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 내에는 평신도와 성직자 두 계급이 있다.
이 두 계급은 결코 좁혀지려야 좁혀질 수 없는 간격으로 벌어져 있어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사역들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성직자들은 특별한 위치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대리인' 또는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을 철폐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배운 '만인사제론'과 같은 것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새로운 것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닌 아주 오래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삼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망각해버렸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말을 들어보자.
로마교도(천주교도)들은 퍽 교묘하게 자기들 주위에 세 가지 담을 쌓아놓고 그 뒤에서 이제가지 자신들을 방어해 왔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들을 개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 기독교계를 통하여 번진 무서운 부패의 원인이 되어 왔다.
먼저, 첫째 담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자.
교황, 주교들, 사제들 및 승려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들, 영주들, 직공들 및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조작적인 것이다. 실로 이것은 순전한 거짓과 위선이다. 아무도 여기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천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다 한 몸이나 모든 지체가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하여 각기 자기대로의 임무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한 세례와 복음과 신앙만이 우리를 '영적'으로 되게 하고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황이나 주교가, 기름을 붓고 체발하고 서품을 하고 봉헌례를 하거나 또는 평신도와는 다른 옷을 입는 일은 위선자와 조각물들을 만들 것이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이나 '영적'인 인간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제사장 같은 나라이다'(9절)라고 말하고 또 계시록에 '당신은 당신의 피로써 저희를 제사장과 왕들이 되게 하셨나이다.(계5:9-10)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중략 .....
그러므로 크리스천들 가운데서 한 사제는 하나의 관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직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위권을 가지나 파면되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농부나 시민이 된다. 따라서 의심 할 여지없이 한 사제가 파면을 당하면 그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지울 수 없는 성질'을 조작해 놓고 파면된 사제도 단순한 평신도와는 좀 다르다고 지껄인다. 사제는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거나, 혹은 사제는 사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몽상까지 한다. 이런 모든 것은 단순히 공론이나 인간이 만든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서 그들이 말하는 바,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는 실제로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이외에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 '신분'에 관한 차이는 전혀 없다.
이것은 1520년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현대의 우리가 읽어도 충격이 된다. 위의 글에서 사제란 천주교의 신부를 가리키는 바 개신교에서는 성직자로 불리는 목사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가? 사제와 평신도와의 근본적 신분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목회직은 교회 내에서 그가 맡게된 독특한 역할일 뿐이지 특별히 다른 직업과 구분된 거룩한 직업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로 왔음을 주장하였다. 의사가 사람의 육체를 다루고 학교 교사가 사람의 정신을 다루고 있다면 목사는 영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 이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들이며 거룩한 직업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목회직이 그들보다 영혼을 다룬다는 면에서 훨씬 더 보람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목사가 대제사장이고 평신도들은 백성에 불과하다는 사고방식이나 심지어 어떤 사람처럼 예배당이 성전이며 강대상이 지성소라는 엉터리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교회 내에서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님을 잠깐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에서는 백성들과 제사장들 간의 정확한 구분이 존재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그러한 구분은 폐지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선언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성구는 루터가 '만인 사제론'을 주장하게된 근거 구절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늘날 평신도라고 불릴 수 있는 집사 빌립이 세례를 주기도 하고(행 8:12) 집사 스데반이 전도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행 6:10-7:60).
사도행전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로 불렸다(행 6:1). 이제 막 예수님을 믿게된 사울이나 (행 9:26), 오래된 신자들도 제자라고 불렸다(행 9:28). 그리스도인들 중에 특별한 사람만 '제자'라고 불리질 않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이며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한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이 자신을 '주의 제자'라는 용어보다는 '주의 종'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들이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며 비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매우 성경적이다. 바울도 많은 서신서에서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주의 종'이라는 용어가 평신도와 구분되는 특별하고도 존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주의 종'이라는 용어를 스스로 자신이 사람에게 존경받을 만한 특별한 위치임을 표시하는데 사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용어는 단지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주님께 복종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평신도가 자신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한다면 그는 매우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교만한 자로 정죄될 것이다. '종'이라는 단어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특권의 표시가 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만큼 '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른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종'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종임을 자인하지 않고야 어찌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만일 자신이 예수님의 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종의 개념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의 성구를 살펴보자.
롬 6:16-19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내가 누구에게 순종하기로 하느냐에 따라 누구의 종이 되는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 나는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치 않는가? 오히려 주의 종이라는 말을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용함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적당히 살아도 되는 사람으로 오해하지나 않는가? 더군다나 성경에 의하면
시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심지어 모든 만물이 주의 종이라고 선언한다.
모든 만물이 주님의 규례를 지킴으로 주의 종이라고 불린다면 더더욱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그리스도인들이면 전부가 스스로를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은 참으로 헌신된 사람이라는 자랑의 의미로써가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을 거스를 수 없고 순종해야만 한다는 겸손의 의미로써 사용되어야 한다.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자세는 주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된 사람을 가리켜 참된 의미로서의 종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직자들은 주님의 종이며 평신도들은 주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들도 헌신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는 이러한 혼동이 다 평신도와 목회자의 구분이 처음부터 존재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겼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교회 내에서 없어져야 한다.
다음의 글은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오늘날 평신도를 가리키는 lay(레이)라는 말이 '무식하다','학문분야에서 비판할 자격이 없는 자'란 뜻으로 안수 받은 교직자를 제외한 일반 신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으나 이것은 본래 성경적인 의미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본래 평신도라는 말 레이(lay)는 헬라어의 laikos(라이코스)에서 나와 라틴말의 라이쿠스(laikus)가 된 말인데 이것은 성경에 자주 사용되고 있는 라오스(laos)와 같은 뜻이다.
즉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벧전 2:9,10). 이것은 어떤 백성 안에 선택된 특권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 즉 하나님 백성의 총체인 믿는 자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인 의도와는 다르게 교회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되면서 성직자와 일반신자를 구분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벌써 A.D. 95년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그런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제 3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구약적 제사장과 백성을 구분하는 계급적인 용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로마교회의 지도 밑에서 성례전과 수도원 제도의 잘못된 발전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계급에는 둘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되고 결국 더 나아가 저 유명한 익나티우스의 '교회는 감독과 그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하는 사상을 합법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래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뜻하던 교회의 주체인 이 라이코스(laikos)들이 성직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교회의 객체가 되어 교회 밖으로 쫓겨나서 '세속에 속한 무식한 무리'로 변질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고 성직자들만이 교회요, 교회의 주체로서 거룩한 그룹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루터의 저 유명한 만인 사제론을 익히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원리적으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폐지된 것이다. 루터는 이를 그의 유명한 크리스챤 귀족에게라는 성명서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제사장들이며, 사무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그들 사이에 하등의 구별이 없다'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가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위대한 만인 사제론이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실제적, 구체적으로는 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자들의 원리는 신학적인 강연의 주제로서는 대단한 힘을 발휘했었지만 여전히 교직자는 전체로서의 회중이 되기보다는 지배적인 통치적 위치를 차지했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새로운 - 중세적은 아니나 원리대로 완전히 개혁되지 못한- 형태의 성직자 계급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었다.
헨트릭 크레머는 A Theology of the Laity라는 책에서 개혁자들의 원리가 개신교에서도 완전한 형태로 적용될 수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이미 교회안에 중생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성도들 속에 참된 하나님의 제사장들(거듭난 자)과 아닌 자들을 구별한 수가 없었다는 점.
둘째, 교인들의 영적인 미숙 때문에 평신도들이 그들이 되찾은 원리에 따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점.
셋째, 순수한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를 길러야하고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계급인 설교자격자라는 특수 그룹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그리하여 그 후 발전한 교회 조직은 일반 성도들에게 적극적인 책임을 갖도록하는 위치를 여전히 줄 수가 없었고 평신도들은 비록 종교개혁 이전과는 다른 정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의 새로운 객체로서 목회와 통치(정치적인)의 대상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 긴 인용문을 반드시 꼼꼼히 읽어보기 바란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즉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것이다.
)
'기독교 이야기 > 기독교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이란 무엇인가? (0) | 2014.06.10 |
---|---|
[스크랩] 성경 기록 연대 (0) | 2014.05.20 |
[스크랩] 기복신앙의 정체 (0) | 2014.05.13 |
위경과 외경의 종류 (0) | 2014.04.20 |
성경의 화폐단위 (0) | 2014.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