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of Sheba ? 시바의

 

솔로몬 왕국과 시바 왕국 ? 전설이 아닌 실존의 역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바의 여왕 - Queen of ShebaQueen of Sheba 

 

 

보석으로 가득한 사막의 왕국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여왕,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무역통로를 누볐다는 ‘시바의 여왕’은 구약성서와 코란은 물론 서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당시 중동 지역의 강자였던 솔로몬 대왕과 로맨스를 즐겼다는 이 여왕의 이야기는 음악가 헨델, 화가 프란체스카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재생산돼 왔다.

기원전 10세기 아랍인과 유대인의 세계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비범한 여성,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간 것은 신화에서 흔히 얘기되는 환상에 사로잡힌 신비한 탐험 여행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향신료, 비단, 낙타, 유황 등의 활발한 무역을 위한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경제외교의 행보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바의 여왕을 맞이하는 솔로몬

The Queen of Sheba's Visit to King Solomon

 

시바의 여왕은 현재 예멘인 고대 아라비아 남쪽에 실존했던 시바왕국의 왕이었다. 왕성한 국제무역으로 번성과 부를 누리고있었으며 에디오피아도 시바왕국의 통치아래 있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한 것은 솔로몬의 훌륭한 지혜를 직접 듣는 것도 있었겠지만 당시 다마스크스에서 홍해 연안까지, 즉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중요한 대상 통로를 지배하고 있던 솔로몬 왕국과의 외교관계를 확고하게 수립하고 시바왕국의 주 무역로를 확보하여 그에 따를 통상관계의 증진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니콜라스 클랩 (Nicholas Clapp)

 


시바왕국의 미스터리를 파헤친 니컬러스 클랩’

 

성경과 코란이 기록하지 못한 진실, 3천년의 잠을 깨다

 

 

고대 중근동 고고학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여전히 개척되지 못한 미지의 세계사이다.

현대 과학과 역사로 밝혀내지 못한 미스터리들이 모래 폭풍우 치는 사막

속에 무궁무진하게 숨겨져 있다.

 

일찍이 수많은 고고학자들과 탐험가들은 중동의 세계가 감추어둔 고대문명의 신비와 비밀을 풀고 싶었지만, 종교분쟁과 내전, 서방국가와 중동국가간의 긴장관계는

그들의 탐구활동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이자 고고학 강사인 니컬러스 클랩(Nicholas Clapp)은 브라운 대학과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에 강연을 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고고학 분야는 전적으로 시바 여왕에 관한 것이다.

 

니컬러스 클랩은 보석으로 가득한 사막의 왕국을 다스렸다는 아름다운 여왕,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무역통로를 누볐다는 '시바의 여왕'의 전설이 단지 상상력의 소산인지, 아니면 역사상 실재한 인물인지를 추적하는 데 20여 년의 시간을 바쳤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예루살렘을 취재하던 니컬러스는 우연히 콥트교 수도원의 벽화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이 만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에 관련된 이야기가 구약성서와 코란은 물론 서아시아 전역에서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지에서 에티오피아, 시리아, 예멘, 아라비아의  사막까지 시바의 여왕과 대상들이 횡단했을 향료길을 탐사하며, 모래폭풍과 도굴과 내전으로 파괴된 3천년 전의 유적지의 흔적을 쫓고, 이스라엘, 아랍, 유럽의 고고학자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하였다.

 

성경을 비롯한 관련 서적과 고지도, 여행기록, 성화(이콘), 조각, 비문, 건물, 무덤 등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자료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곳이 어디이건 달려가는 현장주의자이고 실증주의자로, “발로 쓴” 역작인 <Sheba>를 탄생시켰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성경과 코란이 기록하지 못한 시바 왕국과 솔로몬 왕국의 실체를 밝히고, 기원전 10세기 중동의 사막에서 최고의 부와 권세를 누린 여왕의 실재역사를 기록한 최초의 책이 되었다.

 

 

시바의 여왕, 3천년 잠을 깨다

(원제:SHEBA)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시바의 여왕 ? 3천년 잠을 깨다’로 소개되었다.

(저자: 니컬러스클랩/역자: 이창석) 

 

내가 시바 여왕의 자취를 좇아 캔터베리 성당에서 시작해 체코의 연금술사 탑까지 찾아가게 될 줄은 그당시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고대의 동양으로, 시바가 솔로몬 왕 앞에 나타났던 도시, 서양 종교의 요람이자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될 줄은 그땐 미처 몰랐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나를 자극하고 유혹하여 고대 대상(隊商)들이 묵었던 여관의 자갈길을 지나 풀이 무성한 아프리카 고지대를 거치고, 아리비아 남서부의 폭풍우 치는 눈물의 문을 가로질러 아라비아의 빈 땅, 길도 없는 룹알할리 사막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 사막이 호기심 많은 사람은 물론이고 잠시 산책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멋진 곳임을 알았다. …가장 비밀스러운 것들은 사막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아직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과 중단을 반복하며 나는 20여 년 이상을 이국적이고 아름답지만 위험하기도 한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시바의 여왕을 찾게 될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신화의 안개가 걷히고 실존했던 국가의 실재했던 여왕임이 드러날 것인지, 아니면 조사를 통해 그녀가 환상 속의 여왕으로 밝혀질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에필로그에서
 

 

시바 왕국은 솔로몬 왕국보다 더 큰 부와 문명을 가졌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권세를 확인하기 위해 어느 이름 없는 지역의 왕국에서 떠나온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1980년대 초까지 성경학자들은 그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뒷받침하지 않는 성경 외의 증거는 무시해버렸다.

 

이집트나 아시리아나 고대의 다른 어떤 지역의 사료에도 시바의 여왕에 대해 언급된 사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바의 여왕은 실존 인물이었을까? 시바의 여왕은 남성지배적인 예루살렘과 아랍의 세계에서 버텨낸 비범한 여성임이 분명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성경에 시바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가 씌어진 지 1천년 이상 세월이 지난 후에 그 무렵 발생한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여왕의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다. 남자인 이야기꾼들에게는 그녀가 매력적이고 불가사의하며 위협적이고 두려운 존재였다.


시바의 여왕은 중세와 르네상스 사회를 거치며 주류의 신학이론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유럽의 목판화에는 시바의 여왕을 하급관리나 상인, 기사로 여긴 솔로몬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이교도였기 때문이다.

   

저자인 니컬러스 클랩은 시바 여왕의 기록을 찾던 중,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당당한 모습의 시바를 발견한다. 거기에 묘사된 시바의 여왕은 성서나 코란에 기록된 것처럼, 결코 굴욕적이지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넋을 잃지도 않았다. 솔로몬의 궁전 문으로 거리낌 없이 뛰어든 그녀는 분명히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도권을 장악하고 한판 붙어보자는 듯한 태도이다.

  

시바의 여왕은 온순한 동정녀 마리아가 아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고통받으며 인내하는 순교자와는 딴판이다. 성경의 유일한 여제(女帝)인 그녀는 주도적이고 공격적이며, 신의 섭리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역할을 강탈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시바의 여왕은 신학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무시되었던 것이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한 진짜 목적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간 것은 신화에서 흔히 얘기되는 환상에 사로잡힌 신비한 탐험 여행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향료, 낙타, 안장, 그리고 배와 관련된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고대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솔로몬 왕과 그 시대의 고고학을 탐사한다. 그 시기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 부족들은 이집트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뻗어나갔다고 전해지는 한 제국을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솔로몬이 실존인물인조차 증명해 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솔로몬의 성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찾지만, 솔로몬 성의 성벽, 실로암의 연못은 쓰레기로 덮여 있었다. 정원 터, 기혼 샘, 왕의 무덤들도 없다. 솔로몬이 모리아 정상에 세웠다는 신전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성전산은 아랍의 한 종교재단이 관리하고 있고, 이스라엘 방어군들이 기관총을 들고 있는 상황에서, 고고학자들의 접근과 조사가 금지되어 있으니, 성전산 밑에 묻힌 궁정과 다른 건축물의 유물, 증거를 못 찾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솔론몬을 예루살렘을 오랫동안 통치하고 주변의 열두 부족을 통일한 언덕 국가의 뛰어난 지도자로 보았다. 그러나 저자가 밝혀낸 진실에 의하며, 솔로몬은 강력한 군주였다기보다 언덕국가의 족장에 가까웠다.  

 

 

시바의 여왕은 어디에서 왔는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가져갔다는 향료와 황금의 원산지는 어디였을까? 시바 여왕의 본국이라 여겼던 곳은 어디일까? 시바의 여왕과 그 상인들은 북아라비아 출신일까, 남아라비아에서 온 걸일까? 아니면 에티오피아가 영토인가?


북아라비아 출신이라는 증거로 아랍의 여왕인 자비비와 삼시를 인용한다. 그러나 이들의 왕조가 솔로몬의 시대에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기원전 10세기에 존재한 무역도시는 없었다.

 

이집트와 시나이, 이스라엘,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도자기의 종류 유물 조각들을 관찰하여 도자기의 종류와 연대를 비교하였지만,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비문과 유적지들은 솔로몬 시대보다 훨씬 늦은 시대에 발전했다는 증거가 나온다.

  

메소포타미아 유물 ? 조각이 새겨진 도장

 

저자는 시바 국을 찾아 네게브 사막, 북서 아라비아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디안, 요르단의 와디 룸에서 이집트의 시나이까지 탐사하지만 3,000년 전의 문명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아라비아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에서 번성한 사바 문명을 시바 여왕의 본국이라 가정하고, 시바 여왕과 그녀의 대상들이 거쳐 갔을 수천 킬로에 달하는 남아라비아의 향료길을 탐사한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예멘의 룹알할리 사막을 거쳐 사바 국의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 사브와와 마리브의 유적지에 이른다. 거기에서 발견된 수로의 퇴적물에는 기원전 12세기에 번성한 최고 수준의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리브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시대에도 건재했다. 시바 여왕 이전에도 풍성한 산출량을 자랑하는 농업 기반의 대도시였다.

 

 

Mud castle in Marib

마리브의 진흙으로 세운 토성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리브에서 발견된 시바 여왕의 신전이라 여겨지는 유적지인 ‘마흐람 빌키스’를 탐사하는 일을 녹록치 않았다. 1951년이 되어서야 고고학자들의 신전을 받아들였다. 웬델 필립스는 미국인류학재단을 창설하고 마흐람 빌키스의 발굴을 시도하지만, 보물을 훔치러 온 이교도로 몰려 추방되었다.

  

필립스가 쫓겨난 뒤, 마흐람 빌키스는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2000년부터 다시 시작된 마리브 유적지 발굴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시바의 여왕은 사막을 떠돌아다니는 환상 속의 인물이거나, 솔로몬에게 미소 짓기 위해 천상에서 내려온 이교도의 여신이 아니었다. 실재했던 강성한 문명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파견된 지상의 사자(使者)였다.

  

http://www.gimmyoung.com/bookinfo/bookinfo.html?number=1419

 

  

시바의 여왕 ? ‘전설에서 실존까지 

Queen of Sheba ? Legend and Reality 

 

시바왕국은 어디에 있었나?

 

에티오피아의 여왕으로도 알려지고 있는 시바여왕의 왕국은 에티오피아가 아닌 실제로 예멘의 내륙부에 실재했던 왕국이었다.

시바왕국은 BC 950년부터 BC115년 까지 존속되었다.

 

이 시바왕국이 최초로 번성했던 것이 기원전 10세기정도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시바왕국이 가지고 있었던 교역로는 유향의 길, 스파이스 로드 라고 불리는데 이 교역로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했던 나라가 시바왕국이었다.

 

이 시바왕국이 번성했던 이유는 동남아시아에서의 향목(香木), 중국에서의 비단, 아프리카에서의 신비한 새의 날개, 거기에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에서 채취된 유향이라고 하는 이름의 향료 등의 물건들을 고대 이집트나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등에 공급하는 통상로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바왕국은 몬순계절풍을 이용한 해로와 낙타를 이용한 육로를 이용해 북쪽 지방과 아프리카, 로마제국 등 많은 나라들에 향료를 수출하면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특히 유향은 지중해 지역, 특히 이집트 주변에서 상당히 중시되는 물품이었다. 왜냐하면 이 향은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필요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향에는 [男乳香 남유향] [女乳香 여유향]이 있어 여신을 부를 때는 남유향, 남신을 부를 때는 여유향을 피우도록 되어 있어서 이것 없이는 제사 자체가 불가능 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제사 자체가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은 즉 정치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유향은 무게로 재어 금과 같은 값으로 거래가 되었다고 한다.

 

 남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이 유향을 소재로 한 여러 가지 전설을 만들어 내어, 신화, 온축(충분히 연구해서 간직한 깊은 지식), 신비라는 베일에 쌓아 부가가치를 덧붙여 비싸게 강매하는 것에 성공했다.

 

유향은 나무의 줄기에 흠집을 내어 거기서 흘러 나오는 수액을 고형화한 송진과 같은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들은 고객이었던 유럽, 지중해 지역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 채취되는 가를 알리지 않고 원산지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단 그것을 채취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라는 것을 강조했었다.

 

  

유향(乳香)은 Boswellia thurifera, B. sacra, B. carterii 등의 나무진을 굳혀서 만든다. 

 

때문에 지중해세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유향나무는 날개를 가진 푸른 뱀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 갈 수 없다. 이것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숫소의 가죽을 쓴 남자가 여러 가지 기술을 구사해야만 겨우 채취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이것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의 기술(記述)된 내용으로 아라비아 상인은 이러한 전설을 엮어내어 부가가치를 높였던 것이다.

 

이 시바왕국의 여왕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는 여왕이 솔로몬왕을 방문했던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구약성서 열왕기상 10장에 기록되어있다.

 

시바여왕의 긴 사랑의 여행  

 

현명하고 지혜가 넘치는 왕으로서 이름 높은 솔로몬왕은 어느날 시바왕국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당신의 나라는 대단히 풍요로운 나라라고 들었다. 그러나 여호와를 숭배하지 않고 태양을 숭배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앞으로는 여호와를 숭배하도록 하시오” 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를 받은 시바여왕은 장로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Queen of Sheba(Bilqis) facing the Hoopoe, Solomon’s messenger. 

 

“우리들 앞으로 솔로몬이라는 왕이 편지를 보내 왔어요.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써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얘기를 해보세요 하자 장로들 중 어떤 이는 “건방진 녀석 같으니, 전쟁을 일으켜서 혼을 내줍시다.”

 

또 어떤이는 “무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우리나라와 같이 풍요로운 나라는 없을 테니 토산물을 보내어 그들을 놀라게 하여 회유하는 것이 어떨지요?” 라고 진언했다.

 

그때 시바여왕은 그게 좋겠다 라고 말하고 대량의 금, 은, 보석을 이스라엘에 보냈다.

 

이것을 받은 솔로몬왕은 “우리나라에도 이런 물건들은 산처럼 쌓여 있어 기쁘지도 아무렇지도 않다. 만약 당신들이 여호와를 숭배하지 않겠다고 하면 군대를 보내어 전쟁을 일으키겠다.” 라고 회신을 보냈다.

 

이러한 회신을 받은 시바여왕은 “알았다. 그렇다면 직접 만나러 가겠다” 라고 직접교섭에 나설 것을 결정했다. 당시의 세계정세에서는 이스라엘과 시바왕국은 초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이 회견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수뇌급 회담이었다.

 

시바여왕은 토산물을 가득 싣고 가신, 장군 등을 거느리고 솔로몬 왕을 만나러 출발하였다.

이 낙타의 대열(CARAVAN)은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가장 선두의 낙타가 출발한 후 마지막

낙타가 출발하기까지는 3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구약성서에 의하면 이때 시바여왕이 솔로몬왕에게 가지고 간 금, 은, 보석은 이제껏 없었던 엄청난 분량이었고 그 이후에도 그 정도의 재물이 보내진 적은 없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보물과 토산물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향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 궁에 다다르자 시바여왕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내어 솔로몬왕이 정말로 지혜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려고 했다.

 

이러한 서로의 대화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지혜에 감탄했고 서로 마음이 끌리게 된데다 동침 조건을 건 지혜겨루기 내기에서 진 시바여왕이 솔로몬과 동침하여 서로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마지막에 솔로몬은 시바여왕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었고(열왕기 상 10:13), 꿈같은 몇 달의 세월을 보낸 후 아쉬운 사랑의 빈 가슴을  달래며 여왕은 뱃속에서 자라는 사랑의 열매를 안고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시바여왕의 귀국길은 왜 에티오피아 였나?

 

이 때 시바여왕의 귀국 코스가 재미있다. 여왕은 갈 때는 향료의 길을 따라 아라비아반도를 북상하여 갔었는데 귀국할 때는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를 경유하여 남하하여 이디오피아까지 갔다.

 

그리고 이디오피아에서 구슬 같은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이것이 솔로몬과 시바여왕 사이에서 만들어진 아이로, 이 아이가 이디오피아를 1974년까지 지배한 하이레세라시에 황제집안의 시조 메넬리크 1세가 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즉 에티오피아 황제집안은 솔로몬과 시바여왕 사이에서 만들어진 가계(집안)인 것이다. 그 후 시바여왕은 홍해를 건너 예멘으로 돌아갔다.

 

잠깐 주의를 기울일 것은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만나러 갈 때 처녀여왕의 신분이었느냐

남편이 있는 결혼한 몸이었느냐 아니면 이혼한 채 혼자 몸이었느냐, 그도 아니면 남편이 먼저 죽은 과부의 신분이었느냐 하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바여왕이 굳이 본래 왔던 길로 해서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자기 나라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항해술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굳이 멀리 돌아서 식민지로 있던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로 돌아서 갈려고 했을까 하는 점이 얼른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솔로몬의 아들을 낳은 것을 보면 아무리 여왕의 신분이라고 해도 외국에 수뇌회담 하러 갔다가 상대방 왕과 바람이나 피우고 배가 불러 자기나라로 돌아 오는데 대한 부담감이 대단히 컸기 때문에 길머리를 그리로 돌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식으로 솔로몬 왕의 정비로서 왕비가 된 것도 아닌 관계에서 사생아를 낳는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 비난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의 귀중한 선물-사랑하는 아들의 생명에 대한 안전 보장을 위하여 시바여왕으로 하여금 에티오피아 식민지로 발길을 돌렸고 그곳에서 아들을 낳아 솔로몬에게서 받았던 많은 보석과 재화를 가지고 아들이 에티오피아에서 왕국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하여주므로써 메넬리크 1세로 에티오피아를 통치하기 시작하여 장장 3,000년 왕조를 누리게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솔로몬 왕이 늙어 가면서 이방 여인들로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범죄함에 따라 솔로몬이 죽자마자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을 르호보암의 유다와  여로보암의 이스라엘로 나누고 바빌론에 멸망 당하게 하였으나 기묘하게도 하나님은 시바여왕을 통하여 솔로몬의 또 다른 왕국이 에티오피아에 건설되어 그 위가 끊이지 않게 하고 있음을 성경 밖에서 보게 된다. 

  

  

시바의 여왕의 나라 ‘악숨’ (에티오피아) 

Kingdom of Axum (Aksum)  

시바의 여왕의 나라 -  Axum 

 

악숨(Axum, Aksum) 왕국은 로마, 중국, 페르시아제국과 함께 당시 세계를 움직이는 4대 제국으로 손꼽힐만큼 강성했다. 9세기까지 홍해를 지배한 아프리카 최대의 교역 중심지였으며, 솔로몬 왕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시바 여왕의 나라였다. 또 모세의 십계 원판이 지금도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는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모세와 십계명

 

에티오피아가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과 달리 두드러진 특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3,000년에 이르는 역사 때문이다. 3,000년 전은 솔로몬 왕 시대로,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왕을 만나 사랑을 하게되고 그 둘 사이에서 얻은 아들 메넬리크 1세가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 땅에 저 유명한 시바 왕국이 건설된 것은 기원전 1000년경.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정숙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시바 여왕은 바로 이 왕국의 지배자였다. 그녀의 본래 이름은 마케. 그러나 후일 아랍인들은 빌키스로, 그리스인들은 검은 피부를 가진 미네르바(아테네 여신)라 불렀다.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왕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남 아라비아의 시바라는 나라의 여왕 바루키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흑인이었던 시바의 여왕

헐리우드영화는 시바의 여왕을 백인으로 묘사하지만 그녀는 흑인이었다.

 

시바는 남아라비아의 나라였으나 홍해를 건너 북에티오피아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이주한 후에도 시바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므로, 에티오피아의 역사학자들은 시바의 여왕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에티오피아에서라고 주장하나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제국헌법은 이것을 사실(史實)로 하여 메넬리크 1세부터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까지 왕통이 연면하였음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은 국가통일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메넬리크, 솔로몬 왕조를 세우다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의 아들 메넬리크는 스무 살이 되자 아버지 솔로몬 왕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3년간 머물면서 ‘왕의 법도’를 배웠다. 솔로몬 왕은 걸출한 아들의 면모에 크게 흡족하여 예루살렘에 남아 왕권을 계승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거절하고 고향인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솔로몬 왕은 이를 허락하며 많은 선물을 하사하였는데. 이 중 가장 귀중한 보물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이었다. 그것은 솔로몬 왕이 아들의 무사귀한을 기원하고 앞날의 번영을 기원하는 선물이었다.

 

귀국할 때, 많은 시종들과 함께 모세의 십계명 석판을 넣어둔 법궤도 가져왔다. 에티오피아로 돌아온 메넬리크는 귀중한 법궤는 성스러운 타나 호변의 타나 키르코스란 곳에 모셔 놓고, 홍해와 가까운 악숨(Aksum)에서 솔로몬 왕조를 열었다.

 

기원전 10세기 때의 일이었다.

메넬리크가 세운 왕조는 그후 면면히 이어져 오다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군사 쿠데타로 폐위될 때까지 무려 3000년간 225대에 걸쳐 지속됐다. 이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장 기록이다. 

 

랄리베라(Laibella)는 에티오피아 최고의 성지

 

악숨의 초기 역사는 그리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다 250년경 역사에 다시 등장했는데, 그때 악숨은 아라비아반도와 로마 등과 교역하며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악숨의 왕들이 오벨리스크(尖頭) 형상의 거대한 비석을 왕도에 세우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지금도 130개나 되는 높다란 비석이 남아 있다.

 

 

Axum 의 오벨리스크 

 

역사상 악숨의 최고 전성기는 에자나 대왕이 집권한 4세기 전반으로, 그는 그때까지 국교로 받들던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다. 그리하여 솔로몬 왕국은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지만 내용 면에선 정통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유대교의 전통인 금요일 안식, 돼지고기 금식 등을 지켰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5세기 중엽 이단 판정을 받아 지금까지 고립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 솔로몬 왕조는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12세기 초 또 한 차례 재기의 기회를 맞았다. 당시 국왕 랄리벨라가 어느 날 꿈에 “로하에다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하라’”는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로하로 천도하고, 교회 건축작업에도 들어갔다. 로하란 지명도 랄리벨라로 바꾸었다. 시내 한가운데로 흐르는 강은 예수가 세례 받은 성스러운 곳이라 하여 요르단강이라 명명하고는 그 남북 양쪽에다 교회를 세웠다.

  

거대한 암반을 파내고는 그 속에 지하교회를 세워야 하는 고된 작업이라 그의 치세 동안에는 완공되지 않았다. 11개의 교회가 완공되는 데는 총 125년이 걸렸다. 옛 교회와 새로운 교회 사이에는 법궤를 보관하는 건물을 세웠다. 이곳에서 법궤를 지키는 자는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없다.


이곳 성 죠지 교회의 지붕 위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새겨져 있으며, 내부는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성지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랄리벨라에서 곤다르로 왕도가 옮겨지긴 했으나 순례자들은 랄리벨라를 찾았다는데, 아디스아바바가 수도인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라진 성물 ? 법궤의 행방은? 

 

“법궤는 고대 에티오피아어로 ‘타보트’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궤’나 ‘상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테바’와 관련된 유대 아람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밝혀져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그러면 법궤는 현재 어디에 있는 것일까?

먼저 유대인들은 성전 법궤가 옛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지성소가 있던 곳 땅 속 깊숙이 묻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지성소의 위치는 지금껏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에 자리 잡았던 성전 터에는 현재 회교사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카우프만과 같은 학자들은 성전 번제단 주변에 흘렸던 기드온 골짜기로 흘러가야 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서 회교사원 안 돔의 북쪽에 위치한 뜰이 본래 지성소가 있던 자리로 추정한다. 이들의 의견대로라면 그곳 땅 속에 법궤가 묻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주장과는 달리 법궤가 아프리카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에티오피아 사람들이다. 널리 알려진 에티오피아의 전설에 따르면 법궤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솔로몬과 스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알려진 이브날하킴이 예루살렘에서 에티오피아로 가져왔다고 한다.

 

법궤는 고대 에티오피아어로 ‘타보트’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궤’나 ‘상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테바’와 관련된 유대 아람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밝혀져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이코너미스트’에서 기자생활을 한 바 있는 그레이엄 헨코크는 현재 이 법궤가 에티오피아의 악숨에 있는 유명한 고대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에티오피아의 문헌이나 역사 역시 솔로몬 시대에 법궤가 에티오피아로 건너왔다고 일관되게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악숨에 보관되어 있다는 법궤 역시 그것을 지키는데 헌신한 수도사 형제단 이외에는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탓에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다.

 

  

 

시바의 나라가 약탈당한 ‘신의 기둥’

 

- 이디오피아 ‘악숨 왕국의 오벨리스크’ 반환키로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로마가 반환히기로 한 오벨리스크 

 

 

최근 고대 이디오피아 악숨 왕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오벨리스크가 이탈리아에 약탈 당한지 67년 만에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는 외신을 접했다. 높이 24m, 무게 180톤의 오벨리스크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반환됐다. 이탈리아는 1937년 오벨리스크를 약탈해 간 뒤, 수 차례에 걸쳐 반환을 약속했으나 차일피일 미뤄왔었다. 이날 수도 아디스 아바바의 거리는 반환을 지켜보는 수천명의 군중으로 가득 찼다. 

 

오늘날 이디오피아는 번성했던 악숨 왕국의 후예로 기억되기 보다는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최빈국의 처연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벨리스크 반환을 계기로 아마도

이디오피아 국민들은 번성했던 고대 왕국의 자존심을 떠올렸지 않았을까 싶다. 

 

(옮겨옴)

+ Recent posts