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 여왕'이 솔로몬왕을 찾아 4000㎞나 달려간 까닭

고세진 대한성서고고학회 회장은 3년전부터 ‘시바 여왕’의 고향으로 유명한 에티오피아 악숨의 옛 왕궁터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아침 6시에 해가 뜨자마자 서기 3세기의 악숨왕궁 터에 나가 해가 기울어지는 오후 5시까지 땅을 파면서 금화와 은화, 하수도, 토기 등 각종 유물을 캐내고 있다. 고 회장이 발굴한 희귀 은화 덕택에 독일인들이 100년 전에 가정한 이 왕궁의 설립연대(서기 5세기)를 서기 3세기로 앞당길 수 있었다. 그가 발굴 현장에서 생생한 느낌이 담긴 글을 보내와 나누어 싣는다./편집자

 

진리는 무엇인가? 종교와 교육은 물론이고 정치와 경제도 진리를 묻고 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진리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이고 흩어짐이 어지럽다. 다른 한 쪽에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이 먼 길을 가고 있다. 예수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결국에는 남방여왕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 이유는 그 여인이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그 여인은 ‘시바의 여왕’이라고 알려져 있고, 머나 먼 곳에서 솔로몬을 만나려고 예루살렘까지 찾아 왔었다고 한다. 지난 이십 세기 동안 학자, 종교가, 여행가, 작가들은 시바의 여왕이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였다. 지금도 그 여인에 대한 주제는 인기를 끈다. 이제 필자는 독자들을 그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려고 한다. 이 여인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경에 있는 예수의 간단한 언급과 구약성경에 있는 솔로몬과 그 여자의 짧은 대화록이 전부이다.

 

그 외에는 중세기에 유대인 이야기꾼들과 모슬렘 작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다. 지면 관계로 후대의 그런 이야기들을 소개하지 못 하지만, 그것들 속에는 요정이나 귀신이 나오고 실제로 믿을 만한 구석이란 없다. 시바의 여왕이라는 말은, ‘시바’는 어떤 지역의 이름이며 그 여인은 그 곳을 통치하는 지배자였다는 것일 뿐이다. 그 여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길을 따라서 왔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여자와 수행원들은 이스라엘의 남쪽에 있는 지역(나라)에서 낙타 떼에 물건들을 싣고 왔었다. 연구가들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주었던 금, 유향과 몰약 따위의 향료, 보석 같은 물건들 때문에 그 여자가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이나 예멘 사람이었다고 추측한다.

 

반면에, 아라비아 사람들이 서양으로 금이나 향료를 무역하였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생산한 곳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였다고 보는 사람들은 에티오피아가 시바의 여왕이 발원한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필자가 고고학 자료를 보면, 에티오피아 북부에서는 고대에 금전이 동전보다 흔했고 은전은 퍽 희귀하였다.

 

시바의 현재 땅 악숨의 일상생활 현재로는 시바는 에티오피아의 북부 티그레이 주의 악숨 지역이라고 하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독자들을 인천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아라비아의 남단을 거쳐서 악숨까지 모시고 가는 것이 좋겠으나, 시간상 바로 악숨으로 안내하기로 한다. 시바가 어딘지 찾아 나서는 것은 진리를 찾아 떠난 여인의 고향을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미스테리인 구약성경의 법궤를 찾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악숨은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북쪽으로 960㎞ 정도 되는 곳에 있다.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전기, 수도, 인터넷, TV, 전화 따위는 없다. 시가지에서도 전기와 물이 끊어지는 시간이 많다. 사막과 광야를 건너 향료를 나르던 낙타들은 장작더미를 등에 지고, 주인과 손님이 흥정하는 동안 눈을 내리깔고 옛날을 회상하고 있다. 고대 운송수단의 총아였던 당나귀들은 이제 부인들의 심부름도 마다 않는다. 중국 노무자들이 와서 포장해 놓은 도로에는 자동차 대신 농부들이 소를 몰고 간다. 토기장이들은 여전히 옛날 방식으로 토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판다. 하루 이틀 큰 토기를 만들고 힘들게 져다 팔아 번 돈이 겨우 우리 돈 500원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식구들마다 신발을 신게 할 수가 없다.

(왼쪽 위부터 지그재그로) 1. 장작을 파는 시장. 낙타에 실려 있는 장작을 사려고 흥정하는 사람들과 낙타. 2. 당나귀에 짐을 지우고 길을 가는 부인들. 3. 아프리카 특유의 굽등이 있는 황소를 몰고 가는 농부들. 배경은 ‘떼프’가 노랗게 익은 가을 밭. 4. 세계적으로 멸실되고 있는 원시적 방법으로 토기를 만들고 있는 토기장이 아낙네. 5. 아내가 만든 토기를 시장으로 지고 가는 남편. 6. 토기장이의 가족. 식구들이 맨발로 산다.
(왼쪽 위부터 지그재그로) 1. 장작을 파는 시장. 낙타에 실려 있는 장작을 사려고 흥정하는 사람들과 낙타. 2. 당나귀에 짐을 지우고 길을 가는 부인들. 3. 아프리카 특유의 굽등이 있는 황소를 몰고 가는 농부들. 배경은 ‘떼프’가 노랗게 익은 가을 밭. 4. 세계적으로 멸실되고 있는 원시적 방법으로 토기를 만들고 있는 토기장이 아낙네. 5. 아내가 만든 토기를 시장으로 지고 가는 남편. 6. 토기장이의 가족. 식구들이 맨발로 산다.
창문도 변소도 없는 집을 돌로 짓고 그릇들은 죄다 토기들뿐인 삶이다. 집 앞에나 담장에는 걸쭉한 소똥을 쌓아 말려 연료로 사용한다. 하루 임금 2천원 가량에 신발도 신지 않고 사는 그들에게는 사철 온화한 기온이 축복이며, 해발 2,200미터 고원지대에 항상 부는 신선한 바람은 미세먼지에 찌든 한국인들에게는 부러움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가난해도 삶에 만족해 웃으며 사는 그들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필시 내가 이미 행복의 의미를 잊어버린 한국인이기 때문이리라.

밤에는 기름 등잔 밑에서 여인들이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방식으로 곱게, 정성스레 머리를 땋는다. 결혼할 때 남편이 준 금 귀걸이들도 곱게 머리에 고쳐 단다. 쌀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한국인들처럼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떼프’라는 곡식을 심어, 우리가 밥과 김치를 매일 먹듯이, 매일 ‘인제라’라는 전을 부쳐 먹는다. 가을이면 떼프가 노랗게 익는 들판에서 먼 나라에서 온 나그네는 길을 잃는다.
(왼쪽 위부터 지그재그로) 1. 집 앞에 쌓아 놓고 말린 소똥 무더기. 다른 집에서는 젖은 소똥을 담에 죽 걸쳐 놓고 말린다. 집에서 필요한 연료로 쓴다. 2. 가난해도 표정이 밝은 악숨 사람들. 토기장이의 남편과 고고학 발굴현장의 인부. 3. 밤에는 석유등잔으로 방을 희미하게 밝힌다. 4. 악숨 여인들의 독특한 머리 모양. 귀에는 결혼할 때 남편이 준 금 귀걸이들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다. 5. ‘떼프’라는 곡식으로 만든 ‘인제라’라는 전 위에 ‘뜹시’(매운 양념으로 무친 양고기)를 얹은 요리. 그냥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즐겨 먹는 전통음식이다. 6. 가을에는 에티오피아의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황금들판. 잘 익은 떼프가 추수꾼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왼쪽 위부터 지그재그로) 1. 집 앞에 쌓아 놓고 말린 소똥 무더기. 다른 집에서는 젖은 소똥을 담에 죽 걸쳐 놓고 말린다. 집에서 필요한 연료로 쓴다. 2. 가난해도 표정이 밝은 악숨 사람들. 토기장이의 남편과 고고학 발굴현장의 인부. 3. 밤에는 석유등잔으로 방을 희미하게 밝힌다. 4. 악숨 여인들의 독특한 머리 모양. 귀에는 결혼할 때 남편이 준 금 귀걸이들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다. 5. ‘떼프’라는 곡식으로 만든 ‘인제라’라는 전 위에 ‘뜹시’(매운 양념으로 무친 양고기)를 얹은 요리. 그냥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즐겨 먹는 전통음식이다. 6. 가을에는 에티오피아의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황금들판. 잘 익은 떼프가 추수꾼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이 사람들이 사는 땅이 진리를 찾아 떠났던 그 여인의 터전이었을까? 그들에게 묻기도 전에 악숨 사람들은 시바의 여왕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차라리 정열이고 꿈이고 자존심이다. 그들은 시바의 여왕의 이름은 ‘마케다’였고 그녀가 그들의 조상이고 1975년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 하일레 쎌라씨에 황제가 그녀가 솔로몬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룬 왕조의 225번째이며 마지막 왕이었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이방인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시바의 여왕은 진리를 찾아서 머나먼 길을 다녀 온 걸로 알고 있었는데 솔로몬의 아들을 낳았다니?

어느 나라든지 자기들의 기원은 미화하기 마련인데,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험한 종살이를 했다고 하니 안 믿을 수 없듯이, 악숨/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씨가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하니 다른 나라들의 신화 같지 않아서 믿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하일레 쎌라씨에 황제는 무쏠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1936년에 이스라엘로 망명하여 한 동안 예루살렘에 피신한 때가 있었고, 그는 에티오피아 국가의 문양을 이스라엘의 상징인 사자(獅子)로 정하였다.

미신에서 진실을 걸러내기

악숨 사람들은 악숨이 ‘시바’라는 땅이었음을 믿게 하려고 나그네를 ‘둥그루’라는 유적지로 데리고 간다. ‘시바 여왕의 궁전’이라는 곳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곳은 서기 8세기에 축조된 유적임이 고고학적으로 판명되어 있는 곳이다. 시바의 여왕 때보다 무려 1,700년 정도 시간차가 난다. 마치 근동의 이스라엘에 가면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도 없이 아무 곳에나 다비드의 유적이라는 장소들이 있고, 아랍나라들에는 어디에 가나 ‘무싸’(모셰)의 유적지가 있어서 여행자를 혼란스럽게 하듯이 여기에는 시바 여왕의 유적이라는 곳들이 많다. 악숨에는 ‘시바 여왕의 저수지’라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으나, 마치 베들레헴 남쪽에 있는 ‘솔로몬의 저수지’가 솔로몬과 상관이 없듯이, 이것은 그저 저수지일 뿐이다. 연구자는, 금을 찾는 사람들이 모래에서 금을 골라내듯이, 암석에서 금을 찾아내듯이, 온갖 전설과 지어낸 이야기들과 미신들을 가려내고 역사적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연구자는 어마어마하게 큰 선인장들이 나무처럼 서 있는 신비한 거리를 걸으며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는 시바의 여왕의 뒤를 이었다는 왕들의 흔적들을 찾게 된다. 수없이 많은 선돌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구딧 스틸레 필드’라는 비석 들판에 선다. 무덤마다 비석이 있으며, 누워있는 것들과 땅 속에 있는 것들을 포함하면 500여개의 비석들이 있다는 통계가 존재하는 이 들판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수긍이 가지만, 시바의 여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다른 무덤의 지하 계단들은 신비롭지만 촛불에 비추어진 빈 무덤은 주인 없는 여인숙처럼 허망하다.
(왼쪽 위부터 지그재그로) 1.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쎌라씨에. 한국전쟁 때에 6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한국을 도왔고, 1968년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2. 셰바 여왕의 궁전으로 알려진 둥구르. 그러나 서기 8세기의 건물이다. 3. 거대한 선인장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있는 거리. 4. 구딧 스틸레 필드 (Gudit Stelae Field). 선돌(비석)들이 있는 들판. 유네스코 문화유산. 5. 지하무덤 안에서 밖으로 내다 본 장면. 악숨에 널려 있는 고대 지하무덤들의 일반적인 입구형태. 6. 악숨 시내에 있는 바젠(Bazen)의 무덤. 고대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무덤을 촛불로 비추어 주는 무덤지기의 표정이 기괴하다.
(왼쪽 위부터 지그재그로) 1.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쎌라씨에. 한국전쟁 때에 6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한국을 도왔고, 1968년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2. 셰바 여왕의 궁전으로 알려진 둥구르. 그러나 서기 8세기의 건물이다. 3. 거대한 선인장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있는 거리. 4. 구딧 스틸레 필드 (Gudit Stelae Field). 선돌(비석)들이 있는 들판. 유네스코 문화유산. 5. 지하무덤 안에서 밖으로 내다 본 장면. 악숨에 널려 있는 고대 지하무덤들의 일반적인 입구형태. 6. 악숨 시내에 있는 바젠(Bazen)의 무덤. 고대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무덤을 촛불로 비추어 주는 무덤지기의 표정이 기괴하다.
공기가 투명하게 존재하듯이 여기에는 분명히 시바의 여왕에 대한 믿음과 전설이 골짜기 마다 나무마다 골목마다 사람의 마음마다 휘감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손에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방황하는 연구자의 귀에 악숨 시의 북쪽으로 나 있는 오벨리스크 공원과 큰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솔깃하게 들려 온다.

시바의 여왕과 여호와의 법궤

오벨리스크는 거대한 비석인데 17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수십 개가 장관을 이루며 서 있다. 넘어져 있는 것들 중에는 길이가 33 미터가 되는 것이 있는데 이집트에 있는 오벨리스크들 보다도 더 커서 세계에서 가장 큰 오벨리스크이다. 서 있는 오벨리스크들 중의 하나는 1935년에 무쏠리니가 세 동강을 내어 로마로 실어다가 세워 놓았던 것을 70년 만인 2005년에 돌려받아 다시 세워 놓은 것이다. 그 앞에 있는 큰 광장을 건너서 커다란 교회가 있는데 이곳이 성 마리아 찌욘교회이다. 이 곳에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어찌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법궤가 여기에 와 있는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만나고 온 후에 나은 아들 메네리크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서 가져 왔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그 내용은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한다. 그 거대한 교회로 가는 길에 어느 집, 부엌일을 하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녀의 얼굴에서 문득 시바 여왕의 모습이 배어 나온다.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악숨에서 예루살렘까지 왕복 무려 8,000 km를 다녀 온 그 여인의 그림자가…. 그 거리는 당시에 ‘땅 끝’에서 ‘땅 끝’으로 가는 거리였다.
(왼쪽부터) 1. 악숨의 오벨리스크 공원에 있는 오벨리스크(거대한 비석). 유네스코 문화유산. 배경에 보이는 첨탑이 있는 곳이 여호와의 법궤가 보관되어 있다는 교회이다. 필자가 이 공원을 발굴할 고고학발굴허가서를 에티오피아 정부로부터 받았더니 유네스코에서 조사관들이 여기까지 와서 오벨리스크의 안전문제를 진단하는 소동이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는 무쏠리니가 가져다 로마에 세웠던 것이다. 2. 열여섯 살 청순한 악숨 소녀. 가난하다는 말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찌든 생활이지만 소녀의 밝고 긍정적인 모습에서 삶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다. 솥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느껴진다. 소녀가 매일 입고 있는 단벌 드레스는 엉덩이 부분을 기운 누더기. 그 옷을 볼 때 필자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왼쪽부터) 1. 악숨의 오벨리스크 공원에 있는 오벨리스크(거대한 비석). 유네스코 문화유산. 배경에 보이는 첨탑이 있는 곳이 여호와의 법궤가 보관되어 있다는 교회이다. 필자가 이 공원을 발굴할 고고학발굴허가서를 에티오피아 정부로부터 받았더니 유네스코에서 조사관들이 여기까지 와서 오벨리스크의 안전문제를 진단하는 소동이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는 무쏠리니가 가져다 로마에 세웠던 것이다. 2. 열여섯 살 청순한 악숨 소녀. 가난하다는 말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찌든 생활이지만 소녀의 밝고 긍정적인 모습에서 삶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다. 솥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느껴진다. 소녀가 매일 입고 있는 단벌 드레스는 엉덩이 부분을 기운 누더기. 그 옷을 볼 때 필자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첫 공개되는 시바 여왕의 초상(上)

고고학은 인내와 고난의 학문

시바 여왕의 땅이라는 악숨의 어느 지점에 시바의 여왕, 그 여인의 자취가 남아 있을까? 고고학은 때로는 대숲에서 바늘을 찾는 여인처럼 ‘그 주변’일 것이라는 심증만 가지고 시작한다. 고고학에서 신묘자(神妙者)는 사기꾼이다. 구멍 뚫린 골리앗의 두개골을 찾아냈다느니, 아직도 젖어 있는 예수의 피를 찾았다느니, 모세의 무덤을 발견했다느니…. 이런 자들은 헐리우드가 만들어 낸 인디애나 존스 영화보다 더 허황하다. 비록 인디애나 존스의 배경이 필자의 모교인 시카고 대학교이긴 하지만 영화와 고고학 현장 사이의 벽은 엄연하다. 고고학의 정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로맨틱한 감성으로 고고학을 말하지만, 고고학자는 거친 현장이 주는 도전과 도서관에 숨어있는 자료들 사이에서 몇 년이고 씨름하며 참된 답을 찾아내야 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옛 사람들의 기록에 담겨 있는 사실

시바 여왕의 흔적을 찾아서 악숨 땅을 밟고 지나 간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고고학적으로 탐사를 하지는 않았다. 아시아 사람으로 아프리카의 벌판에 삽을 들고 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반드시 진실이 들어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희랍 시인 호머(Homer)가 읊은 트로이 전쟁을 누가 사실이라고 믿었던가? 그러나 영국인 프랭크 칼버트(Frank Calvert)와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은 터키의 서쪽 끝에서 서기전 12세기의 전장(戰場) 트로이를 발굴해 내었다.

 
요세푸스가 단 한 줄로 써 놓은, 악명 높은 헤롯대왕의 무덤이 베들레헴 남쪽의 헤로디움에 묻혔다는 기록을 누가 그러리라고 수긍했던가? 신약성경에나 나오는 헤롯이라는 인물의 역사성을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 대학교 교수 에후드 네쩌(Ehud Netzer)는 헤로디움의 기슭을 샅샅이 뒤지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고독한 탐사기간 35년 만에 서기 1세기의 헤롯대왕 무덤을 찾아내어 그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다음에 삶을 마감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와 악숨(시바)의 역사

시바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걸림돌이 있다면, 인류는 아프리카의 역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아프리카 하면 대개 이집트 역사에서 멈춘다.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쿠시(Kush)라고 부른 누비아 지방이나 푼트(Punt)라고 부른 에티오피아와 그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 아니 아프리카의 다른 어떤 나라들의 고대사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음이 현실이다.

이집트 제18왕조(서기전 15세기)의 하쳅수트 여왕이 푼트(에티오피아)에 보낸 배에 푼트에서 생산되는 보물들을 싣고 있는 장면. 배의 중간에 줄에 묶이지 않은 원숭이들과 상아들이 있다. 상단에는 소쿠리에 담겨 있는 몰약나무들을 인부들이 나르고 있다. 배 밑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이 벽화가 서기전 15세기 상황이므로 10세기인 시바의 여왕 때에도 이와 같은 교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집트의 디르 엘-바흐리에 있는 하쳅수트 무덤신전 벽화)
이집트 제18왕조(서기전 15세기)의 하쳅수트 여왕이 푼트(에티오피아)에 보낸 배에 푼트에서 생산되는 보물들을 싣고 있는 장면. 배의 중간에 줄에 묶이지 않은 원숭이들과 상아들이 있다. 상단에는 소쿠리에 담겨 있는 몰약나무들을 인부들이 나르고 있다. 배 밑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이 벽화가 서기전 15세기 상황이므로 10세기인 시바의 여왕 때에도 이와 같은 교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집트의 디르 엘-바흐리에 있는 하쳅수트 무덤신전 벽화)

 

 

따라서 ‘시바’(Sheba)라는 왕국이 에티오피아의 악숨(Aksum, Axum)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또한 시바의 여왕이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가공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로 여기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악숨 왕국은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로마, 중국, 페르시아에 필적하는 대국이었다. 서기전 7, 8세기에 이미 악숨과 그 주변에도 왕국이 있었다. 해발 2300 미터 산악지방에 위치한 악숨은 동쪽으로는 홍해, 북쪽으로는 현재의 수단과 이집트, 서쪽과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의 본토로 연결되는 요충지에 있었다. 홍해에서 나는 소금을 대륙으로 운반하며 큰 돈을 버는 길목이었다.
3000년전 '시바 여왕'은 단발머리에 사각형 얼굴

 

악숨은 지금도 벽돌처럼 잘라낸 소금 덩어리들을 대량으로 유통하고 있다. 또한 금과 유향이나 몰약 같은 향료들을 유통하는 무역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고대에 향료는 그 무게만큼 금을 달아 주어야 살 수 있었으니 판매 이익이 방대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기원전 10세기에도 악숨은 시바라는 이름으로 번영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시바의 여왕이 이스라엘 왕을 방문한 배경에는 무역이라는 경제 이슈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창고에 쌓여 있는 홍해의 소금 덩어리들. 고대에 악숨은 홍해와 아프리카 내륙 사이의 무역로를 관장하며 소금과 여러 물품을 팔거나 세금을 거두며 부를 축적하였다. 오른쪽은 악숨국립대학교에서 강연 후에 에티오피아 국영 TV 인터뷰에 답하는 필자.
창고에 쌓여 있는 홍해의 소금 덩어리들. 고대에 악숨은 홍해와 아프리카 내륙 사이의 무역로를 관장하며 소금과 여러 물품을 팔거나 세금을 거두며 부를 축적하였다. 오른쪽은 악숨국립대학교에서 강연 후에 에티오피아 국영 TV 인터뷰에 답하는 필자.

 

시바의 여왕이 이스라엘까지 약 8000 km를 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국력과 경제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악숨에서 고고학적으로 서기전 10세기의 층을 발굴한 적이 없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악숨의 유적들은 5% 정도도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곳이 고고학적으로 무궁무진한 보고라는 이야기를 실감하게 한다.

오벨리스크 공원, 교회, 박물관, 수도원

악숨 시의 중심가의 서쪽 부분에 큰 교회가 있다. 성 마리아 찌욘교회라는 이 교회는 에티오피아가 기독교화 된 서기 4세기부터 존재한 교회의 후신이다. 따라서 이 교회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본산(本山)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서 북쪽을 보면 거대한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는 오벨리스크 공원이 있다. 이 교회 건물의 남쪽에 세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남쪽으로 약 50 미터 이내에 에티오피아 정교회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남쪽으로 50미터 이내에 고대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법궤를 모시고 있다는 성소(聖所)가 있다. 그 성소에서 남쪽으로 50미터 이내에 수도원이 있다. 그러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보면, 오벨리스크 공원, 에티오피아 정교회, 교회 박물관, 수도원이 대략 일렬로 있는 것이다.

돌에 새겨진 시바 여왕 마케다의 초상

그 박물관에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유물들이 좁은 진열장들 안에 조밀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는 돌판에 송곳이나 칼로 젊은 여자의 얼굴 옆 모습을 새겨 놓은 것이 있다. 박물관 안에서 설명을 하는 안내자는 이것이 시바 여왕의 초상화라고 한다.

필자는 이 돌판에 대해서 몇 년간 궁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이 돌판의 출토지와 연대가 궁금하였다. 이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사진 촬영 신청서를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앞으로 내어 허가를 받으면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해도 허가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이 길고 긴 여정이 될 것이 뻔했다. 실제로 단 한번이라도 박물관 안의 유물들에 대한 사진 촬영이 허가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어렵사리 이 특이한 돌판의 사진을 입수할 수 있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그것이 조선일보에 공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유물의 족보를 열람하는 허락은 받지 못했다. 다만 이 돌판이 둥그루에서 발견이 된 것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둥그루는 지난 회에 말한 대로 서기 8세기의 큰 궁전이 있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발굴되지 아니한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지표 조사 중에 발견된 유물들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었다.
‘시바 여왕의 초상’이 새겨진 돌판(왼쪽). 악숨에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머리 모양이 퍽 현대적이고 젊고 행동적인 모습의 얼굴이다. 의지가 굳어 보인다. 에티오피아 박물관은 이 돌판이 시바 여왕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여행 조건이 열악한 3000년 전에 왕복으로 8000km를 여행했다니 젊고 건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른쪽 사진은 아디스 아바바에서 만난 젊은 사람의 옆 얼굴. 돌판의 얼굴과 많이 비슷해 보인다.
‘시바 여왕의 초상’이 새겨진 돌판(왼쪽). 악숨에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머리 모양이 퍽 현대적이고 젊고 행동적인 모습의 얼굴이다. 의지가 굳어 보인다. 에티오피아 박물관은 이 돌판이 시바 여왕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여행 조건이 열악한 3000년 전에 왕복으로 8000km를 여행했다니 젊고 건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른쪽 사진은 아디스 아바바에서 만난 젊은 사람의 옆 얼굴. 돌판의 얼굴과 많이 비슷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돌판의 연대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젊은 여자의 초상이므로 ‘시바 여왕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둥그루는 필자가 발굴하고 있는 악숨 왕궁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면 15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필자가 둥그루 지역을 직접 걸어다니며 살펴 보니 돌무더기들과 토기조각 등 많은 유적들이 널려 있었다. 앞으로 이 돌판의 족보를 보고 발견지점을 확인하여 발굴을 한다면 어떤 놀라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돌판은 이 지역에서 흔한 석회암이다. 크기는 대략 손바닥 두 개를 위, 아래로 맞댄 정도이다.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옆 얼굴은 모양이 사각형이다. 이마가 넓고 코가 오똑하고 바르며 입술의 윤곽이 선명하다. 턱은 직각이며 귀 밑까지 수평으로 흐르다가 각이 져 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고집스럽거나 의지력이 강해 보이는 그런 형이다. 머리카락은 굵은 빗으로 빗은 듯이 결이 굵게 흘러내려 뒷목 윗부분에서 멈추고 있다. 이마와 귀가 드러나게 머리가 짧아서 활동적인 젊은 여자의 이미지를 풍긴다. 필자가 이 얼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에티오피아에서 이러한 사각형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케다의 인종과 다른 부족들의 인종

필자는 약 오천 명 정도의 신자들이 매 주 출석하는 그 교회의 정문에 여러 날 앉아서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였다. 열이면 열 모두 얼굴이 길고 턱은 수평으로 흐르지 않고 사선을 그리면서 귀밑으로 올라가는 형이었다. 악숨의 시내에서도 여러 날 현지인들의 얼굴들을 관찰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돌판에 새겨진 젊은 여자의 얼굴은 현대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긴 얼굴형과는 다르다는 결론이 가능하였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서기전 1세기부터 존재하였던 악숨 왕국이나 그 보다 오래된 시바 왕국의 인구는 산악지방의 부족들의 혼합이었다. 이 여자의 얼굴은 그 어떤 부족의 두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얼굴은 왕복 약 8000 km의 험한 여행을 완주할 만큼, 그리고 아들을 혼자 기르고 왕으로 만들만큼 의지가 강하고 젊고 활동적인 여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시바의 여왕을 경유하여 발생한 흑인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약 십만 명이 1980년대에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고 현재는 약 사천 명 정도가 악숨에서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이스라엘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즉, 현재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흑인 유대인들과 다른 인종 계열인 것이고 돌판에 새겨진 여자는 행여 시바의 여왕이 아닐지라도 어떤 인종적 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돌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악숨에서 고고학층이 깊어질수록 이 돌판의 연대를 시사할 그 어떤 단서가 나올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어느 날, 악숨에서 남쪽으로 900여 km 떨어진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명성교회 병원 대합실에서 필자는 한 젊은 여성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를 설득하여 옆 모습을 촬영하여 돌판의 얼굴과 비교하여 보았다. 가족들이 지켜보는데, 그 여자는 자기의 얼굴이 시바의 여왕의 얼굴일지도 모르는 얼굴과 비교될 것이라는데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얼굴은 돌판에 새겨진 얼굴과 많이 비슷하였다. 혹시 악숨 출생이 아닌가 하여 어디 출생이냐고 물었더니 그 여자는 아디스 아바바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시바의 여왕을 꼭 만나시기를 바랍니다”하며 싱긋 웃는 그녀의 얼굴에 태고적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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