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이집트
김성교수 |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도자 히브리 족장
이스라엘의 고향 이집트(?)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집트 역사 전승에서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통치했다는 언급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하였다. 그런데 이를 시기한 아피온(Apion)이라 불리는 한 이집트인은 ‘유대인 반박문’을 통하여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나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모셔다 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항하여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서기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 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마네토에 의하면 ‘힉소스’라 불리는 한 민족이 북쪽에서부터 쳐들어와서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 민족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멤피스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가 아바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나중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날때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갔으며 유다 지방에 강력한 요새인 예루살렘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힉소스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부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니 하산의 아브라함(?)
이들의 우두머리는 산양 한 마리를 붙들고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힉소스 ‘아비샤’로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림의 위쪽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위해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윌킨슨은 바로 이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비롯한 창세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족장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무덤은 서기전 1900년경 건설된 것이어서 어느 정도 연대상으로도 가능한 추론이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이집트의 한 무덤벽화에서 히브리 족장들을 연상시키는 가나안 출신의 유목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 야곱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수집되어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된 한 스캐럽에는 ‘야쿱-헤르’라는 이름이 파라오를 의미하는 타원형 테두리로 싸여 있었다.
1969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 근처 쉬크모나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스캐럽에도 분명하게 상형문자로 ‘야쿱-헤르’가 표기되어 있었으며 베를린의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함께 출토된 토기들을 통하여 이 무덤의 주인공 야곱은 서기전 1750년경의 인물로 밝혀졌다. 또한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스캐럽에는 이집트 제 15왕조의 파라오임을 증명하는 표시와 함께 야곱의 이름이 나타난다. 그는 힉소스 왕조의 제 2대 왕으로서 서기전 1600년경 통치했었다.
서기전 1900년경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아비샤를 비롯한 서른 일곱 명의 힉소스들, 서기전 1750년경 이스라엘 항구도시에서 발견된 한 도시의 왕 야곱, 그리고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했던 서기전 1600년경의 파라오 야곱 등은 모두가 창세기 족장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해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비록 창세기에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등장하지만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라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은 파라오로서 약 10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식민지로 통치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로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
크눔호텝 3세 무덤의 힉소스 벽화
야곱(야쿱-헤르)의 스캐럽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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