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르엘 계곡

 

이스르엘 (Jezreel) 

 뜻 : 하나님께서 뿌리신 자

에스드렐론 평야로 알려진 골짜기 이며 길보산 서북쪽 낭떠러지에 있는 현재의 세린 마을로서 유대의 산지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 다윗의 아내를 중에서 노암이라는 여인이 이 곳 출신입니다. (삼상 25:43, 27:3, 30:5, 삼하2:2, 3:2)

- 잇사갈 지파의 경계선이 있던 길보산 근처의 도성 (수19:18)

- 이스르엘 도성은 이스르엘 계곡과 요르단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예후는 자기들에게 오는 전령들을 물리치면서 이스르엘의 왕궁을 향하여 돌진 하였습니다.(왕하9:20)

  

1. 명칭

'이스르엘'(Jezreel)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신다'는 뜻입니다. '에스드렐론'(Esdrelon) 평원,

'므깃도 골짜기' (Valley of Megiddo)와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세 지명이 혼용되기도 합니다.

 

2. 위치

'이스르엘'은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을 끼고 팔레스타인 중부를 가로질러 정삼각형을 이루는 골짜기 입니다. 이 골짜기의 동쪽 부분은 모레산과 길보아산 사이의 고개에서 시작하여 요단 계곡에서 끝납니다.

 

3. 관련 기사및 역사

1) 가나안 족속의 거주지이며 주요 군사 거점 (수 17:16)

2) 기드온과 미디안, 아말렉, 동방 연합군의 격전지 (삼상 17:19)

3) 사울이 블레셋을 대항하여 포진한 곳 (삼상 29:1)

4) 길보아 전투시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한 곳 (삼하 4:4)

5) 아합(B.C. 874-853년)의 휴양지 (왕상 18:45-46)

6) 아합이 빼앗은 나봇의 포도원이 있던 곳 (왕상 21:1-2)

7) 예후가 이세벨과 아합의 아들 70여명을 죽인 곳 (왕상 21:33 ; 왕하 10:6-7)

8) 아람 왕 하사엘(B.C. 841-806년) 에게 부상당한 요람이 상처를 치료한 곳 (왕하 8:28-29)

9) 이스라엘이 멸망될 장소로 예언된 곳 (호 1:4-5)

 

4. 유적 및 고고학

이스르엘은 그 이름이 말해 주듯 비옥할 뿐만 아니라 전략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성읍이 발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합과 그 후손들에 대한 대학살이 일어난 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오늘날 후기 청동기, 철기, 및 로마 시대의 몇몇 도기들만이 발견되고 있을 뿐입니다.

 

5. 영적 교훈 및 상징적 의미

1) 이스르엘은 비옥할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에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권이 개입된 인간세상은 항상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원한 평화의 안식처는 주님 나라 밖에 없음을 깨달아 믿음으로 인니하며 소망중에 살아야 합니다.

2)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린 이스르엘이 숱한 심판의 장소가 되었고, 또한 궁극적인 심판의 처소로 예견되었듯이(호 1:4-5), 악을 즐겨 좇는 세상은 주의 날에 결국 행위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스르엘계곡은 하부 갈릴리산지와 사마리아산지 사이에 위치하면서 지중해와 요단계곡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지역이다. 신약시대에는 이스르엘계곡을 헬라어 명칭인 '에스드라엘론 골짜기' (Valley of Esdraelon)라고 불렀다.(마카비1서 5:52; 12:49; 유딧서 1:8; 3:9; 4:6; 7:3 등) 길보아산 밑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스르엘' 도시에서 연유된 이 골짜기의 명칭은 '하나님의 식물'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 지역이 얼마나 비옥한가를 표현해주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1. 이스르엘계곡의 지형적 특징

이스르엘계곡은 지형상 동부와 서부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 이스르엘계곡의 동부지역은 외관상 긴 통 모양을 하고 있는데, 벧산과 이스르엘 도시 사이의 동서간 길이는 18km이며, 길보아산과 모레산 사이의 남북간 폭은 약 5km 정도의 좁은 협곡이다. 이곳의 중심부에는 길보아산 밑에 위치한 하롯샘에서 발원하여 요단계곡 쪽으로 흐르는 하롯강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강 때문에 '하롯계곡'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 이 계곡의 시작지점인 북서쪽은 해발 40m이지만, 끝 부분인 남동쪽 벧산 근처에서는 해저 115m의 낮은 지역이 되고 있어서 시작지점과 끝 부분의 높이 차이가 심한 편이다. 이 계곡에는 북쪽 산지에서 내려온 현무암 성분의 토양과 남쪽 산지에 내려온 석회암 성분의 토양이 함께 섞여 어느 지역보다도 비옥한 토양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하롯샘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상시천인 하롯강은 년 중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원활한 물 공급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전쟁들이 벌어졌던 곳이다. 기드온의 군대가 미디안 군대를 이곳에서 물리쳤으며(삿 7:1), 사울이 블레셋을 맞아 싸우다 그의 아들들과 함께 마지막 죽음을 맞았던 길보아산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삼상 29-31장)

2) 이스르엘 계곡의 중심부분이기도 한 서부계곡은 외형상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삼각형의 밑변에 해당되는 지역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사렛산지인데, 욕네암과 다볼산이 양쪽 끝지점을 이루고 있다. 삼각형의 정점은 현재 아랍도시인 제닌 근처의 이블레암이다. 삼각형 모양의 각 변 길이는 각각 32km 정도로 상당히 넓은 계곡이다.
때로는 이곳을 '므깃도골짜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서부계곡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므깃도이기 때문이다.(수 12:11) 이 계곡의 지대 높이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해발 20-50m의 낮고 평평한 곳이다. 주변의 산지에서 씻겨 내려온 검붉은 색의 충적토는 점토질 성분의 비옥한 토양으로서 물을 잘 흡수하고 흡수한 물을 오래 보존하는 토질을 지니고 있다. 특히 계곡의 중앙부는 지대가 많이 가라앉은 곳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도 충적토가 더욱 두텁게 덮여있다. 또한 계곡을 가로질러 흐르는 '기손강'과 더불어 비교적 많은 양의 강우량은 이 지역을 더욱 비옥한 평야지역으로 만들고 있다. 옛부터 이 지역은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로 알려져 왔고,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라엘의 빵 바구니'라고 표현한다.

이스르엘계곡은 지형적으로 해안평야와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리적 으로는 중앙산지에 속하고 있는 거대한 계곡형 평원이다. 산지가 교통에 불편한 장애적 요소가 된다면, 산지 사이의 거대한 계곡인 도로형성에 많은 이점을 지지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고대부터 대부분의 중요한 도로들이 이곳을 거쳐 지나갔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스르엘계곡을 중심으로 적어도 일곱 개의 크고 작은 도로들이 다섯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서쪽으로는 갈멜산 기슭을 따라 악고와 뵈니게로 향하는 도로가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이스르엘계곡의 중앙부를 통과하여 다볼산을 거쳐 갈릴리바다로 나아가는 해안길이 있었다. 이 길은 갈릴리바다를 거쳐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었다. 동쪽으로는 역시 이스르엘계곡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하롯계곡을 거쳐 벧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었다. 이 도로는 겨울철 우기 때 다볼산을 거쳐 지나가는 중심도로가 통행하기에 불편할 경우 대체 도로 역할을 하였다. 남쪽으로는 도단을 거쳐 세겜과 예루살렘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었다. 마지막 남서쪽으로는 갈멜산으로 넘어 해안평야로 나아가는 세 개의 통로--북쪽으로부터 욕네암통로, 므깃도통로, 다아낙통로--가 있었다. 이 세 통로 중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통로는 해안길의 간선도로 격인 므깃도통로였다.


2. 이스르엘계곡 주변의 산들과 강들

이스르엘계곡의 중요성은 비옥한 지역이라는 경제적 측면과 중요한 도로들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측면이다. 이러한 이스르엘계곡의 중요성은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들과 계곡 내부를 흐르고 있는 강들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이 지역은 사방이 산들로 둘러 쌓인 곳이며, 또한 두 개의 중요한 강이 발원하여 동서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르엘 계곡의 북쪽에는 하부 갈릴리산지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사렛산지가 놓여있으며, 서쪽에는 갈멜산이 북서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있다. 남쪽으로는 사마리아산지가 시작되고 있으며, 동쪽에는 다볼산, 모래산, 길보아산 등 세 개의 산이 남북방향으로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스르엘계곡에는 길보아산 밑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두개의 강이 있다. 서쪽 방향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가는 기손강은 강 자체의 규모가 작아서 겨울 우기에는 불어난 강물이 자주 범람하는 경향이 있었다.(삿 5:21) 주변 산지에서 흘러 내려온 빗물들은 비옥한 충적토지역을 진흙벌로 만들어 통행에 많은 불편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가나안의 막강한 시스라군대가 드보라의 군대에게 패배한 원인도 이런 진흙으로 인하여 군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동쪽인 요단계곡 방향으로 흐르는 하롯강은 길보아산 밑의 하롯샘에서 발원하여 해저 115m에 위치하고 있는 벧산 도시를 거쳐 해저 225m의 요단강으로 유입된다.


3. 이스르엘계곡의 중요 지역들

1) 므깃도 (Megiddo)
이스르엘계곡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므깃도는 가나안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여 왔던 고대 도시중 하나이다. 오늘날의 하이파에서 남동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있는 므깃도는 이스르엘계곡을 거쳐가는 해안길이 갈멜산을 넘어 해안평야로 나아가는 길목을 지키는 전략적 도시였다. 이곳은 또한 북서쪽에 위치한 악고로 가는길과 남동쪽에 위치한 벧산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므깃도는 지형적으로 전략적인 도시로서, 많은 전쟁이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므깃도에서 있었던 가장 오래된 전쟁의 기록은 가원전 15세기 가나안 군대를 패배시킨 투트모세 3세의 연대기에 나오고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므깃도는 강력한 가나안의 한 도시국가였으며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므깃도를 점령하지 못하였다.(삿 1:27) 그후 다윗시대에 이르러 므깃도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고, 솔로몬은 이곳에 요새화된 자신의 병거성을 건설하였다.(왕상 9:15) 후에 아합은 므깃도를 더욱 요새화시켰다. 현재 남아 있는 므깃도의 거대한 지하수로시설은 아합 때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므깃도는 기원전 733년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고, 그후 요시아왕은 기원전 609년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고를 맞아 싸우는 중에 전사하였다. 성경시대 이후에도 나폴레옹이 1799년 터키군과 더불어 이곳에서 전쟁을 벌렸고, 세계 1차대전 중 연합군을 이끌었던 알렌비 장군 역시 이곳에서 터키군을 패배시켰다. 이러한 계속적인 전쟁의 역사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세계 종말에 있을 아마겟돈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계 16:16) 아메겟돈은 '므깃도 언덕'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하르 메기도'를 헬라어로 음역 표기한 것이다.

므깃도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고학 발굴작업이 있었다. 1925-1939년 사이에 시카고대학 고고학팀이 이곳을 처음으로 발굴하였고, 1960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이갈 야딘(Yigal Yadin)은 이곳을 재차 발굴하였다. 므깃도에서 발굴된 고고학 유물들 중에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청동기 초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나안사람들의 산당; (2) 하솔과 게셀에서도 같은 형태로 발견되었던 솔로몬시대의 성문. 이 성문은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여러 겹의 방어벽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3) 지방장관의 거주지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궁전; (4) 솔로몬시대의 마굿간으로 추정되는 건물과 길쭉한 형태의 돌 구유통들 (왕상 10:26); (5) 아합왕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규모의 수로시설. 이것은 외적들이 성을 포위하였을 때 성밖에 있는 샘으로부터 안전하게 물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미련한 지하수로시설이다. 이 지하 수로의 길이는 약 66m나 된다.

2) 벧산 (Beth Shean)
고대도시 벧산은 하롯계곡과 요단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전략적으로 요단계곡을 지나가는 남북교통로와, 이스르엘과 요단동편 지역을 지나가는 동서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벧산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 시대의 역사자료에 이미 언급이 되고 있다. 벧산은 다낙, 므깃도, 이블레암 등과 더불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에 점령되지 못한 가나안의 도시들이었다.(삿 1:27) 사울 시대 이 도시는 블레셋의 통치아래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박아 달아매었다.(삼상 31: 10,12)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북쪽으로 확장하면서 이 도시를 점령한 것 같고, 그 후 솔로몬은 벧산을 자신의 다섯 번째 행정 구역에 포함시켰다.(왕상 4:12)

벧산은 주변의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원지, 그리고 온화한 날씨로 인하여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하였던 지역이다. 이스라엘의 랍비 중 한사람은 벧산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만약 에덴동산이 이스라엘 땅 안에 있다면, 벧산은 그 문이 될 것이다.

전략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벧산은 기원전 700년경부터 방치된 폐허가 되었다. 헬라시대에 이곳은 '스키토폴리스' (Scythopolis)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스키토인들의 도시'라는 의미의 이 도시명은 아마도 프톨레미 2세 (기원전 285-246년) 통치 때에 용병으로 있었던 스키토인들과 관련된 것 같다. 당시 스키토인들은 프톨레미왕조의 용병으로 이곳 벧산에 주둔하였다. 벧산이 최대의 번영기를 누린 것은 기원전 63년 폼페이가 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이다. 이 도시는 데가볼리 도시들 중 요단강 서편지역에 위치한 유일한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데가볼리 도시연맹의 중심적 수도가 되었다.

벧산에는 발굴된 대표적 유물로는 보존 상태가 좋은 로마시대의 대규모 원형극장이다. 기원 2세기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형극장은 약 5000여명 정도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갖추어져 있다.

3) 이스르엘 (Jezreel)

길보아산 밑에 위치하고 있는 이스르엘은 잇사갈지파에게 분배가 된 가나안시대 때부터 있었던 도시였다.(수 19:18) 사울은 블레셋과 마지막 전쟁을 벌리기 전에 이곳에 그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솔로몬은 이스르엘을 그의 왕국의 다섯 번째 행정구역에 예속시겼다.(왕상 4:12) 오므리왕가의 아합왕은 이 도시를 크게 증축하여 북왕조 이스라엘의 겨울별궁을 삼았다.(왕상 18:45; 21:1) 아합왕은 이스르엘의 별궁을 더 크게 확장하기 위하여 근처에 있었던 나봇의 포도원을강제적으로 차지하려고 그 주인 나봇을 살해한 적이 있다.(왕상 21장) 아합이 나봇을 살해한 피의 댓가로 아합은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모두 살해당하였다.(왕하 10:7,11) 이스르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보낸 군대에게 파괴당하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헬라시대부터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게된 이곳은 중세 때까지 그 명목을 계속 유지하였다.

4) 다볼산 (Mt. Tavor)
다볼산은 나사렛산지의 북쪽 지맥으로 이스르엘 계곡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정상이 580m 높이가 되는 아담한 봉우리의 산이다. 산 자체는 석회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산의 동쪽은 검은 현무암 토양으로 덮여있고, 서쪽은 흰색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 다볼산 주변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다볼산은 검고 둥굴게 솟아있는 모습이며, 산 주위 계곡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모습은 신비로운 경외심과 위엄을 자아내는 산이다. 5세기의 교부였던 제롬은 이 산을 "경이롭도록 둥글고 높은 산"이라고 극찬하였다.

산들은 일반적으로 고대인들에게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에게 산은 신의 거처이며, 신적인 권능이 존재하는 곳으로 비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 올라 신에게 기도와 경배를 드리며 구원을 간구하였다. 가나안시대의 사람들 역시 다볼산을 신성하게 여겼었던 것 같다. 산아래 기슭에서 발견된 가나안인들의 성소 관련 유물들이 그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며, '다볼'의 '배꼽' 혹은 '중심'이라는 의미 역시 고대시대 이곳이 예배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 이 산을 신성시하였던 경향은 스블론과 잇사갈을 향한 모세의 기도 속에서 잘 나타나 있다. "스블론이여, 나가는 것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장막에 있는 것을 기뻐하라. 그들은 열국 백성들을 산으로 부를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의의 제물을 바칠 것이니라."(신명기 33:18-19) 여기에서 언급된 '산'은 이스르엘계곡에서 중심적인 산인 다볼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산의 자연적 조건 자체가 '의의 제사'를 위한 예배 중심지로 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시대에 이 산 위에는 '다볼'이라는 도시가 있었고, 그 도시는 잇사갈과 스블론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수 19:22)

하부 갈릴리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다볼산은 이스르엘계곡을 가로지르는 도로와 인접하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성을 띄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사람들과 벌린 전쟁에서 다볼산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 아비노암의 아들 발락은 이스라엘 지파의 지도자들을 모으고, 기손강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하솔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군대를 급습하였다.(삿4:7) 전망을 넓게 볼 수 있는 다볼산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분명히 전략적인 이점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전략적 이점을 염두에 두고 여사사 드보라는 발락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삿4:6-7) 드보라의 명령을 따라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발락은 일 만 명의 부하들과 함께 가나안 군대를 급습하여 시스라와 그의 군대를 대파시켰다.(삿4:15)

다볼산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성산 중의 하나로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시편의 기자는 세상에 드러나 있는 여호와의 놀라우심과 위대하심을 언급하면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산으로서 이 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즐거워 하나이다." (시편89:13) 유대인의 미드리쉬적 해석에 의하면, 율법이 시내산에서 주어졌을 때 다볼산은 마치 시내산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다볼산 정상에서 율법이 자기에게도 주어지도록 하나님께 간청했다고 한다. 이 산은 기독교의 전통에서도 역시 신성시되는 장소이다. 예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 자신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시킨 장소가 곧 다볼산이었다는 교회의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전승에 근거하여 비잔틴시대와 십자군시대에 다볼산 정상에 변화산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다볼산 정상에는 프린체스카 계통의 변화산 기념교회가 세워져있다.

드보라시대 이후에도 이곳에서는 많은 전쟁이 있었다. 특히 유대인의 로마를 향한 일차 반란운동 때에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로마군과 대항하여 싸웠다. 당시 유대반란군의 지도자였던 요세푸스는 다볼산을 요새화하였고, 그 위에 마을을 세워 로마와의 싸움에서 버티어 나가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앞선 로마군은 다볼산을 점령해 버렸다. 중세에는 십자군과 이슬람간의 긴 전쟁이 이 산을 중심으로 벌어지기도 하였다. 십자군들은 필사적으로 이 산을 방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슬람에게 패배하였고, 산 위에 있던 교회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다.

5) 모래산 (Giv't Hamore)
다볼산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는 모래산은 화산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540m의 높이의 산이다. 현무암과 백악암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산은 그 정상이 원형으로 되어있고, 산의 전체 둘레는 4.8km 정도이고, 산의 직경 길이는 가장 넓은 곳이 2.4km이다. 이스르엘과 하롯계곡 사이의 도로와 티베리아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모레산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사사 기드온이 활동하던 시대에 미디안족은 이 산의 북쪽 계곡에 진을 치고 있었다. 기드온이 선발한 300명 정예용사들은 모래산 건너편에 있었던 하롯샘가에서 이곳 모래산 기슭에 진을 치고 있던 미디안을 향하여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치면서 출전하였다.

요세푸스는 이 산을 '작은 헬몬산'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아마도 갈릴리바다 북쪽에 있는 헬몬산과 이 산의 모습이 유사하기 때문에 붙여졌던 것 같다. 이 산 정상에 위치하였던 십자군요새는 나폴레옹 군대가 터키군대와 치열한 전쟁을 벌렸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모래산의 북쪽과 남쪽 기슭에는 성경과 관련된 중요한 두 도시가 위치하고 있다. 남쪽 기슭에는 구약시대의 도시인 수넴(Shunem)이 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 마지막 결전을 벌리기 위하여 이곳에 진을 쳤던 적이 있다. (삼상 28:4) 나이가 많아 늙게된 다윗의 몸을 덥게 하기 위하여 채용된 수넴여인 아비삭은 이곳 출신이었다.(왕상 1:3) 또한 이곳에서 한 수넴여인은 엘리사를 극진히 접대하였고, 엘리사는 그 수넴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었던 곳이기도 하다.(왕하 4:8-37) 그런가 하면 모래산의 북쪽 기슭에는 신약시대 도시인 나인(Nain)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준 장소로 유명하다. (눅 17:11-17) 현재도 '나임'(=나인)이라는 아랍동네가 위치하고 있으며, 동네 한가운데 희랍정교회 소속의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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