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바울의 선교

 

 

베드로의 선교

 

    

 

 

사도행전은 성령에 의한 교회의 태동과 교세의 확장 즉,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온 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확장된 선교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도행전의 선교의 축을 찾아 본다면 그 시대 초기 기독교의 두 기둥 베드로바울을 들 수가 있다. 초대교회의 선교를 연구한다는 것은 베드로의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한 선교와 바울의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소아세아와 로마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분의 선교를 비교 연구하며 이 시기에 많은 도전을 받고자 한다. 

 

예수님의 승천시 격려와 훈계, 그리고 주님에 관한 증거의 위임을 받은 제자들은 수제자인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다.(행 1 : 12 - 14) 먼저 12 제자 중에서 배신하여 없어진 가롯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선거했는데 이것은 베드로의 제의에 의한 것이다.(행 1 : 15 - 26).  이리하여 이들 12 명을 중심으로 하는 120 명의 무리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약속된 성령의 강림을 대망하며 전혀 기도에 힘썼다. 

 

마침내 오순절의 대사건이 일어났다(행 2 장). 이 때에 무리를 대표하여 선교를 한 자는 역시 베드로였다(행 2 : 14 - 36) 즉 그는 예수의 승천 후에 일어난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행 1 - 2장). 성령의 역사에 의한 그들의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기적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에 의해 행해지고 그들의 말을 듣고 따르는 자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견고한 단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성경인명지명" 백합출판사, 1979, p 215)  

      

당시의 그들은 유대교에서 독립한 교단을 조직할 뜻은 없었던 듯하다. 오직 유대교 안에 어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가 보내주신 메시야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단순한 신앙에 불과했다(J.N.D 켈리 "고대기독교회사" P765 ) 그러므로 다른 유대교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선전에 기도하러 가고 또한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베드로와 사도들을 중심으로한 이 새로운 세력이 더해짐에 따라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 드디어 들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 박해로 되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그 때를 맞아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 앞에서 너희말 듣는 것이 하나님 씀 듣는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 : 19 - 20) 고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주님의 생전과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베드로를 볼 수 있다. 그데반의 사건 이후 박가 더욱 가중해진 결과 각지로 추방된 제자들의 활동에 의해 복음은 오히려 확대전파 되었으와 같은 정세의 틈바구니에서 베드로는 이에 잘 적응하며 초대교회의 선교를 확대해 나갔다. 

      

사마리아 전도가 시작되자 그는 빌립을 돕고(행 8 - 24) 계속하여 사방 각처를 순방하면다, 욥바, 가이사랴 등지에 선교의 발자취를 남겼다(행 9 : 32, 36, 10 : 1)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주님께서 임명한 바울보다 먼저 이방인 선교에 손을 댔다. 그는 이아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으로 그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이방인인 그를 교회에 받아 들임으로서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행 10 : 43) 는 복음의 진리를 분명히 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문을 무 할례자 이방인에게도 활짝 열어놓는 계기가 되게 되었다(행 1 : 1 - 48, "성서백과 대사전 4  권" p 765).

 

또 이문제에 관한 유대주의 기독교와 논쟁결정을 위해 열린 예루살렘 회의에 야고보, , 요한과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이방인에 대한 사도 바울과의 완전한

일치로 복음의 진리 확인을 위해 크게 기여한바 있다. 

 

위대한 초대교회의 선교(전도)의 핵심에 언제나 사도 베드로가 있었고 그의 주도, 지시,  력, 실천에 의해 선교가 더 왕성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선교를 연구하며 교훈을 받고자 한다.          

 

1. 기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기도로 시작된 교회였다.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로 부터 권능을 받을 때 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승천하셨다(행 1 : 4).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표적을 보이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그 때 부터  유대교와 전혀 다른 초대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초대교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성령이 감림했던 때인 사도행전 2 장에서의 오순절 날 탄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알반 더글러스 "주제별 성경연구" p 288)

 

또한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사모하는 기도가 약해지지 않았다. 실제로 성령충만은 제자들을 더욱 기도에 정진하도록 인도하셨으며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도록 감동하였다 (H. Kane "성서신학의 성서적 기초"  p 465) 

 

성령강림에 이어 제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행 2 : 42)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기도시간에 선전에 올라 갔으며(행 3 : 1), 처음 박해를 받은 후 요한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돌아가서 연약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교회에 힘찬 기도의 힘을 불어 넣어 성령이  응답하시는 역사를 이룬다.(행 4 : 23 - 24),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하마터면 교회의 성결을 더럽히고 거짓과 위선과 탐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사단의  세력을 제거한 일(행 5 : 1 -11) (곽선희 "사도행전강해 교회의 권세"  p286) . 초대교회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큰 부흥이 일어났으며 심지어는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힐까 바라고 병든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은 일(행 5 : 12 - 16). 교회에 원망이 일어 났을 때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 고 선언할 일(행 6 : 4) 욥바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던 짧은 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고 그 지시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이방인 고넬료를 전도할 수 있었고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복음 전파가 하나님의 뜻임을 증거하는 사건으로 제시된 일(행 10 : 9 - 23).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는 기도로 시작되었고, 기도에 의지했고, 기도로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 주 예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고. 모든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을 기도로 극복하며 승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세워감을 볼 수 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그의 인격과 신앙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성령에 의해 주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여 주님을 기쁘시게하고도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 간곡히 만류하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 사단이라는 큰 책망을 받는다 (마 16 : 16 - 23). 주님 부활 후에도 믿음이 없이 다시 갈릴리의 어부로 돌아가고 만다 (요 21 : 1 - 14)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성경대로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제비뽑아 사도로 세운다 (행 2 : 14 - 40).

 

그 이후에도 교회를 지혜롭게 이 끌고 있다 (행 15 : 7 - 11). 또한 과거에는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사람이 었다(마 26 : 33  -34). 그러나 이후에는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겸손의 사람이 된다(행 3 : 6). 과거에는 비겁하고 겁장이 였으나 (마 26 : 58, 69 - 74), 이후에는 담대하여 의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듣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담대히 선언한다( 행 4 : 19 - 20).

 

이전에는 충동적인 사람이었으나 (요 18 : 10) 이후에는 신중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 된다 (벧후 1 : 1) ("주제별 성경사전" p362)

 

중요한 때에 베드로는 교회를 앞장서서 기도하며 이끌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나아갔 다. 그와 초대교회의 초기사역과 선교는 그와 초대교회의 기도의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임종만 "조직신학 강해 6 교회론" p 200)

  

2. 동역자               

 

베드로는초기 초대교회의 선교에 있어 동역의 힘과 필요성,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에수께서 승천하신 직 후 제자들과 120 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가룟 유다 대신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을 뽑아 사도로서의 동역자를 충원했다.(행 1 : 22).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난 후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수장 격인 자로서 모든 다른 사도들과 동역하는 좋은 본을 보이고 있다 (행 2 : 32 - 41)

 

사도행전 3 장에서는 사도요한과 함께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핍박 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도 베드로는 혼자가 아닌 동역의 개념을 가지고 선교에 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행 3 : 1 - 10). 또한 고넬료와 그 가정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세례를 베푸는데 있어서도 자신이 직접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역했던 동역자 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하고 있다 (행 10 : 42 - 48) 이 때의 동역자들은 베드로에게 소중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호크마 신약주석 신약편 5 사도행전 p 249).

 

사도행전 외에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 장을 끝맺으면서 "내가 진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 (벧전 5 : 12)라고 표현하며 한 동역자를 소개한다.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를 대필했다.

 

동시에 "내 아들 마가"(벧전 5 : 13) 라고 하며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소개한 바울과 유사한 표현을 통해 또 다른 동역자를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선교 초기부터 동역을 통한 선교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서로 진실로 의지하며 부족한 부분은 채워가며 선교의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3 선교의 자원 평신도          

 

베드로는 선교에 있어 동역자들의 협조와 필요성도 알아지만 그에 못지 않게 평신도들에게서도 선교의 헙조자로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9 장에 보면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8 년을 누워있던 애니아라고 하는 여인의 병을 고치며 (행 9 : 32 - 35) 이어 욥바에서는 병들어 죽은 다비다라고 하는 여 제자를 성령의 능력으로 살리는 기적을 베푼다(행 9 : 36 - 43). 이들이 고침을 받고 평신도로서 베드로를 도와 온 성에 복음을 증거 했다. 또한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여러 날 동안 하였는데 피장 시몬의 집에 유하면서 그 일들을  감당했다고 할 때 피장 시몬도 좋은 평신도 동역자였을 것이다 (행 9 : 43, 10 : 6) 

 

사도행전 12 장에 보면 야고보 사도의 순교이후 베드로까지 옥에 갇히게 되는데 (행 12 : 1 - 4) 이때 옥에 갇힌 베드로를위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온 교회가 간절히 기도한 것은 초대교회 선교에 평신도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전서에 언급한 "실루아노"나 "마가" 등의 중요한 동역자를 제외하더라도(벧전 5 : 12 - 13) 베드로에게는 많은 평신도들의 도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와벽한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선교사가 아닌 핍박과 고통을 항상 곁에 두고 있는 베드로인지라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현장에 가까이서 살고 있는 평신도들의 도움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4. 성령의 역사하심             

 

헤리보어(Harry Boer) 는 선교사역은 전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과 그 능력에 있다고 주장 한다. 오순절의 교회는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임재하심으로 그리 스도의 위임명령이(행 1 : 8) 교회의 확고한 존재이유가 되었으며 교회의 삶을 본질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Harry R. Boer "Pentecost and Missions" p 120)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자연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증거하는 교회가 된다. 이는 외부로 부 터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생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내적인 감동에 의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교회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함으로서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한 설교가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행 2 장) 그의 설교는 능력과 확신에 가득 차 있었으며 성령께서 심령들을 사로잡고 역사하셨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관련되었던 예수님 생전의 반대자들이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 꼬" 라고 물었던 것이다.(행 2 : 37). 

 

저들은 성령의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마치 감전된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부림 쳤던 것이다. (김경행 "신약강해설교 사도행전" p 90).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 했을 때 그의 말씀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나?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행 5 : 9)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도 성령의 충만한 영감을 느낄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 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행 : 20 - 23)

 

베드로는 자신의 성정과 뜻으로는 결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께서 그를 택하시어 지혜를 주시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저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담대히 주장하게 하셨다(행 15 : 7-11).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 성령의 강력한 인도였음을 위에서도 기록했지만 사실 베드로가 단번에 순종치 못하고 환상을 세 번 씩이나 보고 나서야 순종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내게 명하신 성령이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셨다" 라고 철저히 자신의 복음전파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행 11 : 12).

 

"성령이 충만하여"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베드로는 분명 성령의 사람이요 성령의 도구인 것을 확신한다.

 

 "제자훈련을 위한 성서연구교제"의 저자인 홍순화 박사는 "제자의 삶 (1)"에서 "성령충만은 함께하시는 인격이신 성령께 지적으로 동의하고 함께 하심을 믿으며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심. 베드로의 설교. 치료. 전도.   베드로 대성전의 전면 > 

 

  5. 겹쳐지는 고난과 담대함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거의 용기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며 결국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예수님을 버려두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하고 만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이르러서는 전 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놀라운 용기를 가진 자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 할뿐 그 어느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러번에 걸쳐 많은 사람들, 특히 그들을 해하려는 대적들은 그들의 담대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행 4 : 13).  이는 자연적인 담대함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상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특별한 담대함이었다 (행 4 : 31).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된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다 (행 4 : 1 - 4) 이 둘을 체포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백성을 가르치기 때문이요.

둘째,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전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셋째, 말씀을 전하매 믿는자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가운데서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행 4 : 9). 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주님의 이름을 전한다. 특별히 이자리에서 베드로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으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게 됨"을 강력히 전한다(행 4 : 10 - 12).  이 자리에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며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지만 베드로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 : 19 - 20)

 

베드로는 고통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더욱이 사도행전 5 장에서는 붙잡혀서 채찍질 당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 당하는 무서운 압박과 고통을 당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심을 기뻐했다" (행 5 :  41).

 

그런 고통과 위협을 당한 후에도 더더욱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행 5 : 42 ).

 

 베드로는 철저히 성령을 의지하는 선교사였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이름이 전해지기만 한다면 나의 고통은 오히려 기쁨이라는 담대한 신앙을 가졌기에 그를 통해 놀라운 복음전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복음을 위한 담대한 용기는 베드로 시대뿐 아니라 지금도 선교사에게 필수적인 자질인 것이다.  

 

6. 이적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베드로의 사역을 취급한 앞 부분에서 그러하다(행 3 : 6 - 8, 4 : 30, 5 : 12, 9 : 32 - 42), 사도들은 단지 말씀만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말씀과 함께 그 증거가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나타났다.사마리아의 도시에서 빌립은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하심이 이적으로 나타나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행 8 : 7)

 

초대교회에 있어서 이적은 예수의 사역에서와 같은 목적, 즉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행하여 졌다. 이적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드러났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가 있었다. 또한 거의 모든 경우에 이적에는 "많은 이가 믿었더라"(행 5 : 14. 9 : 42)는 결과에 대한 언급이 뒤 따랐다. 이적이 없이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유지되고 계승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그 당시에 만연했던 신배종교들과 경쟁하는 새로운 신앙이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이적을 통한 선교를 여러가지 형태로 평행시켜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의 이적을 통한 선교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성전 미문에서 고침 (행 3 : 1 - 10)

2) 베드로가 저주하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 (행 5 : 5)

3) 그림자의 치료능력 (행 5 : 5)

4) 귀신들린 사람을 고침 (행 5 : 16)

5)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함(행 8 : 14 - 17)

6) 죽은 도르가를 살림 (행 9 : 36 - 43)

7) 이적으로 옥에서 풀려남 (행 12 : 6 - 11)

 

위에서 기록한 대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베드로의 이적 사건들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고 주님을 믿은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이가 믿었더라" (행 5 : 14, 9 : 42).  이러한 결과를 볼 때 베드로의 이적을 통한 선교는 초대교회의 선교방법 중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7. 설교  

 

Michael Green 은 초대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중추를 이루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1) 예언의 성취로서의 예수님을 증거 했다 (행 2 : 16 이하)

2) 사람이신 예수님을 증거했다 (행 2 : 22)

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증거했다 (행 2 : 36)

4)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증거했다 (행 2 : 32)

5) 통치하시는 예수님에 관해 증거했다 (행 2 : 34 - 35)

6) 역사적인 예수님에 관해 증거했다 (행 2 : 33)

 

예수님은 단지 오래전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우리시대의 인물이다. 그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성령은 오늘날을 휘한 예수님의 임재이다. 그들은 그와 같이 성령을 이해하였다 (Michael Green "초대교회의 전도" p 92 - 97)

 

김득중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아홉편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내용상의 다른 점이 있음에도 설교문이 구조상으로는 동일성이 있다고 말하며 일반적인 체계를 다음과 같이 말 한다.

     

- 직접담화. 

- 주의를 기울이라는 호소 . 

- 청중들의 오해를 지적. 

- 성경으로 부터의 인용. 

- 기독론적 케리그마. 

- 성경으로 부터의 증명. 

- 오해로 야기된 문제들에 대한 답변. 

- 구원선포 (김득중 "사도행전 연구) p 97 - 98)

 

필자는 베드로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강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요소들이 베드로의 설교 속에 있기에 결국 설교를 통한 선교가 가능했다고 믿는다.   

  

1) 구약에서의 성취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일부가 성취되었고 또한 앞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1) 요엘 2 : 28 - 29  "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우연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 요엘에 의한 예언이 성취이다" (행 2 : 6)

(2) 시 16 : 8 - 11     "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선지자 다윗을 통하여 이미 예언된 것이며 때가 이르매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행 2 : 25-28 )        

(3) 신 18 : 15,         "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것이 이미 선지자 모세를 통하여 예언되었고 때가 차매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행 3 : 22)

         18 - 19.                                                                                                                 

(4) 사 45 : 22          "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말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 고넬료의 삶 속에 실현되었음을 말한다. 

                             (행10 : 34-35)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는 확신에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만유를 회복하실 때 까지(행 3 : 20 - 26) 예수를 영접하여야 하고 죄인은 회개하며 구원을 얻으라고 설교하고 있다. 

 

2) 하나님 중심사상  

베드로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셨던 구속사역이 역사적 현장에서 하나씩 하나씩 성취되어 지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할 때 마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선을 설명하면서 특히 하나님을 강하게 설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행 3 : 20)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권능과 기사와 표적들은 예수가 그리스도 이심을 백성들에게 증거 하시려고 행하신 하나님의 행동이었다는  것이다("성경인명지명" 백합출판사 1979, p 215). 그리고 사단의 억압에서 눌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방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한 다 (행 10 : 38)

      

고넬료의 가정에서도 그는 "저희가 에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고 설교하므로 하나님 중심사상을 나타냈다 (행 10 : 39 - 40). 오순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셨다" (행 2 : 33) 고 설교함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함께 강조하셨다.

베드로는 유대인 앞에서 심지어는 자신을 박해하고 죽이려는 저들 앞에서도 설교할 때 담 대 하게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선포하였다. 하나님 중심의 설교였기에 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병기 "선경인물강론" p 254)

  

3) 예수그리스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그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모습이 전반적으로 뚜렷이 나타나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능과 기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부터 성령을 받아 부어 주셨다는 사실과 장차 심판장으로 재림하신다는 내용을 명백하면서도 다양하게 설교하고 있다 (B. D. Demarest.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 p 163)

 

다시 말하면 너희가 보고 들었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준 예수는 인간 예수일 뿐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주가 되시며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설교했다 (박윤선 "성경 주석 사도행전" p 254). 더욱이 그는 십자가를 말할 때 항상 예수의 부활도 같이 언급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을 증거했다 (행 2 : 33)   

  

8. 세례

 

예수께서 선포하신 대 위임 명령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가르침과 세례가 제자 삼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사도행전에서 세례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한 것은 베드로였다. 그 오순절 설교가 끝나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외쳤다. 이에 베드로는 "너희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 : 37 - 38) 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할 때 세례를 베풀었다. 회개하고 믿게 된 후에야 사도들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행 8 : 36 - 38).

 

세례는 베드로(행 2 : 41). 빌립(행 8 : 38). 아나니아(행 9 : 18). 바울(행 16 : 15, 33, 19 : 5) 등에 의해 유대인(행 2 : 41). 사마리아인(행 8 : 12), 이방인(행 10 : 47 - 48)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행 19 : 5) 에게 베풀어 졌다.

 

특별히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 후에 3 천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행 2 : 41) 고넬료의 가정에서는 베드로 자신이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고 그와 함께 온 형제 중 몇몇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부탁했다. (행 10 : 47 - 48)

 

H. Kane 의 주장을 보면 세례가 선교에 크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세례는 삶에 변화를 초래한 내적인 마음의 변화를 외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것은 새 신자가 공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하나의 가시적인 행위이다" 라고 말하며 새 신자가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는 가시적인 선포식이기도 하기에 선교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결실이며 동시에 죄사함과 구원을 가르칠 수 있는 기독교 신앙교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세례를 선교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을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베드로를 부르심>                    <베드로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의 전도여행> 

 

 

 

바울의 선교

 

바을의 선교 사명적인 삶은 지극히 극적인 신비한 체험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하고 기독교를 박멸해야 한다는 헛된 열심에 사로잡혀 이들을 결박해야 한다는  헛된 열심에 사로잡혀 이들을 소환할 특권이 있는 대제사장의 공문(Josephus, Ant, S Safa - rai and M. Stern "The jewish people in the First Century I " p 456) 을 지참하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로 부터 비췄으며 그 빛 가운데 자신을 부르시며 앞으로 행할 것을 지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행 9 : 5 - 6, 15 - 16) 그 순간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빌 3 : 12) 되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 (Lord) 으로 높이 들리우셨음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고전 15 : 8) 이런 신비한 체험 속에 그는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때까지 자신이 파괴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는데 온 힘을 다해 헌신한다.     

 

그는 자신의 소명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셨으며(갈 1 : 15)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를 특별히 택하셨다"(행 9 : 15) 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소명에 대한 확신을 품고 자신의 계획에 착수하여 소아시아 중부지역, 에게해 연안 일루리곤(ILLyricum) 을 거쳐 로마와 서바나(Spain)에 이르기 까지 자신의 계획을 착착 수행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방인 선교에 참여했지만 바울이 품고 있었던 원대한 전략적 계획과 엄청난 힘과 열정으로 광범위하게 선교를 수행해 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힘의 근원은 바울의 확신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자신은 종말론적 의미를 띤 인물이며 구원사의 과정에서 중요한 주님의 대리인이며, 모든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과 세상의 구속을 향한 선교완성의 필수조건인 이방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일을 위해 주님의 손에 붙잡힌 택함 받은 도구"라는 것이다

 

바울은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그 나름의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박창환 "바울의 선교원칙" 교회와 신학 28집 p 230) 

    

 

             <바울의 초상>                         <하늘에서 빛이 쏟아짐>                     <기도하는 바울>   

  

 1. 기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폭적으로 인정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 법과 그 뜻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방법으로 기도를 이해했다.

바울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다(성서백과 대사전, 성서교재간행사) p 230)

    

다메섹의 도상에서 밝은 빛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나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3 년의 기간을 아라비아에서 보냈다(갈 1 : 17 -18). 그때 그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 가간은 그의 사명을 위한 준비기간 이었으며 하나님과 교재하며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겨 그 뜻을 묻는 기도 중심의 생활이었을 것이다. 이 때에 그의 많은 지식이(행 26 : 24) 신학화 되었으며 또한 성령의 감동하심에 의해 사명화 되어 그 사명을 향해 담대히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위대한 선교사로서의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다. (갈 1 : 20 - 24).

 

오랜 준비기간 끝에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로서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 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미명(美名)으로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행 11 : 26)

이 모두가 그의 기도를 성령께서 들으시고 은혜를 주시고 사용하시는 결과로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의 서신은 각 교회들의 인격과 영적 성장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로 시작하여 그의 뜻을 나타낸다(롬 1 : 8 - 9, 고전 1 : 4, 빌 1 : 3 - 4, 골 1 : 3 - 4, 9, 살전 1 : 2, 3 - 9,

살후 1 : 3, 2 : 13, 몬 1 : 4 - 6).

       

또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선교사로서 성령께 부름을 받으며 성령께 파송을 받는다. (행 13 : 48 - 49).

바울에게는 성령이 기도의 원동력이며 그의 모든 선교사역에 있어서 인도자 임을 확신했다. 그는 모든 선교를 성령께 의지했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는데 이 모든 것이 기도의 결과였다. 그 예를 든다면 비시디아 안디옥의 선교 시에 유대인들의 핍박에 의해 쫓겨 나면서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 (행 13 : 52).

    

외적으로는 실패한듯 해도 실은 그 지역의 선교에 성공하여 그 결과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행 13 : 48 - 49).

루스드라 성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다가 주꼐서 살려 주셨을 때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비시디아)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전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당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각 교회의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행 14 : 21 - 22). 교회를 위해 중요한 일에는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또 금식하며 기도하고 주님께 부탁하는 귀한 기도의 사람임을 볼 수 있다.

 

성령이 아시아에 선교를 허락지 아니하셔서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왔을 때도 기도처를 찾았으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의 집에 교회를 세우고 유럽지역 선교의 전초지를 삼은 것도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라 볼 수 있다 (행 16 : 13 - 15) 빌립보의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기적이 일어나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 사건을 통해 간수를 구원하여 저와 온 집이 다 하나님을 믿었다(행 16 : 25 - 34).

 

에베소 교회에서 안수하고 기도할 때에 주의 성령이 임하심(행 19 : 6).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밀레노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작별을 할 때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일 (행 20 : 36). 예루살렘의 감옥에 있을 때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주님 의 강한 신뢰와 귀한 사명을 확증하신 일(행 23 : 11). 유라굴로의 광풍속에서도 기도하여 응답 받은 일(행 27 : 14 - 23). 등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며 기도로서 모든 선교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 갔음을 밝히 증거해 주고 있다.   

 

또한 그는 기도의 깊은 경지에서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 드로아에서는 마케도냐 선교의 환상을(행 16 : 9), 고린도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환상을(행 18 : 9), 예루 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을 위한 증거를 준비하도록 하는 환상을(행 23 : 11) 보았다. 이 환상들은 기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선교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인줄 믿고 순종하였던 것이다(이광순, 이용원 "선교사개론"  p 85)

         

2. 동역자                                    

 

바울은 선교에 있어 언제나 동역자들과 연합하여 좋은 열매를 거두었다. 그는 복음을 전한 현지에서 동역자들을 선택했으며(디모데. 디도 등...) 그들의 연고지에서 선교의 사역을 하도록 했고 계속적으로 자기와 동행하며 사역하도록 하지 않았다. 현지 동역자들에게 혹은 자기 동족 중에 거하면서 효과적인 나름대로의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맡겨 두었다. (강문석 "선교신학개론" p 196)

 

그의 동역자들은 다양하였다. 레위인 바나바, 한쪽으로만 유대인의 피를 받은 디모데,  헬라인 디도, 유대인이 아닌 누가, 회당장 이었던 소스데네 (행 18장).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아볼로, 마가와 실라 등 그의 동역자들 모두 열거하기는 어려우며 그 출신도 각계 각층에 미치고 있다.

 

그는 이들과 긴밀히 협력함으로써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였다. 만일 바울이 혼자서 선교 활동을 했다면 그의 1 차 전도여행 어느시점에서 전도활동이 끓어 졌을 지도 모른다.

     

협력자로 여러 사람을 대동하고 협력선교를 효과적으로 했기 때문에 교회를 세워갔으며 기독교의 고귀한 사상이 이어져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선교방법은 신앙적 영웅심에 의한 개인위주의 선교활동이 아니다. 동역의 선교였다. 또한 기도와 격려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져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퍼브즈(Purves)는 바울의 동역자를 통한 선교에 대하여 "그는 외로운 전도자가 아니라  다수의 선교사들을 지휘한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선교사역이 진행됨에 따라 동역자들의 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라고 말한다 (Purves "Christianity in the Apostolic Age. p. 102)

 

로마서 16 장에서 그는 27 명의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여 문안했는데 이들은 다  바울의 동역자들이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필요할 때 그의 동역자들을 움직이게  했다.

 

          

        <바울과 실라의 옥중 찬양>     <옥중 바울과 실라의 착고가 풀림>

 

 

3. 선교의 자원 평신도  

 

초대교회의 선교에 있어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평신도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 타난 점이다. 그 대표적 예가 스데반 집사의 선교활동과 그의 죽음 뒤에 따른 핍박으로 신자들은 온 지역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였다 (행 8 : 4). 빌립집사는 사마리아 성에 가서 선교 했으며(행 8 : 5) 어떤 사람들은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까지 흩어져 주의 복음을 전했다. (행 11: 9).

 

그 중에 어떤 이들은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행 11 : 9). 그 중에 어떤 이들은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행 11 : 20)

이처럼 평신도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자 복음은 자연스럽게 각 계층에 스며들게 되었 다. 바울은 그의 선교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이러한 자발적인 복음전파를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명감을 주고 조직화하여  선교에 유용하게 협조자가 되게 했다는 것이 그의 선교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 예를 든다면 로마서 16장 1 - 3 절의 "마리아", 빌립보서 1 장 2 - 3 절 "압비아와 아깁보 " 등의 여성 동역자, 사도행전 20 장 4절의 "소바더, 아리스다고,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 라비모" 등이 바울의 선교를 크게 도왔던 평신도 들이다.

 

바울 선교의 특징은 지역교회의 설립과 더불어 제자훈련을 통한 제자양육과 지도자 양성이다. 교회를 설립한 후에는 전도한 개종자들을 꼭 훈련시켜서 교회의 일꾼과 지도자로 세운 후 성령과 의 말씀에 부탁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떠났다 (행 20 : 2, 28, 32, 21 : 4).

         

바울의 제자양육 방법은 설교와 교육과 권면이다. 특히 두란노 서원에서의 말씀 강론은 체계적이면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행 19 : 9 - 10). 바울은 이곳을 빌려 제자훈련의 장소로 사용했는데 특히 성경공부반, 제자훈련반, 일반인 전도집회 및 말씀교육의 장이 되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19 장 9 - 10 절에서는 "바울이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해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라고 그 모양을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평신도를 선교의 중요한 자원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양육하며 자신의 평생 동역자로 삼았다. 선교와 목회의 좋은 예이다.

  

4. 도시에서 도시로             

 

바울은 로마 제국의 대도시들을 선교의 거점으로 삼으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였 다. 그는 혼자서 모든 지역을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요한 도시를 전도해서 교회를 세우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주변의 소도시에 혹은 전 지역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에베소에서 3 년 이상이나 체류하였으나 (행 20 : 31) 그것은 특별한 예이었고 어느 곳에서나 필요 이상으로 머물지는 아니하였다. 어느 곳이든지 세워진 교회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울 만큼 성장되고 선교사역에 있어서 바울을 도울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는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으며 빌립보는 그 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에베소도 소아시아의 대도시였으며 데살로니가도 큰 상업도시였다.

바울이 도시우선으로 전도한 것은 제한된 시일 안에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의도에서 인구가 집중된 곳보다 개방적이며 공용어인 헬라어를 잘 이해하는 곳인 도시에 힘을 쏟은 것이다.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면 그 주변과 그 사이의 지역들은 도시교회들의 전도활동에 의해 2차 적으로 복음화 될 수 있다고 계산한 듯 하다. 이같은 원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방법으로 보다 신속한 복음화를 가능케 한다 (서정운 "교회와 선교" p 35 - 36)

 

3 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해 바울은 유명했던 로마제국의 도로들을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도로를 따라서 제국의 중요한 대도시들이 위치해 있고 그 도시들을 선교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도시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였다.

 

로마제국의 신속한 복음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도시들만을 선별하여 복음을 전했다. 예컨대 그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여행하는 동안 도상에 있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는 그저 통과하였을 뿐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다 (행 17 : 1) 이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한 중요한 바울의 선교방법이었다.

 

               

             

                                             <바울의 다메섹 탈출>                    <바울과 독사>

  

5. 먼저 회당에서, 먼저 유대인에게   

 

바울의 선교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행 9 : 15, 22 : 21, 갈 2 : 7 - 9) 여러 도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거기서 전도하였다 (행 13 : 14, 14 : 1, 17 : 10, 18 : 4, 19 : 8 )

 

그러므로 바울이 교회를 설립한 모든 지방들은 유대인 세력권의 중심지였다.

회당은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년기 때부터 회당을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하였고 따라서 회당에서 행하여지는 예배의 순서나 기타 의식 같은 것은 그에게 너무나 친숙한 것이었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고 어릴 때부터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으로서 헬라세계와 회당의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의 회당의 관습에 의하면 회당을 방문하는 랍비들에게 권면의 말씀이 있을 때에는 청중들에게 권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행 13 : 15)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하였다.

바울은 회당중심으로 전도하다가 회당에서 추방당하면 즉시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다른 도시에 도착하면 곧바로 회당을 찾아갔다. 회당에서 많은 배척이 있었던 것이 사실일 지라도 또한 회당만큼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또 하나 바울은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였다" (롬 9 : 2 - 3).

 사랑이 바울의 선교의 방향을 먼저 유대인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여하튼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그 당시 각 지역에  흐터져 있던 유대인들의 회당을 거점으로 한 선교였다.

바울이 회당준심의 선교방법을 사용한 이유를 서정운 박사는 두 가지로 들고 있는데 " 하나는 복음을 유대인에게 우선 제공하는 것이고, 다음은 회당에 사람들이 집결하여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군중을 모을 필요가 없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택정함을 입었고(갈 2 : 8) 그러한 직분에 특별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롬 11 : 13) "먼저 유대인에게" (롬 1 :16) 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따라서 그는 한 도시에 도착하면 곧장 회당을 찾곤 하였는데 그것은 집결되어 있는 청중을 만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설교>                     <바울의 옥중서신 작성>

 

 

6. 좋은 토양              

 

바울은 임박한 재림을 염두에 두고 시간절약에 힘썼다. 자기가 하는 일 만이 귀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일군이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든지 꼭 같은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하였기에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 집을 짓는 에너지 낭비는 안하기로 작정하였다(롬 15 : 20, 고후 10 : 13, 15 - 16)

 

같은 복음을 여러사람이 여러 지방에서 빨리 전해서 예수 재림 이전에 복음을 듣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생기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남이 이미 복음을 전한 곳에 바울이  바울이 또 가서 같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시간과 인력의 낭비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그의 설교에 반응이 약한 곳 보다 반응이 좋은 곳에 머물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근거를 잡고 설 때까지 체류하면서 돌 보았다.

제한된 인력 및 자원으로 어떤 지역에 선교적인 노력을 경주하느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제기되는 일인데 반응이 빠른 곳에 집중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원리이다.

 

복음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마 13 장)를 통해서 지적하신 바 있다. 여기서 문제는 토양이었던 것이다. 좋은 토양은 많은 결실을 내었으나 나쁜 토양은 그 결실이 보잘것 없거나 전혀  없었다. 또한 좋은 토양의 경우라 할 지라도 획일적으로 동일한 결실을 낸 것이 아니라 100 배, 60 배, 30 배 등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교방법에 대해 알렌 (Roland Allen) 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 선교하는 지역에서 복음전파를 거부할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었다. 그는 한 곳에 계속 머물면서 그의 선교에 대해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이들을 대상으로  몇년이고 선교를 계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까지 인도한 후에는 그들 자신의 결단을 요구했다. 그들이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안을 경우 그는 그들로 부터  떠났다. 복음을 참되게 전파함에 있어 이러한 점은 신중히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Roland Allen "Missionary Methods, St Paul or Ours?" p 75)

 

반응이 좋은 곳에 집중한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선교방법이다. 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반응이 좋은 지역만을 찾아 너무 많은  선교사들이 집중하여 무모하고 건전치 못한 경쟁에 빠지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7. 삼자원리(三自原理)      

 

대부분의 도시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추방하려 했기 때문에 바울의 체류는 때때로 중단되었고 많은 시련과 위험이 그를 엄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지역에 머물며 교회를 세우며 선교와 양육을 계속했던 것은 그가 세운 교회가 세 가지의 자격을 갖추어 나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세가지는  자치(自治, Self - governing), 자립(自立, Self - Supporting), 자력전도(自力傳道, Self  Propagating) 이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가 세계의 복음화를 목표로 하는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들이 바울처럼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 수는 없었으나 자신들이 속한 지역전체를 복음화 시키는 일을 책임있게 감당해 나아갔다. 바울은 어떤 새로 설립된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다는 소식에 접하고 나서 보낸 그의 편지에서 그 교회의 새로운 신자들이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고 있음을 치하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 : 8)

 

바울은 교회가 조직되면 행정적으로 자치하며 경제적으로 외부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전도에 힘쓰는 교회가 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 흔히 3 자원리로 알려진 자치, 자립, 자력전도의 방법은 사실상 바울의 전도전략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며 이 같은 원리는 19 세기 말부터 많은 지역에서 기본적인 선교정책이 되어왔다.

 

8.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바울은 복음의 내용에 관한한 강경하고 독단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하늘로 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갈 1 : 6 - 9). 그러나 그는 그 밖의 일들에 관하여는 매우 융통성이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대하였다. 이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 즉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특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기 떄문에 전파의 방법은 상황을 따라 다양한 융통성이 창안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 : 7) 는 그의 소신 때문에 어떻게 듣도록 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자세를 그가 이슬람교도들이 선교의 대상이라면 돼지고기를 , 그리고 힌두교도들이  선교의 대상이라면 쇠고기를 먹지 않는 융통성을 발휘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파하는 모양은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바꾸어가며 시도했지만 그가 전하는 복음 자체는 그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철두철미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다만 복음을 위탁받아 전하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변질시킬 수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메시지를 바꾼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엄정하게 단언하였다(갈 1 : 10). 아무리 신속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해도 그 메시지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별 의미가 없게된다. 어느 때나 명쾌한 메시지의 소유와 전파는 선교의 기본적인 요건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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