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예배와 오늘날의 예배 

1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 예배하는 공동체


“예배” 라는 히브리어 아보다는 “섬기다” (serve) 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예배는 단적으로 말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심지어는 영어 사용권에서는 예배를 가리킬 때 "예배 섬김" (worship service) 이라고 해서 “섬김” 의 개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실제로 구약의 모세 오경은 우주의 창조주요 역사의 주권자인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부르시고 그 안에 임재하신다는 점을 중심 주제로 강조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창조 자체가 “예배하는 이스라엘” 을 목표로 나아가도록 의도되어진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창 1-2 장의 전통 가운데서 임무를 부여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 앞에 서서, “땅을 정복하라, 땅을 경작하고 지배하라” 는 명령을 새롭게 듣고 있는 것이다. 창조의 목표가 시내 산에 모인 “예배하는 회중” 이라는 점은 창조의 안식일과 시내산 계시의 안식이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잘 알 수가 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출 31:16, 17).”

예배 공동체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단순히 창조의 목적만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으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는 자신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단절을 만들 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 남자와 여자, 형제와 형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골을 만들고, 인간과 땅 사이에 (가시와 엉겅퀴) 간격을 만들고, 자아 안에 깊은 상처와 골 (수치감)을 만들었다.

 

사실상 죄는 너무 깊히 뿌리 박혀서 “인간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 (6:5). 심지어는 홍수로도 이를 바꿀 수가 없다 (8;21).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자신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로 부르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 9: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 (the servant of God) 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굽에서 구원받은 자들인 것이다. 시내산에 모인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하는 공동체” 인 것이다.

2 구약 예배의 의미


이렇게 창조와 구원의 목적인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시내산에 모여 하나님을 섬기게 된 이스라엘이 언약을 체결하는 스토리를 담은 출 24:1-8을 보면 구약 예배의 기본적 구조와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이 만남이 보여준 구약 예배의 기본적인 골격 6 가지와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를 베풀고 예배로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을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고, 시내 산까지 친히 인도하시며 은혜를 베푸신 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이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만나도록 그의 백성을 부르신다. 이에 이스라엘은 카할 야웨 (Qahal Yahweh), 즉 “하나님의 성회” 가 된 것이다.

둘째, 예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역사 가운데서 드러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역사에 대한 백성들의 감사의 응답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본문에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구원을 받아 광야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한없이 받았다. 진정한 예배란 역사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시고 자신을 만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감사의 응답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세째로 이스라엘은 각기 역할을 분담하여 전원이 참여하였다.

책임은 모세가 졌으나,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 인과 이스라엘 청년들은 물론 심지어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예배 가운데 각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맡았다. 이같은 사실은 참여가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임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네째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셨고, 그의 뜻을 그들에게 알리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예배가 완전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 가 되는데 필요한 언약의 규정이다. 이런 규정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이방의 빛의 역할, 즉 거룩한 공동체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즉 언약의 규정들을 듣고 순종하기로 맹세하였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로 언약의 규정들을 보은의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겠다고 서약한 것이다. 예배란 예배자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한 약속을 계속적으로 갱신하는 것이다. 이로서 예배 후에 일상 생활에서 보은의 규칙인 언약 규정을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여섯째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만남은 언약을 체결하는 극적인 상징, 희생 동물의 피를 단과 백성들에게 뿌리는 상징적 행동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는 점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에 인을 치실 때에는 항상 희생의 피를 사용하셨다.

결국 구약 예배란 역사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시고 자신을 만나도록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초청에 감격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을 정하여 모여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한 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다시 서고, 종주이신 하나님의 뜻인 언약의 규정을 듣고, 그 규정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이를 상징적 행동으로 극화함으로서,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을 통해 이 타락한 세상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3 구약 예배의 특징과 오늘 우리의 예배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예배의 기본 구조의 틀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갱신을 위해서는 몇가지 점들을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과연 “진정으로 예배하는 공동체” 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구약 예배의 특징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제도 가운데 하나는 안식일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은 시간의 주이심을 강하게 상기시키면서, 아무리 긴급한 일이라도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정기적으로 나누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안식일은 아무리 바쁜 절기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출 34:21).

 

오늘날 한국 교회는 하루에 한날을 정하여 예배를 드리며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과연 얼마나 열중하고 있는가? “성전 보다 더 큰 분”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과연 구약 이스라엘 보다 더 은혜를 사모하는 진정한 예배 공동체인가? 오늘 한국 교회는 과연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이 타락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진정한 예배 공동체인지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둘째로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예배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창조와 구속의 행위를 감사하며, 또 기대하는 콘텐츠로 채워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구약에서 예배란 단순히 자연의 소출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이방인들은 다음해의 토양의 비옥함을 확보하기 위해서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으나, 이스라엘은 역사 안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행동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공평과 정의, 사랑과 긍휼” 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역사 안에 개입하셨다. 이스라엘의 3 대 절기는 이런 역사 안의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축하하기 위한 절기인 것이다.

 

유월절은 애굽에서의 구원을, 칠칠절은 시내산에서의 율법 하사와 언약 갱신을, 초막절은 광야에서의 인도와 보호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축하하는 절기였다. 이렇게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 그리고 자연 과정 안에 개입하실 것이라는 점을 믿고 기뻐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 역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과거 사역에 대한 감사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 나라를 세워 나가실 것이라는 소망이 예배의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번영과 풍요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이에 대해 감사하는 예배 보보다는, 역사 안에서 공평과 정의,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이에 대해 감사하고 소망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과 괴리된 채, 자신과 가족의 번영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예배는 자칫하면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역사 안의 잇슈들과 연관해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역사 안에서 공평과 정의, 긍휼과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구체적인 노력과 연관시키며 예배를 드려야 한다. 단순히 개인적인 행복과 번영을 위한 관심, 그저 자기를 위해 살아가며 세상 살이에 지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단순한 위로 시스템 (comfort system) 으로서의 예배는 지양되어야 한다.

셋째로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구약의 정교한 제사 제도는 일견 의미 없는 형식적 일들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은 단지 직접적인 개인적 교통을 통해서 뿐 아니라, 기도할 때 무릎 꿇고 엎드리기, 춤과 화답하는 노래, 평범한 지역에서 신성한 장로를 구분하는 일, 제사장 의복과 제사 준비,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릴 때의 장엄한 침묵, 분향 단에서 올라가는 구름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 모든 가시적 일들은 상징적 의미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거나 부차적인 일이 아니라, 종교적 표현의 필요하고도 본질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명분에서 예배 형식을 너무 쉽게 파괴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 교회에 불어닥친 열린 예배의 광풍은 교인들의 주관적 필요를 어느 정도 채우는데는 성공했는지 모른다. 교인들이 음악 선교단, 혹은 찬양팀의 멤버가 되어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모든 교인들이 자유롭게 음악에 맞추어 눈을 감고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은 체험을 강조하는 현대 교인들의 주관적 필요를 채워주는데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시적인 형식이 깨어짐으로서 자칫하면 예배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보다는 인간을 향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기독교 음악의 현 추세가 나르시즘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 관심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인격과 그 사역에 대한 찬양이 나오도록 하기 보다는 회중의 마음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오락적 요소가 예배에 너무 많이 침투해 있다. 예배의 수직적 요소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배 계획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4 결론


구약의 제사 제도는 유대교나 기독교를 막론하고 더 이상 성전 예배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예배의 형식은 변하였으나, 예배 형식이 표현한 신앙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살아 있다. 지금도 구약의 제사 제도를 성취하고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 안에서 놀라운 용서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상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예배하는 공동체를 불러내시고, 양육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자신, 자신과 이웃, 자신과 자연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게 함으로서, 바울이 말한 대로 자신들을 “산 제사” 로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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