리인 계시성과 응답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편 100:4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했으며,

시편 150:1에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배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임재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가?

 

①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② 하나님께 올라가라.

시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③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열정을 다하라.

시132:13-1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를 위한 예배자의 책임은 무엇인가?

 

① 예배 사역자가 되라.(minister)

⒜ 활동적인 자- 모든 예배자는 예배에 활동적이어야 한다.

시편 150: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 봉사하는 자- 교회 안에서 예배를 위하여 봉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역할에 충실한 자-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고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 희생하는 자- 예배는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는 반드시 예배자의 희생이 따라야 한다.


② 예배를 준비하라.(prepare)

예배자의 책임은 예배에 대한 준비이다.

⒜ 주일에 일찍 일어나는 준비

⒝ 약간의 기도와 찬양으로 준비 -준비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 찬양을 듣고 부르는 준비- 교회에 올 때까지 찬양 CD/TYPE를 듣고 함께 노래하는 것도 필요하다.

⒟ 묵상 준비- 교회에 오면 오늘의 예배를 위하여 묵상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 마음의 조율 준비- 성령 하나님께 마음을 열도록 하는 것이다.

⒡ 죄 씻음 준비- 우리의 삶에서 지은 죄들을 예배 속에서 씻음 받기 위한 것도 중요한 준비이다.

⒢ 적극성 준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위하여 예배 안으로 들어가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 힘찬 예배(vibrant worship) 준비

⒤ 결심 준비-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 소중한 순간을 잃지 않으려는 결단과 의지도 준비한다.

⒥ 성령 충만함의 준비- 우리는 충만한 예배를 위하여 영적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무서운 적인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임재하시는 예배는 자신의 죄들로부터 자유함에 있다.

 

시편 51:2에서(다윗이 밧세바를 겁탈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한 뒤 나단 선지자로부터 경고받은 사건을 배경으로 함(삼하 11,12장) 다윗은 밧세바 간음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며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먼저 죄를 고백하며 철저하게 그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시도했다. 만일 죄를 고백하는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③ 기도에 투자하라.(invest)

예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배자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상호교통 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부지런히 예배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누구나 예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예배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기도의 투자에 달려있다.

 

④ 예배에 모여라.(frequent)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성도들은 예배모임을 거절하지 않아야한다.

주님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격려하고 힘을 모으는 것이 모든 신자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몸에서 잘려나갈 때 우리는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행 2장 교회는 모이는 교회였기에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⑤ 헌금을 가져오라.(bring)

시편 96: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우리는 얼마나 이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받치기 위해 노력(endeavor)하는 것이다.

헌금을 드리는 것은 예배자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예배는 우리의 자신 모두를 바치는 것이지만 그 표현을 헌금으로 하는 것이다.

 

⑥ 자발적으로 하라.(spontaneous)

자발적 예배자(spontaneous worshiper)가 되도록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

자발적 예배자가 되기 위하여 훈련해야 한다.

예배에 게으르거나 나태하면 예배를 온전하게 드리기 어렵게 된다.

예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자아 동기(self-motivated)와 자기 통제(self-control)를 연습해야 한다.

자발적 예배자는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예배가 되기 위해 주저하지 않아야 하고(readily) 전심으로(wholeheartedly)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자의 임무는 밝고(brighten up) 기운이 넘쳐야(cheerful) 한다.

마치 남녀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과 같다.

 

예배는 찬양의 옷을 입고 웃는 얼굴을 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끌어올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배하는 것은 기분전환이 아니라 책임이다.

목사나 예배 봉사자가 즐거워하고 봉사하는 것은 자기의 기분에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의 의무이다.

예배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하라.

시편 34: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라고 예배자는 계속해서 예배하는 책임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제사의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가?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시편 27: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54: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시편 107: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

시편 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예배를 말할 때 언제나 등장하는 것이 ‘희생제사’ ‘산제사’이다(sacrifice).

성경이 말하는 희생은 동물적 희생보다는 마음으로부터의 희생을 요구한다.

시편 51:16-17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예배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오늘날의 예배도 구약의 말씀에 충만해야 한다.

희생제사란 얼마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역대상 21장에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했다. 물론 인구 조사 자체가 죄된 행동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군대의 수효에 집착하는 다윗의 생각이 죄가 된 것이었기 때문에 무려 7만명이 죽게 되었다. 이 때 다윗의 행동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24).

 

그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데 값을 지불하기로 했다.

희생제사란 ‘값을 드리는 것’,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란 값을 지불하는 예배이다.

 

예배에서의 희생이란?

 

첫째, 에너지를 지불하는 것이다.(energy)

한 주간 일을 하면서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예배에 나와 휴식을 취하며 편하게 있고 싶어 하기 때문에 예배에 일어서고 앉고 손을 듣고 크게 찬양하는 것에 피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노동의 시간이다.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 바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나의 모든 에너지를 예배에 쏟아야 한다. 예배자는 영적 에너지, 정신 에너지, 의비 에너지, 감정 에너지, 물질 에너지를 모두 드리는 예배가 희생이다.

 

둘째, 준비에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preparation)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정결한 예배이다(시24:3-4). 고백과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나를 포기하는 값을 지불하는 것이 희생이다. 자기 포기란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예배는 자신을 비우는 것이 첫째의 일이다.

 

셋째, 시간을 지불하는 것이다.(time)

우리는 하루에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성에 살아간다. 그러므로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 예배 시간이란 가장 내 인생에 소중하고 거룩한 시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소중하고 거룩한 것에 희생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배이다. 예배에 희생의 시간을 드리지 않는다면 낭비하는 시간일 뿐이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예배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라.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면 그 예배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고 능력이 가득 차게 된다.

 

 

3. 영적 전쟁을 위한 병기를 만들라.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전쟁(battle), 전투(struggle), 실제 전쟁(veritable war)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주변의 모든 상황과 영적 대결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에베소서 6:10-17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영적 무기를 갖기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기는 예배이다.

 

예배의 기도 찬양 말씀 봉헌은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도구들이다.

그 중에서 회중 예배의 가장 강한 영적 무기는 찬양이다.

 

1) 영적 전쟁 무기인 찬양의 예배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군대에 쫓기며 홍해 바다를 건너는 사건을 15:1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찬양을 했을 때 승리할 수 있었다.

출애굽기 15:3을 보면 왜 찬양을 하면 승리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여호와는 용사라는 말씀은 ‘싸우는 자’(warrior)라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캐릭터를 이렇게 소개했다.

 

여호수아 5:13-14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군대장관(commander-in-chief)이다.

 

여호사밧 왕이 암몬과 모압의 침략을 받게 된 전쟁의 위기에 있을 때 그는 이렇게 했습니다.

역대하 20:12-24에서

 

12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13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14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15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6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18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19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20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

 

24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은 전쟁의 위기 때에 찾은 사람이 ‘찬양하는 자’였다.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면 승리할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찬양하는 자(praiser)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다니엘서 11:32에는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알면 누구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용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찬양의 능력을 경험했다.

사도행전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들을 묶고 있던 사슬을 풀게 하는 능력이 찬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변에 표적이 나타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찬양에서 였다.

 

2) 영적 전쟁의 무기인 외침(shout)의 예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했다.

 

여호수아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백성들이 사용했던 무기는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찬양’을 전심으로 부르는 ‘승리의 함성’이다.

여기에 초자연적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함성의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응답이 이루어진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 찬양의 함성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사기 7: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300명에게 지시했던 것이 외치는 것이었다.

 

그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친히 싸우셨다.

이것도 승리의 외침이었다.

 

예배는 침묵하는 것보다 외치는 것이 필요하다.

예배는 침묵(silence)하는 것이 아니라 외치는 것(shout)이다.

 

오늘의 예배가 무기력한 이유는 승리의 외침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끄시는 능력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승리의 외침이 예배의 흐름이 되어야 한다.

 

외침이란 문제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도록 공격하고 적의 힘을 무력하게 만든다.

또한 하나님 되심을 외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dilemma)로부터 승리하는 길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기뻐할 때 전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찬양하면 그는 싸우신다.(We praise, he fights)

 

예배에서 찬양과 외침은 평화의 사신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한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승리의 함성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영적 무기로 삼는 것은 악한 날에 승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에베소서 6:13-14)

그리스도인들을 매 시간마다 공격하기 위하여 마귀는 기회를 엿보며 노려보고 있다.

 

그 마귀들에게 승리하는 것은 강한 찬양과 외침과 예배이다.

민수기 10:9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

 

우리가 승리의 찬양을 할 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신다.

창세기 49:8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유다는 찬양이라는 뜻으로 유다지파는 적으로부터 승리하였다.

 

사사기 1:1-2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찬양하는 자는 승리를 차지하게 된다.

시편 118:19-20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바로 그 문은 찬양의 문이다.

이사야 60:18에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고 했다.

 

찬양 문을 열어 놓으면 승리하게 된다.

시편 149:1-9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찬양하는 것은 영적 무기인 두 날을 가진 칼을 품고 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교회에서 승리의 함성이 사라지면 교회는 슬픔을 겪게 된다.

 

3) 영적 전쟁의 무기인 성찬양(High praise)의 예배

 시편 149:6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성스러운 영광찬양은 생소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배에서 부르는 찬양의 대부분은 개인적 고백찬양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찬양’은 하나님을 최대로 높이는 찬양이다.

 

성찬양을 왜 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강도(intensity)를 높이기 때문이다.

성찬양은 찬양의 수준을 높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한다.

 

둘째,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exist)를 높이기 때문이다.

성찬양은 그의 권위(majesty)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befit)이다.

 

셋째, 영적으로 승리(victory)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성찬양은 사탄의 세력들을 물리치는 능력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의 찬양 방법은 변해야한다. 개인적인 찬양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으로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좌(throne)의 은혜를 베푸시도록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트럼펫을 불고 기타를 연주하고 피아노와 드럼을 치는 이유는 바로 영적 전쟁을 위한 것이다.

 

이사야 30:32 “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탈 것이며 그는 전쟁 때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

또한 예배자들은 성찬양을 하면서 이 땅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찬양의 예배를 드리는 동안 어둠과 사망과 좌절과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시고 참된 자유를 주신다.

이사야 25:7-8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산은 어떤 산인가? 바로 시온 산이다.

시온산은 찬양의 장소로 유명한 산이다.

시온산은 찬양의 산이다.

 

그러므로 찬양하는 산에 오르면 사망을 멸하고 눈물을 씻어주고 수치를 없이하신다는 것이다. 성산인 시온산에 올라 성찬양을 부르라.

이사야 3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가 불려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을 인하여 굴복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영 위에서 싸울 것이며”

 

시편 76:2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우리는 시온 산에서 성찬양을 부르고 그 곳을 처소로 삼아야 한다.

오늘의 시온 산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찬양이 살아있는 곳이며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예배하는 곳이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교회에서 성찬양이 끊임없이 불러져야 한다.

 

이사야는 말하길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66:6)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큰 소리(uproar)가 흘러나와야 한다. 그 소리는 바로 찬양의 예배 소리이다. 그 소리는 사탄에게나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소리이다.

 

4) 영적 전쟁의 무기인 소리(sound)의 예배

 에스겔 1:24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에스겔은 천국의 찬양 소리를 전능자의 음성으로 표현했다.

 

요한계시록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사도 요한은 천국의 예배를 표현했다.

 

천국의 예배나 찬양은 성도들이 ‘서로 함께 모여 발하는 뇌성 같은 소리’이다.

이 소리는 원수들에게 하나님이 전쟁을 알리시는 소리이다.

 

예배 중의 찬양의 소리는 주께서 우리의 대적에게 보응하시는(bring retribution) 소리이다.

영적 전쟁의 승리는 예배나 찬양에서 모두가 함께 소리를 높이고 외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5) 영적 전쟁의 도구인 믿음(faith)의 예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믿음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는 믿음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전략이다.

 

믿음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① 우리의 마음을 주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② 영적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③ 축복의 자리까지 앞으로 가는 것이다.

④ 영적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난주일의 예배에서 영적으로 충만했는데 이번주일에는 별로 힘을 얻지 못했다면 다른 점은 오직 하나 ‘믿음’에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예배를 원한다면 마음의 자세, 중심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온전한 마음으로 집중하여 믿음으로 예배할 때 전투 예배가 되는 것이다.

예배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기에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6) 영적 전쟁의 무기인 말씀의 예배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예배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예배자가 반응하는 행위이다.

 

영적 전쟁으로서의 예배에서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고 계시다면 그것은 예배자의 반응이 무감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예배를 시도하게 될 예배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배의 방해자인 적들을 위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예배의 적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우리는 예배 속에서 적들과 교전(engaging)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예배 속에서 적들을 공격(attacking)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예배 속에서 적들을 침몰(sinking)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예배 속에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을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말씀을 하실 때 그 타이밍(timing)을 놓치지 않고 의지적인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영적 싸움을 시도하게 될 때 위험에 처하게 되는 4가지

 

 ① 우리는 실체 없는 유령들과 싸울 수 있다. We fight a phantom battle.

 ② 우리는 믿음의 형제들을 공격할 수 있다. We might attack brethren.

 ③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놓칠 수 있다. We can miss God's timing.

 ④ 우리는 하나님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을 공격할 수 있다. We can attack things God never intended for us to conquer.

 

 7) 영적 전쟁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예레미야 12: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

보행자, 평안한 땅은 고향과 이웃 사람들을, 말과 요단의 창일한 물은 제사장과 관리들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평안한 고향에서 당하는 괴로움에 굴복하고 감당치 못한다면 어떻게 타향에서 당할 괴로움을 견디겠느냐는 뜻이다.

 

영적 전쟁은 평상시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시간을 보낸다면 어려울 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매주일 예배에 모이는 습관을 갖는 것은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중요하다.

찬양을 통하여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평화의 시간과 승리의 소리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잠언 24: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어려움 중일 때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습관이 필요한 것이다. 어려움이 있다고 절망하거나 낙담하면 믿음이 약한 것이고 영적 전쟁에 패배한 것이다.

우리들의 상황이 어떨지라도 찬양의 희생을 드려야 한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예배 생활에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는 재해나 불행의 후유증(trail)과 재난과 고생과 시련(tribulation)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test)하는 도구들이다.

이런 상황들에 처하게 될 때 더욱 강한 영적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기쁘지 않는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송축하는 예배 생활을 멀리 하지 말아야 한다.

 

시편 144:1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전쟁을 이미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영적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일 터널 속에서 사는 것과 같은 답답한 신앙생활을 할 뿐이다.

 

다윗은 말하길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시27:5)고 우리가 영적 전쟁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가장 안전한 곳에 숨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생활이란 교회를 가까이 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적들로부터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곳이 교회이다.

 

그 교회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다윗은 이렇게 말씀했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27:6)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적들은 사라진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정적인 예배를 드릴 때 적들은 완전히 전멸하고 전패(annihilate)할 것이다.

우리는 적들 가운데서도 항상 이길 수 있다는 확신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8) 전쟁의 교전(engaging)을 하라.

회중 예배에서 위력 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는 예배인도자가 현재 예배를 영적 전쟁으로 느끼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에 있다. 그리고 회중들도 예배하는 모습이 전쟁을 치루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예배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인도에 봉사하는 사람이든 예배자이든 진실로 마음으로부터 소원을 갖고 예배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예배 준비를 위하여 토요 기도회와 영적 준비 기도회를 갖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사탄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준비하는 봉사자들을 묶어 놓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영적 충만함을 갖고 있어야 한다.

주일아침 예배 속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 줄 아무도 모른다. 어느 때는 영적으로 충만하여 사탄을 공격하는 예배를 드리며 승리의 찬양을 드리지만 어느 때는 사탄의 공격에 힘을 잃고 낙심하는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게 된다.

 

예배가 전쟁의 교전 중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며 바른 방향과 무기를 잘 사용해야 한다.

사탄이 공격을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영적 힘으로 충만한 예배를 준비하고 드려야한다.

언제나 예배는 승리를 위하여 드린다는 정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방향의 예배를 드려야 영적 교전을 잘 할 수 있는가?

 

①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예배를 드리라.

② 사탄을 공격하는 예배를 드리라.

③ 계속해서 도전하는 예배를 드리라.

④ 서로가 격려하는 적극적인 예배를 드리라.

 

사사기 3:1-3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나 전쟁을 준비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정적이며 편하게 쉬는 생활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연습하며 사는 삶을 하나님은 가르치신 것이다. 전쟁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창과 칼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무기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전쟁 연습을 하는 삶이다.

 

세상과의 전쟁, 육신과의 전쟁, 정욕과의 전쟁,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예배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의 무기를 통한 환희, 황홀, 큰 기쁨인 랩춰(rapture)를 증가시키면 포획물인 캡춰(capture)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배는 영적 전쟁의 최고의 무기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승리하고(victorious) 정복하고(conquering) 극복하는(overcoming) 교회가 되길 기대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예배하는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4. 하나님을 예배하라.

 

예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해석, 개념은 다양하다.

무엇이 예배인가라는 것을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예배는 3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

기대(expectation), 만남(encounter), 응답(response)이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관계를 맺기 위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예배자는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배를 정의한다면 예배는 하나님을 깊이 아는 하나님과의 만남(divine encounter)이다. 그 만남이란 하나님과의 긴밀함(intimate)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멀어져 거리감(distant)이 있던 관계가 친밀한 관계가 된다.

 

1) 예배의 본질적 12가지 정의는 무엇인가?

①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conversation)이다.

②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sacrifice)이다.

③ 예배는 삼위일체의 하나님(triune God)께 대한 확고한 응답(response)이다.

④ 예배는 창조의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fellowship)이다.

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표현(expression)이다.

⑥ 예배는 하나님에게 행동(act)하는 것이다.

⑦ 예배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의(appropriate manner)를 갖추는 것이다(예법).

⑧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God's presence)를 찬양(praise)하는 것이다.

⑨ 예배는 하나님께 모든 것(whole being)을 바치는 것(giving)이다.

⑩ 예배는 하나님께 애정 깊은 헌신(affectionate devotion)이다.

⑪ 예배는 하나님과 전적인 관계(properly related)를 맺는 것이다.

⑫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순종(obedience)이다.

 

예배는 아무리 정의를 잘 이해해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다면 예배가 아니다.

참된 예배는 체험(experience)이다. 예배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특히 회중예배의 궁극적 목적도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것이다.

 

2) 예배에 중요한 개념들은 무엇인가?

① 하나님은 예배자(worshiper)를 찾으시지(seek) 예배를 찾는다고 하지 않았다(요 4:23).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들이 예배하는 가운데 임하신다.

 

② 예배는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것이다.

distant(먼, 희미한) - intimate(친밀한, 깊은, 심오한)

 

③ 예배는 주고(giving) 받는(receiving) 행위이다.

찬양은 계속해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한 가지 길이지만 예배는 친교(communion)와 교제(fellowship)가 포함되어야 한다.

 

④ 예배는 상호작용이다(a vertical interaction)

하나님과의 작용(수직작용↕), 사람과의 작용(수평작용M↔M)이다.

 

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은혜를 입는 것(basking)이다.

⑥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concentrate)하는 것이 중요하다.

⑦ 예배는 외부의 뜰(outer court)이 아니라 내부의 뜰(inner court)이다.

⑧ 예배는 모든 것이 동원되어야 한다. 외침, 박수, 노래, 춤

⑨ 예배는 모이는 것(gathering)이다.

 

3) 예배에 대한 그릇된 개념(misconception)은 무엇인가?

① 예배 속의 하나님 임재의 개념에 대한 오해

 예배의 생명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은 임재하심을 통해서 스스로를 나타내신다(manifest). 그러나 예배의 목적이 사람일 경우 예배는 잘못 드리게 된다.

 

② 예배자의 의도(intention)에 대한 개념의 오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배를 통해서 공급하신다. 그러나 예배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는 의도가 잘못될 경우 잘못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아브라함의 예배>

창세기 22:5에서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라는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삭을 데리고 갔으며 이것은 최고의 예배와 최상의 예배를 위한 번제물을 드리는 예배이며 전인적인 순종의 예배였다.

 

<바울의 예배>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거룩한 산제사라는 몸을 바치는 번제물로서의 예배를 통한 헌신을 의도로 예배를 드리라고 했다.

 

<다윗의 예배>

사무엘하 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다윗은 간음과 살인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번제물이 된 회개하는 예배를 드렸다.(시편51편; 참회의 기도)

 

<욥의 예배>

욥기 1:20-21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은 모든 것을 잃었어도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깨트리고 바치는 번제물로서 예배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성경의 위대한 예배자들은 모두 바른 예배 의도로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예배자의 예배 의도가 바르고 합당해야 한다. 만일 예배의 의도가 바르지 못하면 잘못된 예배가 돼버린다.

 

4)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예배의 본질을 살펴야 한다.

 

모리스 스미스(Morris Smith)는 예배에 대해서 말하길 ‘예배는 하나님께 하시는 어떤 일에도 우리의 눈을 낮추고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숭배를 바로잡고 온전한 예배를 다시 재현하는 것을 포함한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나는 어떤 지독한 상황(devastating circumstances), 삶이 기진맥진하는 상황(life-shattering circumstances), 부정적인 상황(negative circumstances), 견디기 어려운 상황(trying circumstances), 몹시 거친 상황(turbulent circumstances) 속에서나 긴장이 가득 찬 상태(stressful conditions)와 감정적 혼란(emotional turmoil)의 상태에서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나의 마음을 드리고 그분의 능력 앞에 엎드리며 주를 따르겠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의 기초는 그의 주되심(Lordship)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은 실천이며 행동이다. 예배의 본질은 어느 상황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를 배워야 한다. 예배는 예배를 통해서만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 속에서 약속하셨다.

 

시편 32:8-9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훈계하신다는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시간이고 예배자는 배우는 시간이다.

잘못된 예배를 드리려는 속성들을 단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워서라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를 예배에 복종시키는 생활을 하도록 예배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을 알기 위해 예배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시편 89:15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

즐거운 소리를 안다는 것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

예배를 배운다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세미나를 갖는 것이나 성경공부 클래스에 들어가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예배를 배운다는 것은?

첫째, 적용(application)하는 것이며 체험(experience)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마음을 열고 성령께 채널(channel)을 맞추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에게 나 자신을 예술(art)로 표현하는 것이다.

넷째, 행동(doing)하는 것이다.

다섯째, 전적으로 신뢰(trust)하는 것이다.

여섯째,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부복(prostration)시키는 것이다.

일곱째,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staring)이다.-하나님과의 eye contact

 

교회는 일을 가르치고 증인이 되기를 가르치지만 예배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예배를 배우지 않아서 성도들의 예배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예배해야한다.

 

첫째, 하나님에게 깊이 빠져 들어가라.

둘째, 사랑의 표현을 하라.-예배 기능은 부부간의 사랑(marital love)과 같다.

셋째, 하나님에게 출발(starting)하라.

넷째, 특별한 기쁨을 자발적 표현(spontaneous expression)으로 드리라.

다섯째,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now) 예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예배의 시제는 현재 시제이다(present tense). 예배는 과거 시제나 미래 시제가 아닌 현재라는 사실이다.

예배는 막연하게 기다리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지금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진정한 예배 속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예배는 하늘나라를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오라는 신호(cue)이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하늘나라의 예배가 시작된다.

그리고 예배의 감독은 하나님이시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찬양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열정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지금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배는 행위를 통해서 배워지는 것이다.

행위는 정신적인 동시에 영적인 것의 표현이기에 우리의 인식(awareness) 변화가 최우선 과제이다. 행동이 따르는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

 

5)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① 성령의 예배를 드리라.

성령의 감동하심 없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불가능한 예배이다.

마치 하나님은 죄많은 사람(unregenerate men)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면 받으시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교의 사람(heathen men)이 드리는 예배는 받으시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만을 받으신다.

 

빌립보서 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교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성령에 이끌리고 진리의 말씀을 갖고 예배드리지 않기에 하나님은 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성령에 이끌리는 예배자의 예배를 기뻐하신다.

 

천국 예배의 리더는 성령이다(겔1:19-20).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르쳐 주신 예배에서 의식이나 예식의 예배가 아닌 성령의 예배를 말씀하셨다(요4장).

 

예배는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일치(corresponding)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향하는 위대한 예배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무지의 예배(ignorant worship)와 지혜의 예배(intelligent worship)에 대한 구별을 하셨다. 무지의 예배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고 지혜의 예배는 아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시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때 성령께 의지해야 한다.

구약의 예배를 이사야는 이렇게 책망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29:13).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과 그들의 마음에 일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입술로는 존경하는 것 같았지만 마음은 멀어졌던 것이다.

 

예배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성령으로 예배해야 한다.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

첫째, 성령의 지시에 예민한 것(sensitive)을 말한다.

둘째, 성령의 지시에 따르는 것(follow)을 말한다.

셋째, 성령의 지시에 행동을 유발(prompt)하는 것을 말한다.

 * 유발시키는 것이란 자기를 복종시키기 위해 가혹하리만큼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② 진리의 예배를 드리라.

첫째, 진리의 예배란 변함없는 말씀을 의지하는 예배이다.

둘째, 진리의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다(요14:6)라고 믿는 예배이다.

셋째, 진리의 예배란 하나님을 진리로 믿는 것이다.

넷째, 진리의 예배란 순결(purity)한 예배로 청렴(integrity)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섯째, 진리의 예배는 위선적 예배(hypocritical worship)와 구별되는 예배이다.

 

위선적 예배에 대한 예는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사울 왕이 했던 것을 의미한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가니라”(사무엘상 15:24-31).

사울이 예배를 드리려는 동기는 위선이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 하나님께 진실로 예배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을 진실되게 예배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 것이다(삼상 15:35). 예배에 가장 무서운 적은 거짓과 위선이다. 하나님은 진실한 예배를 원하신다.

 

여섯째, 진리의 예배란 정직한(honest) 예배이다.

 

일곱째, 진리의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예배이다.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예배이다.

 

여덟째, 진리의 예배란 성경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높이는 것도 말씀을 통해서이다.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예배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기 위해서 자신을 깨끗케 하도록 하나님의 불로 태워져야 한다.

신령의 예배나 진리의 예배는 한 가지 목적을 향하게 되는데 그것은 ‘변화’이다.

 

예배란 예배자의 깨끗해지려는 변화이다.

성령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6) 예배에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① 예배에 단순성(simplicity)을 추구하라.

예배는 복잡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은 무게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예배는 단순한 것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고 마음을 여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고통의 시간이 아니다.

예배는 즐거운 시간이다.

예배는 예배자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는 것(renewing)이며, 상쾌하게 기분을 복 돋우어 주는 것이며(invigorating), 건강을 유지하도록 치유해 주(therapeutic)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 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단순하게 만들어진다.

예배는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압력(strain)이 아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라.

 

② 배타적인 예배(exclusive worship)를 버려라.

예배는 사랑하고(loving) 행하는(doing)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과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예배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4:10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봉사, 전도, 가르치는 것보다도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예배를 놓치다가 교회를 ‘아차클럽’(bless-me club)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배에 배타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포괄적인 사람(inclusive)이 되어야 한다.

사탄은 예배드리는 것을 싫어하기에 배타적이기를 구한다.

예배에 부지런하지 않는 사람을 사탄은 찾아가 무너뜨린다.

 

결 론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최고의 예배이다.

무절제하고 불규칙한 예배의 삶을 하나님께 굴복하고 복종하는 것(submit)이 예배이다.

절대적인 예배(unconditional worship)에 도전해야 한다.

 

시편 46: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에스겔 47: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예배하는 동안 하나님의 강은 흘러넘치게 된다.

갈라진 영혼과 상처와 무거운 짐들을 씻어주는 은혜의 강물이 예배에서 흘러넘치는 것이다. 예배는 살리고 소성하게 하는 축복을 허락하신다. 예배드리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에 예배를 적용하는 것만이 가장 위대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예배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배의 영광스러움을 경험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예배자가 되는 것만이 역동적인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5. 참예배자가 되라.

 

요한복음 4:23에서 하나님은 예배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예배자로서 부지런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자가 되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나 참된 예배자(real worshiper)가 되기를 더욱 원해야 한다.

 

누가복음 7:36-50(향유를 부은 여인<다같이 읽게 함>)에서 예수님과 죄 많은 여인과의 사건에서 예수님은 참예배자의 특성과 자질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될 예배자의 모습은 다양하다.

 

첫째, 예배자란 주는 자(giver)이다.

여인은 향유의 옥합을 깨트렸다. 주저함이 없이 주님께 대한 아낌없는 사랑(lavish love)을 표현했다.

성경적 예배자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나올 때 드릴 것을 가져와야 한다.

 

시편 96:8-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아름다운 예물과 거룩한 예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예물이란 최상의 예물을 의미하고 거룩한 예물이란 구별의 예물을 가르친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선 반드시 예물을 가지고 가야한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예배에서 강조한 것이 희생적 시스템(secrificial system)이다. 예배자는 양과 염소와 비둘기를 가져와 제단에 드리도록 되어 있다.

 

출애굽기 23:15에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고 했다.

예배자는 하나님 앞에 올 때 드릴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배자는 드리는 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케 하는 자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드림이란 예배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드림이란 예배에서 분리(divorce) 될 수 없는 활동이다.

예배자가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선 드림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모든 순서에 하나님께 드리고자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둘째, 예배자란 표현하는 자(manifestation)이다.

여인은 주님 앞으로 와서 눈물을 흘렸다. 마음을 밖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인은 주님께 깊은 감정 표현을 한 것이다. 이것은 연기자가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여인의 눈물에는 진실이 담겨있는 것이다.

 

예배에는 눈물의 고백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몸만이 와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와있어야 한다.

 

예배자가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며 눈물을 흘리고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겠는가?

예배자는 예배하기 전에 오늘 예배에서 내 마음이 굳어져 있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부드러운 마음(soft)과 사랑스런 마음(tender)으로 예배할 때 임재하신다.

 

자신을 깨뜨리는 것(brokenness)과 감격의 눈물(tears)을 흘리는 것은 예배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참 예배는 하나님께 사랑의 강렬한 표현과 숨김없는 고백이다.

 

셋째, 예배자란 입맞춤(kiss)하는 자이다.

예배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예배를 프로스쿠네오(proskuneo)라고 하는데 ‘손에 입맞춤을 하다’ ‘경의와 존경스러움으로 입맞춤을 하다’ ‘경배하기 위해 자신을 굽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가 우리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최고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배는 온 힘을 다하여 주인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분의 숨소리를 들을 만큼 우리의 마음을 그분 가까이로 가는 것이 예배이다.

 

이 여인에 대한 사도 누가의 표현은 죄 많은 사람(sinful)으로 매춘부(prostitute)였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유혹에 빠졌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38절에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라고 했으며 예수님은 그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4-46)고 그 여인의 행위에 대해 인정을 해 주셨다. 그리고 48절에 예수님은 선언하시길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눈물로 당신의 발을 적시고 그의 발에 입맞춤을 한 여인의 회개를 보시고 축복을 해주신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자신의 모습을 바치기 위하여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입맞춤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 관습적, 형식적이며 판에 박힌 상투적 예배(conventional worship)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마음의 기능(a function of the heart)이지 형식의 기능(a function of the form)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는 외적으로 다양하게 드러내는 마음의 표현이다.

 

넷째, 예배자란 사랑하는 자(lover)이다.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했다. 그의 영혼은 사랑하는 자를 찾고 있었다. 예배자들에게 부족한 것이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하는 열정과 표현의 부족이다.

특히 우리는 예배에서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으려고 감추는 예배 문화 때문에 사랑하는 표현의 농도가 낮은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표현이 낮으면 낮을수록 예배에 하나님의 일하심도 낮게 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①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마음을 여는 것(open)이다.

②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집중(concentrate)하는 것이다.

③ 사랑하는 것은 그를 필요(need)로 하는 것이다.

④ 사랑하는 것은 그를 즐거워(joy)하는 것이다.

 

다윗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표현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무엘하 6: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은 예배를 하면서 너무 사랑의 표현이 강렬하여 몸이 드러나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비난하지만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그런 표현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일 예배에서 사랑하는 표현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메마르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효과 없으며 무익하고 무능한(barrenness) 예배 일 뿐이다.

영적 예배는 비판이나 비난을 무서워하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더욱 깊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의 예배는 너무 논쟁의 예배(controversial worship)에 시달리고 있다.

예배를 너무 쪼개고 찢고 나누고 갈라지는 경향이 많다.

 

영적 무능의 예배는 비판을 일삼는 예배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자는 어떤 값이라도 치루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전격적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는 자이다.

 

진정한 예배자는 비난(defamation) 대신 갈채(acclamation)를 보내는 자이다.

여인은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즐거움보다 주인의 즐거움을 열망한 자이다.

 

진실로 이 여인처럼 예배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시고, 그에게 오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며 열정적으로(eager) 사랑하시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예배는 두 가지 메시지를 주고 있다.

 

 ① 예배는 표현되어야 한다. - expression of worship

 ② 예배는 묘사되어야 한다. - representation of worship

 

여인의 향유 예배는 역사적 예배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죄인인 여인의 죄가 용서를 받고 축복 받는 결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발 옆에 서고 그 발에 입 맞추는 마음을 바치는 사랑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배의 신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런 예배는 지식적 예배에서 표현적 예배로 승화시킨 모습이다.

이것은 영적 성숙의 예배이다.

 

시편 107:32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

 

요한계시록 4:9-11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성경에서 강조하는 예배자의 모습에서 회중들과 교회의 장로들이 어떤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예배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예배 태도를 버리고 본이 되는 예배 태도가 되어야 한다.

목사, 장로, 집사를 포함한 모든 교회의 리더들은 하나님 앞에서 반응하는 참된 예배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리더들이 진정한 모습으로 예배할 때 우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진다.

진정한 예배의 영광은 ‘우리 자신을 예배에 쏟아 부은 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영적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다.

 

참 예배자란 어떤 예배자인가?

 

1) 예배자의 자세

 예배자는 깨끗해야 한다(without guilt).

여인은 죄인이었다는 정보를 주는 이유는 예배에서 첫째 되는 것이 죄의 회개를 통한 용서와 깨끗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죄의 예배가 아니라 회개의 예배이다.

예배에 중요한 개념은 용서(forgiveness)와 깨끗함(cleansing)이다.

예배자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결함(purity)이다.

하나님은 유죄한 자의 예배는 거절하시지만 무죄한 자의 예배는 받으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죄가 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예배자는 먼저 죄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정결해야 한다.

예배자의 자격은 깨끗함(purified)이다.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8절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다.

생명이 있는 예배는 영적으로 죄를 씻음 받고 자유함을 받은 자의 예배이다.

 

율법에 매이고 육신에 이끌리어 죄의 모습을 지니고는 생명의 예배나 평안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유죄판결(condemnation)로부터 해방된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유죄(guilt)로부터 자유된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 바로 죄의 자유를 찬양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상태는 죄의 판결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의가 보증을 해주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예배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6).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의로움(rigtheousness)이란 공부를 하거나 배우거나 좋은 생활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상급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과 가까이서 자유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먼저 죄를 회개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죄의 자각, 양심의 가책, 뉘우침(conviction)은 회개(repentance)를 주는 유익이지만 죄의 비난과 선고(condemnation)는 자포자기와 절망의 원인(despair)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죄인임을 알고 죄를 회개하는 것은 죄를 이기고 승리하도록 최고의 절정(culminate)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되고 죄에 눌리는 것은 절망적(abject) 실패자가 되게 한다.

 

회개는 하나님 앞으로 가도록 동기(motivate)를 부여해 준다.

죄의 선고는 실패와 힘을 잃게 한다(deflate/powerless).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1).

우리들의 예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죄(sin)이다.

 

그러므로 먼저 회개함으로 그의 깨끗함을 받고 그 다음에 예배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인간적 예배 방법과 영적 예배 방법의 해결책은 다르다.

 

인간적 예배는 정결한 것이 첫 번째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지만 영적 예배는 어느 죄의 상태라도 하나님 앞으로 와서 용서를 받는 예배를 드리라고 말한다. 누가복음 7장에서 소개되었던 여인에게서 본 것처럼 먼저 예배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말씀하시기를 ‘너의 삶에 죄가 있으니 너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신다든지 아니면 ‘그런 상태로는 나와 가까워질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으니 내게로 오지 말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너는 내게로 가까이 오라고 하시고 용서를 준비하시고 함께 하실 것을 예배 가운데서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배 속에서 자유케 하시고 치료해 주신다.

예배는 죄를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이다.

 

하나님은 예배 속에서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① 용서해 주신다(forgiveness).

 ② 치료해 주신다(healing).

 ③ 세정해 주신다(purification).

 ④ 흡수해 주신다(siphon). - 빨아올린다.

 

하나님과 예배자를 나누는 것이 죄이다.

예배자는 먼저 내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깨끗함을 받으며 하나님과 멀어져 있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2) 예배를 방해하는 태도(hindering attitudes)

예배의 가장 위험한 함정, 유혹(pitfall)과 방해와 장애(hindrance)는 죄이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의 예배자에게 중요한 것이 예배의 태도이다. 잘못된 마음과 정신은 좋은 예배를 억제(deterrent)시킨다.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하여 버려야할 7가지 방해물은 무엇인가?

 

첫째, 교만의 예배 태도를 버리라.

예배의 태도에서 가장 무서운 방해는 교만(pride)이다. 교만한 예배자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교만은 예배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① 예배의 가장 큰 방해물(hindrance)이다.

② 예배자를 파괴(ruin)시킨다.

③ 자아(ego)를 드러내는 예배로 끌어당긴다.

④ 예배를 기진맥진하게(all-out)하게하고 실패하게 만든다.

⑤ 회중예배에서 하나님의 소리대신 사람의 소리(men's voice)가 크게 한다.

⑥ 기쁨을 빼앗고 하나님의 임재하는 예배의 기쁨을 강탈(rob)한다.

⑦ 자의식(self-conscious)의 노예(bondage)가 되게 한다.

⑧ 예배를 비난(blame)하게 만든다.

⑨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기에 분별력(discernment)을 상실하게 한다.

 

예배자의 교만은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며 결국은 자신과 회중예배를 파괴시키고 예배의 축복을 잃게 만드는 무서운 ‘잠행성 질병’(an insidious disease)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에센스(essence 본질)는 겸비(self-abasement)이며 겸손(humility)이다.

예배는 우리자신의 궤변이나 억지, 세상에 익숙함과 지적 교양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예배 발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배는 인간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기에 예배자는 스스로 낮은 지위(a humbling position)에 있어야 한다.

예배는 자신의 교만을 희생시키며 손을 들고 찬양을 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민감성을 통하여 하나님께 응시하는 것(peer)이다.

예배는 사람의 의견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견에 몰두하는데 있다.

예배는 인간의 생각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자의 교만은 죄이다.

영적 예배란 영적 이미지를 갖고 드리는 예배이다. 그 예배의 본질은 우리의 생각을 못 박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humbling) 하나님을 높이는 것(exalting)이 예배이다.

 

둘째, 쾌락주의 예배 태도를 버리라.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서 위험한 것이 쾌락주의(hedonism)이다.

예배는 인간적 쾌락주의를 파기하는 것(reverse hedonism)이다.

현대인들은 쾌락주의적 사회(a hedonistic society)에서 살고 있다.

 

그런 사회의 영향이 현대인들의 예배까지 물들이고 있으며 예배에서 자주 드러나는 것이 자신에게 느낌이 좋은 예배를 선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만족을 찾고 예배에서 흥미를 찾는다. 사람들은 만족을 갈망(craving)하고 세속적인 소원(sensual desi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느낌이 없으면 예배에서 행동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인간을 조절하는 시간이지 자신의 감정에 의해 예배를 조절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런 예배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예배의 목적은 흥미위주의 쾌락이 아니라 예배자의 승리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배는 나의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보다 높게 할 때 파괴된다.

나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쾌락주의로 하나님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승리주의로 이끈다.

 

셋째, 무례한 예배 태도를 버리라.

예배에 실패하는 또 하나는 뻔뻔스럽고 주제넘는 행동을 하는 무례함(presumption)이다.

예배의 무례함이란 자기만족에 도취되거나 자기 우월주의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예배자인 나를 받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의 축복의 영을 기대하며 희생을 드리고 기도에 투자하며 회개의 겸손을 보여드리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겸손과 섬김의 의식없이 마음대로 예배의 태도를 갖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거절하신다.

무례함은 예배를 파괴하는 죄이다.

 

넷째, 방관주의 예배 태도를 버리라.

예배자에게 나타나는 예배의 방해 요소는 마치 경기를 관람하는 관객이나 구경꾼의 모습을 하는 방관주의(spectatorism)이다.

예배는 구경거리를 보러 오는 것이나 볼만한 볼거리를 관전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어떤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무대의 극적 장면을 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드리는 행동이다. 예배는 참여하여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행위이다.

회중 예배는 관객이 모여 경기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정신과 몸과 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참여를 목사나 지휘자, 음악 봉사자, 찬양대 연기나 연주를 보러오는 예배 태도를 버려야 한다.

 

참된 예배자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예배로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희생을 드리도록 하신 것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베드로전서 2:5-6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관객이나 연기를 하는 것 같은 예배는 신약성경의 예배와 이질(foreign)적인 것이다.

누구도 예배의 관람자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영광스런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만이 예배자의 본분이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적인 생각을 초월(transcend)하고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 감상주의 예배 태도를 버리라.

예배자의 잘못된 예배는 감정주의 혹은 감상주의(sentimentalism)이다.

예배의 찬양의 경우 예배자들은 멜로디나 리듬이나 곡에 젖다보면 그 찬양이 말씀하고 있는 메시지를 놓치는 때가 많다.

예배가 너무 감정주의에 빠지게 되면 위험하다.

예배는 마음을 드리는 것이지 마음을 흥분시키거나 자극을 받는 것만이 아니다.

예배인도자는 회중예배에서 조심해야할 것이 감정에 호소하는 예배인도법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예배는 감정이 포함되는 것이지만 감정에 호소하기 위하여 울리고 웃기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면 인위적인 예배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예배는 감정을 강하게 통제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들의 예배에서 감정에 민감한 것만을 선호하게 될 때 예배의 본질인 전인적 반응인 마음과 영혼과 몸의 응답은 약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을 때 에스겔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에스겔 33:32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고운 음성과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살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음악을 좋아한다. 그러나 음악을 예배에서 사용하라고 주신 목적은 하나님께 마음을 열게 하고 더욱 하나님을 잘 받아들이는(receptive) 도구이다.

예배자는 단순히 음악을 하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음악은 수송 수단이지 예배의 전부가 아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말하길 ‘그의 목소리에 의해서 내가 움직일 때 그 가사를 노래하는 것보다 더 노래하게 되고 나는 죄를 고백하게 된다’라고 했다.

예배는 예배자의 감정 호소나 감상의 시간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간이다.

 

여섯째, 입술로 하는 예배 태도를 버리라.

예배자의 바르지 못한 예배 태도는 말뿐인 예배, 입술로 하는 예배(lip service)이다.

예배는 드림이지 말로 하는 재주가 아니다. 예배는 가식적으로 하는 위선적 행동이어서는 안 된다. 예배는 진실한 표현이며 고백이다.

예배는 두 마음을 품고 드려서도 안 된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기 위해서 예배자가 가져야할 성품이 있다.

 ① 진실성-fidelity(충실성)

 ② 정직성-integrity

 ③ 성실성-sincerity

 

아모스 5:21-23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형식적이며 겉치레의 예배(ostensible worship)가 아닌 사실적인 실제의 예배(actual worship)이다.

하나님은 조작(manipulation) 당하시지 않기 때문에 성실한 예배를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

 

① 마음을 드리는 예배

② 온 몸으로 드리는 예배

③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배를 흉내 내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영적 황폐함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 변화되지 않으려는 예배 태도를 버리라.

예배자에게 방해되는 가장 심각한 장애물은 변화되지 않으려는 것(unchanging)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우리는 전에 이와같은 것을 해 본적이 없다’라는 말이다.

 

예배자가 자기의 생각과 전통에 메여 새로운 것을 수용하려는 마음이나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는 변화되지 못하고 새로운 기이한 축복들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예배는 새로움으로의 혁신(innovation)이다.

둘째, 예배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challenge)이다.

셋째, 예배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탐험(explore)이다.

넷째, 예배는 새로운 것의 시도(experiment)이다.

 

 

 참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 특권인 동시에 도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축복이 되는 길이다.

회중예배가 사는 것도 참 예배자들에 의해서다.

예배의 특정 목적(definite purpose)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된 예배자를 통하여 예배가 기쁨이 넘쳐야 한다.

참 예배는 참 예배자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6. 회중예배를 온전하게 드리라.

 

왜 예배를 드리는가? 혹은 회중 예배를 통해서 성취하고자하는 희망은 무엇인가?

성도의 30-50% 정도가 성실하게 주일예배에 참석을 하며 그들마저도 만족과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회중 예배에 대해 바른 의식들이 부족한 상황이다.

 

회중 예배나 협력 예배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회중 예배의 목적과 철학은 무엇인가? 회중 예배는 왜 중요한가?

회중 예배는 3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수직형의 예배(vertical aspect of worship) - 예배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적으로 한다.

둘째, 수평형의 예배(horizontal aspect of worship) - 예배자가 회중과의 관계를 목적으로 한다.

셋째, 내향형의 예배(inward aspect of worship) - 예배자가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회중 안에서 예배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1) 수직형의 예배(vertical aspect of worship)

 ① 하나님을 위한 사역자(minister)가 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다.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이유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이다(to minister unto the Lord).

예배자의 기본적 자세는 하나님께 나를 축복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배자가 불평을 하고 불만스럽게 예배를 생각하는 원인은 자신이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배자의 생각은 자신이 축복을 받는 것이 예배이다라고 여기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무엇이 목적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축복하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분께 감사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배의 과정(process)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배의 결과로 주어지는 축복은 과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자신에게 돌아오는 축복의 경우도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먼저인 것처럼 예배의 경우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면 예배는 잘못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다.

주일에 회중들이 다함께 모이는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는 연합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중 예배의 동기는 모든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것이다.

축복을 받기 위하여 숨은 동기(an ulterior motive)를 갖고 예배하는 것은 예배를 그릇 친다.

예배자의 올바른 동기부여(proper motivation)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라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다든지 축복을 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데 있다.

회중 예배에 가장 큰 방해는 자신 중심(self-centered)이다. 예배는 개인의 흥미나 소원이나 관심을 해결하는 것이 첫째가 아니다.

예배는 오히려 자신을 거절하고 잊어버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열중하며 친밀한 사귐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것이란?

① 하나님의 예배 지시에 따르며 동체(a moving body)가 되는 것이다.

② 하나님께 모든 것을 집중(concentrate)하는 것이다.

③ 재능(talent)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다.

 

회중 예배가 수직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경신(Godward)을 높이는 것이다(Manward 경인이 아님).

그러나 예배 분석가(analyzer)가 되어 회중 예배에 대해 비판과 비난을 하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 예배의 방향은 잘못되게 된다. 회중 예배를 방해하는 가장 무서운 것이 그런 사람들이다. 예배에 까다로운 분석자가 되어 예배를 탈선시키지 않도록 특히 주의해야 한다.

회중예배자에 필요한 것이 구별력(discernment)이다.

회중 예배자는 자신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이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의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② 하나님의 임재를 실현(realize)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수직형 회중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높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편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거하시는 임재의 하나님이시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곳에 임하신다. 회중 예배에 임하신다.

 

출애굽기 33장에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에서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33:14-16)

하나님과 모세는 서로 대화를 하며 모세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함께 행하시고 동행하시는 분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곳이며 다르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배가 사회의 모임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즐겁고 흥미 있는 것은 세상에서도 있으며 재미있는 교제를 나누는 것도 세상의 모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다른 것은 하나님의 임재(God's presence)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교회의 소유주(earmark)이심을 나타내는 특징적 표시이다.

교회의 예배 모임은 세상의 모임과 차별화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에 있는 것이다.

만일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회중들은 매주일 피크닉을 할 뿐이다.

 

누가복음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치유하는 능력이 드러나는 것(reveal)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를 예배하는 자 가운데서 실현된다.

하나님의 임재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것이고 체험하는 것이다.

예배에서 속박을 풀어주시고(unleashing) 깨끗하게(cleansing) 하시며 그의 성령으로 가득하게(fulling) 된다.

 

언제나 하나님은 능력이심을 예배 가운데 나타내신다.

우리의 예배가 부족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위한 수직적 관계가 잘못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 지금도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며 임재하고 계신 것이다.

마치 오늘 교회주보에 ‘오늘은 하나님께서 쉬시고 계십니다’라는 광고를 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의 예배를 살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쉬시는 분이 아니라 일하시는 분임을 예배자들은 인식해야 한다.

 

③ 영적 은사의 표현을 위하여 모판(seedbed)과 분위기(atmosphere)를 공급하는 것이다.

회중 예배는 영적 은사의 실험장이다. 그리고 예배는 영적 예배자의 양성소 역할을 해야 한다.

영적 은사는 하나님을 따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 주권(sovereign)이다.

 

예배는 성령의 은사가 협력하는 시간이다.

회중 예배가 더욱 좋아지려면 각자의 영적 은사가 활발하게 활동 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고 발휘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것이 수직형 예배의 특징이다.

우리 예배에서 나의 은사가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은사 표현의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앞서서 자기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전체의 예배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에 민감한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회중 예배는 영적인 민감성이 최우선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 은사에 따르는 예배로 세워야 한다.

진정한 예배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다양한 배경과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때이다.

 

④ 하나님과 대화의 채널(the channels of communication)을 여는 것이다.

 

수직형 예배란 대화의 예배이다.

 

주일예배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의상(attire)을 입는 것 못지않게 내적으로 하나님과 이간되거나 불화(alienate)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하고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죄의 상태를 그대로 둔다든지 절망과 의욕을 잃은 모습으로 무능하게 예배를 드린다면 능력의 하나님,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이다. 어느 경우는 예배자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이 말하기 싫어하고 뚱한 모습으로(incommunicative) 예배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예배의 기대나 집중을 잃고 예배하는 것이다.

 

아가서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예배자는 모두가 사랑하는 자인 나의 비둘기(My dove)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마치 바위 틈 낭떠러지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두렵고 떨리는 모습으로 아직도 예배하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 예배이다.

 

회중 예배는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 앞에 보여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는 시간이다.

하나님 앞에 숨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가 되고 하나님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편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머리를 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방패시며 영광이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과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듣기 원하시고 듣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우리의 느낌이나 상황을 모두 표현하는 열린 마음의 예배가 수직적 예배이다.

 

2) 수평형의 예배(horizontal aspect of worship)

예배 안에서 하나님과 회중 예배자 사이는 상호작용(interaction)을 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라도 불충분(insufficient)하면 예배는 잘못되게 된다.

 

회중 예배의 체험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필수는 수평적 예배의 역동성이다.

회중 예배는 개인의 헌신된 삶을 통하여 연합을 목표로 한다.

수평적 회중 예배를 왜 드려야 하는가?

 

① 몸을 통일시키는 가치를 높인다(enhance).

시편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값진 기름이 사람을 빛나고 향기롭게 만들며 산에 맺힌 이슬이 생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듯 형제 사랑은 서로의 얼굴을 빛나게 하고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회중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회복하는 유일한 도구이다.

회중 예배는 하나 되게 하는데 기여(contribute)한다.

회중 예배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 거하도록 도와준다.

회중 예배는 회중들의 마음(mind)과 활동(activity)과 자세(stance)를 통합(unify)시켜 준다.

 

회중들이 함께 모여 찬양을 할 때 같은 말을 하도록 하고 같이 행동하게 하고 같은 활동에 소속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회중 예배는 하나 되도록 효과를 주는 역할을 한다.

회중 예배란 신학을 논하고 교회의 정치를 말하고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이들이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것이기에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배는 주주총회나 포럼이나 회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임과 다른 것이다.

그들은 함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로가 손을 잡고 한 가족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가 되도록 묶어주는 가장 강한 것이 회중 예배이다.

서로가 하나님의 형제 자매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회중 예배이다.

 

시편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일심(one in heart)이 되게 하는 것이 회중 예배이다.

 

회중들은 예배 가운데 있을 때 형제와 자매의 고백이나 찬양을 듣고 보면서 같은 느낌과 마음이 하나로 감싸지는 것을 보게 된다.

서로가 예배를 통하여 따뜻함을 느끼고 서로 자라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둘을 요구한다.

 

요한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이 높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높지 못하다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이 회중과의 관계이다. 자신이 기쁘고 역동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모두가 그렇게 되도록 돕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 되고 있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건강이나 예배의 건강은 형제다운 사랑(brotherly love)이 자라는데 있다.

 

예배를 통하여 서로를 위하여 사역하는 사랑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배의 봉사는 예배자를 위한 사랑의 사역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회중 안에서 서로가 만져질 수 없는 것(intangible)이나 촉지할 수 없는(ethereal) 예배가 되지 않도록 사랑하는 가치를 높이는 몸으로서의 회중 예배를 세워야 한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영적 진리를 가르치고(teach) 강화시킨다(reinforce).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단순하게 바울은 수평적 기능으로서의 예배를 말하고 있다.

그는 서로 찬양하며 화답하고 서로 마음을 다할 때 진리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예배를 통하여 회중이 함께 할 때 서로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예배할 때 본래에 가지고 있는(inherent) 하나님의 의도를 배우게 된다.

예배는 진리를 배우는 가장 완전한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교육의 시간이다.

예배자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더욱 회상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은혜를 배우게 된다.

 

예배는 교회론을 배우는 유일한 방편이다.

교회를 성도들에게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회중 예배를 잘 가르쳐야 한다.

성경을 배우는 시간이란 성경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시간에 있다.

 

③ 다른 사람 앞에서 믿음을 고백(profess)하게 하는 기회를 준다.

회중 예배는 자신들의 믿음을 서로가 표현하는 장소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구두전달(a vocal communication)하고 있는 것이 회중 예배의 특징이다.

개인이 혼자서 드리는 예배는 수직적 예배로서 하나님과 자신만이 있지만 회중 예배에서 수평적 예배는 서로가 말로서 고백하게 된다.

회중 예배는 믿음을 서로가 격려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④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declare)하게 한다.

예배는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방문객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예배에 진지함이나 예배의 축복을 잘 모르기 때문에 대충 둘러보는 것처럼 예배할 수 있다.

그러나 회중 예배에서 성도들이 서로 힘을 다하여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동기를 주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끌어 들이게 된다.

예배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이나 아직도 예배의 체험이 약한 성도들에게 회중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필요를 가르쳐주게 된다. 우리는 처음 교회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예배를 이해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찬양하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도록 보여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시편 108: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이렇게 예배자 자신이 예배에 최선을 다할 때 구원받지 못했던 친구(a unsaved friend)가 하나님을 찾게 되고 먼저 예배하는 자를 따르게 된다.

 

호세아 6:11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유다는 찬양이라는 뜻이다. 찬양하는 자는 추수를 거두는 자라는 것이다.

회중 예배는 추수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만일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평범한 예배(mediocre worship)를 드리며 회중들이 예배의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예배에 참석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추수할 의지가 없는 예배일 것이다.

 

예배는 복음전도적(evangelistic)이어야 하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사람들의 전신을 끌어 올리는(draw) 역할을 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광고(advertising)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선하심, 성실하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자비하심, 사랑하심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간이다. 자신을 위한 예배와 서로를 위한 예배에서 더욱 구원받지 못한 자를 위한 추수의 예배로 승화시켜야 한다.

 

⑤ 하나님께 대한 감수성(receptivity)을 마음에 품게 한다(foster).

회중 예배 가운데 예배자들이 마음을 하나님께 열고 있는가? 아니면 계속해서 위축되고 있는가?

예배자가 하나님의 성령께 의지하지 않을 때 예배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수용성이 예배자들에게 부족할 때 예배는 굳게 닫힌다.

 

호세아 10:11-12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의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우리 자신을 갈고 경작하며 뒤집는 쟁기질(plow)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경작(plow)이다.

예배에서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밭(soil)을 갈아 일구는 시간이며 씨앗(seed)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이다.

회중 예배자들이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큰 응답을 주실 것이다.

 

시편 65:9-10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강을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예배자들에게 가득 찰 때 예배의 영광은 나타난다.

회중 예배는 전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다.

함께 고백하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회중 예배자는 마음을 하나님께 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과 의지와 정신을 모두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 회중 예배이다.

 

3) 내향형의 예배(inward aspect of worship)

예배를 통해 파생되는 효과(ramification)는 회중과 개인에게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다.

 

① 내적 자아의 표현을 제약받지 않도록(uninhibited) 하나님의 사람들을 해방(release)시켜 준다.

중요한 것은 제약받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예배자들에게 어떤 방해물이나 문제들로 묶여있기를 소원하지 않으신다. 예배는 해방의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다. 죄, 절망, 슬픔, 괴로움, 좌절, 죽음으로부터 예배자를 자유케 해주는 것이 예배이다. 회중 예배는 제약하는 예배가 아니라 제약받지 않도록 돕는 예배이다. 어떤 형식과 방법이든 자유롭게 표현 되는 예배가 내향형 예배이다.

만일 외향형 예배(outward worship)인 경우는 외적인 것에 의해서 통제와 제약을 받기 때문에 예배의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할 수 없게 된다.

천국의 예배는 자유함을 주는 예배이지 구속하는 예배가 아니다. 그렇다고 예배 순서나 의식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너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편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진정한 예배는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도록 열려있는 문이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그 문은 마음의 문이지 형식의 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보호를 위하여 문을 열지 않고 닫은 상태로 버틴다. 예배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도록 차단물(barricade)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좌정하시고 활동하실 수 있도록 넓게 열어 놓아야 한다.

 

② 우리 마음과 느낌의 표현을 말(verbal)로 할 수 있도록 공급해 준다.

예배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 의미를 모르면 예배는 잘못되게 된다.

하나님을 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예배이다.

찬송가나 성시나 기도문이나 고백문과 드라마의 재료들은 모두 특별하게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표현이다.

마틴 루터나 웨슬레와 같은 위대한 신앙인들이 쓴 찬송가를 우리가 부르면서 그분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우리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위대한 찬송들을 하게 될 때 용어(vocabulary)를 통해서 우리의 느낌이 더해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 있는 표현(meaningful expression)이 살아나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는 마음과 느낌의 표현이 말로 실천되어야 한다.

회중 예배가 내향적인 예배라고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담긴 표현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③ 믿음을 강하도록(increase) 하는데 도움을 준다.

내적 예배의 효과는 믿음을 강하게 하는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인  

마태복음 28:17에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예배는 하지만 의심하며 예배하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예배는 믿음의 열매이며 믿음의 고백이기에 믿음에 따라 평가를 받게 된다. 믿음이 없이 예배를 한다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예배의 체험을 할 수 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예배할 때 강해지고 성숙되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자는 하나님을 전적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이다.

우리가 예배 할 때 우리의 영역은 점점 넓게 확장되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회중 예배는 서로의 믿음을 합하여 하나님을 향하는 내적 연합과 일치가 중요한 것이다.

회중 예배는 믿음을 강하게 하는 내향적 예배이다.

 

④ 거룩함을 자라게(grow) 해 준다.

내향적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배우는 예배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holy)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들의 삶이 거룩하게 된다

.

하나님을 예배하면 그분은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도 거룩하게 만드신다.

 

시편 115:4-8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을 만들고 의지하는 자는 그들과 같이 된다.

우리가 예배하면 우리는 예배하는 사람처럼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와 그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신다.

그러나 변화에서 가장 축복된 변화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변화이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참으로 예배를 통해서 나타나는 축복의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의 영향력 안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게 되고 그의 성실함처럼 성실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변화도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얼굴에 있는 베일을 벗지 않을 때이다.

 

요한일서 3: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배는 주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처럼 될 것이다. 내향적 예배는 하나님을 배우게 하고 따르게 한다.

 

⑤ 예배하는 삶에 헌신하도록(commitment) 영감(inspire)을 부어준다.

회중 예배는 헌신하는 예배이다.

기쁨으로 함께 모이고 서로 음악 봉사를 하고 수고하는 이유는 영광 찬양을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만일 교회에 예배가 없다면 성도의 삶은 열악한 상태로 침몰하게 될 것이다.

예배 속에서의 힘있는 분위기와 만족스런 사람을 위하여 예배자는 모두가 헌신하는 예배자들이어야 한다.

회중 예배가 살아있으려면 헌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

내적으로 헌신하겠다는 의지나 믿음과 결심이 없으면 회중 예배는 무기력할 것이다.

우리의 회중 예배가 헌신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는 주일을 갖게 된다면 일주일의 생활은 벅찬 은혜의 삶이 될 것이다.

예배는 체험하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헌신은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⑥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것을 준비(prepare)하게 한다.

이사야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누가복음 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고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을 예비하십니다. 예배는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고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변화를 시켜준다. 회중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것을 본다.

예배는 우리를 어떻게 준비시키는가?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softens) 만들며 우리의 영을 민감하게(sensitizes) 만들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moves) 우리가 이 사실을 알도록(knows) 한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형식에 의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 즉 올바른 예배자를 통하여 움직이신다. 우리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확고부동한(steadfastly) 예배 태도를 갖게 된다면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위하여 항상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우리의 예배가 왜 크게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아내를 예비하였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준비하신 축복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며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회중 예배는 내향적 예배로 내적인 준비가 있어야 한다.

 

결론

 시편 73:16-17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예배하는 것이다.

 

특히 회중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서로가 힘을 모으고 함께 하나님을 향하고 마음과 정신과 영을 집중하도록 서로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모두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할 때 하나님이 이 땅에 보여 주시고자 하는 것을 말씀하실 것이고 회중들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시편 77: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하나님은 거룩한 회중의 무리가 모여 예배할 때 주의 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배는 우리를 그에게로 올라가도록 합니다.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은 회중 예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예언적 사역(prophetic ministry)을 하신다는 것이다.

회중 예배는 회중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가장 강력한 사역이다.

주일 예배가 중요하고 모든 교회의 등록 신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서로 모이기에 힘쓰는 예배를 세워야 한다.

회중 예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추진해야 될 전적인 예배사역 회중 예배 회복이다.

 

 

7. 성령의 예배인도를 받으라.

 

1) 성령의 예배란 무엇인가?

2) 영적 연결의 예배를 드리라.

3) 신령한 예배 도구를 사용하라.

4)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예배를 추구하라.

 

예배는 영적 기능의 요소로 되어있다.

예배는 성령의 활동이다.

 

고린도전서 12:4-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예배에는 성령의 역사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배 사역에서 성령은 상호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매순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요구하심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움직이며 성령님의 지시하심을 분별하고 동참해야 한다.

예배 가운데 성령은 다양하게 일하시고 예배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예배를 교정하고 수정하고 고치는(rectify) 역할을 성령께서 하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예배를 주도하는 것이 성령이시다.

 

때문에 예배인도자나 예배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성령의 인도이다.

예배를 방해하는 문제들의 본질을 추적하면 대체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무시하는 예배였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예배 인도자나 예배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진실을 예배 속에서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예배의 문을 열게 하고 하나님을 더욱 향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며 초자연적 역사를 예배 가운데서 체험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예배란 성령 하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 자신을 드리는 예배이다.

 

1) 성령의 예배란 무엇인가?

성령의 예배(spiritual worship)란 어떤 예배인가?

창세기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8-9).

 

성령의 예배란 하나님과 함께 걷고 말하는 예배라고 할 수 있다(walking & talking with Lord).

배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예배는 모놀로그(monologue) 즉 독백이 아니다.

그렇다고 예배는 일방적으로 내가 하나님께 나의 느낌이나 상황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말하고 그분께서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예배를 정의한다면?

 ① 예배는 교환이다(Worship is an exchange).

 ② 예배는 쌍방 대화이다(Worship is tow-way communication).

 ③ 예배는 사랑의 언어(Worship is language of love)이다.

 

예배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어떤 인공 언어(artificial language), 기계 언어(machine language), 죽은 언어(사어 a dead language), 아름답게 꾸민 화려한 언어(fine language)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living language)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사랑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둘 사이에 교환이 오고가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주고받고(give & take), 말하고 듣고(talking & listening), 송신과 수신transmitting & receiving)를 해야만 한다.

 

예배는 어떤 일방적인 감정 표현을 한 쪽으로(one way) 쏟아 붓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가 의견을 내고 느낌을 말하며 기회를 주는 시간이다.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께 우리는 충분한 표현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반응을 충분히 들어야만 한다.

예배를 드릴 때 찬양하고 노래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하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조용히 앉아있는 시간을 갖는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하길 원하고 그의 마음을 나누어 주시길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 기회를 드리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두 관계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심(God speaking)과 예배자가 말함(We speaking)이다.

찬양은 우리가 말하는 시간이고 성령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시간이다.

 

예배가 예언적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에서 하나님과 예배자의 관계는 예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은 예배자에게 화답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에서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2) 영적 연결의 예배를 드리라.

예배는 그것이 음악이든 설교이든 헌금을 드리는 것이든 모두가 영적 연결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이나 영적 능력이 없으면 기쁨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예배자가 성령 충만함이 없다면 예배의 기능이나 역할들이 잘못되게 된다.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고 영적 연결이 마비되어 있다면 예배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게 된다.

 

역대상 25:1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다윗의 예배 리더십은 탁월했다.

 

그는 예배봉사자들의 자격을 3가지로 말했다.

① 구별하여 섬기는 것

② 신령한 노래를 하도록 하는 것

③ 직무대로 일하게 하는 것

 

 이것은 예배봉사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 반드시 교회에서 시행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다윗은 세밀하게 예배 봉사자들의 이름을 말하고 그들의 선택 기준이 모두 신령함이었다는 것은 아주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 사역자들이 알아야할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예배 가운데 성령의 일하심이 모든 예배 순서와 예배자들에게 연결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성령에 민감한 기도, 찬양, 설교, 봉사, 안내, 사역을 해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회중 예배가 꼭 닫혀있는 것을 여는 예배(unlock worship)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 순간마다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전략을 세워야 한다.

 

3) 신령한 예배 도구를 사용하라.

예배는 다양한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그 도구들은 예배를 돕기 위한 것이지만 예배를 풍성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좋은 시설과 봉사자, 설교자, 음악, 기도, 섬김, 은사, 스타일, 자료 등, 탁월한 예배를 위하여 필요한 도구들은 더 많게 된다. 그러나 어떤 도구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신령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예배에서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예배는 영적 도구들이 일반적인 도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찬양은 더욱더 영적이어야 한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가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시편 22:22-24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다윗은 전적으로 예배 속에서 일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히브리서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히브리서기자는 교회에서 찬송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예배를 받을 실 뿐 만아니라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을 보이시고 문제를 치료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하면 회중 안에 하나님은 임하신다.

찬양은 신령한 예배를 드리도록 돕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어떤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가? 바울은 이렇게 하라고 요청을 했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① 찬송가(hymn)

찬송가는 성령의 지시에 의하여 쓰여진 시이며 고백이며 표현이다.

찬송가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노래들이다.

그러므로 찬송가는 사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작품(composition)이다.

찬송가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가게 하기 위한 영적 도구이다.

때문에 예배에서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교인들은 찬송가에 반감(antipathy)을 갖거나 혐오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교회의 예배에서 가장 큰 갈등 중의 하나가 찬송과 현대 예배 음악의 충돌이다.

이 문제를 교회의 리더와 회중들이 갈등의 요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돕는 도구로 사용하여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예배로 승화시켜야 한다.

 

※ 찬송가를 사용해야 할 이유

 

첫째, 찬송가는 부요한 기독교 유산(heritage)과 연결(link)시켜 준다.

찬송가를 쓴 크리스천들의 표현은 현대의 노래를 쓰는 사람들과 영적 차이가 있다.

 (hymnwriter - songwriter)

 

둘째, 찬송가는 깊이 있는 표현형식(vocabulary)을 공급해 준다.

현대의 찬양들은 대부분 짧게 쓰여진 가사들이지만 찬송가는 폭넓고 다양한 표현을 하여 깊은 내용을 전달해 준다.

 (many words - few words)

 

셋째, 찬송가는 오랜 기간의 수명(lifespan)을 준다.

현대 찬양들은 오랜 기간 불려지지 않지만 찬송가는 400년 전 것도 불려진다.

루터나 웨슬레의 영성을 전달해 주면서 오랜 시간동안 부요함과 가치를 심어준다.

 (longer - shorter)

찬송가를 쓴 사람들(hymnists)은 신학을 진실한(bona fide) 마음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운 시심(poetry)과 지식(knowledge)의 결합이었다.

 

넷째, 찬송가는 폭넓은 주제와 내용의 다양성(variety)을 제공해 준다.

각 절기나 예배에서 찬송가는 많은 주제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찬송가는 절기의 의미와 주제들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여러 곡들이 있다.

그러나 현대 찬양은 대부분 절기에 사용할 수 있는 곡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variety - simple)

이렇게 예배는 찬송가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적인 훈련을 받기도 하고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과 하나님을 섬기던 모습을 터득하기도 한다. 현대예배를 강조하면서 교회들이 현대 예배음악을 찬송가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불려지고 사용되는 새로운 현대 음악의 흐름을 반대하는 10가지 이유

 

① 너무 새롭고(too new) 알 수 없는 언어(unknown language)로 되어 있다.

② 멜로디(melodious)보다는 너무 스타일(style)을 강조한다.

③ 너무 많은 새로운 곡(many new songs)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배우기는 불가능하다.

④ 음악이 너무 요란하고(disturbance) 무질서한 매너(disorderly manner)를 한다.

⑤ 경건성의 가사(godly lyrics)보다 기계 음악(instrumental music)을 너무 강조한다.

⑥ 가사에서 너무 불건전한(blasphemous) 면이 많다.

⑦ 이전 세대들(preceding generations)의 고백을 들을 수 없다.

⑧ 장치(contrivance)하는데 너무 많은 돈(money)이 든다.

⑨ 예배가 한쪽 방향으로 가도록 독점(monopolize)한다.

⑩ 갑자기 나타난 젊은이들이 하기에 치밀하지 못한(loose) 것이 많다.

 

젊은이들이 말하는 찬송가를 원하지 않는 10가지 이유(1984 성경대학그룹)

 

① 많은 찬송가는 예배보다 교리(doctrine)에 더 기여한다.

② 음악과 구조가 너무 형식(formal)에 매여 현대와 젊은이들과 대립(opposed)된다.

③ 많은 단어들이 고체(archaic)이다.

④ 사라진 찬송가(forsaken hymns)는 그들의 전통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⑤ 많은 찬송가가 죽었다(dead).

⑥ 많은 교회들이 찬송가를 제공할 수 없다(afford).

⑦ 찬송가는 현대에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represent)하는데 부족하다.

⑧ 현대 찬양은 단순하고(simple) 집중하는데 쉽다(easy).

⑨ 찬송가만을 붙들고 있으면 소극적인 요인(negative factor)만 연출된다.

⑩ 현대 찬양은 영의 흐름(flowing)이 더 쉽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나 현대 찬양을 하는 것이나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는 회중들 신앙과 진리로 교육하고 가르치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어떤 것은 좋고 나쁘다라는 차원보다는 서로 예배를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합당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②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

신령한 노래란 무엇인가?

첫째, 주를 향한 자발적인 찬양(spontaneous song)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부르는 찬양이다.

둘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부르는 영의 찬양(spirit song)이다.

셋째, 하나님을 노래하는 영광의 찬양(glory song)이다.

넷째, 하늘나라의 찬양이다(heavenly song).

 

신령한 찬양은 예언적 찬양이라고 할 수 있으며 깊이 있게 영적 감화를 체험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① 신령한 노래는 초자연적인 은총의 회복(charismatic renewal)을 주는 능력이다.

② 신령한 노래는 회중 전체의 영성을 들어올리는(uplifting) 능력을 준다.

③ 신령한 노래는 예배자를 치료해 주는(healing) 능력을 준다.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방법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예배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 최선을 다해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한 가지 방법이 아니라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예배에서 예언적 증거가 나타나는 신령한 노래들도 사용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오늘의 예배에서 많은 교회들이 하지 않는 예배가 이러한 예배이다.

예배는 예언의 영을 증거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우리가 예수님을 예배 속에서 증거할 때 하나님(예언적)의 영이 우리 가운데 머물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머물 때(우리 예언을 증거할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증거의 영이다.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뜻을 발견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이상을 보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언이 있는 예배가 되려면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믿음의 문이 닫혀 있으면 성령의 인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더욱 예배인도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예언적 예배를 경험하게 될 때 믿음의 성숙함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그분과의 친밀함이 먼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4)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예배를 추구하라.

어떻게 드리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예배인가?

우리는 예배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것은 예배탐험의 마지막 중요한 정리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예배를 위하여 해야 될 것(things to do)과 피해야 될 것(things to avoid)이 무엇인가를 소개한다.

해야 될 것

 

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도록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intimate time)을 많이 가지라.

영적 민감한 시간을 갖기 위해 자신을 경작하며 하나님의 심장(heartbeat) 소리를 듣게 해야 한다. 이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2:36-38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는 교회에서 오랜 기간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도행전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예배는 기도와 금식(prayer and fasting)에 있다.

 

② 규칙적(regularly)으로 성경의 말씀을 훈련하라.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다.

 

③ 하나님의 뜻(God's will)을 알기 위하여 힘쓰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영적인 깊이를 훈련해야 한다.

 

④ 하나님 말씀의 흠없음(flawless)을 받아들이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믿어야 한다.

시편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요한복음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⑤ 바르게 하나님을 이해하라(understanding).

예배는 감정 표현이나 즉흥적인 생각으로 하여 큰 실수(fiasco)를 저지르지 않아야한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⑥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지(give) 주의 깊게 생각하라.

예배에서 인도자나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지 자신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회중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반응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열왕기상 22:13-14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⑦ 하나님을 기다리라(waiting).

예배는 때(timing)를 아는 것이다. 들어야 할 때와 말할 때 구분을 잘해야 한다.

전도서 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⑧ 핵심의 말씀(a key word)에 온 마음을 집중하라.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기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집중해서 듣고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다.

 

⑨ 예배에서 새로운 것이 알려지기(emerge)를 기대하라.

예배는 논쟁이나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⑩ 예배의 가치를 높이는 추진력(impulse)을 가지라.

예배는 일회성이 아닌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에너지를 바치며 헌신하는 것이다. 예배의 방해물들이 없도록 적극적인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

 

⑪ 크게(loudly) 그리고 분명하게(clearly) 표현하라.

알아들을 수 없는(inaudible) 말과 환자와 같은 병약한(invalid) 표현으로 예배하지 않기 위하여 표현에 열정이 담겨있도록 해야 한다.

 

⑫ 고갈(exhaust)되지 않도록 기여하라(contribute).

예배는 서로의 조화와 협력으로 세워진다. 그러나 회중들의 참여도가 낮거나 소극적인 관심은 예배의 불을 끄게 되고 예배인도자나 봉사자들을 지치게 한다. 예배에 기여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야한다.

 

⑬ 창조적(creativity) 예배가 되게 하라.

예배는 제한받지 않아야 하고 다양한 영적 상황들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⑭ 참된 예배(true worship)가 되게 하라.

진실한 예배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거짓과 위선의 예배는 거절하신다. 구별과 성별된 예배를 위하여 자신을 버려야 한다.

 

⑮ 예배자들과의 관계(relationship)를 잘하라.

회중 예배는 개인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전체 성도들을 위한 예배이기에 협력이 중요하다. 서로 섬기고 격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피해야 될 것

 

① 예배인도자들은 비난(rebuke)과 거친 말(harsh word)을 피하라.

하나님은 사랑스러움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자이든 교사이든 예배 사역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는 모두는 아름답고 사랑스런 용어와 인자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시편 85:8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② 진부하고 단조로운(platitudes) 표현을 피하라.

만일 예배에서 똑같은 찬양, 판에 박힌 기도, 같은 설교를 매주 한다면 그 예배는 더 이상 예배자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기대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예배자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활동이 예배에서 들어나게 해야 한다.

 

③ 너무 과장되게 꾸미는 것(embellish)을 피하라.

예배인도자나 예배자들은 느낌(feel)을 분명하게 표현을 해야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과장되게 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④ 경멸하고 멸시하는(despise) 태도를 피하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강조했다. 예배는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했다. 성령의 역사까지 수용하는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에게 있어야 한다.

 

⑤ 사람들이 시험(temptation)에 들게 하는 것을 피하라.

예배는 성령의 역사도 있지만 사탄의 역사도 있다. 성령께 이끌리는 것을 거절하게 되면 자연히 사탄이 예배를 지배하게 된다. 성령 충만한 예배가 되기 위해 성령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 사도행전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⑥ 성령을 슬프게 하는(grieve) 태도를 피하라.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슬프게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기쁘시게 일하시도록 예배를 성령께 맡겨야 한다.

 

⑦ 성령을 훼방(blasphemy)하는 예배를 피하라.

마태복음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행위이다. 예배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이다. 예배를 어지럽히지(violating)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결론

 

 예배는 성령께 민감할 때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을 기다리며 그 능력을 체험한 예배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락방에 들어가기 전과 다락방을 나온 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새로운 영적 생활을 출발하게 된 것이다.


예배의 기초는 성령인도이다.

예배는 성령 체험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나의 경향(predisposi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향을 우선하는 것이다.

예배는 노력과 희생을 치루며 획득하는 것(purchase)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백성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예배 가운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신다.  

예배 탐험을 통하여 우리는 예배에 대한 7가지 중요한 원리를 배웠고 그 중에서 잊지 말아야할 가장 핵심적인 말은 세 가지이다.

 

첫째, 회중예배를 회복하라.

둘째, 하나님을 체험하라.

셋째, 변화를 받으라.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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