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견디기 

 

글 / 김남준 목사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견디고 있습니까?

 

요즘은 예배가 성도들에게 인내를 필요로 하는데, 예배 견디기의 극치는 설교 견디기(?)입니다. 그리고 그 형태도 천태만상입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생각파,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보는 읽기파, 졸면서 예배드리는 수면파, 수시로 시계 들여다보는 시간절약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 있는 회의 준비하는 회의파, 성경읽기로 시간 때우는 실속파, 이런 식의 예배태도는 단지 예배를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바로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의 모습들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드리는 예배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예배 속에서 성령과 교통이 없고 인간의 심령을 찌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데 어떻게 무관심한 예배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예배를 장악하시고 진리가 살아 역사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때 그들은 성령의 증거와 말씀의 진실 앞에서 자기 자신 때문에 고뇌합니다.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영적인 역사를 동반한 예배 가운데 그들은 뜨거워지기도 하고 흔들리던 마음이 냉정을 되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서 일어납니다.

 

예배, 하나님과의 만남

 

소망이 없는 교회일수록 더욱 예배다운 예배가 필요합니다. 죄인들로 가득 찬 교회일수록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필요성은 증대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우리가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분 백성과의 만남입니다. 예배는 결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왜 똑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다른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예배를 통해 대답을 듣게 됩니다.

 

본질적인 두 요소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갖지 않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예배를 통해 받는 영적인 영향보다는 의식과 형식에 관심이 많아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신령과 진정으로 (in spirit and in truth)’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근거 없는 자기만족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절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인지 귀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과 진리

 

‘신령과 진정으로’, 이 부분을 헬라어 성경은 ‘영과 진리 안에서  (in spirit and truth)’라고 읽습니다. 즉 예수님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장소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산’도 ‘예루살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디서’ 가 아니라 ‘어떻게’ 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먼저 예배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배 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극복하게 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가장 우선적인 사역은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그 인격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에서 ‘영’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본질적인 방식이 아니라, 단지 장소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의 예배하는 방식은 영과 진리 안에 예배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배자를 찾으심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전폭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모두 자신 안에 있는 그 마음을 예배로 표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가득 찰 때 그가 무엇을 할까요? 마음속이 하나님을 모셔들이고 싶어하는 사모함과 경외심으로 가득 찰 때 그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예배드리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단지 정규적으로 드리는 교회의 예배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의 태도로 살아가는 그 모든 삶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그들의 예배는 냉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사, 예배의 원형

 

예배가 무엇일까요?  제사는 예배의 원형(proto-type)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서 기른 짐승을 가지고 성전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짐승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 기도자의 죄가 짐승에게로 옮겨가고 성전에서 그 제물 되는 짐승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아주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갑니다. 그곳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방의 제사 개념

 

제사 현장에서 그렇게 죽어가는 제물들의 죽음을 통해서 제사드리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기대하는 바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만나주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영혼에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고 심령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이방의 죄 된 문화에 둘러싸여 있던 그 시대 한가운데서 오직 진리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제사의 동기였습니다.

 

예배를 위한 교회

 

교회는 단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변화의 매체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거기는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영혼의 교통이 있고 성령과의 사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한 영적 교통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또 느끼며 어두운 세상을 어떻게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고통 받으며 신음하던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던 비정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하나님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도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예배를 통해 바뀌어가야 합니다. 예배가 영혼의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성도의 성도됨이 드러날 수 있으며 교회의 교회됨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자각

 

무엇보다도 오늘날 예배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예배를 통해 예배자들이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배자들이 예배 가운데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도 하찮게 됩니다. 성령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거기에는 죄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물인 짐승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제사장의 선언을 통해 제사드리는 자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되고, 이윽고 그 제물이 죽어갑니다. 제사 속에서 죽어가던 양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얀 양들이 그 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며 비명소리에 죽어가고 사지가 잘리며 온몸이 각 떠집니다. 내장이 헤쳐지고 살과 기름이 분해되며 콩팥과 쓸개가 나누어집니다. 짐승들이 죽어가는 그 자리는 한마디로 피바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끔찍한 방법으로 제사의 규례를 정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연식 교육방식이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양심과 영적인 예민함을 소유하고 있던 모든 예배자들은 그렇게 죽어가는 짐승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느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동일한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죄의 심각함 입니다. 죽음을 불러오는 죄, 자신을 그렇게 죽음으로 데려가야 할 죄의 값을 짐승에게 갚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이것이 제사드리는 자들이 제일 먼저 깨닫는 사실이었습니다.

 

 죽음을 당하는 것은 제물이지만 이미 그 아픔은 예배자의 심령 깊이 다가왔고 피 어린 통곡과 참회의 눈물로 죽어 마땅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죄 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 바로 이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피 토하는 경고  

 

왜 사람들이 신앙생활과 실제의 세상살이가 분리됨을 느낍니까?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이원론적인 삶에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어리석음은 모두 예배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친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의문에 매여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근복적으로 영적인 일에 대하여 대부분의 감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세상을 사랑하는 원초적인 욕망이 커져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불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리를 경험하게 하심

 

“당신, 하나님을 보았소?”

만약 여러분이 이 같은 질문을 받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뵌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이 전도하는 모든 내용들은 설득력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담대하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때 그것은 곧 우리가 성령을 경험하였다는 것이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두 눈으로 보는 것만 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양심의 실재를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합병원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 어디도 ‘양심과’라는 간판을 붙인 진료실은 없습니다.

 

해부학적으로는 양심이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 이상의 예배

 

우리는 이미 참회 없이 드리는 예배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비할 데 없는 죄인들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교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손수건이 필요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예배 중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참회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이상한 일은 예배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부재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예배는 반드시 침묵 이상의 어떤 사건을 동반해야 합니다. 침묵을 능가하는 신령한 영적인 권세가 하나님과 설교자, 설교자와 교인, 교인과 예배순서 사이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임하실 때

 

성령이 설교자를 붙잡아주시고 말씀 선포 가운데 함께하시면 평범한 설교라도 수많은 사람의 심령을 찌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기름 부어진 한마디 말은 단지 인간의 지식으로 또 능변으로 늘어놓는 수천 마디 말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을 지배하던 세속적인 욕망과 더러운 탐심을 축출하고 하늘의 거룩한 은혜로 충만해지도록 만드십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 그것은 마치 국경일에 거행되는 기념행사 같은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죽음의 침묵이 무겁게 깃들인 교회당을 뒤흔들어 생명의 함성이 가득 차게 만드실 수 있으며,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을 일으키셔서 함성을 지르는 군대와 같은 교인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요소들을 살아나게 만들어주는 그 모든 힘의 원천은 오직 성령이 예배 중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정신을 따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교통이 깃들인 살아 있는 예배가 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를 예배를 통해 가르치거나 그러한 교리에 기초하여 성령이 슬퍼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하고 있다면 성령이 함께하시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죄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죄가 무감각을 가져오고 그러한 영적인 무감각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예배를 통해 기대하는 것이 없도록 작용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예배를 위하여,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무감각해진 마음을 씻고 정결한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으시는 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제사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엄격할 정도로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와 공교한 형식을 존중하며 그 안에서 제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사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에 찾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영이었지만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종교 행위 중 하나가 예배일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배의 정신대로 살지 아니한 사람들이 단지 그 형식의 준수를 은신처 삼아 안주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사도들을 하나님은 경멸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수하고 완전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예배하는 자들을 싫어하시는데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예배의 정서적 요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죄 가운데 곤고한 자들과 허물로 인하여 고통하며 상처를 인하여 영혼이 곤궁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세상에서 낙인찍힌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의 실패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가로 막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가 예배를 통해 주어지는 축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는 반드시 거룩한 정서를 동반합니다. 그것은 신령하게 드려진 예배의 결과입니다.

 

초기 미국 청교도들의 예배

 

예배의 목표 자체가 예배자들에게 정서적인 자극을 주거나 충격을 주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예배에 이런식의 목표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예배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오늘날 예배 가운데 과도한 악기나 열광적인 찬양의 순서나 예배실에 지나친 실내장식이나 조명시설을 설치하는 등의 일은 예배갱신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한 요점에서 벗어나는 일들입니다.

 

정서를 새롭게 하심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입니다.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교인들이 거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될 때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정서’(holy emotion)를 경험하게 됩니다. (후회, 탄원, 열정, 두려움, 근심, 신비, 사랑, 아픔, 절망, 신뢰, 고난, 목마름)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에서는 예배자의 이러한 정서적 갱신(emotional renewal)이 반드시 예배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배의 이러한 효과는 바로 예배 안에 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예배와 십자가 사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만큼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깨닫게 해주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만들어줍니다. 따라서 예배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과거의 사건으로 문을 돌리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 성령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쳐주시는 은혜, 이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이 예배하는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중심성

 

한 교회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영적 깊이는 그들이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식하고 느끼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곳에서는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교회의 예배에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한, 인간의 눈에 미련한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자유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 두 번째 교훈은 예배에서 맛보는 자유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예배에는 분명히 정해진 순서와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배척하는 사람들이 교회 역사에 언제나 있었습니다. 극단의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예배에서 규모를 잃어버림으로 그들이 구한 자유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내가 본 빈야드 집회

 

지난해 여름, 빈야드 운동이 한창인 캐나다 토론토의 빈야드 에어포트 교회(Vineyard Airport Fellowship Church)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약 이천여 명의 교인들이 운집하였습니다. 티셔츠 차림의 목사가 자유스럽게 찬양도 인도하고 간증할 때 사회를 보기도 하고 축하순서를 진행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은혜받은 이야기도 했습니다. 성경 본문을 읽지도 않은 채 간증 같은 이야기를 몇 사람이 계속하였습니다. 물론 대규모의 뮤직 밴드(music band)도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형식이 없는 집회를 예배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집회 형태는 19세기 미국에서 흔히 유행하던 전도집회의 모습을 많이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회 형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렇게나 모여도 분위기만 은혜로우면 그것이 곧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 저는 반대입니다. 전도집회와 예배입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그 분위기가 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모임의 목표는 같지 않습니다. 그런점에서 볼 때 찬양집회 같은 것으로 예배를 대신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역사적이지도 않고 신학적으로 타당하지도 않습니다. 당장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목회적인 유익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형식을 파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유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것은 성령이고 그것을 구속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역사의 결핍이지 형식 그 자체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파격이

 

설교를 30분 정도에 마치는 것이 예정된 예배 프로그램이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설교자를 붙잡았습니다. 그 설교자는 진리의 말씀을 실로 오랜만에 폭포수같이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교인들도 그 진리의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예정된 설교 시간을 거의 모두 사용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설교자를 사로잡아 본문의 진리가 개봉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 후에 있을 식사시간과 각종회합을 위한 시간 계획을 고려하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즉시 설교를 마쳐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 충분히 말씀하시도록 더 설교를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규모를 지키면서 예배드리지만 그러나 성령이 그 규모 안에서 진리를 따라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성령이 친히 예배의 주관자가 되시고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역사하셔서 우리 자신을 바꾸어놓으실 수 있도록 파격(?)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맺음말

 

성령이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고 치유도 없으며 진정한 참회와 사죄의 확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습이 경건해도 결국은 형식을 숭상하는 바리새인의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예배다운 예배를 통해 만들어지는 교인은 여타의 인간적인 방법이나 프로그램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교인들보다 더욱 성경의 기대에 가까워집니다.

 

예배다운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면 그 교회는 성도들로 가득차게 되고 그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요한 침묵으로 드리는 무감각한 예배야말로 우리와 우리 시대 조국 교회에 진정한 신앙 부흥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불꽃처럼 드려지도록….”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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