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기독교 신앙교육

기독교는 예배하는 종교이다. 기독교의 교회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섬기기 위해 구별된 백성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교회시작과 함께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예배를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이며 또한 그들이 모임 처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예배는 성경이 가르치고 종교개혁자들이 새롭게 해준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지기 보다는 실제로 그렇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개선되어야할 실천신학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예배와 신앙교육의 상관관계를 기독교교육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칼빈은 "Semper Ekklesia Reformanda."(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개혁은 신앙교육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교육을 통하여 예배의 본질과 기능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어야한다.


1. 교육과정 속에 있는 지상교회


지상의 교회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과정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독교 구속사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지상의 교회는 도래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서구의 실천신학에서 보는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인간을 섬기는 일로 규정하고 있다. 교회는 실제적으로 복음전파를 위하여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봉사의 임무를 들고 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가 명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교회의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복음전파의 사명은 그 방법에 있어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예루살렘교회는 모일 때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부터 그들의 교회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행 2:42). 그리고 최초로 집사를 세울 때에도 사도들의 직무를 말씀봉사(행 6:4)와 기도하는 일로 제한하고 집사로 하여금 구제하는 일을 맡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말씀봉사는 복음전파를 뜻하며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사례는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행 8:27~).


사도바울의 생애에서도 그가 행한 복음전파의 실제적인 방법은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행위에 의존하였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는 교회를 섬기는 교회내의 직분의 다양성을 은사와의 관계에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몇 가지 직분을 언급하고 있다(고전 12:28).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의 가르침이 더 낫다고 했다(고전 14:19).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할 것을 교훈하면서 이러한 일을 위하여 목사와 교사를 세웠음을 언급하고 있다(엡 4:11-16).


오늘날은 일반교육에서 전통적으로 교육의 대상이 성장세대라고 생각하던 입장을 뛰어넘어 기성세대도 교육을 받아야할 대상으로 전제되며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배워야 하는 교육적인 존재이며 인간의 삶 자체가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의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의 과정 속에 있음이 평생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표현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교회교육을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며 그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차원에서 교회의 교육적인 사명은 막중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교육적인 과제와 함께 교회는 평생교육의 장으로서 교육의 과정 안에 실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화란의 개혁교회와 독일의 개혁교회들은 실제적인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 속에 실제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A. Kuyper도 그의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범위를 설정하면서 크게 4부분으로 나누었다. 즉 첫째는 교육적인 과목, 둘째는 다스림의 과목, 셋째는 봉사적인 과목, 넷째는 평신도 과목 등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가 교육적인 과목으로서 그 내용은 설교, 교리문답, 예배, 전도 및 선교를 포함하고 있다.



2. 기독교예배의 본질과 그 기능


1) 기독교예배의 본질
기독교의 예배란 그 낱말적인 의미가 뜻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를 경배하며 그를 섬기는 봉사적인 행위를 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과 그 기능의 본질적인 근거는 우리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인간 밖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게 놓여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주신 구원계시(Opus Dei)에 근거하기 때문에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이 때문에 예배는 계시 의존적인 관계에 있게 되며 그 중심이 삼위일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예배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그 무엇이 아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계속적인 선포와 작용으로서 인간을 섬겨주시는 하나님의 봉사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선취행위(Opus Dei)에 대한 감사로서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의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가 어우러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예배는 그 본질이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로서 예배(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한 영원한 제사)와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하나님에 대한 봉사로서의 예배(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녀들의 믿음과 순종)는 양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배의 중심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화목의 복음이 선포됨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섬기며(마 20:28, 막 10:45) 예배에 참여한 회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곧 인간 자신의 몸 전체를 드리는 헌신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2) 기독교예배의 기능
D. Rossler에 의하면 예배의 기능을 3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예배의 교육적인 면이다. 종교개혁자 M. Luther는 바로 예배의 교육적인 임무를 그의 예배에 관한 글(Deutsche Messe)에서 밝히고 있는데 즉 예배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야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자의식(신앙)을 일깨우고 강화시키는 역할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Luther의 예배에 대한 교육적인 이해는 정통주의(Orthodoxie)시대를 거쳐 슐라이허막허 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요리문답과의 관계 속에서 예배의 교육적인 기능은 크게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교육적인 기능은 후에 부흥운동과 함께 부흥설교, 전도설교에서 결정적인 역할로 바뀌어 지게 되었다. 이러한 예배의 교육적인 기능은 Calvin과 개혁파교회의 전통에서도 처음부터 강하게 작용되었다. 즉 예배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를 통한 가르침이었으며 다른 한편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신앙고백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이다.


둘째는 Luther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는 "우리 주님께서는 예배에서 그의 거룩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는 다시금 그 예배에서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그에게 응답 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공동적인 기도"이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개체 신앙인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되며 공적인 교회의 예배는 바로 공동적인 기도의 이루어짐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예배 중에 함께 기도하는 것만큼 강한 능력적인 것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마 20:19-20, 행 1:14, 2:1-4). 이것은 역시 개체 신앙인의 신앙적 교화(Erbauung)와도 깊은 관련을 갖는데 이러한 이해는 역사적으로 경건주의적인 교회에서의 예배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예배를 바로 교화와 주일축제(Sonnntagsfeier der Erbauung)로 이해한다.

 

셋째는 예배의 축제(Feier) 또는 축하(Fest)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슐라이허막허에게서 결정적으로 대두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20세기에 와서 기독교 예배에 대한 지배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역시 교회를 신앙의 공동체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예배는 공동체의 공동적사건이며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것이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체쯔비즈(Zezchwitz)는 예배를 가리켜 성찬을 위한 교회의 축제라고 불렀으며 부루너(P. Brunner)는 창조와 종말사이에 구원의 실현으로서 종말의 사건으로서의 예배, 즉 그 예배에서 과거와 새로운 시작, 죄와 용서가 동시에 현재적 실제성으로 나타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예배에 이런 이해와 관련하여 랑에(E. Lange)도 그리스도인 개체와 교회의 생명을 위한 기능관계에서 예배를 하나님의 언약갱신의 잔치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언약관계에서 본 것이며 매 예배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믿는 자에게 보증하는 구원사건에 대한 언약의 새롭게 함의 축제로 이해한 것이다. 그 말씀을 중심하여 드리는 예배를 K. Barth 역시 잔치(Fest)로 표시했다. 예배를 축제나 잔치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성찬의 본질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에 있다면, 그것은 다만 과거의 사건에 대한 회상의 의미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성령으로 임재 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함께 나아가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만찬을 믿음으로 소망하는 관계에서 볼 때에 예배와 성찬은 훨씬 기쁨과 감사와 희망이 넘치는 축제와 잔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마 25:1-13).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보상을 받는 것으로서의 예배이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베푸신 은혜의 상기와 신뢰회복과 그 은혜에 대한 말씀의 들음 안에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그에게 드림이며, 그런 관계 속에서 매주일 예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으로의 만남이요, 죄 용서와 의롭다하심, 영원한 나라의 약속의 확인과 함께 부활의 찬양이요, 기쁨과 감사로서의 예배는 그러한 기쁨의 은혜를 함께 나눔으로서의 축제가 되는 것이다.

 

 

3. 교육적인 기능을 지닌 기독교 예배


역사적으로 예배는 언제나 신앙의 가르침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며 발전되어 왔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더욱 강조되었는데 곧 "복음의 순수한 가르침과 올바른 성례의 시행"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예배의 중심에는 복음의 가르침 즉 말씀중심의 예배가 개신교 예배의 특징을 결정짓는 요소일정도로 예배에서 주 역할을 해왔다. 성례 역시 이러한 복음의 가르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에서 교육적인 의미와 관련하여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것은 예배에서 성도들의 찬양과 경배가 더욱 바르게 되도록 하는데 있었고 예배하는 자를 말씀의 바른 가르침과 깨달음 안에서 예배와 성례에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있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성취 안에서 복음으로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축복된 사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현재위치를 점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며 견고히 하며 믿음에 굳게 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1) 말씀중심의 예배
개신교예배의 특징은 말씀중심의 예배이다. 말씀중심의 예배에서 교육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1) 예배의 선언, 묵도, 기원, 송영(Intriotus)
우리의 예배에서는 묵도는 예배의 시작을 뜻하지만 단순히 눈을 감고 머리를 가볍게 숙인 자세로 예배의 태도를 표하지만 실제는 예배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선언이요, 예배자의 몸과 마음을 그에게 드릴 수 있는 준비의 시간이다.

 

예배에서 인도자의 기원은 개신교 예배의 특징인 말씀중심의 예배의 총체에 대한 선포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크신 은혜의 행위에 대하여 알고 있는 회중을 지금부터 이 예배 안에서 현저히 주님의 말씀의 가르침 안에 머물겠다는 결심을 세우는 데로까지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역시 회중에게서 아멘으로 응답되는 것이다.

 

특히 주일의 예배가 교회력에 의한 절기와 관련될 때 그 예배의 시작은 예배의 방향제시와 함께 예배의 의미와 성격과 예배의 선언에서부터 예배의 교육적인 목적을 분명히 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배의 참여자로 하여금 그 목표에 향하도록 동기유발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배움의 과정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2) 교독문
이 교독문은 원래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의 낭독순서로 초대교회에서 행한 바울서신의 낭독에 근거하였으며, 그 후 벌써 3세기경에 복음서들이 읽혀졌고 이러한 발전은 후에 서구 기독교예배에서 서신과 복음서 낭독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유대교이 회당예배의 유산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하여 복음서와 서신서 낭독순서가 거절당하였으며 Calvin은 성경봉독 대신에 사회자와 회중의 십계명을 교독하게 하였다. 영국교회의 The Book of Common Prayer(공동기도서)에서는 다시 십계명 교독과 성서봉독(복음서와 서신서) 양자를 다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도리어 시편을 중심한 성서교독으로 바뀌어 예배 중에 교독문을 낭독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말씀 중심의 예배가 개신교 예배의 본질적인 특징이라면 한국교회의 예배에 성시교독보다는 설교 본문과 관계없이 독립적인 성서낭독 순서가 부활되었으면 한다. 현대서구의 교회에서는 여전히 성서낭독의 순서가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순서의 중요성은 역시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부분으로 예배 참여자들에게 신앙교육적인 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3) 설교
설교는 개신교 예배의 심장부와 같다. 이러한 심장부와 같은 중요성은 어디까지나 모든 사람을 하나님말씀 가운데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으로 교회의 교육적인 임무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설교 없이는 역시 예배일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설교의 기능은 복음전파와 신앙의 가르침에 그 중요성을 갖는다. 신학적으로 설교는 하나님말씀의 선포라는데 그 기능이 중요시 된다. 이러한 설교 없이는 예배일 수가 없다 할 정도로 설교의 위치는 오늘날까지 예배에서 중히 다루어지고 있다.


설교는 역시 하나님말씀을 선포하지만 예배의 참여자 편에서는 설교의 들음을 통하여 믿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롬 10:17). 그것은 곧 신앙의 가르침이요, 신앙교육적인 기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부르시며 그러한 삶의 목적임을 밝혀준다.


설교의 교육적인 기능으로서 더욱 중요한 것은 설교는 인간의 신앙적인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으로서의 역할이 실제의 중심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물음과 대답의 교수적(Didatik)인 관계를 뜻한다.

(4) 기도
예배 중에는 기도의 분야가 여러 번 있을 수 있다. 먼저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있는데 예배참여자는 엿새 동안 세상생활 속에서 있었던 실수와 죄에 대한 것을 뉘우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순서이다. 이러한 기도가 끝나면 사회자를 통하여 고백된 죄의 용서에 대한 죄의 사면이 선포되는 것이다. 이러한 죄의 고백은 사면선언의 관계에서 예배하는 자는 자기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굴복의 표시와 죄 용서에 대한 은혜의 약속의 선포를 통하여 그 마음에 기쁨과 새로운 신뢰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언제부터인지 장로가 예배 중의 기도순서를 맡고 있다. 이러한 발전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한 신학적인 해명을 얻지 못하고 있다. 서구교회의 예배순서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목회기도는 예배의 마지막에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원리적인 면에서 볼 때에 성경낭독 다음에 행함으로서 이러한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전제에서 실시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도는 인간의 소원을 간구한다는 뜻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질문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실제로 기도하는 자 자신의 발견이며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대면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 아멘을 말함으로서 그의 뜻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한편, 한국교회 예배에서 찾아 볼 수 없지만 서구교회의 예배에는 기도되어지고 있는 '주님의 가르친 기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기도 자체가 본래 제자들의 기도교육에 대한 요청으로 예수님이 제시해 주신 것이며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항상 교육적인 특징을 가지고 기도되었고 전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항상 신앙의 가르침의 모본으로서 예배 중에 사용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5) 신앙고백
예배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되어지는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보아야한다. 한국교회의 예배에서는 대체로 신앙고백이 성시교독문 다음에 행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예배순서의 전통적인 관계에서 볼 때 전혀 어떤 원칙에 적용시키기는 어렵다.

 

 대체로 독일 Luther교회의 예배순서를 보면 항상 가톨릭의 전통에 연결시키면서 정규적인(Ordianarium) 예배순서의 목적을 위한 것으로 구분하여 개신교 예배순서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 Ordianarium에 속하는 것은 곧 Kypie(주님의 영광), Gloria(영광), Credo(사도신경), Sanctus(거룩), Benedictus(축하하다), Amgnus Dei(하나님의 어린양)등이다. 여기에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순서로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서구교회의 예배에서는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예배란 완전히 새로운 순서로서의 개혁을 뜻했기 때문에 말씀중심의 예배로서 사도신경은 예배순서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성찬식을 행할 때 신앙고백과 찬양의 의미로 사용했다. 이런 관계에서 볼 때 우리의 예배순서에서는 Credo는 그런 뜻의 의미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배참여자들에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신앙의 대상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의 확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앙고백이야말로 예배를 통한 배움의 과정 안에서 반응과 신앙적 회복단계의 한 요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 봉헌
봉헌순서는 고대 가톨릭교회의 성만찬 예배에 그 뿌리를 두었다고 할 것이다. 믿는 자들의 성찬참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헌신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성찬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Offertorim). 이 때문에 회중은 성찬에 참여할 때 먼저 빵과 포도주를, 그리고 기름과 초, 그의 자연의 생산품(농산물) 등을 가져와 제단에 내어 놓게 되었다.

 

이런 행위가 9세기경부터 부분적으로 봉헌의 순서가 여러 가지로 발전하였는데 신자들이 가져온 예물의 드림의 행위가 예배 중에 드리는 순서로 등장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성만찬의 떡과 잔이 거룩한 물질로의 변화를 위한 감사와 찬양의 기도순서로 바뀌게 되었다(Das Lobund Dankgebet der Prafaration).


전자는 11세기경에 와서는 돈을 대신하여 예배 중에 드리는 것으로 바뀌어졌으며 종교개혁 이후의 말씀중심예배에서 감사의 제물 또는 사랑의 제물(Dankopfer der Liebesopfer)로서 포기할 수 없는 개신교 예배 중의 한 요소가 된 것이다. 개신교의 예배는 단번에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희생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에 근거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희생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 순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속죄행위를 위한 희생제물적인 의미에서 드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 은혜와 감사의 표로서 마음을 물질로 표현하는 것은 개신교 예배의 봉헌순서의 한 의의라고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여러 차례 헌금에 대하여 교훈한 것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근으로 인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고통당할 때 그 일을 돕기 위함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앙교육과의 관계에서 봉헌의 행위는 예배하는 자의 마음과 그의 진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오직 내 몸과 마음의 모든 것을 드릴 수밖에 없음에 ㄷ한 깊은 교훈의 의미를 나타내 줌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감사와 순종과 헌신의 삶이다.

(7) 찬양과 음악
예배에서 부르는 회중찬송과 그 노래에 함께 동반하는 악기의 사용, 성가대 등은 모두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미적 표현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음악은 실제로 인간의 마음을 나타내는 정직한 표현이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예배 중의 찬양과 찬송은 역시 신앙교육에서 깊은 영향을 끼치는 교육적인 요소로 평가된다.


고전적인 이론에서 교육과정을 보면 정서적 차원이 중히 여겨진다. 특히 한국교회의 신앙교육의 실제는 빈번한 찬송의 부름을 통하여 예배이든 성경공부에 있어서도 지적중심보다는 훨씬 감정적이며 정서적 차원에서 더 강하게 이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한국교회의 신앙교육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찬송가 가사의 표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앙고백의 표현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선교적인 상황에서 신앙을 가르치며 전달하는 하나의 교육적인 기능의 역할을 인식하게 된다.

(8) 축도
주일예배는 축도와 함께 끝난다. 축도는 신학적인 두 가지의 의미로 귀결된다. 첫째는 세상으로의 파송(부활의 증인으로)의 의미와 둘째는 성삼위하나님이 범사에 함께 하심인 선언이다(마 28:19-20). 루터와 칼빈은 개신교의 예배를 특징 지워, 가톨릭교회의 미사예배가 고전 13:13의 삼위일체적인 관계에서 축도를 행할 때, 오히려 아론의 축복의 선언(민 6:24-26)을 축도 시에 말씀으로 사용했다. 축도는 예배와 신자의 세상적인 삶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로 볼 수 있으며 예전적인 학습의 마지막 단계로서 학습과정에서 학습을 마무리하고 삶의 실제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실제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2) 성례중심의 예배
성례중심예배는 세례(Taufe)와 성찬(Abenemahl)의 두 가지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성찬의 신앙교육적인 의미만을 다루어 보려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만찬 예식에 관하여 바울의 교훈을 따라(고전 11:24-26) 기념하는 행위로 이해한다. 즉 예수그리스도가 그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주심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기억하고 그가 오실 때까지 그의 죽음을 전하는 전파행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

 

주의 성찬이 유대교의 유월절 잔치와의 관계 속에서 그 역사적인 배경을 갖는 것으로 본다면 유월절의 만찬은 여호와의 과거와 미래적인 구원의 현재를 기억하는 것이 있으며 성찬 안에서 구원의 현재와 구원의 미래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초대교회는 지상에 있었던 예수의 만찬을 대리적인 의미로 기억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장차 그의 오심에 대한 예견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영으로서의 주님의 현재적인 임재요, 장차 오실 그의 나라에서 영원한 성만찬과의 관계에서의 성도의 수직과 수평의 교제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례는 교회의 이론과 실제의 통일을 위한 본보기이며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개신교교회는 성찬중심의 예배보다는 말씀중심의 예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은혜의 수단으로서 성찬의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경시하는 경향 속에 있다고 본다.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만찬이 함께(행 2:42-43)하는 예배의 본뜻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일 년에 한 두 차례로 기념하는 성찬이 아니라 말씀중심의 예배에 가까이 위치하는 성찬이 되게 해야 한다. 성만찬은 교육적으로 볼 때 모든 기독교 신앙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신앙적인 공동체 훈련의 모체로서 기능이 중요한 것으로 지적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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