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솔의 고고학적 연구

 

I 서론


하솔(Hazor)은 가나안땅 갈릴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기 이전부터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솔(Hazor)은 고대 가나안지역의 원주민 사이에서도 매우 중요한 도시로 종교적,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도 주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은 1875년 포터(J. L Porter)에 의하여 발굴이 시작되었고, 1955년부터 1958년 사이에 로스차일드와 야딘(Yigael Yadin)이 지휘하는 발굴팀에 의하여 발굴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시 1968년 여름에 히브리대학교의 야딘(Yigael Yadin)이 이끄는 발굴팀에 의하여 중요한 발굴들이 이루어 졌다. 그후 현재까지 히브리대학교의 암몬 벤-토르(Amnon Ben-Tor) 교수와 샤론 츠커만(Sharon Zuckerman)교수 팀에 의하여 계속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텔 하솔(Tel Hazor)의 고고학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자는 자료의 접근성에 대한 한계와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본 과제 보고서를 통하여 하솔의 종교와 당시 주변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본 과제 보고서는 문헌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하며 하솔(Hazor)에 대한 각종 발굴보고서와 단편 논문들을 참고하고 국내, 외의 참고서적을 참고하여 보고서를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주 자료는 현재 발굴을 진행하면서 히브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하솔 발굴(Hazor Excavation) 웹사이트 정보를 활용하고자 한다.

 


II. 하솔의 역사적 배경


1. 하솔의 지리적 위치


텔 하솔(Tell Hazor)은 이스라엘 땅에서 시리아를 경유하여, 바빌론까지 인도하는 고대 도로에 접한 상부 갈릴리 동쪽에 위치해 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텔 하솔(Tell Hazor)은 갈릴리 호수 북쪽 약 14Km 지점과 훌레 호수 남서쪽 8Km 지점, 그리고 상부 요단에서 서쪽으로 약 6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아랍인들은 텔 하솔을 텔 알 퀘다흐(Tell all-Qedah)라고 불렀으며 텔 왁카츠(Tell Waqqas)와 동일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텔 하솔은 고대 근동에서 중요한 해변 길(Via Maris)의 길목을 관장하였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시돈에서 벳산 그리고 다메섹에서 므깃도에 이르는 주요 무역 로의 교차점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솔왕 야빈”에 대한 기술은 가나안 땅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도시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하솔의 절정기는 주전 2천년으로 당시 그 곳의 거주자는 2만


<그림 1, 텔 하솔을 지나가는 바닷길의 지도(Via Maris)>


명이었다고 한다. 텔 하솔은 약 200에이커의 면적에 걸쳐 있는 상부 도시의 아크로폴리스와 하부 도시의 요새화된 지역을 포함한다. 상부 도시는 나할 하솔보다 40m 위에 위치하고, 30에이커에 걸쳐 있다. 그것은 병 모양으로 토대는 동쪽에 목은 서쪽에 있다. 하부 도시는 흙 제방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길고 가느다랗게 동쪽으로 뻗은 상부 도시의 북쪽에 놓여있다.


2. 가나안 시대의 하솔


하솔의 역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하기 이전의 가나안 원주민의 시대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의 시기로 구분 할 수 있다. 마리문서에서는 라기스와 더불어 하솔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도시이다. 함부라비(BC1792년~BC1750년) 통치기에 마리문서에서는 우가릿과 비블로스, 그리고 크레타 섬과 더불어 하솔을 언급하기도 한다. 마리문서에 의하면 하솔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바벨론까지 이르는 대상들이 왕래했던 중요한 상업 도시로 등장한다. 청동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석이다. 고대 근동지역의 주석은 현재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 지역에서 수입하였다. 기원전 18세기 초의 마리 문서(Mari Letter)에서는 고대 근동의 여러 지역으로 주석을 선적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도시들 가운데서는 북부의 하솔이 있었다. 기원전 19세기에 발견된 이집트의 저주문서에서도 하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집트의 신왕국시대 투트모세 3세(ThutmosesIII)의 도시 목록에서 하솔은 라이스, 펠라, 긴네렛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텔 하솔은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와 세티 I세의 도시 목록 가운데에도 등장한다. 또한 아마르나 서신(Tell Amarma Letters)에는 아스다롯(Ashtaroth)과 두로의 왕들이 자신들의 성읍들을 탈취한 하솔의 왕 아브디 티르쉬(Abdi-Tirshi)를 비난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또한 두로의 왕은 하솔의 왕이 자신의 도시와 하비루(Habiru)를 결탁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솔은 파피루스 아나스타시 제1권(the Papyrus Anastasi I)에도 등장하고 있다.


<그림2. 하솔의 고대도시계획과 고고학적 발굴지역>


한편 야딘(Yigael Yadin)은 약 200에이커에 달하는 텔 하솔을 발굴하며, 후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230년에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성벽은 없지만 구덩이들을 갖춘 약 15-20에이커 정동의 빈약한 거주지가 성채 상부 지역에 자리 잡았다. 현재는 아몬 벤토르(Amnon Ben-Tor)와 샤론 츠커만(Sharon Zuckerman)교수의 지휘 아래 히브리대학교의 고고학 발굴 팀에 의하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후기 청동기시대에 하솔의 파괴 연대를 좀더 이른 시기로 보는 기원전 1250년으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솔에서 발굴된 힉소스 시설물은 이 시기의 최대 유적인데 기원전 13세기에 파괴된 후 곧바로 재건되어 거주하지는 않았다. 한편 후기 청동기 시대 말엽에 파괴된 증거를 실제로 보여주는 “피정복 도시”인 라기스와 하솔은 서로 연대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3. 이스라엘 시대의 하솔


하솔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첫째로, 초기 정착시대를 보여주는 여호수아서 11장과 사사기 4장 그리고 사사기 5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열왕기상 9장 15절에 솔로몬의 요새건설에 하솔도 포함 되어 있다. 셋째로,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시대에 하솔을 재건한 흔적이 있다. 넷째로, 왕기하 15장 29절은 하솔에 대하여 성서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첫째로, 하솔에 대한 성서의 증거는 여호수아서 11장 1절에서 5절까지의 내용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사사기 4장 1절에서 5장 31절까지 에서도 하솔에 대한 기사가 등장한다. 여호수아서는 분명히 “하솔의 왕 야빈”(???? ??? ????, Jabin King of Hazor)이 가나안 왕들 중에 우두머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솔왕 야빈은 주변 소규모의 도시국가들과 동맹하여 연합군을 결성하고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와 메론 물가에서 전투를 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하솔 왕 야빈이 이끄는 북부 가나안 동맹군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에게 패퇴하였다. 이에 대하여 여호수아서 11장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모든 말의 뒤발 힘줄은 끊고 병거는 불살랐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하솔 왕 야빈을 칼로 죽이고 다른 성읍들은 그대로 남긴 채 하솔만 불살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사사기 4장에 나타난 하솔 왕 야빈은 드보라(Deborah)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이스라엘의 바락(Barak)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므로 드보라와 바락이 축하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사사기 5장 1절에서 31절까지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여호수아와 사사기에 나타난 두 기사의 내용 중 한곳은 최소한 기존의 내용을 재구성 한것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야딘(Yigael Yadin)은 이러한 전승들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200에이커에 달하는 하솔의 파괴 원인을 여호수아서에 기록한 내용대로 여호수아와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사기 4장에 나타난 하솔 왕 야빈의 전쟁기사에 대하여 “나는 사사기 4장의 하솔 왕 야빈에 대한 언급을 후대의 편집자에 의한 편집 해설이라고 해석한다.”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열왕기상 9장 15절에서 솔로몬은 하솔을 므깃도, 게셀과 더블어 성읍을 재건하였다. 이 세 도시에서 주요한 발굴이 이루어 졌는데 야딘(Yigael Yadin)과 그의 의견을 따르는 많은 학자들은 이 세 도시가 기원전 10세기 중엽인 솔로몬 시대에 재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야딘을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세 유적지 모두에서 거의 똑같은 요새 구조가 발견된다는 점을 근거해 그들의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각 도시는 포곽벽(Casemate Wall)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관문 양편으로는 거의 같은 크기인 세 개의 방이 있었다.


<그림 3. 하솔의 포곽벽 구조 사진을 근거로 재구성한 그림, 기원전 10세기경으로 추정>

이 세 도시 관문의 마름돌들(ashlars)은 같은 방식으로 다듬어져 있다. 이런 설계의 유사성들은 솔로몬 통치기에 이었던 동일한 건축가나 동일한 건축 기술의 작품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와 해석은 벤토르(Amnon Ben-Tor)의 하솔 발굴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①므깃도 ②게설 ③하솔

<그림 4. ①므깃도, ②게설, ③하솔의 6방문의 성문구조 비교>


셋째로, 하솔은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시대에 북쪽의 아람(Aram)을 방어하기 위하여 하솔을 요새로 건설하였다. 오므리가 외국과 전쟁한 내용에 대해서는 성서에서 보도하고 있지 않지만 갈릴리 북부 대부분이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강탈을 당할 때 바아사가 시작했던 다메섹과의 투쟁을 오므리가 성공적으로 계속해 나가겠다는 강력한 간접적인 증거들이 있다.

 

하솔에는 다섯 개의 거주 단계가 분열왕국과 앗수르 정복사이 시기에 속한다 고고학자들은 북쪽지역의 도시인 단과 하솔 같은 유적지에서 파괴 층을 발견하였는데 벤하닷과 연관시키고 있다. 발굴결과에 따르면 이 하솔은 신속히 재건되었다. 그런데 하솔은 더 높은 수준으로 재건되었는데 이것은 페니키아의 건축 기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열왕기상 22장 39절에서도 “그 건축한 상아궁”과 북 이스라엘 전역에서 “그 건축한 모든 성”을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이때 건축된 시설로는 하솔에서 발견된 수로시설이 있다. 물을 수로에서 끌어와 높이 30m의 수직 갱구에서 물을 긷도록 고안되었다.

 

넷째로, 성경에서 하솔을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열왕기하 15장 29절에서 이다. 이 보도 기사에 따르면 하솔은 주전 732년 디글랏 빌레셀 3세(Tiglath-Pileser Ⅲ)에 의하여 북부 갈릴리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정복당하고 파괴된다. 이 파괴 이후 거주민은 훨씬 축소되었고, 주전 7세기-2세기 동안 상부 도시의 더 올라간 서쪽 끝에다 지었던 성으로 한정되어졌다. 하솔에 대한 최후의 역사적 언급은 마카비서로, 주전 147년에 데메트리우스에 저항했던 요나단 마카비의 전투에서 “하솔 평원”을 기술하고 있다.

 


III. 하솔의 고고학적 발굴


1. 발굴 역사


하솔의 고고학적 발굴은 1875년 포터(J. L Porter)에 의하여 시작되었지만 매우 원시인 탐사였다. 하솔의 유적은 1926년 갈스탕(J. Garstang) 교수에 의하여 홀레호수(Huleh lake)남서쪽으로 약 5마일 털어진 텔 엘 퀴다흐(Tel el Qedah)의 폐허화된 언덕을 발굴하였다. 갈스탕은 1928년에 측연 측심법을 사용하여 총 네 차례에 걸쳐 이 지역을 발굴하였다. 그 후 1955년부터 1958년까지 팔레스타인 유대인 정책 협회(P.I.C.A)와 영국-이스라엘 고고학발굴협회(the Anglo-Israel Exploration Society)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의 후원으로 로스차일드(James A. de Rothschild)발굴단과 히브리대학의 야딘(Yigael.Yadin)의 지휘 아래 보다 더 정밀하고 철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섯 번째 발굴은 1968년 이루어 졌다.

 

이 때에는 전체적인 발굴의 지휘를 야딘(Yigael Yadin)이 담당하였고, 책임자로는 벤토르(Amnon Ben-Tor)와 실로흐(Y. Shiloh)가 담당하였으며 건축가 였던 두나예브스키(I. Dunayevsky)가 함께 참여하였다. 1990년도에는 미국 택사스에 있는 빅 샌디(Big-Sandy)의 엠밧사돌 대학(Ambassador College)와 이스라엘 고고학발굴협회(Israel Exploration Society)가 협력하고 히브리대학(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과 마드리드(Madrid)의 컴풀텐시대학(Complutense University)의 공동 프로그램으로 벤토르(Amnon Ben-Tor) 교수의 지도하에 발굴이 이루어 졌다. 그 후 매년마다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2008년부터는 벤토르(Amnon Ben-Tor) 교수와 샤론 주커만(Sharon Zuckerman)교수가 공동으로 발굴 작업에 참여 하였다.


2. 발굴된 주요 지역


하솔 지역은 크게 상부 하솔(Upper City)과 하부 하솔(Lower City)로 나누어진다. 주변의 평원에 비하여 40m 정도 솟아있는 넓이 30에이커 규모의 병 모양으로 토대는 동쪽에 목은 서쪽에 있는 부분과 텔 북쪽에 위치한 넓이 175에이커 부분 즉 상부 도시인 아크로폴리스와 하부 도시의 요새화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1) 상부 하솔 (Upper City)

상부 하솔은 다섯 지역에서 발굴이 이루어 졌으며 이곳에 인간이 정착한 것은 초기 청동기 제 2기 말엽인 주전 2800년경부터 이다. 그리고 주전 2500년부터 2300년까지 정착의 공백 상태가 발생한 후 제 18 거주 층을 보면 중기 청동기 1기에 다시 정착이 이루어 졌다. 주전 1600년경에 세워진 왕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건물의 일부와 성전이 발견되면서 하솔의 전성기가 이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성전에는 암사자의 부조를 갖추고 있는 상판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같은 시대 하부 도시의 성전에서 발견된 상판에 부조로 장식된 사자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제 13 주거 층 곧 후기청동기 말엽 그 텔 위의 도시는 주전 13세기 주거 층의 하부 도시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파괴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상부 도시는 짧은 공백기를 보낸 후 곧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도시의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여전히 반-유목적인 특정을 보여주는 건조대, 화덕, 그리고 천막과 오두막의 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기본적으로는 주전 12세기 갈릴리의 이스라엘 정착지들에서 발견된 유적들과 동일하며, 동시에 이 정착지의 대부분이 그 도시들과 가나안의 여러 지역들이 멸망당한 직후에 발생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 하부 하솔(Lower City)

가스탕(J. L. Garstang)은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커다란 고원 지대가 보병과 기마부대를 위 한 진영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그 지역에서는 마이세니안 토기가 주전 14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기초로, 하솔에서 발견된 마이세니안 토기는 하솔이 최종적으로 파괴된 연대를 주전 l400년경 즉 여호수아의 정복시기와 관련지었다. 그러나 이 파괴는 이집트의 세티 1세(Seti I)의 원정에 의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하솔은 여러 예배 처소를 가지고 있었다 텔 아래(Lower tel)의 북쪽 끝에 있는 H 지역에서는 중기 청동기 시대의 신전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시리아의 알랄락(Alalakh)신전과 비슷하게 측면에 두 개의 방이 붙어 있었으며 주전 14세기의 현무암 석비가 세워진 이후 세 공간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 신전에는 제사 그릇과 식탁도 발견되었으며 머리가 잘려나간 조각상은 지성소에 있는 재를 모으는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


<그림5. 머리가 잘려나간 신전의 조각상>

하부 도시에 위치한 C지역에서도 10개의 현무암 비석을 가진 선전이 발견되었다. 이 비석중의 하나는 달의 신을 상징하는 뒤집힌 초승달 아래에 높이 들린 손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6. 10개의 현무암 구조를 가진 신전>

이 석비에서도 쭈그린 사자가 그려져 있었고, 컵을 들고 있는 목이 잘린 조각(목은 주변에


<그림 7. 사자 조각상> <그림 8. 목이 잘린 조각상>

서 발견됨), 도자기 가면, 청동 ‘깃발’ 등도 발견되었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직사각형의 신전은 재건축된 것이며 그곳에 돌비들 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 신전은 15세기 이후 사용되지 않았으나 주변에 다른 성소들이 발견되었다.


3. 고고학적 증거로 본 하솔의 종교 생활


하솔의 종교적 배경을 암시하는 것이 후기 청동기 제 1기의 주전 1550년경에 제작된 청동 송아지상이다. 이 청동 송아지상은 바알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하솔의 신앙적 배경은 우가릿의 만신 전에 우두머리 신인 바알을 섬겼다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또한 주전 1200년경 촌락에서는 청동 서원 헌물을 담은 한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또한 분향단, 화살촉, 포장지역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네 개의 돌기둥도 그곳에서 발견 되었다. 또한 고깔모자를 쓰고 왼손에는 무기를 든 남자상도 이었다. 뱀을 가진 여신상도 하솔의 석비 신전 C에 있는 은도금 받침대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9. 뱀을 가진 여신상>

주전 10세기에 하솔의 발굴 3283지역에는 높이 약 1.9미터의 바나나모양의 돌 즉 바체바가 있었다. 방에는 벤치들이 인공적으로 높여진 토대 위에 세워진 세 개의 벽을 따라 나란히 놓여 있다. 분향단 받침대와 도끼날 그리고 다른 청동 물체, 고깔 머리를 한 좌상 조각상 등이 발견되었다 이보다 약간 이전 시대의 황소 유적지에서처럼 그 청동 물체들은 돌기둥 앞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마체바를 향해 제사 드리는 사람들은 남쪽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리고 주전 8세기 개인의 가정집에서는 인간과 동물 모양의 조각상이 발견 되었다. 또한 신성한 나무 곁에 있는 사람을 보여주는 상아 화장품 뚜껑도 발견 되었다. 이것은 종교 활동을 암시할 수 있으나 정확한 성격은 파악하기 어렵다. 하솔에서 발견된 가정제의 물품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대중 종교 정서에 관한 모델을 제시한다. 그것은 철기 시대 팔레스타인의 지역들 가운데 가장 좋은 발굴 층의 순서를 보유하고 있다. 제 5번 발굴 층에서는 주전 750년까지 비교적 적은 수의 종교 물품이 하솔의 가정집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후 종교 물품의 수가 발굴 층 당 7개에서 36개로 증가한다. 이것은 아모스와 호세아의 메시지로 연결되는 것 같다. 주전 7세기 팔레스타인에 주거지에서 발견된 가정제의 물품들의 크기와 숫자가 늘어나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북 왕국에서 먼저 발생한 후 남 왕국으로 내려왔다. 북 왕국과 남 왕국이 멸망할 즈음에 가정제의 활동이 늘어난 것 같은데 이것은 아마 가정에서 다양한 신들에 대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4. 고고학 증거로 본 하솔의 생활풍속


주전 9세기에 하솔의 낮은 언덕의 동쪽에 세워진 공공 저장 건물들과 큰 곡식 저장 창고는 하솔이 왕정 하에서 곡식을 분배하는 행정을 위한 지역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솔은 하나의 거대한 지하수로 시스템을 건설하여 도시 안으로 물을 공급하였다. 거주 가옥들은 거리를 따라 밀집하게 건설되었고, 때로는 상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앞마당과 함께 나타난다. 몇개의 거주지는 크고 잘 계획된 “4방 가옥”구조 이지만, 다른 것들은 좀 덜 정교하고 구조상 다양하다. 주전 8세기에 도시의 광범위한 변화의 증거는 A지역에서 발견되는데 그곳은 공공 저장소가 사용되지 않고 그 지역이 개인 거주지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하솔의 또 다른 생활문화의 풍속 중에 하나는 중기 청동기 시대 분묘가 가옥의 지하에 시신을 매장하는 관습이었다. 하솔에서 궁전으로 생각되는 큰 건물에 지하 연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묘실이 발견 되었다. 이 묘실은 왕족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러한 시설이 중기 청동기 2기에 에블라(Ebla), 그리고 후기청동기시대의 우가릿(Ugarit)와 므깃도(Megiddo)등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하솔에서는 그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두개의 용광로(furnaces)가 발굴되었는데, 하나는 금속을 녹이는데 사 용되었고, 다른 것은 아마 도자기를 굽는데 사용된 것 같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새 화살촉들이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 되었다.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고대 히브리 문자의 선구자인 전기 시대 알파벳 두 문자를 주천 13세기의 작은 항아리 단편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것은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알파벳 문자를 처음 사용한 첫 번째 실중이다. 그리고 하솔은 가나안 지역에서도 가장 큰 도시로 약 40,000명의 인구가 거주 한 것으로 추정된다.

 


Ⅳ. 결론


야딘의 발굴 이후 1990년 이후로 이루어진 벤토르(Amnon Ben-Tor)의 지도 아래의 발굴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하나는 야딘이 세웠던 지층학적 연대적 결론을 확정하였는데, 즉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 도시의 파괴가 주전 1230년 이전에 이루어 졌다. 즉 다시 말하면 13세기 후반에 하솔은 파괴되었고 이후 아래쪽 도시는 버려졌다. 이후 주전 12세기-11세기의 빈약한 지층 즉 구덩이를 중심으로 한 거주 지층이 존재하고 다시 건물이 들어 서기 시작한 것은 주전 10세기 후반부터이다. 새로운 발굴로 인하여 6방 구조 성문과 포곽벽(casemate wall)은 토기와 지층학적인 고려에 의하여 주전 10세기 후반의 것으로 밝혀졌다.

 

후기 철기 시대의 하솔이 732년 티글랏 빌레셀에 의하여 파괴되었다면, 하솔은 약 220년 동안의 후기 철기시대 시간을 가진다. 이 사이에는 지층이 6개 세부적으로 나눈다면 9개 또는 11개 또는 12개의 하부 단계를 가진다. 이 단계들은 평균 15년에 걸쳐진 시간을 가진다. 지층은 35년. 따라서,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어진, 후기 철기 시대를 9세기로 낮추자는 주장은 하솔로 보았을 때, 불가능하다. 지층 X의 6 방문(chamber gate), 포곽벽(casemate wall)은 950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층 X의 건축은 누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가?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솔로몬 또는 여로보암 I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지층은 10에이커도 안되는 크기로 상부 텔의 서쪽에서만 인구 약 800~100명이 거주하였을 것이다. 이후 지층 IX에서는 상부 텔의 동쪽으로 확장되어 성벽에 의하여 상부 도시 전체가 요새화 된다. 야딘의 결론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9세기 때에는 도시가 두배로 커지게 되고 인구도 따라서 두배가 된다. 새로운 발굴에서는 Area M에서 Area A의 것과 비슷한 9세기의 저장소를 발굴하게 되어 그 당시의 번영을 엿볼 수 있다. 야딘은 이 시기를 아합의 시기로 편년하였다. 8세기에서는 북쪽 아람과 앗시리아의 위협으로 점차 하솔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9세기의 건물은 계속 사용되지만, 8세기때 건설된 건물은 점차 빈약해지고 벽들은 점점 얇아 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732년에 티글랏 빌레셀에 의하여 하솔은 멸망하게 되는데, 성서의 하솔 멸망 언급은 야딘의 발굴에 의하여 밝혀졌다.

 

이제까지 본 대학원생은 하솔에 대하여 고고학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하솔은 지리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하솔이 지정학적 중요한 위치에 잇다는 사실은 직접 성서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간접적으로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솔에 대하여 알려진 자료는 매우 미약하며, 그 접근성도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솔의 연구를 통하여 고대 가나안지역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고찰 할 수 있었고, 다양한 문화의 충돌에서 생기는 변화도 관찰 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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