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의 정체

 

(박득훈목사의 자본주의에 접수된 교회의 병폐 중에서 발췌 )


“사람들이 돈을 향유하고자 원하면서 하나님을 단지 이용하려는 것은 왜곡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돈을 쓰지 않고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핵심입니다.

즉 하나님께 다양한 축복을 구하는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러한 축복 추구가 표면적인 고백과는 달리 실제적으로는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데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질적 목표를 하나님 열심히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겠다는 데 두는

개인주의적 기복신앙이 오늘날 영성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나아가 교회를 부패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습니다.

목사는 복 빌어주는 일종의 샤먼으로 전락되고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거래가 형성됩니다. 목사는 성도가 세상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그 과정이 과연 정의로웠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묻지 않습니다. 성공한 성도가 거액의 헌금을 하면 그 출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을 잘 믿어 축복 받은 사람으로 추켜 세워줍니다.

 


성도들은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을 잘 따르고 떠받들어줍니다. 이런 분위기에선 장로로 임직하기 위해 수백만 원에서 수 천만 원에 이르는 헌금을 드리는 관행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결국 교회 안에 진리와 정의는 설자리가 없어지고 맘몬이 실권을 휘두르게 됨으로써 교회는 썩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기복신앙을 노골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복신앙이 한국교회 안에서 어떻게 교묘하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1. 축복의 복음


첫째, 여의도순복음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오중 복음과 삼중 축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PDF판을 보면 오중 복음 중 축복의 복음과 관련해 고후 8:9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가난과 성도의 부유함의 상관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 부유함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사신 것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 부요를 누리며 살아야 하며, 받은바 축복을 나누어주며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이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길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누는 삶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지만 이를 위해서 우선 부자가 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진리를 비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는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고후 8:9의 맥락은 정반대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독려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가난해진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은혜에 동참하자는 뜻으로 말씀한 것입니다.(고후 8:1∼9)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동을 받고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구제 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우선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어야한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마게도냐 성도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영성을 지닌 사람은 물질적 풍요를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론 물질적 풍요를 부차적인 수단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거기에 얽매여 사는 자기기만의 함정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삶에 진력할 뿐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부의 창출에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다하는 데 필요한 것 외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질적 부를 멸시하는 금욕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마저 충족시키지 못한 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의한 현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압니다.(빌 4:12)


 

2. 야베스의 기도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가 20001년 한국에 상륙하자 폭발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대박을 터뜨렸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무섭게 팔려나갔습니다. 단숨에 유명 대형 교회들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의 정서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대하 4:9∼10) 야베스는 어머니가 고통 중에 낳았습니다. 이 세상에 힘겹게 태어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에 복을 더해주시고, 자신의 영토를 넓혀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자신을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여 그는 가족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 기도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브루스 윌킨슨은 기복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윌킨슨은 자신이 해석한 야베스의 기도는 종래의 기복신앙과는 다르다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신뢰는 캐딜락이나 거액의 수입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돈을 버는 물질적인 복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며 인기를 끄는 종류의 복음과는 전혀 다르다.’


이어서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야베스의 기도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야베스가 구하는 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를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레이저처럼 초점을 맞추어 광선을 비추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기복신앙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면을 보면 성경적인 복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잠언 10장 22절을 인용합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즉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자가 되고 근심하지 않는 복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적 기도와 야베스의 기도와 실질적인 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부를 구하되 단순히 자기 욕심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기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복신앙이겠습니까?


이어서 저자는 천국 경험을 한 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베드로를 졸라서 어느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거대한 건물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선반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각 선반에는 이름이 적힌 빨간 리본이 묶여진 하얀 상자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발견한 존은 흥분된 마음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습니다. 존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 상자에는 하나님께서 존에게 주시기 원했지만 존이 기도하지 않아서 주시지 못한 복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저자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는 예수님의 말씀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윌킨슨은 그런 말씀들의 맥락과 관계없이 기복신앙적 기도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야베스의 기도가 그런 기복신앙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그 기도는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가운데 억울한 삶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이기적 행복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억압과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땅에 대한 정당한 권리, 인간의 존엄성과 적절한 품위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당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정의를 위한 기도이지 단순히 자기 유익을 위한 기복신앙적 기도가 아닙니다. 


혹 야베스의 기도가 기복신앙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해도 성경전체의 맥락에서 그 자리매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고 자신의 백성을 단계적으로 훈련시키는 분이십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은 그 기도가 대단히 성숙한 기도여서가 아닙니다. 다만 야베스의 영적 수준에 걸맞게 하나님께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기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모범적인 기도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야 할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마 6:9∼13, 눅 11:2∼4). 예수님 제자들의 기도의 가장 우선적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의 영광, 그의 나라의 확장 그리고 그의 뜻의 실현에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물질적인 문제를 위해선 생존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할 뿐입니다.

이런 기도에 기복신앙적 요소가 틈탈 여백이 전혀 없습니다. 기복신앙으로 포장되고 왜곡된 야베스의 기도에 혼을 뺏긴 한국교회는 주기도문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3. 깨끗한 부자론


요즘 기독청년들 가운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론’ 소위 신청부론(新淸富論)도 조심스럽게 살펴봐야 합니다. 신청부론은 물질적 성공을 축복으로보다는 일종의 은사로 봅니다.

또한 아무렇게나 성공해서는 안되고 정직하게 살아야 됩니다. 또한 성공한 다음에는 획득한 부(富) 중에서 하나님의 몫과 이웃의 몫으로 34.8%를 확실히 떼어나야 합니다. 34.8%는 매년 드리는 십일조(10%)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매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3.3%)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남겨두어야 하는 작물(21.5%)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부자와 힘 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돌보는 흐름이 있을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러고 나서 남는 부는 자유롭게 즐겨도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깨끗한 부자로서 모든 신앙인이 그런 사람이 되도록 힘쓸 것을 권유합니다.


신청부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기존의 기복신앙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질적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은사라고 강력히 주장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이나 결론을 보면 그 차이가 무색해집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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