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역사

 

바둑은 누가 만들었을까?

 

바둑을 만들었다고 주로 이야기 되는 인물은 중국 전설상의 성왕()인 요()임금1)이다.

중국의 장화(, 232-300)가 쓴 『박물지()』에 나온다는 “요조위기 단주선지( , 요임금이 바둑을 만들었고,

단주가 그것을 잘 했다)”가 요임금 창제설의 근거이다.

 

그러나 『박물지』는 일종의 ‘지괴소설(, 괴상한 것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초자연적이며 불가사의한 것을 다룬 글)’로서 그 내용을 그대로 믿기 어렵고,

3세기에 저술된 『박물지』가 모두 망실된 상황에서 현존하는 『박물지』의 판본 중 바둑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청나라 말기나 중화민국 초기에 수집되고 출판된 것들이어서 문헌 자체의 신빙성도 매우 떨어진다.

 

특히 요임금은 『논어』의 마지막 장인 <요왈편()>의 주인공일 만큼 중국인들에게는

 각종 제도와 역법을 제정하여 백성을 행복하게 한 임금으로 인식되고 있어 그가 바둑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바둑이 그러한 성군()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은 것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바둑은 언제부터 두었을까?

바둑 역시 스톤헨지와 마찬가지로 50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요임금이 바둑을 만들었다고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요임금의 재위가 기원전 24세기라고 하니 정확히 말하면 약 4500년 정도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요임금창제설을 믿지 않는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바둑과 같은 ‘보드게임’을 통칭하는 중국어는 ‘기()’인데 이 글자가 쓰인 가장 오래된 증거는 중국 은대(, BC 16-11세기)의 갑골문이다.

만일 이 갑골문의 ‘기()’2)자가 의미하는 것이 바둑이라면 바둑이 두어진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3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라는 글자는 바둑 이외의 다른 유사한 게임을 지칭할 수도 있고3),

이름이나 지명()과 같이 바둑과 전혀 관계없는 의미로 쓰였을 수도 있어 이것만으로 바둑이 당시에 두어졌을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중국의 고전인 『논어』와 『맹자』에도 바둑에 관한 언급이 있다.

『논어』의 <양화()>편에는 “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풀이하자면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바둑이나 장기 같은 놀이가 있지 않은가.

그거라도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의미다.

 

구절 중 ‘박혁()’이라는 단어가 바둑을 뜻한다는 것인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혁()’이라는 글자는 후대에도 계속 바둑을 의미하는 글자로 쓰이므로

‘박혁’이라고 하는 것은 바둑을 포함한 보드게임을 통칭하는 단어였을 가능성이 높다.

 

『맹자』에는 바둑이 두 번 언급되어 있다.

”는 “지금 바둑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따라서 바둑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잘하기 어렵다.

혁추는 나라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의 ‘혁()’자는 확실히 바둑을 지칭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술 마시며 ‘박혁()’을 하면서 부모의 봉양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한 것인데,

『논어』의 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는 바둑을 지칭했다기보다 여러 보드게임을 한데 묶어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논어』와 『맹자』에서 언급된 것이 바둑이 맞다면 바둑이 두어진 시대는 최소한 공자가 살았던 BC 551~479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맹자(BC 372~289)가 ‘나라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고,

바둑 때문에 부모 봉양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바둑이 보급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바둑이 처음 두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2500년 이상 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출토된 바둑판으로도 바둑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중국 하북()성 망도()현의 후한()시대 장군(182년경 매장된 것으로 추측)의 묘에서 석제 바둑판이 출토되었다.

이 바둑판은 당시로서는 가장 오래된 바둑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판 위의 줄의 수가 현재와 같은 19줄이 아니라 17줄인 점,

화점의 개수 역시 9개가 아니라 5개인 점 등으로도 화제를 모았다.4)

 

이미지 목록

망도현에서 출토된 후한()시대 석제 바둑판(좌)과 상세이미지(우), 북경역사박물관 소장

 

이후 약 50년만인 지난 2000년, 이보다 300년 이상 앞선 시기인 중국 전한()시대의 도자기제 바둑판이 출토되었다.

한나라 경제(, 재위 BC 157~141년)의 양릉 유적에서 출토된 이 바둑판은 망도현의 바둑판과는 달리 깨어진 파편이었고

판 위의 줄도 고르지 않아 매장()품이 아니라 능을 지키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으로 보인다.

바둑은 어디서 만들어졌을까?

바둑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도, 가장 오래된 바둑판도 중국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바둑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체스의 발상지라는 인도에서 바둑도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별로 신빙성이 없다.

그나저나 체스야말로 정말 인도에서 시작되었을까?

바둑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을까?

요임금창제설에 따르면 바둑은 ‘어리석은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흔히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는데, 성왕이 아들에게 인생을 가르쳐주는 교육의 도구가 바둑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둑판 한 가운데의 점을 천원()이라고 부른다는 점,

교차점이 361개인 것이 음력의 날 수와 비슷하다는 점 등을 가지고 바둑이 원래는 역학()이나 천문학의 도구였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바둑이 원래는 판과 돌을 이용한 계산기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근거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바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느 날 갑자기 현재와 같은 형태의 놀이로 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추측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17줄의 바둑판이 존재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최초의 바둑판은 17줄,

혹은 그보다 더 작은 크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9개인 화점의 개수도 과거 중국에서는 5개, 티벳 지방에서 발견된 17줄 바둑판은 13개,

그리고 한국에서 두어졌던 순장바둑판은 17개로 다양하며,

이들 화점을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바둑의 규칙도 지역마다 많이 달랐다.

이들 중 어느 것이 바둑의 원형인지, 그것들은 어떻게 그런 형태의 놀이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좀 더 작은 사이즈의 바둑판, 그리고 좀 더 많은 개수의 화점이 원형에 가까울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기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즐겨 읽은 중국 고전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조조와 관우의 바둑에 얽힌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위나라를 세운 조조는 고대의 병법을 통달한 지략가이자 시와 음악, 건축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바둑을 잘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촉의 장수였던 관우도 바둑을 좋아해서,

어깨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당했을 때 마취도 없이 마량(, 187~222)과 바둑을 두면서

당시 중국 최고의 외과 의사였던 화타(, 145~208)의 수술을 견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사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14세기의 작품5)으로 거기에 등장하는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믿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국지의 세 나라 위, 촉, 오 중에서 오나라를 건국한 손권의 형 손책(, 175~200)이

그의 신하 여범(, 169~228)과 두었다는 바둑이 기보로 남아 있다.

중국 송나라 휘종(, 재위 1100~1125) 때 편찬된 『망우청락집()』이라는 바둑책에 이 두 인물의 기보가 실려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기보가 사실이라면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보라 할 수 있다.

 

이미지 목록

손책·여범의 바둑 기보 원본

손책·여범의 바둑 기보를 현대 기보로 옮긴 것

 

그러나 바둑을 ‘망우청락’ 즉, ‘근심을 잊게 하는 순수한 즐거움’이라 일컬은 이 책은 손책,

여범과 같이 실존했던 인물의 기보뿐만 아니라,

‘왕질()이라는 사람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신선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느라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몰랐다’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난가도()’ 등 그 진위를 의심케 하는 기보도 함께 수록하고 있어 아무래도 신뢰도가 떨어진다.

 

더욱이 손책과 여범이 살았던 1800년 전 중국에서는 17줄 바둑판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데

『망우청락집』에 실린 기보는 19줄 바둑판에 두어진 것이어서

아마도 송대의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만들어 낸 위작이 아닐까 생각된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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